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하 15:1~6
*제목; 사무엘하서강해(15) 광야학교에서 배우다!
1. 다윗, 드디어 압살롬을 만나다!
‘삼하14장’에서 다윗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으로 인해서 비극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특별히 다말의 사건을 어리석게 처리하고, 암논 살인 사건으로 ‘그술 땅’에 가 있는 압살롬을 불러 놓고도, 용서하지 못해서 더 큰 갈등과 불씨를 일으킵니다.
더 이상 다윗을 푸대접을 견디지 못한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서 아버지 다윗을 만나려 합니다. ‘삼하 14:32~33’입니다.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삼하 14:32~33)
이를 통해서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지만 아직도 용서가 제대로 되지는 못했습니다. 용서나 징계는 둘 다 분명하게 해야 하는데 다윗을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만남이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이 아니라, 신하와 왕의 만남처럼 더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에 드디어 ‘압살롬’은 자신의 반역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용서와 징계를 분명하게 했어야 하는데, 다윗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1~6절’입니다.
“1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삼하 15:1~6)
이스라엘의 민심을 압살롬이 훔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이스라엘백성들은 다윗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차인데, ‘압살롬’이 이렇게 하니 그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압살롬’은 ‘7~10절’에서 일을 치룹니다.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삼하 15:7~10)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된 것입니다. 왜 하필 헤브론입니까? 그곳 주민들이 다윗에게 가장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직 힘이 없을 때에 다윗을 왕으로 세운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헤브론’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헤브론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압살롬은 이 부분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 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왕된 곳을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노리기도 한 것입니다.
2. 다윗이 광야학교가 시작되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다윗왕의 위대한 전략가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넘어간 것입니다. ‘12절’입니다.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삼하 15:12)
그러니 많은 백성들이 더 많이 압살롬에게 가게 됩니다. 그야말로 대세가 기운 것입니다.
다윗은 하는 수없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일련의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도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버리지 못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광야학교”를 여신 것입니다. ‘23절’입니다.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삼하 15:23)
광야학교는 은혜학교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믿음이 바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담아내는 그릇을 만드는 곳입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해 어려움 속에 빠져 있습니까? 광야학교가 시작된 것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회복하려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기쁨과 순종함으로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믿음과 삶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아멘.
광야학교는 은혜입니다.
광야학교에 입학한 다윗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봅니다. ‘24~25절’입니다.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삼하 15:24~25)
다윗을 따라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나온 제사장들에게 법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려보낸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 법궤가 함께 한다는 것은 믿음의 정통성, 그리고 왕국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법궤를 이용하려하지 않습니다. 법궤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광야학교에서 다윗이 철이 나고, 이를 깨달아 법궤를 다시 돌려보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신앙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용대상이 아니십니다.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을 때, 우리 삶에 은혜를 부으시는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절대로 신앙도 아니요, 신실함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아멘.
첫댓글 믿음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고통 받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바로 "광야 학교"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을 보기 이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광야는 학교가 되고, 고난은 은혜가 되고, 어려움은 오히려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