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버지의 사랑표현이 없어서 한평생 아버지를 싫어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어렵고 무서운 존재여서 차라리 아버지 없는 가정을 부러워했을 정도 였다. 원인은 6살때 사촌언니의 엉뚱한 말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장작을 뽑아서 종아리를 때린일이 있었기에 시작된 것이다. 순전히 억울 한일이지만은 6살인 내가 아니예요 아니예요 내가 기덕이를 밀지 않았어요 라는 말을 못했었다. 사촌언니가 돌이안된아기를 마루에 내려놓고 부엌에 가있는 사이 내가 한글공부 하는데 아기가 귀퉁이를 잡고 일어서다가 입을 찧고 앉았나 보았다. 아기가 상모서리에 입을 찧어서 우는데 내가 밀었나 보다고 말한게 원인 이었다. 이제 나도 75세나 되고보니 아버지의 은혜를 따져보고 아버지와 화해를 하려 한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전에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신 일이 있었다. 중풍으로 말을 못할 때였었다. 내속으로 나에게 미안해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관심밖의 막내딸 의 도움을 받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화가가 된것이 아버지 때문 인것으로 기억된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때였다. 진학상담 차 어머니가 오지 않고 아버지가 오셨다. 나는 너무뚱뚱한 아버지가 나타난것이 창피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담임이 교통비가 안들어가는 창덕에 원서를 내는게 좋겠다고 하는것을 아버지가 무조건 이화여중 에 원서를 넣으라고 하신것이다. 내가 가끔 산수시험을 100점 맞는것을 아시니 나를 머리가좋은 아이로 인정하고 계신터였다. 나는 이화에 커트라인보다 10점이나 높게 합격 하였고. 아버지는 너무 기쁘셔서 입학식에 혼자 오셔서 나를 빵과우유를 사주시고는 시청앞에 데리고 나가서 통만두를 또 사주시는데 그 통만두도 내가 다 먹었었다. 아버지는 외갓집에 우리집딸도 이화에 들어갔다고 자랑스러워 하셨을것이다. 내가 이화를 다녔기 때문에 예고에 가게 되었고 예고를 다녔기에 기초가 탄탄 해서 화가가 된것이다. 인천에서 그림을 그릴때엔 누구에게 배우러 가지도 않고 나홀로 많은 공모전에 입상 하여 초대작가 까지 된것이다. 그동안 홍대교육원 경인교대 교육원등도 다니긴 했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아버지께서 좋은 학교에 진학 하게 해주신 덕분 이다. 세종병원에 큰 그림두점을 기증하니 부자가 큰기부금을 낸듯이 뿌듯하다 영감이 투석을 한지 5개월 째인데 간호사 들이 엄청나게 특별대우를 해주니 영감은 작가의 남편 이 거지같이 하고 다니면 않된다고 모시 와이셔츠만 입고 다니고 있다. 투석을 주3회 다니고 함께 따라 다니니 돌아올때마다 하나님 께서 데이트를 시키신다고 해석하고 감사하면서 영감의 밥상을 진수성찬 으로 차려준다. 화가가 되었지마는 아직 영감이 살아 있으니 요양사 무술이 가 되어 시중을 든다. 화가가 된것이 다 아버지의 덕분이라고 75세에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