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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7:1-16절) 아름다운 부부생활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집회를 열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위를 하고, *차별금지법*을 만든다고 해서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동성애자들의 활동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소돔과 고모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를 위시한 죄악으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멋진 남자의 모습으로 소돔 성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소돔의 동성애자들은 천사를 멋지게 생긴 남자로 생각하여 강간하기 위해 몰려들어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동성애자들의 행패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롯이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동성애자들의 행패를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동성애자들을 달래기 위해 협상을 하려고 했습니다.
즉 자기 딸을 내어줄 테니 마음대로 하고 손님들을 해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여자에게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는 동성애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사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보냈다고 하면서 빨리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전합니다.
머지않아 평지는 모두 불 쓰나미로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롯은 밤새 우왕좌왕하면서 소돔 성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결국 천사가 강제로 *롯과 두 딸과 롯의 아내의 팔을 잡고 끌어내어 달아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롯은 *도저히 산까지 도망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소알 성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 쓰나미의 규모를 줄여서 소알 성은 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롯의 가족이 떠나자 곧바로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지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덮쳤는데, 단 한 명도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두 딸을 살린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협상하시기를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시위나 행동을 누군가는 반대해야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의인의 기도입니다. 즉 *의인의 부르짖는 기도만이 소돔과 고모라로 변해버린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性)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性)을 잘못 사용하면, 이 세상에서 수치와 굴욕을 당할 뿐 아니라, 그 후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성적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해, 인생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적으로 이 세상과 잘 어울리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 세상은 술 문화이고, 대단히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거기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예배 문화이고,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젊은이들이 더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성(性)문화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성(性)이 자유*라고 생각해서 *사랑의 감정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청소년이나 청년이 *순결을 가지고 있으면, 게이(Gay)라고 의심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적 타락과 방종 뒤에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Ⅰ.남녀관계의 위험성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사랑하게 만드셨고, 좋아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최고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정욕이 통제되지 않아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때는 인간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은 모두 다 없어지고, 오직 추하고 더러운 것만 남게* 됩니다.
우리 *인간과 천사가 다른 점*은 천사는 정욕이 없고, 유혹을 받지 않고, 타락하지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욕을 갖고 있고, 유혹도 받지만, 이것을 바른 방향으로 쓰고 참을 때 천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폭발물을 전담하는 사람처럼 매사에 조심, 조심해야 겨우 지킬 수* 있습니다.
7:l절)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교회 안에서 성도를 돌볼 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성도를 돌볼 때, 개인적으로 가정을 방문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두고 상담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이며, 교육하고 제자 훈련을 시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남성이 남성을 돌보고, 여성이 여성을 돌보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 교인 중에 병자가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당한 자가 있어 심방해야 할 때, 여성이 심방하는 것이 좋고, 남자 교역자가 심방해야 할 때는 반드시 여성을 동반해야 시험에 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육체의 정욕을 가진 죄인*이기에 잘못하면, 마귀가 틈을 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데, 남자가 여자 성도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장시간 기도하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우리가 성도이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지만, 우리 속에는 여전히 *육체의 정욕이 있어 잘못하면, 누구든지 무서운 유혹에 빠져 멸망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라 할지라도 다른 이성(異性)을 육체적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배웠지만, 남녀 간에는 아주 예민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쁜 소리로 노래하는 새를 잡아 집으로 데려가 초롱 안에 키울 때, 그 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새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새에게 행복은 자유롭게 자기가 가고 싶은데 가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인간이므로 *다른 이성(異性)을 대할 때, 이런 욕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예배당의 구조는 *남녀가 서로 보지 못하도록 중간에 벽이 있고, 자리도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가까이 있으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마음이 집중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이 결혼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7:2절)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남자와 여자 모두 결혼해서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초대교회 시절에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사람들이 처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모두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결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남자 청년이나, 여자 청년이 육체적 사랑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마음과 육체를 순결하게 지켜서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는 것이 영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독신 서약*을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반드시 남녀 간에 사랑하지 않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 본 앙드레 지드의『좁은 문』에서 주인공 남녀는 서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목사님의‘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설교를 듣고, 자기들에게 *좁은 문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헤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자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려 죽습니다.
우리는 이런 스토리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얼마든지 육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불쌍한 병자들을 돌보다가 죽는 것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답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남녀가 하나님 때문에 계속 사랑하지 못하고 헤어진다면, 죽을 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며, 예수 믿은 것을 후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비극적 사랑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하게 얼마든지 사랑하고,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그 대신
*엉뚱한 사람을 사랑해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독신으로 살기로 서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다가 어느 날 밤 뛰쳐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죄를 짓게 되었다면, 그것이 더 악(惡)한 것이며, 위선적인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인이 주님을 위해 가족도 없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마음껏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독신이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돈이 필요한 것은 아이를 비롯해 가족이 있기 때문에 교육이나 집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자기 몸뚱이 하나뿐이라면, 작은 골방에서 잠을 자도 상관없고, 어디서든지 먹고 입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성자(聖者)같고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인간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육체의 정욕이 있어 나쁜 생각을 하게 되고,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적 사랑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Ⅱ.남녀 간 사랑의 책임
사실 남녀 간에 사랑의 감정이나 육체적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을 나누려고 하면, 한 가지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평생을 상대방에게 바치고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평생과 인생을 상대방에게 바치지 않은 채, 육체적 쾌락만 가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의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즘은 부부가 늙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성공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되,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용량을 주셨다면, 죄짓는 일이 없을 텐데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정욕을 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즉 딱 한 사람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사랑할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인간은 누구든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또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정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하면, 자기 몸의 주인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7:3-4절)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일단 결혼하면, 의무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절(貞節)의 의무입니다. 결혼하면 오직 한 사람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과도 육체적 사랑을 나누면, 안 됩니다. 간음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한평생을 바쳐서 한 여자나 남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모든 생활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결혼할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비롯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하리라 약속하고* 결혼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옷을 사주지 않거나, 쌀이 아깝다고 많이 먹지 못하게 해선 안 됩니다. 또 여성이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남자가 먹고 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의 몸을 남자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여자의 몸도 여자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남자는 결혼하기 전, 자기 몸을 자기가 결정합니다. 어디든 놀러갈 수도 있고, 공부를 하거나 일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자기 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몸을 혹사(酷使)해서도 안 되고, 부인이 요구하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남자는 자기 몸을 회사(會社)것이라고 생각해서 밤새워 일하려고 하는 데, 부인이 *빨리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와야 합니다. 특히 결혼한 사람의 건강은 서로의 행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므로 아주 중요합니다.
결혼하고 나서 빨리 죽는다거나 하면, 이것은 계약위반입니다. 예전에 어떤 남자가 병으로 빨리 죽자, 부인이 장례식장에서 죽은 남편을 향해“계약 위반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부부 사이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분방(分房)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7:5-6절)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요즘은 나이 든 사람 가운데 방을 따로 쓰는 부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이 너무나 심하게 코를 곤다거나,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가 다르거나, 활동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너무나 오래 분방(分房)하면, 유혹이 파고 들어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장기간의 해외 출장으로 오래 떨어져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Ⅲ.그리스도인의 독신과 이혼의 문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이성을 사랑하도록 만드셨는데, 남녀 짝이 딱 맞으면 참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중에 결혼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가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하기는 했지만, 상대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도저히 같이 살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무나 세상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말라*고 권합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이혼은 절대로 안 된다거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것은 무효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7:7절)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독신으로 있는데, 사실 독신으로 있는 것이 너무나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았으면 좋겠지만,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恩賜)가 다르기 때문에 강요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부터 예루살렘에 유학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혈육(血肉)에게 물어보지 않고, 곧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혼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야 할 때, 꼭 부인(婦人)을 데리고 다녀야 해서 위험한 여행을 할 수도 없었고, 그가 가는 교회는 경제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독신(獨身)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여행도 감행할 수 있었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일에 열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욕(性慾)의 문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육체의 욕망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런 성령 충만한 시간이 없어지면, 그때 잘못하면, 육체의 욕망에 더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특히 고린도에서는 예수 믿는 신앙을 가진 배우자를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혼자 사는 여성을 억지로 결혼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7:8-9절)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옛날에는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과부로 있으면, 주위에서 압력을 넣어서 억지로라도 결혼시켰던 것 같습니다. 특히 로마 당국은 *독신으로 있는 여자에게 벌금을 내게 하거나, 재산권을 빼앗아서라도 억지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억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 여성이 주님을 사랑해서 독신으로 살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과부들 중에서 재혼하지 않고, 마리아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다가 죽으려는 여성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여인들에게 *억지로 결혼하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그 여성들 중에서 처음에는 *독신으로 살면서 주님만 사랑하고 섬기려고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남자를 사랑하고 싶고, 또 좋은 남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얼마든지 독신을 포기하고, 결혼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마틴 루터는 처음에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免罪符)가 틀렸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는 수도원이라고 해서 더 거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많은 수도사와 수녀가 수도원을 떠나서 마틴 루터에게 왔습니다.
루터는 그 수녀들에게 남자들을 소개시켜 주어 결혼하게 했는데, 한 여자가 *죽어도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마틴 루터는 의무감으로 그녀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카트리나 폰 보라였습니다. 루터는 나중에 이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결혼을 하라, 그리하면 후회할 것이라’고 말한 뒤,‘결혼하지 말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작건대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를 너무나 사랑해서 한평생 철학의 진리를 찾기 위해 돈도 벌지 않고,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아내의 물벼락을 맞고‘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 비가 내리는 법이지’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남편이 돈도 벌어오지 않는데, 아이를 키워야 하니, 그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겠는가? 하면서 크산티페를 변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 26:4).고 약속하셨는데, 그는 100세에 독자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삭 역시 40세가 될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타락한 가나안 땅에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결(純潔)한 여자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삭은 40살이 되어 리브가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그때 리브가의 나이는 한창 아름다운 십대였습니다.
이삭이 오랫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리브가가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7:10-11절)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리스도인 아내나 남편에게 있어서 *신앙이 없다*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배우자가 신앙이 없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배우자를 전도하면 됩니다.
상담실을 하니까 강원도에서 어떤 여자 집사님이 불신 남편과의 문제로 상담해 왔습니다. 그때 벧전 3:1-6절로 답변했습니다.
한번 결혼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고, 한번 결혼하면, 마음대로 나누어질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이혼해선 안 된다고 하면, 결국 남자들이 여자를 구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등, 억지로 헤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모세도 율법에서 *연약한 여자를 남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놀라운 비밀이지만, 인간의 죄 성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라고 해서 *억지로 같이 살 것을 강요한다면, 여자나 남자 중에서 미치거나, 죽는 사람도 있을*것입니다.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때는 갈라지게 되면 갈라지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살든지, 사정이 변해서 함께 살 수 있으면, 함께 살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면, 맞아 가면서 함께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겨 맞으면서도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맞아가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이 욕을 먹거나 매를 맞으면, 마음속에 있는 긍정적 자아상이 모두 다 파괴되어 너무나 비참한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은 이미 남편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인데, 아이를 정도 이상으로 때리는 부모는 이미 부모 자격이 없는 것이므로 아이를 그런 집에 돌려보내선 안 됩니다. 이것은 국가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한번 이혼했지만, 그 후에 좋은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패자부활전이라고 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음행 외에 절대 이혼은 안 되고, 재혼도 안 된다*고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느슨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원칙이고, 우리 인간은 무지(無知)나 어리석음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7:12절)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신앙을 가진 부인이 남편이 믿지 않아도 같이 살기를 원한다면,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남편이 신앙을 가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신앙을 위해 오래 기도했는데, 나중에 예수 믿고 불이 붙어서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가기 때문에 아이들의 신앙을 모두 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이유로 상대방이 갈라서자고 할 때는 *노예처럼 살지 말고, 대담하게 갈라서라*고 말씀합니다.
7:15절)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함께 사는 것이 노예생활과 같고, 힘겹다면, 상대방이 갈라서자고 할 때, 갈라서도 됩니다. 물론 이것은 이혼(離婚)이 아니라, 여성 보호 차원에서 단지 따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예처럼 살면서도 억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화평 중에 부르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종노릇을 할 필요도 없고, 불행할 필요도 없고,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사랑하게 하셨지만, 사랑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따릅니다.
오늘날 책임지지 않으면서 사랑만 하려고 하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강요당해서 결혼하거나 결혼생활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각 셀(cell)공동체는 ▷믿음의 부자 되어▷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찬송가 559장 *시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성숙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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