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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 ·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議)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 ·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간 벼슬길에서 두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회헌 선생 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이다.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남짓 땅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함께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세울새,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 고을의 生員 몇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되는 명종1년 乙巳(1545)에 회헌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 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몇번이고 보고 싶었던
부석사
입구의 분수대 모습이
가을의 낙옆의 변화 무쌍한 풍광과 어우러져
멋의 깊이가 깊다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창건설화
부석(浮石) : 무량수전 서편 언덕 아래에 있는 바위 떨기 위에 앉아있는 이 반석은 30명쯤 둘러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부석사 절 이름을 달고 있는 이돌의 전설이 바로 부석사의 창건 설화입니다.
다음은 송나라 [고승전]에 들어있는 의상의 전기입니다.
의상의 속성은 박씨이며 계림부의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어 출가하여 산천에 노닐다가 불도에 들었으며 성품은 매우 천연덕스러웠다. 일찌기 법을 구하러 원효법사와 함께 서유의 길에 올랐으나 당주계에 이르러 폭풍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 길가에 토굴속에서 비를 피하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비로 자욱하고 땅은 질어 이번에는 벽돌굽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채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괴변을 부렸다. 원효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어젯밤에는 토굴 아닌 무덤에서 잠을 자도편안했었는데 오늘밤에는 초저녁부터 도깨비굴이 있다 생각하니 탈이많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일이 생기는도다(일체유심조).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니 토굴이건 무덤이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삼계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도다.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하였다. 비록 원효는 되돌아섰지만 의상은 죽기를 한하고 물러서지 않겠다. 하여 상선을 탔다.
총장 2년에 등주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이르자 의상의 생김생김이 뛰어남을 보고 머무르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선묘란 처녀가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의상을 동하게 할 수 없자 갑자기 도심을 일으켜 그 앞에서 대원을 발하여 말하길 ‘세세에 태어나 화상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이다.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이다.’하였다. 의상은 그후 곧 장안으로 향해 가서 종남산에 계신 지엄삼장 밑에서 ‘화엄경’을 종합적으로 배웠다. 그때에 강장국사와 함께 공부하였다. 말하자면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함에 절도가 있고, 요령이 있어 덕의 그릇에 가득찼다고할 수가 있고, 가히 삼장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귀국날짜를 의논하는 가운데 문등에 있는 신도집에 이르러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를 감사하고상선이 있기를 기다려 어느날 문득 출범을 하게 되었느데, 선묘는 의상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등을 마련한 함을 가득 채워 해안가로 달려가보니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멀리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들어가라’ 이렇게 외고 거센 파도위로 함을 던졌다. 때 마침 거센 질풍이 불어 새털같이 함을 배로 날려 보냈다. 그녀는 다시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으로 바뀌어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웃옷을 벗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원력은 굽힐 수가 없었다. 과연 그 몸매는 요교하여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그 배밑을 안전하게 하였다. 의상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찾아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그러한 곳을 찾아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 만한 곳이다. 권종이부의 무리들이 오백명씩이나 모여있을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의상은 마음속 깊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은 의상의 생각을 알아 허공중에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일리쯤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락말락 하니 많은승려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상은 절안에 들어 화엄경을 펴기시작하였다. 겨울에는 햇빛이 있는 낮에, 여름에는 서늘한 저녁에 강설을 하여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국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장전과 노복을 베풀어주었으나, 의상이 아뢰기를 ‘내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히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는 여덟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 어찌 장전을 소유하고 노복을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여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헤명, 즉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 하였다. 의상의 강설로 심어진 나무는 꽃을 피우고, 그가 대화를 통해 이룬 숲은 열매를 맺었다.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히 여겨 강설하는 일 외에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온화하고 서늘하였다. 늘 의정스님의 더러움을 씻는 법을 좇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를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마르도록 내 버려 두었다. 또 의복과 병과 발우의 세가지 것 외에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를 않았다. 대개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서두르지 않고 그 조용히 가라앉는 때를 기다린 후에 계발해주었다. 의문나는 점을 술술 풀어서 조금도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하였다. 이때 이래로 정처없이 구름처럼 떠다니며 그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지 머물렀다
바람결에 무수히 떨어진 은행잎
지나는 객들의 짖밟힌 은행알들의
격한 내음이 오늘은 향기롭다.
기을의 선물이라 .....
부석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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