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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현대사 - 좌우를 넘어서 민족을 하나로
‘해방은 뜻밖에 왔다.’
해방을 맞는 이들이 감격에 겨워 모여든 곳은 여운형의 집이었다.
숨막히는 일제통치속에 여운형은 언제나 이들과 함께했다.
이기형(88) /시인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올라와.
몽양을 찾아와
몽양을 찾아오고 계속 올라오니까,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사람만 오는게 아니야...
-46년 3월 소련 정보 보고서
‘통일임시정부수상후보는 여운형이다. 그는 당대 조선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였다.’
(47년 주한총영사 랭던)
-리처드 로빈슨 / 당시 미군정관
(국무성은) 그를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보았다.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여운형은 서울한복판에서 동족에 의해 암살된다.
‘몽양 여운형’ 그의 노력과 죽음은 통일조국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어 갔는지에 대한 잊혀진 기록이다.
-한국의 집/ 서울 중구 필동
(해방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
45년 8월 15일 이곳에선 여운형과 정무총감 엔도가 만났다.
치안유지권을 넘길테니 신변보호를 해달라는 총독부의 요청이었다.
‘조선의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고 치안유지와 청년조직의 건설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여운형은 제안을 승낙한다.
그리고 이튿날.
여운형은 방송과 전단을 통해 완전한 독립국가건설을 구심점으로 건국준비위원회결성을 선포한다.
그날 휘문중학교정에서 행한 연설은 여운형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육성은 남아있지 않다.
<연설내용>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이기형(88) / 시인
그 당시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건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어 충천했어...
그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도 몽양이 1등을 했다고...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라는건 대단한거죠.
*건국준비위원회본부 (서울 종로구 YMCA)
놀랍게도 건국준비위원회는 출범이틀만에 체계를 갖춘 모습을 드러낸다.
석방된 독립투사들이 귀향하면서 지방에서는 치안대가 꾸려졌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속에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만에 145개 지부를 설치한 전국조직으로 확대된다.
치안대의 치안유지활동역시 자리를 잡는다.
*전남장흥
강수희옹(89) / 사진작가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사진한장을 꺼내 놓았다.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의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해방되어서 주로 청년단, 치안대 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남지역 치안대(청년단) 씨름대회 /1945년 가을
강수의(89) / 장흥 치안대 참여
청년단이 조직된 뒤, 내 위치는 선전을 맞았어요.
일본인들에게 횡포부리지 말고 잘 보내자...
(어떤사람들은) 일본사람살림 강탈하려고 야단이었었거든요.
-치안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향한 약탈을 막고 더 나아가 일제경찰을 몰아내며 일제잔재의 청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중석교수 / 성균관대 사학과
해방이후에 건준같은 조직이 없었더라면 굉장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를 포함한 중요한 독립운동단체는 해외에 너무 멀리떨어졌거든요.
그런데 해방이 되기전부터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해방이 되는 날부터 바로 건준이라는게 조직이 돼 가지고 활동할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 치안유지같은 것을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나서서 할 수 있게 됐다.
이건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20세기초 세계의 정보가 모여들던곳 상해
해방후 건준을 이끌던 여운형이 처음 독립운동을 시작한곳이 상해였다.
1918년 33의 여운형은 ‘신한청년단’결성을 주도한다.
1차세계대전의 종전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을 알릴 대표로 김규식과 여운홍이 선출됐고 청년단원들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3.1운동의 준비과정을 도왔다.
이어 3.1운동의 평가물로 출현한 것이 상해임시정부.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초대내각에서 외무부차장을 맡았다.
그해가을 여운형은 일본의 초청을 받는다.
그것은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을 와해하려는 일제의 노골적인 공작이었다.
그대상으로 지목된 여운형에게 비난이 쏟아지자 그를 옹호한 이가 도산 안창호였다.
여운혁(85) / 여운형의 육촌동생
도산 안창호 선생은 “가라” 너 몽양 네 길이라면 말이지, 갈 것 같으면 걔네들한테 말려들어가는일 없이 충분히 우리주장을 관철하고 그러고 효과를 거두고 올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라” 하는걸로 해가지구 안창호 선생이 그때 돈으로 300원의 여비도 마련해 주셨어요.
*강덕상 / 재일한국역사자료관 조사위원장
독립운동의 제2세대는 장덕수라든지 여운형같은 좀 더 젊은 세대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정세도 알고 러시아정세도 알고 있고 미구정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장선 속에 중심 인물들이 일본에있어서는 무서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중심인 신한청년단의 대장 여운형을 데리고 오면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동경
여운형이 공직을 사퇴하고 개인자격으로 일본에 온 것은 1919. 11 그에겐 국빈에게만 허용되는 일왕의 비원 (아카사카궁)관람을 비롯해 임정탈퇴를 조선으로한 회유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제국호텔에서 수백명의 기자를 상대로 한 마지막 연설까지 여운형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 1919월 11월 28일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조선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조선독립운동의 주창자 여운형 입경 (신문기사내용)
-그것은 일제의 심장부에서 얻어낸 여운형의 승리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승리였다.
여운형이 돌아간 뒤 이듬해 일본제국의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3.1운동의 중심점에 있던 인물이 일본을 뒤흔든 사건에 대한 책임공방이었다.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의사록 (1920. 2)
다카하시의원
: 여운형은 작년(1919) 3월폭동에 이르기까지 조선내지의 폭동자와 연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이 3.1운동의 핵심인물임이 한번 더 드러났다.
당시 하라케 내각은 여운형회유공작실패의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제국의회 중의원은 해산된다.
강덕상 / 재일한국역사자료관 조사위원장
그래서 (하라수상은) 궁지에 몰리자 그는 여러 가지 공작을 하여 이를 완화시키려고 했지만 반대파가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그럼 해산하자’ 그러한 의미에서 여운형국회라고 합니다.
*독립신문 상해임시정부발행
(1920년 1월 17일)
임시정부역시 이러한 그의 활약을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성과로 보면서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자리잡는다.
이후 여운형의 행보또한 인상적인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선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중국에선 손문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국.공합작에 참여해 공산당을 도운 인물, 이념과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조선독립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1929년 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3년행을 받았다.
비록 수인의 몸이었지만 여운형의 귀국은 그와 민족의 운명을 바꿨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입구 (조선중앙일보 옛 자리) 일제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된 2층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제때 조선중앙일보사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출옥후 여운형이 선택한 행보는 뜻밖에도 신문사사장이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언론사사장이라는 직위를 충분히 활용한다.
취임 이듬해 상해의 김구와 연락해 당시까지 국내에 있던 어머니와 아들이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 여운형이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한다.
당시 조선청년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사진을 개재한 것 역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해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신문도 폐간된다.
퇴임후 그가 머문 서울 계동집이다.
당시 여운형은 일제의 보호관찰대상 1호 였지만 그의 집에는 조국을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여운형역시 청년들에게 연설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는 식민지조선청년들에 희망이었다.
강원룡 / 목사
용정에서 축구대회를 중앙일보주취로 열었다가 극장에서 강연을 했는데 세상에... 그렇게 웅변 잘하는 사람도 있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 그러구 남자가 생김 생김이 보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을 본 일이 없어서 야... 저런분이 앞으로 독립되고 나라를 맡아 줬으면 참 좋겠다.
여운혁 / 여운형의 육촌동생
그양반 연설하시는걸 보면은 그냥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그냥 압도되고 끌려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뭐... 어찌 연습해서 돼는것도 아니구
천성적으로 그런 기질을 타고 나신 분이죠.
‘돈 가지고 뿌리는향수는 역겹지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땀 냄새는 참으로 구수하고’ 그러면서 이양반이 연설하는데...
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마지막발악을 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43년부터 23만명의 조선청년이 일제의 총알받이가 됐고 200만에 이르는 강제징용으로 조선인들의 희생이 극에달한 시기였다.
‘고려신사’ / 일본 히다키시
41년 이곳을 방문한 여운형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전향이 이어진 이시기
일제는 또다시 여운형을 초청했다.
중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여운형은 이 요청을 거부했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등으로 악화일로를 겪는 일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
*고려신사 방명록 (1941년 6월)
그리고 그가 일본땅에 남기고 온 것은 힘있게 써내려간 4자의 한자.
‘혈농어수(血濃於水)’ - 피는 물도다 진하다.
그것은 조선독립에 대한 확신이자 의지였다.
*일제에 다녀온 뒤 일제패망에 대한 확신을 얻은 여운형은 요양을 핑계로 거처를 옮긴다.
여전히 일제의 보호관찰 1호였던 그에겐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찾았다.
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이 여운형과 만났다.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한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단체 - 농민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여운혁(85) / 1944년 10월 농민동맹참여
몽양선생이 농촌청년들의 무쳐있는 그 힘을 결속시켜 가지고 일본전쟁에 항거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하셨던 거죠.
그래가지구 인제... 고 세사람은 핵심적인 존재들이고 그 이외에는 전부 묻어둔 존재로써 조직을 해 나가구 해서 그 양반의 말씀에 의해 가지구 그렇게 시작된거죠.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상징인 가나안 농군학교 (고 김용일 장로) / 경기도 하남시
*자료참조
김종일 목사 / 가나안 농군학교 이사장
가나안 농군학교의 창시자인 김용기장로님이 젊었을 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분들 가운데 한분이 몽양 여운형 선생님인데 그 중에도 그분이 민족주의 나라사랑에 관한 것을 그 영향을 분명히 우리아버님은 받으셨다고 그게 농군학교의 정신에도 반영이 됐습니다.
-결집된 것은 농민만이 아니었다.
(당시 건국동맹 결성장소인 삼광한의원) 자리: 서울 종로구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까지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들이 뭉친 건국동맹 (이상백 - 여운형 - 이여성)
해방후 이틀만에 위용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의 뒤에는 이들의 준비가 있었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은 흩어진 해외독립운동단체와도 연대를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 연안독립동맹과의 연결이었다.
연안독립동맹의 수장이었던 ‘무정’의 기록속에 조선의 한성에서 연락을 취하던 대규모 독립단체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여운형의 건국동맹이다.
염인호 /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무엇보다도 그 일본이 점차 몰리고 있던 이런 시점에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세력과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세력이 연합을 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군사작전이라든지 아니면 지하활동이라든지 이런 것을 함께 노력했다는 점은 대단히 의의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해방직후인 45년 10월
우익잡지인 선구가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선을 이끌 지도자 여운형 33%’
-그것은 가장 어려운 시기 이땅에서 민족과 함께 해방을 준비한 여운형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
그러나 광복 60년 여운형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새나라 건설을 꿈꾼 건국준비위원회와 여운형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 미국 시애틀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60년전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 그는 45년 9월 일제에 대한 승전국으로 미군이 조선에 진주할 당시 미군정의 군정관이었다.
조선에 도착한 직후 그가 직접그린 지도위를 빽빽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다.
건준조직은 당시 인민위원회로 전환한 상태였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 지도에서도 보듯이 전국에서 이 위원회가 활동중이었고 수백개의 지부가 있었다.
일본인은 여운형에게 항복했다.
당시 다른 사람은 없었고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 위원회가 설립돼 전국에서 지방정부 역할을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들은 얘기는 ‘이 위원회는 공산주의 조직망이며 따라서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 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우리는 이 위원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이들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건국을 향한 조선백성들의 노력이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장흥까지 나갔던 장흥치안대도 예상치 못한일을 당했다.
강수의 (89) / 사진작가 (장흥치안대 참여)
(미군정은) 치안대가 경찰서에 들어가서 치안을 맡고 있는걸 전부 쫓아내고 일제 경찰들을 오라고 하여 경찰을 조직해서 치안을 맡도록 했어요.
‘군인민위원회, 청년단, 치안대 이런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들이다.’
-45년 9월 미군정은 일제때의 기관과 관리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원활한 체제유지를 핑계로 그들이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 그들(친일파)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조사에 따르면 46년 경위이상의 경찰고위 간부중 80%가 일제경찰출신이었다.
*여운형. 하지(미군정 사령관) 첫 만남 1945년 10월
여운형을 둘러싼 상황도 달라져 있었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와 여운형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 것은 미군이 진주한 뒤 한달이 지난 뒤였다.
-죽기전 친구에게 전한 편지에서
(김용중에게 보낸 여운형의 유고 편지중)
1947년 7월 18일
여운형은 45년 10월 하지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After shaking hands, the first question Gen-aral hodge put to me was, 'What connections have you much the jap?'
Answer : 'None' Then asked : 'How much money did you receive from the jap?'
I was completely taken aback by his question this unfriendly attitude. -중략
(악수를 마친후 그가 던진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 였고 내 대답은 ‘없소’였소.
그러자 그는 ‘왜놈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받았지’ 라고 묻더이다.
나는 그의 질문과 비우호적인 태도에 완전히 당황했소.)
-여운형에 대한 하지의 왜곡된 선입견
그 배경은 곧바로 밝혀졌다.
하지와 만난뒤 옆방으로 향하자 그곳은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조선이이 있었다.
바로 한민당원들이였다.
*한민당(한국민주당) 발기인 대회 성명서 (1945년 9월 6일)
-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출범한 한민당
한민당은 첫 발기인 성명부터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일제와 손잡고 무질서를 조장한 소수 무리배’ 라고 공격했다.
<일부내용>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유지에 대한 협력의 의뢰를 받은 여운형은 4,5명으로서 건준위를 조직하고...’ , 각처에서 폭행이 일어나고 무질서한 상태가 연속되었다...
-당 지도부의 90%가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지주와 자본가 출신으로 구성된 한민당은 오히려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주장했다.
강원룡 / 목사
친일파라고 한민당에서 하고 했는데...
끝까지 일제때 국내살면서 마지막까지 타협(배교)안한 사람이에요.
여운형하고 안재홍 선생들이 ...
*연합군 및 이승만 환영식 (1945년 10월 20일)
대대적인 환영속에 이승만이 귀국한다.
그는 여운형의 방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어 11월 23일 김구와 임시정부인사들이 귀국했지만 역시 여운형과 손잡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노고를 잘 아는 여운형이었지만 임시정부만을 추대하자는 주장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정병준교수 / 목포대 역사문화학과
여운형의 생각은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중경, 중국각지에 독립운동했던 여러 중요한 조직들이 해외에 5개 정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세력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함께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설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중경에서 들어온 임시정부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임시정부세력들에게는 중경임시정부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도교 중앙 대강당 / 서울 종로구 경운동
이미 시작된 대립과 갈등속에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창당한다.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한뒤 건국준비위원회가 또다른 분열의 축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새출발을 선언한 것이다.
평화적 방법으로 광범위한 대중과 정치세력이 뭉쳐 독립을 완성기키는 것, 이것이 인민당의 목표였다.
<연설부분>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했던 혁명투사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조선인민당 창당연설중 / 1945년 11월
-단결을 위한 원칙은 단 하나!
악질적인 친일파의 배제였다.
이것이 여운형이 죽는날까지 외친 원칙이었다.
*동아일보기사의 신탁통치기사 (12월 27일)
-그러나 45년의 마감을 앞둔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35년간의 식민지를 벗어나던 그해 또다시 들려온 신탁통치소식에 반대시위는 급격하게 일어났다.
*모스크바 3상회의
그러나 당시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 사항이 무엇이었는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
제1항
1. With a view to the re-establishment of korea as an independent state, the creation of conditions for developing the country on democratic principles and the earlist possible liquidation of the disastrous results of the protracted japanese domination in korea, there shall be set up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which shall ...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고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제3항
3. The proposals of the joint Commission shall be submitted, following consultation with the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for the joint consideration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ted Stat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nited kingdom and China far the working out of an agreement concerning a four-power trusteeship of korea for a period of up to five years.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해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원조 협력방을 작성 제출한다.
송남헌 / 독립운동가
신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의 원문이란말이야.
‘어떻게 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그럼 임시정부가 수립한 후에는 어떻게 해서 연합국이 임시정부를 도와주느냐?’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 그건 보지 않고...
*모스크바 3상회의 -1945년 12월 16일 ~ 26일
모스크바에서 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현지시각 1945년 12월 27일 그로부터 3일 뒤 미군정에 원문이 전달됐을때는 이미 반탁시위가 불붙은 상태였다.
그 촉발제가 된 27일자 국내신문들은 모스크바에서 결의안이 나오지도 않은 시간에 배포된 것이었다.
정용욱교수 / 서울대 국사학과
모스크바 3상 회의가 12월 26일날 끝나고 12월 27일날 정오에 전문의 텍스트발표를 했는데 27일 정오같은 경우, 한국으로는 27일 밤시간입니다.
그런데 27일날 모스크바 3상회의에 관한 결정이 국내에서는 전부 보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해서요.
그런데 왜 그것이 오보냐 하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애초에 미국이 러시아측에 제안했던 내용은 5개년간 신탁통치 그리고 그것을 10년간 연장할 수 있다고까지 애초에 제안이 그랬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애초의 입장은 즉시독립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동아일보기사, 조선일보기사
-소련이 신탁통치주장 -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당시 기사는 워싱턴발 합동통신을 출처로 했다.
*영문명: KPP (korean pacific press)
정영욱교수는 합동통신의 영문명인 KPP를 추적했다.
그러나 조사결과 미국의 언론에는 보도된 적이 없는 기사였다.
- [태평양 성조기]는 ‘번즈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조선의 측시독립을 촉구하는 훈령을가지고 갔다’고 보도했고 합동통신(KPP)은 ‘미국은 즉각적인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러시아는 신탁통치를 주장한다’ 는 기사를 배포
(출처: 정계동향 (미군정 공보부발령) 45년 12월 29일)
-대신 그가 찾아낸 것은 미군정이 자체 진상조사를 통해 작성한 보고서, 보고서는 국내보도의 출처로 태평양 성조기지를 지목하고 있다.
-미국은 신탁통치에 반대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보고의 출처는 바로 이 신문이라는 것이다.
[태평양 성조기]지 1945년 12월 27일자
태평양 성조기지는 당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을 위한 신문이었다.
해당기사를 확인해본 결과
It was pointed out that secretary of state James F. Byrnes wen to Russia with instructions to urge immediate independence of korea as opposed to the Soviet thesis of trus-teeship.
Up said. The American ...
...번즈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조선의 즉시 독립을 촉구하는 훈령을 가지고 러시아로 갔다...
-기사 내용은 소련의 신탁주장에 반대해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부분이 일치하고 있었다.
국내상황도 혼란을 더해갔다.
처음 반탁을 지지한 박헌영이 북에 다녀온 뒤, 모스크바결의안 지지로 선회하면서 시위는 반소. 반공운동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기형(88) / 시인
찬탁 반탁에서 완전히 갈라져 버렸어.
찬탁 반탁에서 그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도 그렇게까지 대립 안했는데 찬탁, 반탁이 나면서 빨갱이냐 아니냐 하는게 더 선명하게 나왔다고.
찬탁한 사람은 빨갱이다.
반탁한 사람은 애국자다.
-이 혼란속에서 여운형은 즉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때보다 정확한 상황파악이 필요했다.
대신 해가 바뀌자 여운형의 인민당을 중심으로 4당 지도자와 임정이 만났다.
*4당 (한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코뮤니케
1.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데 대하여 전적으로 지지한다.
2. 신탁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한다.
-1946년 1월 8일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신탁은 장래수립될 우리정부가 해결케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해방이후 각 정치세력이 이루어낸 단 한번의 합의안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송남헌 / 독립운동가
그것만 합의가 이루어졌더라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도 안했을거고
또 오늘날과 같이 남북이 갈라지지 않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 것 아닙니까?
-그모습을 보며 여운형은 이렇게 통탄했다.
“참담한 심경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 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같은 지도층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4당 코뮤니케 무산뒤 1월 14일 기자회견)
-여운형의 비통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한반도의 남과북에서는 분단의 그립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최근에야 비밀해제된 미.소 양국의 비밀문서들은 그 위기의 증거이다.
740,00119 control (korea) / 11-2145 : telegram
The Acting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44
[Seoul, 20 November, 1945]
[Received November 21-4 : 25 p.m]
Tfgbi 20. Referance SWNCC 79/1 and 101/4 of October 20 and 24 Respectively.
After one month's observation in liberated korea and with background of earlier service in korea, I am unable to fit trusteeship to actual conditions here or to be persuaded of its suitability from ...중략
[“Transmitted also to the Actiong Political Adviser in Japan"]
-랭던이 미 국무장관에게 1945년 11월 20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가 결성된 직후인 1945년 11월 미군정의 제안서다.
1. (미군정)사령관...행전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한다.
2. 행정위원회는 과도정부로 하며
5. 행정위원회는 국가수반의 선거를 실시한다.
-제안서에는 남한만의 독자정부수립을 암시하는 내용이 곳곳에 들어있다.
당시 이 제안은 미국무부에의해 일단 거부됐다.
뿐만 아니라 93년 공개된 스탈린 지시사항 (1945년 9월 20일) 소련의 비밀문서에는 광복이 되던 45년 소련역시 정권의 성격에서 업무추진방안까지 북한만의 독자적인 정부추진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련비밀문서)
제2항
반일적인 민주정당사회단체에 기초하고 동맹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제7항
북조선에서의 모든 민정업무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가 지도한다.
-스탈린. 안토노프
이렇게 해서 조선의 반이라도 선점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다름아닌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었다.
전현진 교수 / 경북ㄷ개 사학과
“신탁통치 구상은 한국전체를 일단 통일정부를 수립해서 미국과 소련내지 연합국이 관리한다는 구상입니다.
그러니까 분할해서 관리한다는게 아니라 통일적으로 관리한다는 구상입니다.
전전부터 약속을 해왔던 것이고 전후에 한국사람들의 통일에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그런 안으로서의 국제적인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먼저 방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 환영행사 (서울운동장 1946년 4월)
여운형은 미.소공위가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남은 과제는 미국과 소련 좌.우 정치세력이 공감하는 통일정부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연설내용>
지정학상으로 남방세력이자 해안세력인 자본주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회주의의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건설과 유지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같이 좌.우 협력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미.소 공의회는 석달만에 휴회되었다.
*이승만 삼남지방유세 (이승만 정읍발언)
휴회된 미.소 공위가 재개될 기미가 안보이니 통일정부수립은 여의치 않다.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하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안 : 해방후 일년이 안된 시점)
여운형은 결연히 반대했다.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
(46년 6월 11일 여운형 기자회견중)
그후 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부상한다.
무엇보다 미국무부의 의지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할 큰 힘이였다.
*루즈벨트대통령 1주기 추모식 (1946년 4월 12일)
46년 4월 국내좌파세력들이 개최한 루즈벨트의 추도식.
그속에 조선공산당의 당수 박헌영이 보인다.
그것은 엄연한 남한에서 현실권력인 군정을 인정하고 협조하겠다는 제스쳐이자 여운형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추진될 좌우합작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여운형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달뒤인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터지며 미군정의 조선공산당탄압은 본격화 됐고, 공산당역시 급진화 된다.
*여운형에 대한 조사제안 보고서 (1946년 8월 2일)
-문제는 미군정의 태도였다.
좌우합작 세력을 지지해 대중의 지지기반을 선점한 뒤 공산당 대열에서 이탈하면 곧바로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그 열쇠를 쥔 것이 여운형이었다.
50년이 지나 비밀해제된 당시 문서들은 미군정이 노골적인 회유와 공작으로 여운형을 압박했음을 보여준다.
*비밀문서내용
하지, 굿 펠로우, 버취는
여운홍(여운형의 동생)과 몇몇 2류당원들에게 인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치집단을 만들도록 종용했다.
“일리있는 말이군, 나는 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 -하지 친필메모
-46년 5월 여운형이 이끌던 인민당 일부가 탈당한 것도 미군정의 공작이었다.
미군정이 원한 것은 여운형과 공산당의 단절이었다.
조선공산당의 태도또한 여운형을 어렵게 만들었다.
*박헌영 합작 5월칙 발표 (1946년 6월 23일)
3. 북조선과 동일한 토지개혁법 제정
5.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각 이양할 것
여운형은 박헌영을 설득했다.
그가 공산당에 손을 놓는 순간이 미군정과 공산당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다.
-여운형과 미군정은 서로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다.
여운형에게 있어 미군정은 좌.우 합작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미군정에 있어 여운형은 상황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인민당의 상황] (미군정 비밀문서)
1946년 4월 12일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의 단절을 요구하는 제안에는 거부하면서, ‘소련을 포함하여, 어떤 정당 혹은 강대국에 의한 조선의 지배를 인정할 수 없다.’ 고 말했다.
-한편으로 여운형은 끊임업는 테러에 시달리고 있었다.
46년 7월 (8번째)
이후에도 테러는 계속됐다.
그리고 한달 뒤 1946년 8월 27일
여운형은 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인민당내의 공산당쁘락치들이 박헌영의 지시로 공산당으로의 흡수통합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중에는 건국동맹시절부터 함께했던 동지들도 있었다.
-이시기 미군정은 공산당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공산당은 이에 총파업으로 맞선다.
그러나 여운형은 마지막순간까지 그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여운형은 그해 환갑의 나이로 38선을 넘는다.
해방과 동시에 소련의 통치권하에 놓인 북한은 46년 이미 김일성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속에서 북으로간 여운형의 행보는 남쪽에서와 다를것이 없었다.
46년 2월 북으로간 여운형.
첫 번째로 만난이는 조만식이었다.
반탁을 주장하다 연금된 그의 석방이 북한에서 여운형의 첫 요구였다.
*소련 25군 정보 보고서 (1946년 9월 25일)
소련의 정보 보고서에 기록된 여운형의 기록도 다를것이 없다.
여운형이 김일성을 만난 것은 46년 9월
좌익의 합당을 원하는 김일성에게 여운형은 좌.우 합작으로 통일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설득하고 있다.
전연수 교수 / 경북대 사학과
여운형은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여운형이 설득당한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여운형이 이 이후에 남한에 내려와서 끊임없이 좌익 3당의 합당보다 좌.우 합작운동 그리고 좌익정당의 합당 좌익블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좌익의 독자적 진출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우익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데 그리고 합법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입법위원회에 참여해서 활동공간을 넓히려고 하는데 이런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은 활동을 해 나갔다라고 하는 겁니다.
-정치인으로 환대를 받으며 간 꽃길이 아니었다.
콧수염을 깎고 농민복을 걸치고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간 길이었다.
남과북을 넘고 좌와우를 설득해 민족이 통일되는 것, 그것이 그가 평생 염원한 꿈이었다.
47년 7월 19일 아침
여운형은 친구에게 편지 한통을 주었다.
편지는 죽음을 예견한 듯 했다.
<여운형의 유고편지중에서>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는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업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그날 오후 혜화동 로터리
여운형의 차 앞으로 트럭한대가 돌진해왔다.
이란 / 몽양의 제자
7월 19일 오후 1시쯤 몽양선생님이 탄 차가 명륜동 일가 숙소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왔습니다.
그때 길이 포장이 안돼서 길이 나빴어요.
그래서 속도를 못내고 10마일 정도...
막 꼬부라지는데.
차에 범퍼를 딛고 선 암살자는 뒷좌석에 앉은 여운형의 심장을 겨냥해 두발을 쏘았다.
남과북을 오가고 좌.우를 안기위해 동분서주한 그는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동족에게 살해됐다.
그의 수첩에는 못다이룬 일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당시 경찰은 22살의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제2 저격조가 동원된 조직적인 암살이라며 네명의 범인들이 나타난 것은 공소시효가 끝난 74년 그들은 경찰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지근’만을 데려갔다고 증언했다.
*1994년 인터뷰
김ㅁㅁ / 여운형 암살 지휘자
“옳은일 하는데 여러사람 희생시킬 필요가 없지.”
“경찰도 여기 그랬잖아.”
“범인인줄 알고 있었다고 하잖아.”
“김일성을 다섯 번 만나고 김일성과 타협한 것이지, 좌익계통의 통일에 대해서.”
“아들, 딸까지 자기 죽기전에 이북으로 보냈어.”
*여운형선생 장례식 (1947. 8.3)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은 사실상 멈춰버렸고
그해말 결국 해체된다.
그들이 원했던 통일의 꿈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여운형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처리돼 철제관에 담겼다.
통일된 조국에 다시 묻어달라는 당부 때문이었다.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주한미국총영사 윌리엄 랭던
[미국의 배반] 초고 -리처드 로빈슨
로빈슨은 자신이 본 해방당시 한국의 상황을 책으로 엮어 여운형에게 바쳤다.
‘미국의 분별없는 외교정책에 의한 희생자 여운형에게 이 책을 바쳤다.’
그는 좌익과, 우익 양쪽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로 죽었다.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는 민중정치기구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편이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좌와우
남과 북이라는 대립속에
그가 원한 것은 권력이 아닌 하나된 우리였다.
해방된지 60년 그가 떠난지 58년
아직도 여운형은 차가운 역사속에 그렇게 갇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