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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정득도 원문보기 글쓴이: 하회탈
[한국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 항일의병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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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미 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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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가 섬 오랑캐의 해를 입었으니 하늘과 땅이 바뀌었고,
성상이 단발의 욕을 받았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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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친일 내각에 의해 간행된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민족적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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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을 일으킨 유생들은 단발령으로 상징되는 개화사상이 서양 세력과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 나라의 전통 유교 윤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전통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반침략·반개화를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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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한 보수적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농민들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에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전국 각지로 군사 활동을 확대하여, 충주를 비롯한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고, 친일 관리와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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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단발령이 취소되고, 고종이 의병 해산 권고 조직을 내리자 대부분 종식되었다. 그러나 을미의병의 하부조직을 이루었던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들에게는 이 항쟁이 반침략·반봉건 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의병의 해산 후에도 활빈당 등으로 변신하여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큰 위기를 맞게 되자 다시 을사·병오 의병이 일어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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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 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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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에 의해 한일 의정서·한일협약 등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준식민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게 되어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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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이상설, 안병찬 등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였고, 민영환 등은 외교권 상실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함으로써 을사조약에 항거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 처단 운동에 나섰으며, 장지연은 격렬한 항일 언론운동을 펴서 일제를 규탄하고 민족적 항쟁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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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봉기한 의병들은 조약의 폐기와 친일 내각의 타도를 내세우고, 일본에 빼앗긴 외교권 등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격렬한 무장 항전을 벌였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때 봉기하였던 의병장들이 다시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당시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생들도 참여하였다. 지역적으로는 강원, 경기, 충남, 경북, 전라고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당수의 포수와 포군 등이 가세하고 전투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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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은 을사조약이 발표된 뒤에 관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맞섰다. 최익현은 의병을 이끌고 순창에 입성하여 관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못하겠다고 하여 싸움을 중단하고 포로가 되어 쓰시마 섬에 끌려가 순절하였다. 최익현은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영해에 입성하여 관군의 무기를 탈취한 후 평해, 울진 등지에서활동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규율이 엄하고 유격 전술이 뛰어나서 많은 전적을 올렸으며, 의병의 수가 한때는 3천 명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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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의 의병장은 대체로 유생들이었는데, 이때부터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동이 두드러져 의병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됨에 따라, 일본 세력과 의병의 직접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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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미 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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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한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강제 퇴위되고 군대 해산 조치로 해산된 군인들이 합세함으로써 의병 운동은 규모와 성격 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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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발점으로 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던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부대는 군대와 같은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화력도 강화되었다. 이로써 의병 투쟁은 전 계층이 참여하는 본격적인 항일 구국 전쟁으로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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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 · 을사 의병은 주로 경기 이남 지역에서 활발한 양상을 보였으나, 이 시기의 의병조직과 활동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와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 항쟁의 범위가 널리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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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유생 출신 의병장을 중심으로 전국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결성되었다.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1만여 명의 의병은 이 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탈환을 위해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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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편성과정에서 신 돌석, 홍 범도 등 평민 출신 의병장들은 신분이 낮다고 하여 제외되었다. 이는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봉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 것으로, 13도 창의군이 폭넓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평민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제외한 채 양반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서울 진공 작전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에 비해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주로 유격 전술을 펼치며 일제에게 타격을 가하였는데, 특히 호남 지역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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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이 계속되자 일제는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의병이라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진행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만 의병장 100여 명, 의병 4000여 명이 붙들리거나 학살당하였다.
일제의 공세가 거세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차츰 위축되었고 규모도 작아졌다. 그러나 의병들의 항전은 1910년대 중반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많은 의병 부대가 간도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재편성되어 치열한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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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운동이란 일본에 대항하는 의병운동입니다. 의병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국민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일으킨 군사를 말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우리를 침략하려는 일본에 맞서서 일으킨 것이 항일의병운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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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운동을 구체적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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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1895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을미의병). 을미의병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이 때의 의병들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인석과 이소응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 농민들까지 그 구성이 다양하였죠.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습니다. 이후 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을사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을사의병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나왔다는데 그 특징이 있을 것이며 을사조약의 파기과 친일 정부 관료들의 축출을 주장하였죠. 을미의병에 비해 더욱 거센 의병이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년 후인 1907년 마지막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합니다.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죠.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거대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해 을미, 을사,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는 의병운동은 1910년 8월 29일 국치일 이후 항일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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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의병(1895년) ◀ 항읠 의병 운동의 시작
│ +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단발령의 반포
+ 이소응+허위+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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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을사의병(1905년) ◀ 의병 운동의 격화
│ + 을사조약 체결 → 외교권 박탈+통감 통치의 실시
│ + 최익현(태인, 순창) → 대마도에서 순국
│ + 민종식(홍주성 점령+관리출신)
│ + 신돌석(평해) → 평민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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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미의병(1907년) ◀ 의병 전쟁으로 확대
│ + 고종 강제 퇴위+군대 해산+차관 통치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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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산 군인의 합류 → 의병 전쟁으로 발달
│ + 이인영+허위의 서울 진공 작전(1908)
│ +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위축(1909) → 만주 및 연해주로 이주 → 독립 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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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의군부의 조직과 활동
대한 광복회의 활동
기타 항일 결사 단체
연해주에서의 독립 운동
대한 광복군 정부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
중국 본토에서의 독립 운동
미주에서의 독립 운동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독립 운동
이들 비밀 결사 조직들은 훗날 3.1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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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국내 무장 항일 투쟁
2.8 독립 선언
연합전선의 구축
해외에서의 만세 운동(만주, 연해주,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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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각 분야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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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한인애국단
노인단
그 외 소수 열사들의 의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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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인 무장 투쟁으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독립군
한,중 연합군의 활동
민족 연합 전선의 형성 노력
연합군과의 연합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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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에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을미의병(1895년)인데요 그 원인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입니다
을미의병의 주도세력은 보수적 유생층으로 봉건주의 사상이 강합니다
이 을미의병은 고종황제의 '아관파천(1896.2~1897.2)' 이후 친러파에 의해 친일파였던
김홍집내각이 실권하고 그에 따라 단발령이 철회됩니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자 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유생 의병장들은 스스로 해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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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1905년)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국권을 침탈하고
을사조약이 1905년에 체결이 되자 각지에서 조약체결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민영환 같은 사람은 조약의 부당함을 외치면서 자결을 하게 됩니다
이 을사조약의 가장 포인트는 외교권 박탈에 있습니다 이 외교권 박탈때문에 차후
고종황제의 헤이그특사 파견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고 그걸 빌미로 나중에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퇴위까지 됩니다
이 을사조약 체결당시 조약 문서에 서명했던 대신들을 을사5적 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을사5적 암살단이 결성되기도 합니다
을사의병에서 중요한 것은 유생들이 차지했던 의병장의 자리에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인물이 '신돌석'입니다
이러한 평민의병장이 등장하자 유생의병장들은 신분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평민의병장들을 무시하고 함께하지 않는 사상적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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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의병전쟁이라 불리는 정미의병(1907년)은 그 원인이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진위대-대한 제국의 지방군대)이 원인이 되어 발생합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활동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은 조직력과 전투력이 이전 의병들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 정미의병때는 평민의병장들이 다수 등장을 하게 되고 오히려 유생의병장의 수를 능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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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많은 의병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이란 이름으로 연합부대를 창설하게 되고
이들은 1908년에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연합부대에는 양반 의병장들의 반대로 일본군을 무섭게 만들었던 평민 의병 부대를 제외시키는 모습을 보여 유생 의병장들의 한계를 또 한번 드러내게 됩니다
13도 창의군은 진공 개시를 얼마 남기지 않고 총대장이었던 '이인영'이 부친상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이후에는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 의병부대들의 활약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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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애국 계몽 운동은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독립협회를 세웠던 인물들이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당장의 의병투쟁보다는 실력을 쌓아서 차후에 기회를 도모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애국계몽운동의 주도세력은 서울과 지방의 지식인들, 관료, 개혁적 유학자들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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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을 실시한 단체로는 보안회,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있습니다
1904년에 결성된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면서 끝까지 그 주장을 펼쳐 마침내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을 저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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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연구회(1905년)는 입헌 군주제를 통한 민권확대를 주장하는 등의 정치 운동을 펼치지만 을사조약 이후 정치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대한 자강회라는 이름으로 재편됩니다
대한 자강회는 정치 운동보다는 문화,교육활동 등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려 애썼는데 월보를 간행하거나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민중계몽활동을 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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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한 자강회는 일제의 신문지법, 보안법 등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대한 협회로 다시 재조직되는 데 이 대한 협회는 친일적 색채가 뚜렷해서 1910년 한일 병합 당시에는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그 공로를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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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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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정부의 부름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무장한 의병이 일제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한 민족운동.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그리고 청,일전쟁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191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일제하 만주, 연해주일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는 등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인적, 정신적인 연원이 되었다. 이는 한국민족운동의 주조(主潮)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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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의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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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배경]
갑오개혁, 을미사변과 이후 단행된 변복령, 단발령 등은 의병운동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였다. 을미사변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솟구치게 하였다. 의복제도를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 반포를 심각한 문화적 위기로 인식하였다.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국민의 울분을 자아내는 등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혼란을 야기 시켰다. 사상적 배경은 유생들의 중심 이념체계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일반민에 퍼져 있던 척왜양창의론(斥倭洋倡義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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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과정]
전기의병은 1894년 7월 서상철(徐相轍)이 안동향교에서 거의한 안동의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갑오변란 직후 이미 지평의 안승우(安承禹), 홍주의 안창식(安昌植), 철원의 홍범도(洪範圖) 등은 모병 단계에서 끝났지만, 안동의병과 김원교(金元喬)의 상원의병은 의병을 모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9월 18일 문석봉(文錫鳳)이 유성에서 봉기한 유성의병은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시작되었다. 문석봉 외에 을미사변 직후의 의병으로는 강계의병이 있다. 광무황제의 단발소식과 단발강요는 전국적인 의병봉기는 이천,춘천,제천,홍주,강릉,진주,장성,나주 등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제천의병은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이 포군장 김백선(金伯先)을 비롯한 포수 400여 명을 주병력으로 하여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원주관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김백선의 처형사건이 발생하고 제천 남산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한 후 서행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896년 10월경을 기하여 전기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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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포로가 된 의병 아래 - 교수형을 당하는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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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의병은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등 일련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1907년 정미의병 이전까지 전개되었다. 중기의병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경기, 강원도의 원용팔(元容八), 정운경(鄭雲慶) 의병부대,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의병과 영천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의병, 전라도의 최익현(崔益鉉), 고광순(高光洵)의병, 양서지역의 우동선, 전덕원 의병 등이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이밖에 김하규(삼척), 박장호(홍천), 최도환(양구),이범주(양평,여주), 박석여(죽산,안성)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 대표적인 의병진은 홍주의병, 산남의진 등이었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던 지역성, 학통성, 혈연성 등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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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1907 의병 진압과 의병포로 신문기사 아래 - 광화문의 의병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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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병은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통감부의 간섭을 강화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일제가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시키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후기의병은 유생을 비롯하여 해산된 군인들과 평민, 천민, 상인, 농민 등 다양한 전계층이 동참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군인출신의 의병 가담은 부대 편성과 전략에 큰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 원주진위대와 강화진위대의 해산군인들도 의병에 합류하거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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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병은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와 활동면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었다. 1908년 초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규모와 활동에서 이전 의병전쟁과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야욕이 분명해짐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전 민중이 의병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대 초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국망 이후에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일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함으로써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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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되는 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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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의병전쟁은 1894년 갑오의병이 봉기한 이래로 1910년대 초까지 지속된 반제국주의 성격을 보여준다. 의병전쟁은 일제 군사력과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상태에서 투쟁함으로써 비록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전민족적 항일세력을 형성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등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저항정신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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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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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의병 분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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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세계 각국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기들의 부를 위해 세계 각지의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식민지화 하기에 급급했다. 내부적으로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고 자생적인 발전의 길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으로도 열강들의 관심이 쏠렸고 이는 곧 민족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흥 열강으로 거듭난 일본에선 한국을 치자는 정한론이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무능한 조선 정부는 동학혁명의 진압을 일본과 청에게 부탁하게 되고, 이로써 본격적인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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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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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피해-나라가 타국의 전쟁터로 전락하면서 무고한 인명이 전쟁의 와중에 희생되었다. |
1894년 5월, 조선의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당의 난(일본측 명칭)이 일어나자 진압 능력이 없었던 조선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이에 천진조약(갑신정변 후 청일 양국은 조선 출병시 상대국에게 통보하기로 함)의 규정에 따라 일본은 6월 2일 공사관과 영사관 및 거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청나라 군대보다 4배에 가까운 병력을 재빠르게 파병해서 기회에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어 곧 양국의 무력충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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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일본의 압도적 우위로 진행되서 약 9개월만에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다. 청나라는 패배의 대가로 대만과 평후제도 , 일본에게 랴오뚱 반도의 할양과 2억 냥의 배상금 지불, 청국 본토에 대한 최혜국 조약의 약속, 조선의 완전 독립의 승인을 해야했다. 그러나 조약 6일 후인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이 이루어져, 일본은 대상금 삼천 만냥과의 상환 조건으로 랴오뚱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조약에 의해 얻은 전승국으로서의 이익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국력이 성장한 일본은 만주와 조선에서 남진해오던 러시아와 충돌하였고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러일전쟁 역시 막을 내린다. 이로써 만주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제어할 다른 세력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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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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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내 목을 자를 지언정 머리는 자를지 못할 것이다" 구한말 유림 의병장의 대표적인물 |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親露)책과 정면충돌을 하였고, 명성황후의 이러한 친로(親露)책은 일본을 자극하여, 결국 1895년 4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마저 비단이불에 싸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버렸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하고 전국적인 항일의병활동의 시작이 된다. 을미의병은 주로 경기·충청·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일어나 남으로 경상도, 북으로 함경도 지방까지 퍼져 나갔으며. 지방의 존경받는 유학자를 의병장으로 하여 친일부역자를 응징·처단하고 진압에 나선 관군이나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며, 일본군의 군용시설과 주둔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이천(利川)과 여주(驪州)의 박준영(朴準英)·김하락(金河洛), 춘천(春川)의 이소응(李昭應), 강릉(江陵)의 민용호(閔龍鎬), 제천(堤川)의 유인석(柳麟錫)·이춘영(李春永), 홍주(洪州)의 김복한(金福漢)·이설, 문경(聞慶)의 이강년, 안동(安東)의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진주(晉州)의 노응규(盧應奎), 김천(金泉)과 성주(星州)의 허위(許蔿), 장성(長城)의 기우만(奇宇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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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친일정부는 서울의 수비부대를 출동시켜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진압,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친러파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 친러내각을 수립하였는데,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 적체된 각종 공세(貢稅)의 탕감 등 조처를 시행하여 의병 봉기의 명분을 없애고 의병의 해산을 회유하였다. 그 결과 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을미의병은 유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척화론(斥邪衛正論)과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에 입각하여 일정한 한계성을 지녔으나, 조선 말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최초의 본격적 항일의병운동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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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차 의병전쟁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고 집단시위와 철시가 행해졌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이상철 등 정부 관료들이 목숨을 끊음으로서 국민들을 봉기하도록 자극하였고 국민들 스스로도 의병단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친일파 인사들을 응징하였다.의병 활동은 삼남 지방에서 특히 치열하였으며 그 지도자는 유교를 숭상하는 유생들 출신이 많았다. 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제2차 의병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할 때에 일어났다. 즉, 1905년 9월 러일간의 휴전이 성립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역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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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복장의 의병들-당시 의병들의 구성과 무장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사진이다. |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일어난 의병의 중심 세력은 지방의 가난한 유생(寒士)들과 포군(砲軍), 그리고 빈농(破落戶)들이었으며, 평균 40∼5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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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봉기한 주요 의병장들을 보면, 원주의 원용팔(元容八),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이하현(李夏玄)·정환직(鄭換直)·정용기(鄭傭其)·최성집(崔聖執)·신돌석(申乭錫)·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백낙구(白樂九)·양한규(梁漢奎)·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그리고 충청북도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생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영천의 정환직, 태인의 최익현(崔益鉉) 등이다. 1906년 5월 충청남도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월 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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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 남북이 상응하여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자진 해산한 최익현은 관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에 압송된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하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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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의병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부대는 영해의 신돌석 부대였다. 그는 제1차 의병 때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상민 출신으로서 활빈당이나 농민을 규합하여 을사의병 중에 유일하게 농민의병부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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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여름에 이르자 의병전쟁은 전국에 확산되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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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항전은 먼저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강화 등 지방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홍주 진위대는 집단 탈영을 했고, 진주 진위대도 봉기 계획을 짰다. 이들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원주 진위대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에서 활약했고 서울진격작전의 주축을 이루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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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경기도에서 일어난 의병도 곧 나머지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농촌이 의병 천하로 되었다. 또 각처에서 일본인이 살해되고 군아(郡衙)·면사무소·경찰분파소·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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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놀란 일본군이 의병 토벌에 나서자 민중은 문자 그대로 선전(宣戰)없는 한일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함흥에 북부수비관구, 대구에 남부수비관구를 두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 해산에 대비하여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했고,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본국의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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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위연대 1대대장 박승환. 군대해산명령에 대한 그의 자결은 군인들의 항일전쟁 참여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
일본군은 의병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방화·살인·강간을 자행하였다. 이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의병들은 마침내 전국 의병군 13도창의군을 경기도 양주에 집결시켜 서울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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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음력 정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군은 모두 1만명에 달하였다. 그 중 민긍호 휘하의 강원도 의병이 8,000명에 이르렀다. 창의대장 이인영(李鱗榮), 군사장(軍師將) 허위, 그리고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의 이강년, 관동의 민긍호, 교남(嶠南)의 신돌석, 관서의 방인관(方仁寬), 관북의 정봉준(鄭鳳俊), 관동의 허위 등이 중요 진영 및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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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임을 선언하고 진보와 인간성의 적인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군사장 허위의 작전 계획에 따르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하여 각 군이 분산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서 집결, 성내로 진격하여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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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일부 의병군은 세검정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는 의병의 선봉 부대를 습격하였다. 동대문 밖의 혈전으로 인하여 서울 점령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열약한 무기로 수도 탈환까지 계획한 의병의 대작전은 경탄할만한 일이었으며,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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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1909년 5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일제는 전쟁을 하루속히 종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같은해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이듬해 봄 황해도와 강원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수색 작전으로 잔인무도한 살육작전을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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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5월 목포 일본인상업회의소가 통감부에 호소한 바에 따르면, 전라남도 각지의 의병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은 10리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병의 험악의 정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배가되어 생명·재산의 피해가 수백건에 이르고, 교통은 두절되고 농사와 상업이 위축되어 직접·간접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같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하여 일본군이 대공세를 취한 것이 남한대토벌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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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은 전라남도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 포위하여 동남으로 그물질하여 빗질하듯 좁혀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모두 한복으로 변장했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반자는 가차없이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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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도살 작전에서 심남일(沈南一) 등 의병장이 사살당하고 박도경(朴道京)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의병 주력 부대가 섬멸되다시피 하였다. 이어 전개된 강원·황해도 대토벌로 이 지역의 주요 의병 부대를 패배시킨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완전히 정복에 의한 병합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항일항쟁은 국내에서도 그리고 만주일대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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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자 매켄지( Frederic Arthur Mckenzie)의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Korea's Fight for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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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과 당시 사용하던 다양한 무기 |
나는 그들이 휴대하고 있는 총을 살펴보았다.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나는 의병들의 조직을 물어 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사실상 아무런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들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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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5, 6명의 의병들이 뜰로 들어섰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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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최근에 전쟁을 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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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소.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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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군요. 두 배 이상의 전과를 올렸는데 왜 쫒겨 다니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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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무기가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정규군이오. 우리 의병 2백명이 일본군 40명에게 공격 당해 패배한 적도 있을 정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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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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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될 것이요. 그러나 어찌 되든 좋소!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오. 헌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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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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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결정적으로 무기가 없소. 총은 낡아 쓸모가 없고 화약도 거의 떨어졌소. 당신은 원하면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시오. 돈은 5천 달러건 만 달러건 요구하는 대로 드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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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나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종군기자로서 어느 한 쪽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기자 윤리상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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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인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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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전쟁
항일 의병은 1895년 명성 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처음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 ․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농민들의 생활은 몹시 피폐해져 반일 감정이 매우 높아졌다. 위정 척사 운동을 펴던 유생층은 왕에게 상소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없을뿐더러 일본의 압력으로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무장 투쟁을 통해 왕을 지키고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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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9월 중순경 충청도 희덕 ․ 유성 등지에서 문석봉이 의병을 이르킨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 1월부터 본격적인 의병 항쟁이 일어나 2월 상순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경기도의 김하락, 강원도의 이소응과 민용호, 충청도 홍주의 김복한 ․ 이설과 제천의 유인석, 경상도 상청의 곽종석과 김천의 허위, 전라도 나주의 기우만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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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은 대개 지방의 유생들이 주도하여 갑오개혁의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 ․ 군수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단하거나 문책하면서 그들을 진압하려는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아울러 전선 ․ 철도 등 일본군의 군용 시설을 파괴하거나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러 정권의 단발령 철회와 친일 요인의 단죄, 미납 조세의 탕감조치,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 발표 등으로 명분을 잃은 의병은 대부분 자진 해산 하였다. 이때 정부의 회유 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의 부대는 만주 지방으로 이동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을미의병은 비록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적이며 위정 척사론적인 사상적 한계성을 탕피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에 들어서서 일어난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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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고종의 재가도 없이 이를 선포하자 의병들은 다시 봉기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폐기와 을사 5적의 처벌을 요구 하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에 이르러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 ․ 일 신협약(정미 7조약)의 체결,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서울의 시위대, 원주 진위대, 강화 분견대 등의 해산당한 군대가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화력이 강화되고, 전술의 완성도도 높아져 의병 전쟁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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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는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 전라도의 기삼연 ․ 전해산 ․김태원 ․ 문태수 ․이석용 등, 충청도의 김동신, 황해도의 박정빈 ․ 이진룡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경기 ․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한 김수민, 함경도 ․ 평안도 지역의 채응언 ․홍범도 ․ 최재형 등과 신돌석처럼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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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1908년 초 유생 출신 의병장들은 전국 의병의 연합에 의한 서울 진공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여러 의병들은 각기 분산하여 독자적인 항일전을 수행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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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항쟁이 격화되어가자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 이라는 야만적인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 활동 지역 안의 촌락들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함으로써 의병 전쟁의 근원을 봉쇄하려 하였다. 이결과 의병 활동은 1909년 후반기부터 점차 그 기세가 꺾여 국내에서는 1915년 경을 기점으로 소멸되었고, 활동 무대를 해외로 옮겨 독립군으로 발전하여 일제와 활발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정미의병은 양반 유생 이외에도 해산 군인 ․ 평민 ․ 천민 의병장이 등장하게 되었고,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전면 항일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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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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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항일의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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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사조약 전후의 의병항쟁. 1905. 다 469
2) 군대해산후의 의병항쟁(1907~1910)
다 474
국내: 독립의군부(임병찬), 홍범도
독립의군부 :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은 의병장 임병찬이 1912년에 조직.
안중근의 이등박문 살상(1909)
기타.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슨을 살해 (1908), 이재명은 이완용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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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구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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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국계몽운동의 두흐름; 독립보다 실력양성을 앞세우는 부류, 실력양성보다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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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사회단체의 활동.
( ᄉ) 송수만, 원세성등이 조직. 보안회(1904) - 러일전쟁 진행중, 일제가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맺고,이어 영토 약탈을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조직
( ᄋ ) 헌정연구회: 윤 효정, 이준,양한묵등이 만든 정치적 계몽단체로 일진회와 대항하면서 민중의 계몽과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노력하였다.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
( ᄌ ) 대한 자강회: 윤효정, 장지연, 윤치호등이 조직, 일진회와 대결, 이완용, 송병준에 의하여 해산하였으나 다시 대한 협회로 개칭발전
( ᄎ ) 천도교의 오세창,권동진등 대한협회
( ᄒ )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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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안회(1904) - 러일전쟁 진행중, 일제가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맺고,이어 영토 약탈을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가, 송세만, 원세성등이 조직.
(2) 공진회 (1904) - 1898년 독립협회주최의 만민공동회에 테러행위를 했던 보부상들이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명회공진회)를 조직. 황민의 권위, 국미의 권리와 의무를 잘수행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 대표- 나 용석
(3) 헌정연구회: 윤 효정등이 만든 정치적 계몽단체로 일진회와 대항하면서 민중의 계몽과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노력하였다. 대한 자강회
(4) 대한 자강회: 윤효정, 장지연, 윤치호등이 조직, 일진회와 대결, 이완용, 송병준에 의하여 해산
(5) 대한협회; 천도교의 오세창, 권동진등이 합세하여 결성 1907.11.
3) 언론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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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 서양의 진보한 문물 소개, 국채보상운동, 문명지식 계발, 강력한 항일 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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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483. 종교 운동의 변화
천주교 선교의 자유 획득(1886),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 (교육과 언론)
개신교 근대 교육과 서양 의술의 보급 (장로교 - 알렌, 언더우드, 감리교 - 아펜젤러)
동학 천도교로 개명 (손병희) 이용구등 친일파 일진회를 조직하여 흡수하려함. 만세보 간행
유교 박은식의 유교 구신()론 (1909) 주장: 구태의연한 유교의 수구성을 타파하고 유교를 혁신하여 구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을 것과 그 방법으로서 국민적 자립및 부국강병을 위한 교육의 진흥을 제시한 것
불교 억불책에서 풀림 (1899), 한용운의 조선 불교 유신론 주장(1913): 미신적 요소의 배격과 불교 쇄신을 주장
대종교 나철(), 오기호 등이 단군 신앙을 발전, 간도연해주등의 해외 항일 운동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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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학운동과 신문학운동.
1. 국어 연구
문법 - 국한문 혼용 교과서의 간행 , 유길준 서유견문: 국한문체 보급에 공헌
주시경의 국어문법(1906), 유길준의 대한문전(1909)등
국문 연구소 (1907, 주시경, 지석영)의 설립
2. 신채호의 독사신론 저술 - 정신의 역사는 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정신의 국가를 만들리니,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요.
3. 서사건국전, 미국독립사, 의대리독립사, 이태리 건국삼걸전, 비사맥전,피득대제.
4. 문학 - 신소설, 신체시
5. 조선 광문회 (최남선, 박은식)의 고전 발굴연구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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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그 계기였다
단발령.
고1 국어시간에 배운 '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글의 서두에 나오는 인용문중에
'목은 잘라도 머리털은 못자른다' 라는 말을 남기신
최익현이 이 을미의병을 주도했다.
그 외에 신돌석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평민의병장이었다. 그러나 최고의 의병장이었으며
일본도 신돌석의 존재의 위협성이 날로 커지자 결국 현상금을 걸었다.
적은 가까이에 있다고 신돌석의 가까운 부하 한명이 그와 술을 마신후
그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그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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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눈이 멀어 이런 식으로 아까운 위인들을 살해하거나
역사를 망친 일이 이 외에도 꽤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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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년뒤 을사의병이 터졌다.
러.일 전쟁 후 체결된 을사조약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을사조약에 대한 항거는 의병활동 외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 을 지어 비판했고 민영환은 분을 못이겨 자결했다.
그러나 꼭 자결을 해야 했을까? 사실 죽는 것은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죽음으로써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항일 의병에라도 가담했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의 자결은 언뜻 보기엔
지조를 지킨 의로운 죽음으로 보이지만 내 생각엔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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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고종이 네덜란드에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파문이 일자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켰던 일이 그 이유였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얘기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그 당시 규모로는 꽤 많은 인원인 3만명 정도를 모은 유생 몇명이
의병 투쟁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 바로 하루 전
내일의 전투를 위해 계획을 검토하며 회의를 열던 유생들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유생들 중 한명이었던 이인영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 비보를 들은 이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의 동료들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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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자네 지금 어디가는 겐가? "
" 아버님의 상을 치르러 가네. "
" 아니, 그래도 바로 내일이 전투날인데......"
" 모름지기 효는 모든것의 근본이지 않은가. 충 또한 효가 그 근본이니
나는 효를 행하러 가네. "
" 그럼..... 언제 올겐가? "
" 진정한 효를 행하기 위해선 부모의 묘소를 지키며 3년상을 치뤄야 하지 않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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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그는 자리를 뜨고 이에따라 나머지 사람들도
그럼 나도 갈래 라는 식으로 헤어졌고 대규모의 3만명 병력도 뿔뿔히 흩어졌다.
신돌석 장군이 그 3만의 의병을 지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평민이래서
반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역시 이래서 안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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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울분>
매국노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였는데, 그 딸이 시집갈 때 하녀 하나를 데리고 갔다.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오며 숨이 차서 땀을 흘리며 부인을 대하였다. 그는 늑약(肋約, =을사조약)을 맺은 일을 말하며 “내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하니, 하녀가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오면서 소리쳐 말하기를 “이근택아! 네 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가 어떤 것인데 나라가 위태함에 능히 죽지 않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기로서니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 도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하고다시한규설의 집으로 도망쳐 왔다. <황현,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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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의식에 앞선 신분 의식>
을미의병 운동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탄압을 받아 실패했지만, 양반 유생에게 뿌리박혀 있던 봉건사상이 갖는 한계도 크게 작용하였다. 유생들이 내건 반개화·반외세 운동은 갑오정권과 일제 침략에 분개하고 있던 민중에게 한때 반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투쟁 과정에서 드러난 유생들의 사상적 한계는 민중을 의병 항쟁의 주체로 묶어 세울 수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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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많은 의병장들은 농민 전쟁이 끝나갈 무렵 ‘수성군’이나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는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실제 큰 힘이 될 수 있었던 농민군을 ‘동비’라 하여 물리쳤다. 또, 기우만 등 많은 유생 의병 부대가 고종의 해산 명령에, “왕의 군대가 도착하였으니 성을 지키고 저항함은 이들을 맞이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스스로 해산하였듯이 이른바 ‘근왕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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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유생들은 적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도 낡은 신분 의식을 내세워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을미의병 대 중심적인 역할을 한 유인석은 여러 번 승전을 거둔 포수 출신 선봉장 김백선을 양반에게 버릇없이 굴었다 하여 처형해 버렸다. 유생 의병 부대 안에 깊이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관은 그만큼 의병 부대의 결속력을 떨어뜨렸다. 또,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대개 총포를 가진 포수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거나 자신들의 소작인 머슴 등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실질적인 전투력이던 포수들은 김백선이 처형된 뒤 밤을 틈타 부대에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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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에 얽매인 지방의 유생들이 개화파의 부르주아적 개혁으로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고자 반개화·반일의 기치를 든 정치 운동이었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는 이 운동은 봉건 모순 관계를 부정하는 민중의 변혁 열망을 담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운동은 민족사에서 요구되던 근대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지닌, 양반 유생들의 반일·반근대화 운동이었다. <강좌 한국 근현대사>, 역사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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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03. 구국 민족 운동의 전개
3)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①을미의병 ~ 항일 의병 운동의 시작
㉠배경 : 을미사면과 단발령으로 봉기
㉡특징 : 보수적 양반 유생측이 주도 + 농민 +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
(이소응 / 유인석 / 민용호 / 허위 / 기우만...)
* 양반들과 농민들간의 갈등 有
㉢해산 :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 철회
고종의 해산 권고 → 자진해산
* 활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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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을사의병 ~ 의병 투쟁의 확대
㉠을사늑약(1905.11.17)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을사5조약)
* 을사늑약 반대 투쟁
~ 상소운동 / 5적 암살단 조직 / 항일 언론 활동
자결 / 외교고문 스티븐슨 사살
* 을사5적
~ 박제순(외부대신) / 이지용(내부)
이근태(군부) / 이완용(학부) / 권중현(농상)
㉡특징 : 1904년부터 곳곳에서 다시 의병 봉기
: 양반 유생(민종석 / 정용기 / 최익현)
+ 평민 의병장 등장(신돌석) + 무장 농민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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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정미의병 ~ 의병 전쟁으로 확대
㉠배경 : 고종의 강제 퇴위(1907.7)
군대해산(1907.8) → 박승환의 자결 → 서울 시위대 봉기 → 지방 진위대 동조
㉡특징 : 해산 군인 합류 → 사기, 전투력 향상
: 의병 부대의 전국적 확산 (연합 전선 형성)
: 여러 계층 참여
: 다수의 평민 의병장 -- 김수민 / 홍범도
㉢서울 진공 작전(1907.12)
: 13도 창의군 결성 (이인영 / 허위)
: 연합 의병 양주로 집결. 서울로 진격
→ 실패 (이인여의 낙향 + 허위 체포 + 반격)
→ 평민의병장 + 일부 유생층 소규모 유격 활동
* 평민 의병장의 부대는 제외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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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계속되는 의병 전쟁
㉠호남의병 →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진압(1909.9~10)
㉡의병 부대의 이동 : 만주(홍범도) / 연해주(이범윤)로
→ 독립 운동의 근거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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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의병 전쟁의 의의와 한계
-- 日 식민 정책에 타격 + 독립의지 표출 + 무장독립투쟁의 기반 마련
-- 조직력의 한계 + 유생 의병장의 봉건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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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의사와 열사들의 항일 ㅌ쟁
㉠장인환, 전명운 : 외교고문 스티븐슨 살해 (1908.3.28)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10.26)
㉢이재명 : 이완용 저격 시도
㉣나철·오기호 : 을사5적 암살단 조직
㉤의의 : 침략 원흉이나 매국노들 처단해 일본 침략 저지
: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림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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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의병 1895
① 계기 :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② 주도 세력 : 보수적 유생층이 주도(유인석, 이소응) 일반 농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 가담
③ 특징 : 위정 척사 사상 계승, 의병 투쟁의 시작
④ 해산 : 아관파천 후 단발령 철회와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으로 대부분 해산
계속된 농민의 투쟁 : 의병 해산 이후에도 농민층은 활빈당, 영학당 등의 농민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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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을사ㆍ병오의병 1905~1906
① 계기 : 러ㆍ일 전쟁 발발 후 일본의 침략 본격화 을사조약 체결
② 특징 :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 전개, 평민 의병장의 등장
③ 대표적 의병장 :
민종식 : 전직 관리, 충남 홍주성
최익현 : 유생, 전북 태인 순창 쓰시마에 유배, 순국 , 전라도 지역 의병 투쟁에 자극
신돌석 : 평민, 경북, 강원도의 관동 지방 일대(평해, 울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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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미 의병 1907
① 계기 :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
② 의병 전쟁으로 발전 : 해산 군대의 의병 가담으로 전투력 강화, 각계각층의 참여하여 전국으로 확산
③ 전개
서울 진공 작전(1908) : 이인영, 허위 등 유생 의병장의 주도로 13도 창의군 결성(경기도 양주 집결) 신돌석, 홍범도 등 평민 의병장은 제외 일본의 우세한 화력으로 실패
평민 의병장의 활약 : 유격 전술, 호남 일대에서 가장 활발
④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1909) 의병 투쟁 위축, 만주, 연해주로 이동하여 무장 독립군 편성, 국내에서는 1910년대 중반까지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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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병 전쟁의 의의와 한계
① 의의 : 일제 침략에 맞서 가장 적극적인 투쟁 전개, 민족의 강한 독립 정신 표출, 항일 무장 투쟁의 기반 형성
② 한계 : 봉건적 지배 질서를 고집하는 양반 유생층의 지도 노선으로 결속력 약화, 일본에 대한 무력적 열세 속에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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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의병 운동 이 시작되다.>
①을미 의병
- 을미 사변과 단발령 계기
- 유생 이소응이 의병 발기
②의병전쟁의 변모
- 위정 척사사상을 가진 유생이 앞장서고 반일 반침략 농민과 동학 농민군이 가담
- 유생 의병장과 달리 농민들은 반봉건을 지향했기에 많은 갈등 유발
- 고종의 단발령 철회와 의병 해산 명령으로 자체 해산
- 농민군 및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등은 활빈당과 같은 농민 조직을 만들어 반침략, 반봉건 투쟁을 계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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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붙은 의병 항쟁>
①후기 의병
- 을사 조약을 전후하여 재 봉기
- 1904년 서울 교외의 군인이 반일 의병 활동 시작
- 1905년 활빈당 및 농민 무장 세력이 활발히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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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을사의병
- 을사 조약 체결이후 민종식, 정용기. 최익현이 의병 봉기
- 전국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 운동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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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평민 의병장의 등장
- 동학 농민 운동과 활빈당등의 무장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소규모 부대로 일본군과 전투
- 신돌석 부대가 강원, 경상북도, 충청도 접경 지대와 동해안 일대를 누비며 많은 전과를 거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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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후기 의병 전쟁의 특징
- 참여 계층의 확대와 전술의 변화로 침략 항쟁의 성격을 강하게 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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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확대된 의병 전쟁>
①정미 의병
-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기 맞이
-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
- 박승환(시위 제 1연대 제 1대대장)의 자결 후 서울 시위대가 봉기
- 지방 진위대가 동조
---의병 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어 의병 항쟁이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을 띠면서 전국적으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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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의병 부대의 구성
- 유생, 농민, 해산 군인 뿐 아니라 노동자, 소상인, 지식인, 승려, 화적등 여러 계층의 참여
- 다수의 의병장이 양반 대신 평민이 차지 ( 김수민, 홍범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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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13도 연합 의병의 결성
-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양반 유생 의병장인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결성
- 양주에서 집결한 연합 의병은 서울을 탈환하여 일제와 담판하기 위해 서울 진공 작전 시도
- 서울 진공 작전 실패, 유생 의병장은 의병 대열에서 이탈
- 평민 의병장과 일부 혁신 유생들이 지역민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부대로 유격활동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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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유생이 하나가 된 호남 의병 전쟁>
①호남 의병의 활약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이후에도 강력한 저항 계속
- 일본군의 주력을 호남이라는 지역에 묶어두어 타 지역의 의병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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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남한 대토벌 작전
-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호남지역을 봉쇄한 뒤 반복해서 의병 부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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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새로운 독립 운동 기지의 마련
- 대한제국의 완전 병합이후 국내 의병 항쟁 어려워짐
- 대부분의 의병 부대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립 운동의 근거지 마련
- 만주에서는 홍범도, 연해주에서는 이범윤이 이끄는 독립군 세력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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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결과
- 치열한 의병항쟁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타격
- 을사 조약이후 완전 병합까지 약 5년간 걸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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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열사들의 항일 투쟁>
①스티븐스 암살사건
- 일본의 대한 제국 침탈 행위를 선전하는데 앞장선 스티븐스 살해
- 미국 유학중이던 장인환과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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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안중근의 의거
- 연해주에서 의병활동
-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 한국의 독립 주권과 동양 평화를 위해 처형했다고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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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이완용 저격사건
-이재명 열사의 활약
- 이완용 저격했으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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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을사 5적암살단 조직
-나철, 오기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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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의의
- 개인의 의해 산발적으로 일어나 조직적인 반일 항쟁으로 이어지지 못함
- 일제의 침략상을 국내외에 알리고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됨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당시 유림을 대표하던 면암 최익현이 이에 극력 반대하며 한 말이다. 이처럼 최익현은 대체로 개항·개화·개혁을 반대하고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려 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척사운동이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을 수행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반외세적 자주운동이었다는 측면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기울어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버팀목이자 거유(巨儒)였던 면암 선생의 혼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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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고종과도 맞선 대쪽 같은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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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1833~1907)은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1833년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고 골격이 평범하지 않았으며 눈에 광채가 서리는 등 ‘기이’한 점이 많아 어릴 때 기남(奇男)으로 불렸다고 한다. 4세 때 가세가 어렵게 되자 단양으로 이사하였고, 11세 때 양평으로 옮긴 후 인근에 사는 당대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면암이라는 호는 스승한테서 받은 것이다. 면암은 훗날 이항로의 신도비명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강수계(講修契)를 조직하여 스승을 선양하는 활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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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면암은 승문원부정자·지평·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장령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 동부승지를 지냈다. 신창현감으로 재직하던 때에는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졌으며,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는 흥선대원군에 맞서 당백전의 혁파와 원납전 및 문세(門稅) 징수 금지를 주장하는 등 대궐공사를 중지함으로써 백성을 구제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또한 1873년에는 상소를 올려 만동묘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를 단행하는 등의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제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대원군과 고종 사이를 이간했다는 대신들의 공격을 받아 3년간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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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면암은 도끼를 짊어진 채 광화문으로 달려가 조약 체결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일본과 통상을 맺으면 저들의 물건은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인 데 비해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이므로 얼마 안 가 지탱할 수 없으며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일본과 화친을 주장하며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을 가려내 죽일 것을 요구하며, 만일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자신이 들고 있는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고 강변한 이른바 ‘도끼상소’는 그의 죽음을 초월한 강직성과 투철한 애국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행히 사형은 면하였지만 임금을 속여 어지럽게 하고 감히 꾸짖었다는 죄목으로 조약이 반포되기도 전에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뒤에는 오랫동안 금강산, 마리산 등을 유람하는가 하면 학문적 동지를 방문하거나 편지로 교류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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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 발포를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은 유림들에게 영향력이 막강한 면암을 선유대원(宣諭大員)에 임명하여 의병들을 타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면암은 ‘차라리 임금의 명을 어기고 죄를 받을지언정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선포하여 많은 사람의 비웃음을 받을 수 없다’며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 후로도 궁내부특진관·의정부찬정·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직상소를 올려 오직 잘못된 정치를 시정하고 일본을 배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는 관직생활을 통하여 불의와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내 굴복하지 않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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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 그리고 이국 땅 대마도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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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17일(이하 양력) 일본과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이 4천년 강토와 5백년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국민을 노예로 만들었다’며 목 놓아 통곡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때 사실상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최익현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조약에 참여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함은 물론 황제로서 위엄을 떨치며 호령을 하지 못하였음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에 대해 ‘근심과 울분에 찬 그대의 정성으로 보아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다’고만 할 뿐이었다. 이에 면암은 을사늑약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떨쳐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팔도에 보내는 한편, 직접 적을 물리칠 것을 결심하고 의병을 일으키고자 전라도 태인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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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6월4일 면암은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과 동시에 일본 정부에는 그들의 죄악 16가지를 나열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국의 인민과 함께 끝까지 결사 항쟁하겠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또 창의격문(倡義檄文)을 각지로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밝히고, 우리의 종실·대신을 비롯하여 사농공상과 하인에 이르기까지 창과 칼로 역적의 무리를 없애고,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의 오랑캐를 섬멸하여 그 종자를 없애고 소굴을 파헤치자고 주장하였다. 최익현 의병진은 곧바로 정읍·순창·곡성 등으로 진출하여 군비를 마련하고 부대를 증강한 다음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 정부에서는 진위대를 출동시켜 의병을 해산조치하고 우두머리를 체포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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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순창을 포위해 오자 면암은, “왜군과는 결사항전하겠지만 차마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 하면서 해산을 명하고 스스로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면암은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하루는 간수가 그의 이름을 묻자 목침을 집어던지며 “내 이름을 알고 싶으면 이등(伊藤)이나 장곡천(長谷川)에게 물어보라. 하찮은 오랑캐가 어찌 감히 무례하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간수들이 자기네끼리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조선의 제1인’이라 하였을 정도로 면암은 추상같은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군율위반으로 금고 3년형을 받고 대마도로 이송된 뒤에는 굶어죽더라도 적국인 일본의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일본군 장교가 통역이 잘못되었다고 거듭 사과하고, 이어 다른 의병들이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자결할 필요가 없다고 간청한 후에야 다시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74세의 고령인데다 옥고가 겹쳐 급속도로 쇠약해지더니 병으로 악화되었다. 결국 면암은 대마도로 들어간 지 4개월 만인 1907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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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은 순국 직전에 남긴 마지막 상소에서, 자신의 나이가 74세이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처단하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환수하지 못하여 4천 년의 문명이 진흙 속에 빠지고 백성들이 물고기밥이 되는데 이를 구원하지 못하니 이 점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일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유학사’를 지은 현상윤은 면암의 마지막 상소를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글이라 평가하였고, 역사가이며 시인인 황현도 면암의 순국에 물고기·용·귀신까지 슬피 울고 조선 300군(郡)의 골목마다 통곡소리가 이어졌다고 읊으면서 충신의 넋은 지하에서도 변할 리 없을 것이라 칭송하였다. 면암의 유해는 1월4일 대마도를 떠나 그가 그토록 사랑한 조국으로 돌아왔으며, 말년을 보낸 충청도 정산에 안장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으며,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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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애국심은 민족운동의 지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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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포천시에서는 면암 선생의 순국 100주기를 맞아 기념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자 건립된 채산사(경기도기념물 제30호) 외에도 2007년에 선생의 생가 터를 알리는 비석을 세운 데 이어 기념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청성문화체육공원에는 근엄한 표정의 면암 동상이 조성되어 있는데, 동상 아래에 그가 남긴 시가 새겨져 있다. 보는 이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절로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치 스승 이항로한테서 배운 ‘어버이를 위하는 것처럼 임금을 사랑하고, 집을 돌보는 것과 같이 나라를 걱정하라(愛君如父 憂國如家)’는 가르침이 그대로 배어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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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에 맞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 수많은 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한 반면 친일 및 변절한 관료·지식인도 숱하게 나왔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면암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였다. 즉 초기에는 성리학적 의리를 바탕으로 한 위정척사 입장에서 배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직접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결국 그의 우국애민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때로는 극력상소로, 때로는 직접 총칼을 들고 국권 회복에 목숨을 바친 면암의 투철한 충성심이야말로 경기도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숭고한 민족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독도 관련 망언을 하는 등 여전히 과거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있는 일본의 행태를 바라보며, 한 세기 전 그들의 ‘버르장머리’를 호되게 꾸짖던 거인(巨人) 면암의 기개가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경기일보 2009년 1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