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숲속 편지】
숲속 친구들은 장맛비를 어떻게 견딜까?
― 도솔산 정자에서 손자에게 쓰는 할아버지 편지
윤승원 수필가
세찬 폭우가 쏟아진 뒤 도솔산 두루봉 숲에 들어왔다. 비는 일시적으로 그쳤으나 장맛비가 언제 또 요란하게 내릴지 모른다.
그런데 혼자 숲을 거닐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면 사람들은 정자에 들어가거나 우산을 받고 편안한 가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산새들은 어디로 갈까? 어디에서 비를 피할까? 고라니는 또 어디로 들어가 폭우를 피할까? 산토끼는 또 어디로 몸을 숨길까?
▲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면 숲속 친구들은 어떻게 장대비를 피할까?(삽화=AI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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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는 본래 연못이나 계곡 체질이니 비가 아무리 와도 걱정할 것 없고, 꽃뱀 역시 물이든 땅이든 걱정 없는 생명체다.
하지만 털 달린 산짐승들은 비에 젖으면 어떡하나?
할아버지는 평소 산에 즐겨 다니지만, 산짐승들이 거처로 삼을 만한 굴이나 집을 발견하지 못했거든.
그래서 비가 오면 은근히 걱정된다. 산중 친구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는지, 배도 고플 텐데 먹이 활동은 어떻게 하는지 걱정을 한다.
하지만 비가 그치면 새들은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나뭇가지에서 신나게 노래한다.
장대 같은 비가 줄기차게 내렸는데도 털이 조금도 젖은 것 같지 않다.
산토끼와 고라니도 마찬가지다. 전혀 비를 맞지 않은 모습이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도 옛날 옛적, 원시시대에는 그랬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비가 오면 움막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도솔산 두루봉 숲길에서 혼자 명상하다가 숲속 친구들에게 물었다.
“대전지방 어제부터 거센 장맛비가 쏟아졌는데 너희들은 대체 어디 들어가 있었기에 옷(털)도 젖지 않았느냐?
번개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토끼야, 고라니야, 너희들은 또 어느 안전한 거처에서 세찬 비를 피했느냐?”
그러자 산새, 산토끼, 고라니, 다람쥐, 두꺼비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희를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사람처럼 주택은 없지만, 자연이 만들어 준 훌륭한 피난처를 이용한답니다.”
훌륭한 피난처라니, 그런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동안 할아버지와 의사소통을 해왔던 숲속 친구들이 차례대로 답했다.
▲ 숲속 친구들의 비밀 - 자연이 마련해 준 집에서 저마다 슬기롭게 비를 피하는구나.(삽화=AI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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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새 : 저희는 폭우가 시작되면 소나무, 전나무 등 빽빽한 침엽수 속 깊은 가지나 큰 나무의 줄기 가까이 숨어 있습니다.
잎이 겹겹이 비를 막아 주고, 줄기 가까울수록 빗물이 덜 떨어집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깃털을 부풀려 빗물과 찬 바람을 막습니다.
□ 산토끼 : 저희는 풀숲, 덤불 아래, 바위틈, 쓰러진 나무 밑이나 얕은 굴에서 비를 피합니다. 저희는 스스로 깊은 굴을 잘 파지는 않지만, 자연적으로 생긴 은신처를 잘 이용합니다.
□ 고라니 : 저희는 숲속의 울창한 덤불, 대나무숲, 칡넝쿨이나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폭우가 심할 때는 몸을 낮춘 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 다람쥐 : 저희는 나무 구멍이나 딱따구리가 파 놓은 빈 둥지 속으로 들어갑니다.
□ 두꺼비 : 저희는 낙엽 아래, 흙 속, 또는 돌 밑에 숨어 있다가 비가 오면 오히려 활발하게 움직이며 먹이를 찾기도 합니다.
숲속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보니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됐다.
비가 그친 뒤 산새들의 털이 거의 젖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주 만났던 낯익은 박새가 설명했다.
“깃털에는 기름 성분이 있어 물을 잘 튕겨 냅니다. 비를 맞는 시간을 최소화하도록 좋은 은신처를 찾고, 비가 그친 뒤에는 몸을 떨어 물기를 털고 깃털을 정리하기 때문에 금세 보송보송해집니다.”
털 달린 다른 친구들도 공통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알고 보니 산새에게는 나뭇잎이 우산이었고, 산토끼에게는 덤불이 처마였으며, 고라니에게는 숲속 깊은 수풀이 따뜻한 집이었구나. 사람은 집을 짓지만, 산중 친구들은 저마다 숲을 집으로 삼아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이렇게 숲속 친구들과 궁금했던 것들을 문답식으로 주고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소나기가 쏟아졌다.
할아버지는 얼른 정자로 들어가 장대비를 피했고, 숲속 친구들은 저마다 은신처를 찾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의 바른 친구들은 사라지면서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 비가 그치면 또 뵐게요. 오늘 저희를 따뜻하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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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평
이 작품은 단순히 ‘장맛비가 오면 동물들은 어디에서 비를 피할까?’라는 자연관찰을 기록한 글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빌려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 그리고 호기심이 어떻게 배움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교육적 에세이입니다.
◆ 작품 감상
‘숲속 친구들은 장맛비를 어떻게 견딜까?’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자연은 모든 생명에게 이미 집을 마련해 주었다’는 깨달음으로 끝나는 아름다운 숲속 철학입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걱정합니다.
‘산새는 어디로 갈까? 고라니는 어디 숨을까?’
이 질문에는 인간 중심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집이 없는 동물들은 매우 불안해 보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곧 시선을 뒤집습니다.
- 산새는 침엽수 속을,
- 산토끼는 덤불 아래를,
- 고라니는 칡넝쿨 속을,
- 다람쥐는 나무 구멍을,
- 두꺼비는 낙엽 밑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자연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가르치는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그 결과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사람은 집을 짓지만, 산중 친구들은 저마다 숲을 집으로 삼아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이 한 문장은 자연생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인간의 겸손을 일깨워 줍니다.
◆ 가장 돋보이는 문학적 특징
첫째는 질문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설명식으로 “동물들은 이렇게 비를 피합니다.”라고 말했다면 자연도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 궁금해하고
- 질문하고
- 대답을 듣고
- 깨닫는
대화 구조를 취함으로써 독자도 함께 숲속에서 배우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문답식 구성은 어린 손자는 물론 어른 독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둘째는 동물의 의인화가 매우 절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들이 말을 하지만 인간처럼 과장되지 않습니다.
각 동물은 실제 생태 습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활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동화 같으면서도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신뢰감을 동시에 줍니다.
◆ 손자에게 전하는 교육적 가치
이 작품은 손자에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 생명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
- 모르는 것은 질문하는 습관을 가질 것
- 모든 생명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
- 약해 보이는 생명도 놀라운 적응력을 지녔다는 것
이처럼 교훈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한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 생태 문학으로서의 가치
이 작품에는 환경보호를 외치는 구호가 없습니다.
대신 독자는 글을 읽고 나면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저 덤불 하나도 누군가에게는 집이구나.’
‘쓰러진 나무도 다람쥐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구나.’
이러한 깨달음은 환경운동보다 오래가는 생태 감수성을 길러 줍니다.
작은 숲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감성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 문학적 감동
가장 따뜻한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비가 다시 쏟아지자
- 할아버지는 정자로 들어가고
- 산새는 나무 속으로,
- 산토끼는 덤불로,
- 고라니는 숲속으로 흩어집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동물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비를 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숲속 친구들이 남기는 “할아버지, 비가 그치면 또 뵐게요.”라는 인사는 독자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적셔 줍니다.
◆ 종합 감상
이 작품은 자연관찰 수필, 생태교육 동화, 할아버지의 인생 편지, 숲명상 에세이의 성격을 아름답게 아우르고 있습니다.
특히 윤승원 수필가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징인 ‘숲속 친구들과의 문답’이라는 독창적인 서술 방식이 한층 자연스럽게 완성되었습니다.
동물을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들의 생태를 통해 인간도 배우는 존재임을 일깨웁니다.
무엇보다 이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사실에 기반한 생태 지식과 따뜻한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장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자연의 모습을 토대로 이야기를 펼쳐, 어린 독자는 흥미를 느끼고 어른 독자는 삶의 철학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 작품은 손자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넘어, 오늘날 자연과 다소 멀어진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숲은 모든 생명에게 이미 집을 마련해 두었다. 그 집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자연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이 한 문장으로 작품의 의미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생명에 대한 배려를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전하는, 교육성과 문학성을 함께 갖춘 ‘숲속 에세이’라 할 만합니다.
◆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윤승원 수필가만의 독특한 문학적 화법이 한층 풍부해졌다는 것입니다.
보통 자연을 소재로 한 수필은 풍경을 묘사하거나 자신의 감상을 풀어놓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궁금증→질문→숲속 친구들의 대답→깨달음→감사>라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함께 도솔산 숲길을 걸으며 산새와 고라니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문학평론가의 눈으로 본다면,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아름다운 가치가 살아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작가는 비를 맞고 있을 자신의 불편보다 먼저 산새와 산토끼를 걱정합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까?”
이 한마디에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인간 중심적 사고가 강한 시대에, 이름 없는 숲속 생명들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은 작품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는 정서가 됩니다.
둘째는 자연 앞에서 배우려는 겸손입니다.
작가는 동물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디에서 비를 피하느냐?”고 묻고, 숲속 친구들의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사실을 배웁니다.
이러한 자세는 진정한 자연인의 태도이며, 독자에게도 “자연은 배움의 스승”이라는 인식을 심어 줍니다.
셋째는 손자에게 전하는 삶의 유산입니다.
이 편지는 장맛비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세월이 흘러 손자가 어른이 되어 어느 숲길을 걷게 될 때, “덤불은 산토끼의 처마이고, 나무 구멍은 다람쥐의 집”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면, 그 기억은 오래도록 살아 있는 삶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저는 특히 마지막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지자 할아버지는 정자로 들어가고, 숲속 친구들은 각자의 은신처로 흩어집니다. 누구도 허둥대지 않습니다.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은 마치 자연이 조용히 들려주는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
“할아버지, 비가 그치면 또 뵐게요.”
이 한마디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라, 작가와 자연 사이에 오랫동안 쌓여 온 신뢰와 우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이별을 아쉬워하기보다, 다음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을 품게 됩니다.
윤승원 수필가의 최근 작품들을 계속 읽어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꽃뱀, 두꺼비, 다람쥐, 산새, 어린이, 등산객이 모두 '대화의 상대'로 등장합니다.
이는 자연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관계를 맺는 문학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앞으로 《윤승원 숲속 편지》를 대표하는 문학적 개성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이 연작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생태 에세이 동화, 숲 명상 문학, 세대를 잇는 편지 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작품군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숲을 통해 생명의 가치를 배우고, 손자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이 따뜻한 문학 세계는 오래도록 많은 독자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 (雲峰, 윤승원 수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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