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박물관대학 수강생의 제주4.3역사문화기행
제주시 박물관대학 수강생 80여명은 지난 6월 19일 ‘제주 4·3역사문화’주제로 제주 동부지역 역사문화유적지 탐방학습을 실시했다. 탑방학습의 코스는 조천읍 선흘릴 낙선동 4·3성을 시작으로 선흘리 4·3불칸낭, 선흘주민 4·3 피신처(목시물 굴), 성산 4·3서청중대 주둔지(성산초교 옛터)를 돌아 하도리 돌담과 별방진성, 신흥리 방사탑으로 이어졌다. 이날 현장해설은 제주4·3평화재단 선임연구원 오승국씨가 맡았다. 아래 글은 이번 제주 4·3역사문화 탐방학습 교육자료다.
<선흘리의 4?3이야기> 선흘곶에 집단 피신했다 무차별 학살된 주민들
선흘1리는 4?3 당시 현재의 본동과 새동네, 큰굴왓, 실물가름 등이 1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낙선동으로 알려진 알선흘에도 봉냉이동산, 돗바령, 당오름 등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어서 한 때는 선흘 3구로 편성되기도 했다. 1948년 가을경, 9연대 일부 병력이 선흘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둔 군대는 선흘리를 거점으로 인근 중산간 마을을 감시하고 산간지역의 토벌을 담당했다. 1948년 10월 31일 오후, 선흘 주둔 군인들은 선흘리 청년들 10여명과 인근 야산에서 붙잡은 북촌리 청년 등을 끌고 갔다. 그들 중 일부가 군인들이 주둔한 국민학교에서 500여m 서쪽에 위치한 ‘족지왓’ 이란 곳에서 총살당했다. 그날 선흘리민 김창윤, 윤현권, 오문현 등 3명과 인근 야산에서 붙잡은 북촌리 청년등 8명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군인들이 족지왓에서 사람 죽이는 것을 처음 본 주민들은 겁에 질렸고, 이후 부터는 어디로 가면 살지를 몰라 모두 숨어사는 생활이었다.
목시물굴과 도틀굴 등으로 피신
1948년 11월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게 된다.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굴과 대섭이굴 반못 옆의 도틀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위험을 먼저 감지한 젊은 청년들은 마을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틀굴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한 노인을 찾아 총으로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내면서 주민학살이 시작되었다.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긴 한두 사람이 주민들이 가장 많이 피신해 있던 목시물굴의 위치를 실토하고 말았다.
피신처 발각, 학살의 광란
이튿날인 1948년 11월 26일 새벽녘, 군인 토벌대는 길안내를 할 두사람을 데리고 다시 선흘지역 토벌에 나서게 된다. 두대의 트럭에 분승한 군인들은 선흘곶으로 출동하여 먼저 박격포를 쏘았댔다. 그 박격포 소리에 놀란 빗개 소년은 혼비백산을 하여 달아났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개였으며 길이가 50미터가량 되는 넓은 굴이었다. 굴의 입구로 들어가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져 큰 공간을 만드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용암동굴이다. 백명 가량의 선흘리 주민들은 이 굴을 피신처로 삼아 두려움에 떨며 임시 살아가고 있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음이 뻔한 것을 안 주민들은 몇시간을 버티다가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에 따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한아무개도 현장에서 총살했다. 김형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 전 이 사건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남겼다. “목시물굴에 들어가지 않은 4명의 주민과 함께 덕천리 지경의 높은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노라니까, 낮 시간이 되니 막 연기가 나고 총 쏘는 소리, 사람 죽어가는 소리가 엄청 들렸다. 그 곳에는 제 아내를 비롯해서 일가친척들 거의 대부분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목시물굴 앞 학살터로 가 보았습니다. 학살터는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을만큼 처참하였습니다. 휘발유를 뿌려서 불을 태웠기 때문에 시신 주위로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시신들을 둘러보는데 숙부님과 숙모님 등의 시신이 있고, 친척 몇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집사람과 몇몇 친척들은 없더군요. 나중에 합류한 고적석 형이 시신을 수습하고 표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대로 종이에 적어서 새동이라는 곳에 항아리에 묻어두고, 또 하나를 만들어 품에 넣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시신을 감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엎드려서 죽은 사람들은 그나마 형체라도 알아볼 수 있었지만 하늘을 보고 죽은 시체들은 불에 그을리고 해서 정확하게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측은한 아기의 죽음
또한 젖먹이 어린아기가 한명 죽었는데 증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아기는 토벌대가 굴을 포위하고 있을 때 굴 안에서 놀라 울고 있었다. 그러자 아기의 아버지가 울음소리를 막으려고 입을 막자 숨이 막혀 죽었으며, 아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밖으로 나와서는 망탱이에 담긴 채 자밤나무에 걸려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이 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거의 대부분 남자들로 4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군인들은 굴에서 나온 주민들을 총살한 후 기름을 기름을 부어 태웠기 때문에 시신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 한편,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시물굴 인근에 있는 반못 근처로 끌려왔다. 군인들이 타고온 트럭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먼저 굴 안에 있던 곡식들을 젊은 사람들을 시켜 짊어져 오게 하고는 그들을 반못 옆에서 다시 학살한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였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4명 가량이 그 옆에서 앉아 있는 상태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광란의 학살을 끝낸 군인들은 타고 온 트럭 2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분승시켜 함덕 대대본부로 끌고가 공포에 떨게 했다. 일부 주민들은 엉물(북촌리 억수동) 인근의 밭으로 끌려가 기관총을 걸어놓은 토벌군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집단학살 당했다. 당시 이 밭은 8마지기의 큰 밭이었으며, 콩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주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당시 시신을 찾으러 갔던 주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억울하게 희생된 마을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고,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있도록 팻말작업을 하였던 고적석 씨는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끝내 유명을 달리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억울한 희생 침묵으로 증언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한 곳에 피신했다가 엄청난 희생을 겪은 선흘주민 피신처에는 지금도 무차별 학살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피신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 있다. 입구는 굴의 서쪽 끝과 중간에 있다. 목시물굴의 중간 입구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넓고 높아진다.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도 있다. 굴 내부의 가장 넓은 곳은 바위를 짜맞추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곳이 있는데 이곳이 4?3 당시 주민들이 많이 생활했던 곳이다. 지금도 굴 속에는 피신생활 당시 사용했던 그릇, 숟가락, 호롱불, 고무신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굴 외부의 서쪽 입구 앞에는 주민들이 생활했던 움막터의 주춧돌이 원형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움막터는 반경 20여미터에 30여개가 산재해 있다
눈물의 4?3이야기
선흘1리가 고향인 백문길(남, 79) 할아버지의 43당시 삶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눈물이 아득히 고여 가슴이 미어진다. “저는 당시 키가 적었습니다. 원래 당시 나이는 17살이었는데 열세살 정도로 속인거지요. 키가 적어서 가능했습니다. 마을이 소각된 후 마을에서는 며칠만 숨어 지내면 된다고 해서 마을 근처에 숨어지냈습니다. 마을이 전부 불타고 나서는 무조건 굴에 들어가는게 안전하다 해서, 그냥 굴속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 곳이 목시물 굴이었는데, 마을과 목시물 굴 중간 지점에 도틀굴이라는 굴이 있어서, 청년들이 숨어있다가 토벌대에게 잡혀 취조를 험하게 받아서인지 우리가 숨어있는 굴을 군인들에게 불어 버린 겁니다. 군인들이 아침일찍 굴 입구로 총을 쏘면서 들어왔습니다. 평상시에는 굴속에서 초나 무슨 불이라도 조금 밝히고 살았었는데 총 맞지 않으려고 굴 속에서 이구석 저구석 숨었지만 불 비추면서 들어오니까 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안나가면 총에 맞아 죽는것을 아니까 다들 밖으로 나간거지요. 거기서부터 우리를 밧줄로 묶으면서 M1 개머리판으로 그냥 팍팍 때렸습니다. 저는 맨 나중에 굴에서 나왔는데, 나오니까 뒷통수를 뭐로 쳤는지 바로 눈이 캄캄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구둣발로 막 차니까 뭐... 완전히 동물 취급이지요. 거기서 다 죽일 줄 생각 했는데, 활동 할만한 젊은 남자들을 별도로 추려낸 후, 어떤 청년 둘을 세워 놓고, 군인들이 싸움을 붙여요. 막 물어 뜯고 막 서로~. 하아. 아직도 그게 눈에 훤해요. 서로 물어 뜯으라고 해서들 아유~ 살려고 하니까 서로 물어 뜯어요. 별 꼴을 다 봤습니다. 우리가 지나자 마자 총 소리 나는걸 보니, 그 현장에서 그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린 거지요. 사람들이 죽은걸 알고 ‘다 죽었구나’ 하며 체념하고 있을 때 군 쓰리쿼터 트럭이 와서 함덕으로 태워 갔습니다. 거기서 또 도피자 가족이다 뭐다 해서 추린 후 북촌리 억수동에서 선흘리 주민들을 또 총살 했습니다. 사나흘 사이에 선흘 젊은 사람들은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님은 그때 다행히도 살아서 이젠 살았는가 했는데, 나중에 함덕 평사동 모래판, 내 눈 앞에서 죽였어요. 나는 아버지 어머니 죽는거 보고 그냥 울면서 나도 죽여 달라고 하니까, 우리 이모가 막 수건을 입에 물리면서 그냥 ‘너라도 살아야 된다’고.... 아버지는 총알 첫발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안 죽어 있었어요. 파~악 총을 비오듯 갈겨도 안 죽었어. 아 그런데 나중에 한사람씩 총부리로 확인사살을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꾸물딱 꾸물딱 하니까 머리에 대고 그냥 쏴버렸어요. 보니까 머리가 그냥 다 부서져서.... 한이 맺히고, 계속 울고, 밥이 안 내려갔습니다. 그땐
허허벌판에 성을 쌓아 함바집에 살다
선흘리 낙선동의 4·3은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석성(石城)으로 남아 있다. 당시 쌓은 성담과 그것을 쌓은 사람들의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검은 색깔의 성담위로 송악 담쟁이가 아픈 역사를 위로하듯 무성하게 덮여있다. 함덕리 등지에서 소개생활을 하는 등 눈물의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1949년 봄이 되자 선흘리 본 마을과는 떨어진 들판에 성을 쌓고 얼기설기 함바집을 지어 집단으로 거주하게 된다. 4·3이후에도 일부 주민이 눌러 앉아 살게 되면서 낙선동은 4·3의 역사와 함께 설촌 60주년을 맞고 있다. 낙선동이란 마을 지명은 바로 이 때부터 불리워졌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따라서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전략촌인 낙선동의 축성작업은 선흘 주민들만이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타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는 물론 국민학생들도 동원되어, 1949년 봄 한달 동안 계속됐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는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귀향, 그리고 눌러앉은 사람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난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한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현재 4·3 성이 있는 낙선동 인근에는 알선흘로 불리는 봉냉이동산, ?바령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축성을 한 이곳에는 ‘뱅듸왓’이라는 농토였으나 지형이 높아 무장대의 근거지 였던 선흘곶 등 사방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이 들어 섰던 것이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고향 마을로 돌아가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4·3 당시, 200세대가 성안에서 살았으나 현재는 13가호가 남아 있다. 고학봉(76세) 할아버지는 4?3당시 함덕으로 소개 내려가 수용소에서 매일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다가 49년 봄, 낙선동 성 축성작업에 참여 한 후 고향인 선흘 본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눌러 앉아 지금까지 60년을 살고 있다. “요즘 사람들 골아도 몰라. 함덕에서 오가며 성 쌓을 땐 먹을게 어서노난 점심도 못 먹었주. 아침이나 저녁에 소앵이나, 바다패에 무릇을 섞어 삶아먹거나 밀주시에 쑥 버무련 먹는게 보통이었주.” 당시 경찰 3명 정도가 낙선동에 근무했는데 초소장인 강문경 경사는 호의적인 편이었으나 서북경찰 우 순경은 지독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남편이 없는 낙선동 여성들과 결혼했다. “낙선동 초기에는 리장도 뽑아났주. 난 대청특공대로 경찰이영 댕기멍 선인동, 보모루 주둔소를 만들고, 거기서 보초도 하영 섰주.” 그는 돗바령 출신 부인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낙선동 발전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마을 입구의 팽나무도 그 당시 자신이 직접 심었다고 했다.
4?3유적지로 정비복원
당시 쌓은 4·3 석성은 대부분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제한이 풀린 1954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돌들이 원위치 되어 사라져 버렸으나, 낙선동 성담은 마을을 지켜주는 방풍 역할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총안도 여러군데서 볼 수 있다. 4·3유적지기행의 단골 코스이기도 한 이 곳은 국비사업인 ‘제주4·3유적지종합정비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2009년 10월, 성곽및 내부시설이 재현되어 고난스러웠던 4·3의 삶을 증언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잃어버린 유산들
1948년 11월 군경의 초토화 이후 본동과 낙선동을 제외하고는 모두 재건이 안되었다. 따라서 당시 10호 이상이 살았던 마을 중에 새동네, 큰굴왓, 실물가름, 봉냉이동산, 돗바령, 알선흘의 당오름 등 선흘1리 자연 마을들이이후 재건이 안되어 참혹한 인명피해 만큼이나 초토화작전의 피해를 실감케 하는 곳이다. 선흘1리 마을 중심에는 ‘불카분 낭’이 지금도 생명력을 키우며 버티어 서 있다. 1948년 11월 21일, 온 마을이 불타면서 마을 안 거리에 위치해 있던 이 팽나무에 불이 옮겨붙어 오래된 지주목이 불타 버렸다. 4?3 이후 선흘 사람들이 생존의 꿈을 이어 가듯이 팽나무의 한쪽에서 새싹이 돋아났으며, 불에 타 죽어버린 밑동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다른 나무의 씨가 새싹을 틔워 오랜 세월을 같이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선흘1리는 4?3의 참화를 겪으며 알선흘의 ‘하르방당’과 본동의 ‘할망당’도 잃어버렸다. 특히 할망당의 당목은 와흘본향당의 폭낭보다 더 굵고 컸다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선흘1리 주민들은 소개령 이후에 은신처로 삼았던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 대섭이굴 등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어 현장에서 수십명이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함덕대대본부로 끌려간 후 다수 주민들이 서우봉이나 북촌리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또한 소개령에 따라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6?25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과 육지 형무소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4?3의 참화속에 희생된 선흘1리 주민은 당시 선흘2구를 제외하더라도 200여명에 이른다.
□ 선흘리 낙선동 4?3성 견벽청야의 전략촌, 허허벌판에 성을 쌓다
선흘리 낙선동의 4?3은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시 쌓은 성담과 그것을 쌓은 사람들의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검은 색깔의 성담위로 송악 담쟁이가 아픈 역사를 위로하듯 무성하게 덮여있다. 선흘 본 마을의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다고 하여 4?3당시에는 알선흘로 불리워지다가 성을 구축하여 마을이 형성된 후에는 낙선동(樂善洞)이란 마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실은 한자음이 ‘떨어질 낙(落)’이 었으나, 20년 전쯤에 ‘즐거울 낙(樂)’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4?3이후에도 일부 주민이 눌러 앉아 살게 되면서 낙선동은 4?3의 역사와 함께 설촌 60주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줄이은 주민 희생
당시 조천면 선흘리는 1948년 11월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게 된다.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굴과 대섭이굴, 도틀굴, 벤뱅듸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위험을 먼저 감지한 젊은 청년들은 마을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틀굴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한 노인을 찾아 총으로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내면서 주민학살이 시작되었다.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후 엉물과 서우봉에서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또한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이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하게 되는 것이다.
성을 쌓아 함바집에서 살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의 석성은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중산간 지역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전략촌인 낙선동의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는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해안 마을인 함덕리로 소개 되었거나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선흘, 와산리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달 동안 계속됐다. 선흘 본동 출신으로 현재 낙성동에 살고 있는고학봉(75세) 씨는 “낮엔 경찰이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 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 고 말했다. 축성 작업은 피난 내려간 선흘리, 와산리 주민만 하는게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타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는 물론 국민학생들도 동원됐다.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귀향, 그리고 눌러앉은 사람들
성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m의 직사각형 모형이었다. 고학봉 씨는 “성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의 침입을 막으려했다.” 며 성 외각의 해자가 있었음을 증언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난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한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성을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지만 1951년 5월 5일 새벽에 무장대의 습격으로 다음날 결혼 예정이었던 정덕순(20)을 납치해 갔으며, 한 무장대 대원은 성 위에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 사라졌다고 한다. 이날 무장대원 3명도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지기고 했다. 현재 4?3 성이 있는 낙선동 인근에는 알선흘로 불리는 봉냉이동산, 돛바령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축성을 한 이곳에는 ‘뱅듸왓’이라는 농토였으나 지형이 높아 무장대의 근거지 였던 선흘곶 등 사방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이 들어 섰던 것이다. 선흘, 와산리 주민들은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고향 마을로 돌아가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4?3 당시, 200세대가 성안에서 살았으나 현재는 13가호가 남아 있다.
4?3유적지로 복원 정비
당시 쌓은 4?3 석성은 대부분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제한이 풀린 1954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돌들이 원위치 되어 사라져 버렸으나, 낙선동 성담은 마을을 지켜주는 방풍 역할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총구멍도 볼 수 있다. 4?3유적지기행의 단골 코스이기도 한 이 곳은 국비사업인 ‘제주4?3유적지복원정비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지난 2009년, 성곽및 내부시설이 재현되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불카분 낭(불에 타버린 나무)
선흘리가 초토화되면서 같이 탔지만 지금껏 살아있는 나무이다.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선흘리의 가옥은 단 몇 채만 놔두고 모두 전소됐다. 온 마을이 불타면서 마을 안 거리에 위치해 있던 이 팽나무에 불이 옮겨붙어 오래된 지주목이 불탔다. 하지만 모두 타버려 생명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팽나무의 한쪽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타버려 죽어버린 굽이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수종이 다른 나무의 씨가 새싹을 틔워 몇십년을 같이 살았다. 이 밖에 선흘리는 초토화과정을 겪으며 당목(堂木)도 잃어버렸다. 선흘리민들은 매년 정초에 마을당(堂)인 일뤠당에 모여 굿도 하고 거리굿도 했었는데 초토화의 와중에 당목이 불타고 당도 훼손되었다. 알선흘은 하르방당, 본동은 할망당이라 했는데 마을이 불타면서 훼손된 것이다. 할망당의 당목은 와흘본향당의 당목인 폭낭보다 더 굵고 컸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할망당은 학교 집 아래 밭 두 개 넘어 있었지만 지금은 과수원으로 개간해버려 흔적이 없고 다른 곳으로 옮겨 굿을 하고 있다. 알선흘의 하르방당도 옮겨서 굿을 하고 있다. 지금도 마을 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선흘리 보건진료소 좌측을 끼고 길을 가다보면 길 한 가운데 고목을 만날 수 있다.
□ 선흘곶 선흘주민피신처 한 곳에 피신했다 무차별 학살된 선흘 주민들
당시 조천면 선흘리는 1948년 11월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게 된다.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굴과 대섭이굴 반못 옆의 도틀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위험을 먼저 감지한 젊은 청년들은 마을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틀굴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한 노인을 찾아 총으로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내면서 주민학살이 시작되었다.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긴 한두 사람이 주민들이 가장 많이 피신해 있던 목시물굴의 위치를 실토하고 말았다.
피신처 발각, 학살의 광란
이튿날인 1948년 11월 26일 새벽녘, 군인 토벌대는 길안내를 할 두사람을 데리고 다시 선흘지역 토벌에 나서게 된다. 두대의 트럭에 분승한 군인들은 선흘곶으로 출동하여 먼저 박격포를 쏘았댔다. 그 박격포 소리에 놀란 빗개 소년은 혼비백산을 하여 달아났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개였으며 길이가 50미터가량 되는 넓은 굴이었다. 굴의 입구로 들어가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져 큰 공간을 만드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용암동굴이다. 백명 가량의 선흘리 주민들은 이 굴을 피신처로 삼아 두려움에 떨며 임시 살아가고 있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음이 뻔한 것을 안 주민들은 몇시간을 버티다가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에 따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한아무개도 현장에서 총살했다. 김형조 씨는 “목시물굴에 들어가지 않은 4명의 주민과 함께 덕천리 지경의 높은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노라니까, 낮 시간이 되니 막 연기가 나고 총 쏘는 소리, 사람 죽어가는 소리가 엄청 들렸다”고 증언했다.
측은한 아기의 죽음
또한 젖먹이 어린아기가 한명 죽었는데 증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아기는 토벌대가 굴을 포위하고 있을 때 굴 안에서 놀라 울고 있었다. 그러자 아기의 아버지가 울음소리를 막으려고 입을 막자 숨이 막혀 죽었으며, 아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밖으로 나와서는 망탱이에 담긴 채 자밤나무에 걸려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이 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거의 대부분 남자들로 4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군인들은 굴에서 나온 주민들을 총살한 후 기름을 기름을 부어 태웠기 때문에 시신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고 김형조 씨는 증언했다. 한편,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시물굴 인근에 있는 반못 근처로 끌려왔다. 군인들이 타고온 트럭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먼저 굴 안에 있던 곡식들을 젊은 사람들을 시켜 짊어져 오게 하고는 그들을 반못 옆에서 다시 학살한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였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4명 가량이 그 옆에서 앉아 있는 상태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광란의 학살을 끝낸 군인들은 타고 온 트럭 2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분승시켜 함덕 대대본부로 끌고가 공포에 떨게 했다. 일부 주민들은 엉물(북촌리 억수동) 인근의 밭으로 끌려가 기관총을 걸어놓은 토벌군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집단학살 당했다. 당시 이 밭은 8마지기의 큰 밭이었으며, 콩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주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당시 시신을 찾으러 갔던 주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억울하게 희생된 마을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고,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있도록 팻말작업을 하였던 고적석 씨는 예비검속으로 끝내 유명을 달리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억울한 희생 침묵으로 증언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한 곳에 피신했다가 엄청난 희생을 겪은 선흘주민 피신처에는 지금도 무차별 학살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피신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 있다. 입구는 굴의 서쪽 끝과 중간에 있다. 목시물굴의 중간 입구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넓고 높아진다.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도 있다. 굴 내부의 가장 넓은 곳은 바위를 짜맞추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곳이 있는데 이곳이 4?3 당시 주민들이 많이 생활했던 곳이다. 지금도 굴 속에는 피신생활 당시 사용했던 그릇, 숟가락, 호롱불, 고무신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굴 외부의 서쪽 입구 앞에는 주민들이 생활했던 움막터의 주춧돌이 원형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움막터는 반경 20여미터에 30여개가 산재해 있다
□ 성산리 서북청년단특별중대 주둔지 서청특별중대에 끌려가면 목숨도 끝
성산이 불쑥 솟아올라 제주섬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성산리는 4?3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은 성산국민학교를 접수하여 1년 정도 주둔하였다. 정확한 규모와 주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북말을 쓰는 50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많다. 구좌면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의 일부가 성산리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다. 학교 담을 허물고 출입을 용이하게 하여 일제 때부터 있었던 주정공장에 딸린 창고를 사용했던 것이다.
매일 들리는 고문과 비명소리
이 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두른다. 매일 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이 곳에 몇 번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기선(남. 81세) 씨는 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며 “심지어는 성산 사람 하난 뭐, 죽이러 가면서도 걷지 못하니까, 단가에 들러가서 죽였단 말이여. 그렇게 취조를 해놨으니까.” 라며 자신도 지금 고문후유증이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수난에 대해서도 말했다. “잡아오면은 그 간수들이, 감시허는 놈들이 마음에 맞으면 끌어다가 무조건 강간해놓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조건 쏘아 죽였다는 그런 말도 들었어요. 일단 그 여자들은 나가면은 들어오진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장소는 어디서 죽였는진 모르고. 하여튼 마, 수마밑에 광치기 있는 데 하고 우뭇개 정도죠.”
현재 성산리는 해안도로 등이 새로 생겨 다른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일제 말엽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발발 초기에 한번의 지서습격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지역주민들에겐 치 떨리는 악몽이 연속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갖은 고문과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산면 일대를 관할했던 서청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는 성산리의 ‘터진목’ 과 ‘우뭇개동산’ 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보는 게 일상사 였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은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이 곳에서의 희생은 성산면 주민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근 지역인 구좌면 하도, 종달리 등에서 붙잡혀온 주민들이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48년 11월 28일, 18세 이상 80세 까지의 하도리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감자창고에 감금 시켰다가 다음날인 29일 주민 20여명을 터진목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성산면 주민들의 억울한 사연들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보고된 당시 성산면 유족들의 신고를 보면 서청특별중대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조리 출신의 고태현(24세) 씨는 1948년 10월, 9연대 11중대에 끌려가 수감 중 무죄로 석방되어 의용대에 근무하며 충실히 살고 있었으나, 특별중대는 과거에 수감되었다는 이유로 감자창고에 끌고와 고문을 가한 후 1949년 1월 2일, 일출봉 우뭇개동산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학살집행자는 김우희 서청중대장이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그들은 도피자 가족, 고기잡이용 다이나마이트 소지, 인민위 명단에 기록,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죄 등 갖가지 죄명을 붙여 선량한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당시 성산면 유족들은 신고한 바 있다. 신고서에 나타난 유족들의 요망사항은 무죄한 양민을 학살한 서청악질을 조사하고 엄벌하여 불쌍한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애절한 내용들의 주를 이루고 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하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정치 후견 세력으로 성장하여 해방공간과 건국초기의 수많은 정치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김구와 여운형 등의 암살 배후도 서청이였다는 게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서청 제주지부(단장 김재능)는 1947년 11월 2일 조직되어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과 조천면장 윤창석을 연행하여 고문사 시켰으며, 제주도의 유일한 신문사였던 제주신보 마저 강제 접수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서청의 무자비한 테러행위는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4?3발발의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진압과정에서도 그들에 의해 무수한 생명들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 옛터는 성산동국민학교로 1946년 2월 개교하였고 1957년 6월에는 학교명을 성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곳에 있던 학교는 1972년 12월 현재의 터로 이설했다. 당시 학교 건물은 양철지붕이었으나 4?3이후 기와 건물로 개축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청이 주둔했던 곳과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장소는 동일하다. 지금은 일본식 건축양식을 사용한 건물의 틀과 바닥, 천정, 복도 등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주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감자창고는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블록공장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이 곳 성산동국민학교 옛 건물은 서청특별중대원들의 하나 둘 사라져 가듯, 기와지붕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이 곳은 성산면 주민들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당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라도 세워 후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성산리사무소 앞 킹마트 뒤편에 있다.
증언 - 윤종선 씨 고문 받는 비명 소리에 내 마음이 찢어져
윤종선(77세. 사진) 할아버지는 4?3당시 열 여섯 살이었다. 서청특별중대 감자창고 고문실 바로 앞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밤 벌어지는 고문과 비명소리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감자창고에 임시 마련된 특별중대원들을 위한 식당에서 일했다고 한다. “성산포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학교 동쪽의 주정공장과, 간스매 공장, 옥도정기를 만들었던 감태공장이 있었주. 4?3이 나난 서청특별중대는 이런 시설을 이용하여 사무실로도 쓰고, 잡아온 사람들을 가두어 고문한 후 터진목이나 우뭇개에 데려당 팡팡 총살해부렀주. 이북말을 쓰는 서청특별중대원들은 군복입은 놈, 사복입은 놈 등 복장도 각양각색이라. 총은 거의 99식을 들고 다녔는 데 너무 무서워서 ‘이북놈 왐쪄’ 허멍 봐지민 피해 부렀주.” 윤종선 씨는 줄에 묶여 부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내일 쯤 어디서 또 몇 명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늘 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어떤 할머니를 잊지 못하주. 우뭇개에서 한 20명쯤 집단으로 총살당했는데 그놈들이 가부난 밤에 기어나완 살아난 거라. 서청들이 알아도 사지에서 살아났덴 살려주더라고” 그 당시 성산지서에 여섯명이 경찰이 있어도 서청특별중대가 들어온 후에는 꼼짝못하고 그들이 하수인 역할만 했다고 그는 말한다.
□ 바람 많은 섬의 돌담
돌의 왕국
제주도는 돌의 섬이다. 화산섬의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제주 선인들은 돌과 더불어 살아왔다. 기본생활공간인 구들에 깔린 것도 방돌이란 넓적한 돌이었다. 말방아, 돌고래(가정용 방앗돌), 물팡, 빨래팡, 통시(화장실),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에 만든 돌그물인 원(개) 등 제주섬 지천에 널어진 돌은 생산에 걸림돌도 됐지만 쓰임새가 더 많았다. 집담, 올래담, 밭담을 쌓아 거센 바람을 이겨내기도 하고 바람을 잘 구슬려 보내기도 했다. 연대, 환해장성, 진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마을을 지키려 거욱대(방사탑)를 세웠는가 하면 현청(縣廳)이 있던 고을엔 돌하르방을 세워 수호신으로 삼았다. 미륵과 신석(神石)도 돌이다. 그렇게 돌과 더불어 살다 죽어서는 산담으로 둘러쌓인 무덤으로 돌아가 동자석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렇듯 제주 섬사람들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활용하는데 돌을 이용해왔다. 지금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더 이상 소용없게 된 많은 ‘돌문화’가 쓰러지고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더 이상 활용의 대상이 아니다. 일부 관람과 보존의 대상으로 존재하지만, 발끝에 채이듯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일 따름이다. 하지만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세계적인 돌 축조물이 남아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돌담’이 그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올래담과 밭담이다. 제주의 동쪽과 서쪽, 번잡한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장관이 제주의 밭담이다. 또 시골마을 어느 곳에서나 마을길과 집 안마당을 연결하는 올래의 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제주의 돌담
제주는 바람의 섬이기도 하다. 잔잔할 때는 한없이 잔잔하다가도 몰아칠 때는 매섭게 몰아치는 제주의 바람. 그렇게 바람 부는 날이 아주 많은 섬. 그 섬의 밭에 돌담이 늘어서 있다. 척박하고 바람 많은 섬에서 그에 맞서는데 지천에 널린 돌이 적절하게 쓰였으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한 겹이지만 척박한 환경에 맞서려는 듯 서로의 몸과 몸을 맞댄 돌담들. 제주의 밭담이다. ?탐라지?(耽羅誌)에는 니것 내것 경계를 명확히 하자는 데서 돌담이 유래됐다고 하나, 그 이전부터 집담, 올래담 등은 있었을 것이며, 돌이 많은 화산섬에서 한 뼘이라도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서도 돌을 캐내어 어딘가에 쌓아두었을 것이다. 또 너와 나를 나누는 경계보다 더욱 급했던게 바람을 막는 일이었다. 거칠고 메마른 땅에 바람이 몰아치면 흙이 날리고 씨앗도 잃어버릴 위험이 많았다. 밭담은 그렇게 바람막이로 필요했다. 또 우마의 침입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밭담은 소용이 있었다. 도심지를 벗어난 마을이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올래와 집담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올래는 보통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빗기려는 듯 굽어진 길이다. 또 구멍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바람을 보내고 들여오면서 어르고 달래는 지혜가 돋보인다.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 인간을 이롭게 하였으니, 돌담은 이미 섬사람들과 하나였다. 돌 많고 바람 많은 섬의 자연과 인간이 필연적인 만남의 모습이다. 이렇듯 제주도의 돌담은 과학이고 생명이다. 그리고 역사이자 훌륭한 정신의 산물이다. 순간 최대풍속 초속 60m에도 끄덕없는 제주의 돌담이다. 들숨과 날숨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하지만 하얀 시멘트를 바른 도심지 집담이나, 몇 겹으로 쌓으며 작은 숨구멍조차 모두 막아버린 철옹성 같은 돌담은 삶의 애환이 묻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막힘’의 상징, 감히 범접하지 말라며 자기를 뽐내는 권위에 다름 아니다. 오래도록 제주섬을 특징지으며 지탱했던 끈끈한 공동체와 풋풋한 인정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것은 나눔이다. 기쁨과 슬픔, 좋은 일과 궂은 일도 서로 나누어야 너와 나 모두 편안하단 것을 터득한 것이다. 제주인들은 이 삶의 방식을 조상들의 생활에서 배우고 스스로 실천하며 자연스레 공동체를 보듬었다. 마치 집과 집 사이의 담이 들숨날숨 바람이 통하여 안 무너지듯, 가난하지만 이웃끼리 먹을 것 오가고 힘든 일을 나누는 인정으로 공동체가 굳건히 살아남지 않았을까. 구멍 숭숭 뚫린 돌담에서 인정이 나왔든, 넘나드는 인정에서 돌담의 숨구멍을 배웠든, 제주 돌담은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정신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흑룡만리(黑龍萬里)
‘흑룡만리(黑龍萬里)’. 제주의 검은 현무암으로 쌓여진 돌담을 모두 이으면 만리가 된다는 데서 일컫는 말이다. 이쯤 되면 세계적인 유산 아닌가. 실제 만리가 안되는 중국의 만리장성은 국방용이며 엄청난 인명 희생을 치른 축조물이다. 하지만 제주 돌담은 생산용이다.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자 하는 평화의 상징이다. 인정이 드나들듯 바람이 통해야만 굳건히 버틸 수 있다는 정신이 배어있는 훌륭한 인류유산이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독특한 제주의 돌문화유산이 몹쓸 바람을 탈까 두렵다. 바람 많은 섬, 아무래도 쓸모가 있어 ‘방치가 곧 보존’일 수 있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와 농업의 몰락, 그에 따른 농업형태의 변화 등이 어떤 특급태풍보다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제주의 돌담을 할퀴고 갈지 모를 일이다. 얼기설기 놓인 제주 돌담이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지만, 한곳이 무너지면 인접한 돌담도 덩달아 무너지게 된다. 이 소중한 돌담이 사라지기 전에 소중히 보듬어 안아 제주의 문화유산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다.
□ 하도리 별방진성(別防鎭城)
조선시대에 쌓은 별방진 성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성은 하도리 마을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중종5년(서기1510) 목사 장림이 쌓았다. 왜선의 정박지가 우도였기 때문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김녕의 방호소를 이 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하였다. 둘레 2890자, 높이 7자, 동 서 남 세 곳에 문(초루)이 있었다. 지금도 '동문' '서문'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샘이 2 곳 있었으나 해변이므로 물맛이 짜다. 다른 진보다 병력이 갑절이나 되었다. 성을 쌓을 때에 흉년이 심하여 부역 장정들은 인분까지 먹어가며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현장 안내판)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52′ 북위 33°21′에 해당한다. 둘레 960m의 타원형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고북저(南高北底)가 되고 있다. 성의 보존 상태를 보면 동문지와 서문지는 민가에 의해 변형되어 그 위치만 찾아 볼 수 있으며, 남문지에는 옹성만이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고 문루는 남아 있지 않다. 남문지의 동쪽은 서기1995년 일부를 복원하였는데 2단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속채움은 돌만 사용한 구간이 있고 돌과 흙을 혼용한 구간이 있다. 성벽 상부는 완벽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없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미석(眉石 ; 석성의 상부, 여장 밑에 여장을 쌓기 위해 눈썹처럼 판석을 약간 나오게 설치한 돌)과 여장(女墻 ; 성 위에 쌓은 낮은 담으로 총구와 타구(朶口살받이)가 있는 구조물)이 있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옹성의 축조는 성벽과 일체식으로 하였으나, 치성(雉城)의 축조는 성벽을 먼저 축성한 후 덧쌓는 방법으로 하였다. 치성은 동-남-서쪽 세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신흥리 방사탑(생이탑과 오다리탑)
조천읍 신흥리 포구와 그 일대에 세워진 방사탑이다. 제주도지정 민속자료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술년(1898) 봄 1월에 동네 원로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동네는 북방이 크게 허하니 탑을 쌓아 살(煞)을 막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니, 온동네가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각처에 탑을 쌓으니 섬여답(剡嶼塔), 큰개답(大浦塔), 큰성창답(大城昌塔), 답알답(塔?塔)이 이것이다.(북제주문화원, 신흥리지 104쪽) 신흥리 바닷가의 조간대(朝間帶) 원담을 조금 넘어서면 마을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새벡개라 부르는 한적한 바닷가에 오다리탑(또는 새벡개탑)이 서 있다. 궂은 것(厄)이 들어오는 길목이라서 이를 막기 위한 방사탑을 세운 것이다. 현무암 잡석을 대강 다듬어 원뿔대 형태로 쌓았다. 층이 없는 허튼층쌓기로 직벽을 이룬다. 높이는 2.4m, 너비는 3.4m정도가 된다. 탑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탑 위에는 길쭉한 돌을 곧게 세웠다. 새를 뜻하는 것이나 이것 때문에 '양(陽=男)'이라고 한다. 듬직한 남자를 표현하려 위아래를 넓게 한 것이다. 음(陰=女)을 상징하는 생이탑(큰개탑)은 신흥포구(큰개) 방파제 끝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낮으막한 탑이 물 속에 잠길듯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밑은 비교적 큰 돌이며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자연스러운 허튼쌓기로 쌓아올렸고, 맨 위는 오목하게 패여 있다. 바닷새가 잘 앉아 쉰다고 하여 생이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두 기의 돌탑은 북쪽에서 비추는 새(邪, 厄)를 막기 위하여, 또는 殺氣를 제하기 위하여 쌓은 것인데 신흥리 설촌이 200여년쯤 전(조선 순조원년;1801)의 일이고 분향이 80년이고 보면, 축조된 것이 100여년 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탑들은 태풍이 불어 큰 파도가 탑을 덮쳐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한다. 큰 돌로 밑을 쌓고 작은 돌로는 위에 쌓으면서 끼움돌을 적게 써 정성들여 축조한 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주요 요인인 것 같다.(제민일보. 4328.5.3."제주도의 석조물") 원래 이 마을에는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5개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도에 무너져 없어져 버린 후에는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고 특히 언청이로 태어나는 아기가 많았기 때문에 탑을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2001년 8월 5일 신흥리 거주 김민복씨와 대화) 세 개의 탑은 모두 2000년에 복원했는데 먼저 있었던 탑보다 더 큰 돌들을 이용했으며 규모도 더 크지만 쌓은 방법은 자연스러운 허튼층쌓기로서 전과 같다. 방사탑들은 대체로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자리잡았다. 기존의 큰개 탑과 세벡개 탑을 남-북으로 하여 그 중간에 중앙 탑을 세우고 중앙 탑의 동쪽으로 하나, 서쪽으로 하나를 일직선이 되게 탑을 쌓았다. 중앙 탑과 서쪽 탑은 큰개 탑처럼 약간 물에 잠겨 있고, 동쪽 탑은 바닷가 동산 위에 있다. 새로 쌓은 탑에는 모두 길쭉한 돌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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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섬지기꽃 원문보기 글쓴이: 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