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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과 54년의 세월을 함께한
이종임 유성, 초, 중,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인터뷰
일 시: 2008년 10월 18일 오후 3시 반~5시 반
장 소: 유성 초, 중, 고등학교
정 리: 천성호((사)전국야학협의회 지도위원)
[이종임 교장 선생님 사진 ]
[유성 초, 중, 고등학교 교실]
이종임 유성 초, 중,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193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6.25가 나고 부산에서 1953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청소년을 교회에 모아 천막야학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1957년 경기도 양평에서 농촌야학을 운영하셨고, 1974년 서울에서 유성학교를 만들고 지금까지 무려 54년의 세월을 야학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서울 고덕동에 있는 유성 초, 중, 고등학교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하루 8시간이상 수업을 하고 계신 현직 교사입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야학을 가장 오랫동안 하고 계신 분 중에 한 분일 것입니다. 현재 유성학교는 아들 윤성필님이 이어받아 어머니와 함께 2대째 야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는 이종임 교장선생님께 야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청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순서대로 글을 정리를 했습니다. 읽다보면 야학을 인생의 업으로 삼아 오신 선생님의 삶, 희망, 고통, 기쁨 등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인터뷰의 형식을 취했지만, 한편의 민중구술사로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야학인 모두에게 좋은 배움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질 문: 전국야학협의회 천성호입니다. 선생님께서 야학을 반세기가 넘게 해 오신다는 것을 듣고, 선생님과 삶과 야학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야학을 언제 처음으로 하시게 되었습니까?
이종임: 부산에서 내가 19살 때 교회 천막 속에서 했어요. 그때 임시 수도가 부산이었으니까. 6.25가 난 후니까. 그래서 그곳에서 시작했어요. 19살인 내가 올해 칠십 넷이 되었으니까.
질 문: 선생님 원래 고향은 어디신가요?
이종임: 본래 선친들 고향은 경남 의령이고, 저는 경남 창녕군 남지면에서 태어났어요.
질 문: 유성학교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이종임: 처음에 내가 18살 때부터 기독교를 믿은 사람인데,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데, 구두닦이, 신문팔이... 거지들, 뭐, 이런 애들이 있어. 6.25가 난 후니까. 참 안타깝지 만은 딴 것 나눠 먹을 것이 없으니까. 글이라도 좀 몇 자 가르쳐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마침 교회가 천막 안에서 예배를 보다가 누가 지원을 해 줘서 좋은 건물로 이사를 갔어요. 그래서 천막을 뜯으려고 하는데, 내가 목사님보고, 천막 안 뜯으면 안 되냐고 했어요. “저 밑에 구두닦이 신문팔이가 많으니까 내가 글 좀 가르쳐주면 좋겠다.” 말씀드렸어요. 그때는 교회가 나가서 전도하기가 쉽지도 않았어요. 목사님께서 “그래 참 좋은 뜻이다” 했어요. 그래서 천막 속에서 밤에 불을 켜고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어요. 거기가 원래 부산대학교가 있었어요. 부산대학 학생들이 같이 와서 지원도 하고 했어요. 나도 그때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질 문: 선생님이 19살 때 야학을 하시게 된 해가 1953년도 인가요?
이종임: 예.. 그때가 1953년도 이지요.
질 문: 야학을 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이종임: 내가 어제도 선생들 모아놓고, 얘기를 했듯이 옛날에 우리가 초등학교 4년 과정을 일제식민지 아래서 공부를 했거든요. 근데 이 사람들이 입학을 시키고 공부를 하려고 할 때 의무교육 식으로 마구 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시험을 봤어요. 시험을 봐서 일본말을 좀 할 수 있고, 하는 애들을 뽑아서 딱 넣었어요. 그 사람들이 문화교육을 시켜서 동질화하려고 했지요. 조선말 하면 카드 빼고, 압박을 심하게 하고, 명찰 달 때도 일본어로 써야지 우리말로 쓰면 “누가 써 주었나?”하고 추궁을 하고 했어요. 일본말을 철저히 하라고 했어요. 조선말 못 하게 했어요. 근데 해방이 되었잖아요. 해방이 되니까 갑작스럽게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본에 강점을 당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일제시대 선생도, 교장도 나를 아주 예뻐했어요. 공부 잘하고 했으니까.
해방 된 후부터는 마음이 싹 바뀌더니 조국에 대한 사랑, 조국애가 생겼어요. 유관순, 윤봉길.. 이런 분들에 관해 소리는 없이 변사가 나오는 것이지만 영화가 나오고 하니까. 나도 유관순처럼 살아야 되겠다. 나라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어요. 이래 나라가 당하니까 나는 나라를 위해 살다가 죽겠다했지요. 마음이 그렇게 든거지요. 내가 15살인가 16살인가 먹을 때 1948년에 5.10 총선거를 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 그때도 벽보를 부치려 조그만 애가 다니고, 국회의원들 출마하고 하면 국회의원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정견 발표하는데 따라 다니고 했어요. 헌법이 만들어지고, 대통령이 서고했어요. 내가 아마 야학 길로 안 들어섰으면 정치를 했을 거예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도 하고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할 때는 체코, 폴란드 하는 중립국이 있었으니까. 중립국 감시에서 총선을 할 거냐. 아니면 남북한이 같이 할 거냐. UN 감시 하에서 할 거냐. 데모도 하고 다니고 했어요. 당시에 학생운동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그리고 6.25중에는 백낙중씨가 문교부 장관을 했으니까. 학생들 전체를 군대식으로 만들었어요. 대대, 연대, 중대, 소대.. 조회를 하고 나면 “제 1중대 앞으로 가, 제 2중대 앞으로 가 ”했어요. 군사훈련도 많이 받았어요.
6.25 났을 때 제3방위성이 김해 노(무현)대통령 고향인 진영인가 있고, 대산 중학교라는 데가 있는데.. 학생들이 모이자 해서 가 보니 학도 의용도가 만들어지고, 의용도가 나중 변해서 학도 호국단이 되고, 학생회 회장은 학도 호국단 대장이 되는 거죠. 학생들끼리 교류가 되고, 남학생 여학생 모여 자꾸 회의를 하고 많이 했어요. 그때는 소설도 “흙”(이광수), “상록수”(심훈), “영혼의 미소”하는 것들이 많이 나왔어요. 책을 탐독하니까 그때 학생들이 농촌 운동에 관심이 컸고, 우리가 15살 때부터 여름방학이 되면, 시골에 가서 공회당이 있으면 한글을 가르치고 농촌을 많이 다니고 했어요. 그때 학생들은 다는 아니지만, 꿈이 있었어요. 남학생, 여학생 교재를 해도 상록수 주인공 채영신, 박동혁처럼 뭔가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건전한 일을 하는 것에 우리들이 보탬이 되고 힘이 되자, 보람으로 살자고 했어요. 뭐, 지금 애들처럼 돈 갖고 이런 것 저런 것 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하는 시절이라. 그래서 부산이 수원지(水源池)가 있는데 그곳에서 처음에 야학을 하게 된 거죠.
세월이 흘러서 서울로 이사(1957)를 오게 되었죠. 용두동에 미도파 백화점이 있었는데, 그곳이 옛날에 성동역 자리라. 성동역이 경춘선 종점이 되어서 그곳에 나무이고 와서 팔고 많이 왔었어요. 그곳에 공부도 못하고 하는 애들이 구두통 메고 다니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막 다니고 했어요. 그곳에서 한 집에 사는 애들도 없이 살아서 공부를 못하고, 그래서 그곳에서 (애들 공부시키는 것) 좀 했죠. 맨 날 그런 애들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박 정권이 들어설 땐가 그때 우리 집에 빚쟁이가 무지 왔었어요. 빚 청산을 하고 해서.. 남의 돈을 빌려주었는데, 돈을 돌려받지 못하니까 돈 줄 사람이 과수원 문건을 주었단 말이죠. 과수원 문건이 만평이라. 그게 경기도 양평에 있었어요. 그래 내 남동생이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중앙대 문리과 학장인 백 철씨가 살아있을 때 남동생이 중앙대 철학과를 다녔다고.. 우리 남동생이 의식이 뚜렷한 청년이었어요. 그래서 농촌사업을 한다고 해서 양평으로 내려갔어요. 근데 남동생이 군대를 안가고 자꾸 밀어 놓다보니, 박정권이 들어서니까 군대 안간 사람들 다 자수하라고 했어요. 6월 29일까진가.. 그래서 7월 3일인가 군대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갔어요.
내가 (경기도 양평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보니까 몸뚱이만 가지고 안 되는 거야. 영농자금도 있어야 하고, 노동력도 있어야 되고.. 그때 여군 훈련소 학생대장을 하는 사람이 내 동기의 한 과 친구의 여동생 이였어. 그 언니를 만나로 갔다 나오는데 우리 양평에 살던 곳에 철길 밑에서 뭐 이상한 무당 굿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역 직원을 보고, “아,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했더니 서당에 글 읽는 소리래요. “이 밝은 세상에 서당에서 왜 글을 읽노”하니, “돈이 없으니 서당에서 글을 읽죠. 학교를 못 가니” 해요. 농촌이 하도 피폐하고, 가난했어요. 벽 바른 집도 없고.. 마루도 없고, 시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이발소도 없고.. 그래서 딱 느껴지는 게 우리 농촌이 이렇게 못 살고 하는 것은 무지에서 왔다. 무지하지 때문에 무지의 악순환이 된다. 공부를 가르쳐야 되겠다. 그래 밤에 이 동네, 저 동네 몇 군데 다니면서 “우리 과수원으로 애들 보내소. 돈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애들만 보내소!” 했어요. 그래 모았더니 애들이 14명이 되었어요. 한 열 동네에서.. 집에서 밥상 하나씩 들고 공부하려 왔잖아요. 1년을 하고나니까 공부를 낮에 가르쳐야 되는데, 낮에는 우리가 농사를 지어야 우리도 먹고 살지. 그래서 밤에 오라고 하니까, 옛날에는 승냥이라고 있었어요. 밤에 나와서 닭도 물어가고 했는데 학부형들이 “밤에는 애들 겁나서 못 보내니, 낮에 보내면 좋겠다.” 해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니, 학부형들이 와서 밭도 메주고 한대요. 그래서 그 애들을 가르치는데, 그 애들만 가르친 것은 아니지. 복숭아 이런 게 열리면 돌멩이를 훅 훅 던지고, 초등학교들이 기어 들어와 따 먹으라고.. 그래 하루는 내가 다 붙들어가지고 돌 던지지 말라고.. 과수원을 하면 비가와도, 바람이 많이 불어도 복숭아가 떨어지거든요. 그래 과수원에는 돼지를 키우잖아요. 떨어진 것 먹이려고.. 너희가 열지어서 오면 줄 테니까 그러지 말라 했어요. 그래 몇 학년이고 물어보니, 5학년이고, 3학년이고. 그래.. 공부는 잘하나 하고 산수 문제를 내 주었더니, 애들이 산수를 거꾸로 하고, 제대로 맞추고 하는 애들이 없더라고요. 애들 보고 밤에 오면 내가 글 가르쳐줄테니 오라고 했어요. 그러니 관솔에 불을 붙여서 온다니까요. 노래를 불러 싸면서..
한 해가 지나고 나니까 애들이 68명이 나와요. 창고, 방, 축사 막 헐어 가지고 하나로 만들어 가지고, 초등학교 가서 칠판을 얻어가지고 하나는 이리 붙이고, 저리붙이고 해서 수업을 했어요. 처음 한 때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이 이 쪽을 가르치고, 누이는 저쪽을 가르치고 했어요. 그러다 나중에 동생도 군대가고 해서 도저히 그곳에서 안 되어 가지고 땅을 팔았어요. 그 밑에 넓은 곳에다 학교를 지어잖아요. 학교를 지었는데 4번이나 쓰러졌어요. 서까래를 올리면 내려앉고 했어요. 이엉도 내 어깨만큼이나 짊어지고 다니고, 애들이 해 먹을 것이 없어서.. 낮에는 수제비를 끓이다 해 먹이다가 보리밥도 안 돼.. 보리를 맷돌에다가 부어서 죽을 쑤어서 먹어. 그래서 과로하고, 제대로 못 먹고, 몸살처럼 앓아누웠어요. 기관지 천식이 심장천식으로 심부전으로 심장병으로 변해서 사경을 해매고 다녔어요.
그때는 방송이 통합되기 전에 동아방송에 야학만 취재를 하고 다니는 이승우 라는 분이 있었어요. 이분이 생각이 있어서 자기 처가에 가서 야학을 하는데 딸도 유한대학 다니는데 교수하고 결혼을 했거든요. 운영자금이 없으니까 애들 시켜서 참새를 잡아가지고 팔아서 운영자금을 쓰고 했다 말이죠.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딸을 대학 교수한테 시집 보냈다고 하더니 그 사람이 와서 참새나 잡아서 그런 짓이나 한다고..(웃음) 이분이 견디지 못해서 그만두고 동아방송에 들어가서 전국을 다니면서 야학을 취재를 하려 다닌 거예요. 그래 내한테도 온 거예요. 병들어가지고 있을 때..
그래서 내, 고생 많이 했습니다. 엄청 고생 많이 했습니다. 지식의 굶주림도 중하지만, 육체적인 굶주림이 제일 큽니다. 밥을 굶고는 아무 이상도 희망도 없어요. 애들이 장마가 지면 집에를 가지를 못해요. 개울물이 넘쳐서.. 그러니 맷돌에 보리나 옥수수를 갈아서 죽을 끓여 먹고, 그것도 부족하면 논두렁을 다니면서 질경이를 뜯고, 산에 가서 광대사리1)도 뜯고, 그것을 가지고 된장이랑 소금이랑 묻혀서 죽을 끓여 가지고 먹었어요. 배가 고프면 애들이요 큰 애들이 작은 애들 밥도 빼앗아서 지 그릇에 딱 엎쳐서 먹어요. 선생님 먹어보라는 소리도 없어. 그때는 옷도 없어서 왜 그렇게 떨어진 옷만 입고 다녔는지, 신발도 없어서.. 맨 날 부산이나 서울 가서 헌 옷가지나 얻어오고, 신발도 떨어진 것 얻어가지고 이고 와서 애들 한 가지씩 입히고 했어요. 그래 이래 하다보니까 세월이 한 십년 흘러 버렸어요.
그곳에서 내가 늦게 남편을 만나서 서른여섯에 첫 애를 낳았는데, 그 다음에 서른일곱에 애를.. 선생이 없으니까 애들을 가르치려고 맨 날 애를 업고 교실을 다니잖아요. 교실에 아를 업고 들어갔는데.. 날이 춥고, 연탄 땔 것도 없고, 정부에서 지원도 없잖아요. 산에 가서 나무뿌리를 그것을 괭이로 걷어서 와서 난로를 때는데.. 난로가 없으니까. 거기(양평) 옥녀봉에 광산이 있었거든요. 광산에 가서 도나무깡(드럼통)을 갔다가 피우니까 북풍만 불면 연기가 꽉 차지요. 그러니까 애가, 생후 5개월 된 애니까 견디지 못해요. 그래서 사회를 가르치는데 칠판에 한 칠판 쓰고, 나오니까, 교실 문을 여니까, 애가 고개가 떨어지더니.. 딸을 하나 죽였잖아요...(눈에 눈물이 고이심) 아이고, 이제는 이 짓을 못하겠다. 어떻게, 또 그 사이에도 동생도 심장마비로 죽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하도 많이 고생이 너무 심하니까..
선생도 내 하나는 부족하니까.. 먹이고, 입히고, 차비는 줘야지. 책이라고 살 돈은 주어야죠. 그래서 또 축산을 했잖아요. 한우를 생산법을 해본다 하다 재건운동본부가 생기고 또 재경운동본부에서 일하다가.. 내가 고혈압이 생겨서 쓰러져서 죽게 되고, 심장병으로 늘 고생하고.. 그래서 ‘이제는 학교를 그만둔다. 서울 가서 살면 수제비장사를 하든, 호떡장사를 하든지 그리 살아야겠다’ 하고는 나왔는데.. 박 정권이 들어 설 때 조사를 해 가지고 존치대상 학교라 해서 전국의 백마흔 다섯 개를 뽑았어요. 그 백 마흔 다섯 개가 될 때 탄압이 심했어요. 지금은 좋은 세상이에요. 야학 선생들이 가르치려면 얼마든지 기를 피고 살잖아요. 가난해서, 돈 때문이 못 가르치지.. 이념문제 뭐, 이런 것 가지고 탄압은 안 받거든요. 그래서 그전에는 재건운동본부에 속해 있는 재건학교는 재건학교의 교장들을 모아서 공무원 훈련소서 훈련도 하고, 전국의 연합고사도 보고, 재건 운동본부에서 3년제로 운용 하도록 했어요. 새마을 청소년 중, 고등학교라 했어요. 그래서 한 학교에 백만 원씩 지원을 해 주었어요. 근데 내만 안 받았어요. 아무 지원 없이 평생을 살았는데, 그것을 받으면 내가 때가 묻을 것 같았어요. 지금 같으면 내가 언능 받았겠죠.(웃음) 나는 때 묻히기 싫었어요. 나중 새마을 청소년 학교라 하고, 내무부 장관이 승인을 하고 A급, B급, C급으로 나눠가지고 입학금을 받고, 한달에 얼마씩 받아라. 교장들이 거지가 되어서 안 된다 학교도 모두 문을 닫고.. 그래서 백마흔 다섯 개 학교가 내무장관 인가가 났죠.
그 뒤 (1978년) 서울로 와서 그렇게 살다보니 (야학 한 것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돕는 거라. 내장이 다 빠진 것 같더라고요. 한 며칠 온 데가 아픈 데가 다 생겨. 그리고 양평 있는 애들이 하나씩 따라 올라왔어요. 가르쳐 달라고.. 학교를 넘긴 후임자가 왔는데 그 사람이 등록금을 딱딱 받으니까 시골에 돈이 있나. 영농자금도 없는데.. 그래서 애들이 올라오는데.. 또 서울에 와서 보니 그러더라고요. 있는 집 아이들은 유치원도 가는데, 없는 집 애들은 유치원도 어린이집도 못가니까 걔들을 어디 비닐이라고 쳐 놓고 유희도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치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데.. 서울에는 그런 것을 못 친다하고.. 애들은 자꾸 서울로 쫒아 올라왔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하다가 유성학교가 되었잖아요.
처음에 애들을 4명 가지고 교회에서 하다가 한달이 되니 애들이 한 40명 와요. 그러니 교회에서 막 쫒아내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눈물이 몇 섬이나 될 거예요. 그러다 강동구 암사동 489-1에 가서 야학을 했어요. 내가 야학을 하다가 60살이 되었던가. 수업을 마치고 음악을 가르친다고 사람을 모으라 하고 하도 배가 고파서 사탕이나 하나 먹고 고개를 돌렸는데 팍 쓰러졌어요. 그게 뇌경색이라. 그날 쓰러지고, 그 이튿날 쓰러지고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중환자실에서 쓰러지고 했어요. 그러니 해군사관학교 학생이 아들이 올라오니 학생들이 막 울고 하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 대를 이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아들이 해군 대위였을 때 제대를 하고, 학교를 후임 한다고 나왔잖아요. 제대금 타 가지고 전산교육 시킨다고 컴퓨터도 많이 사고했어요. 또 이런 학교를 하는 사람은 각자 각자 마다 달란트(재능)가 다 있어. 학생들도 자꾸 할매를 찾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새파란 젊은이가 가나다라 찾고, 가나다라 찾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수준도 그렇거든요. 황무지를 개발해서 옥토로 만든다고 생각을 하고 해야지. 마구 교육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거든. 이런 학교에 오는 청소년도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올바른 시민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글자는 몰라도 의, 식, 주는 해결하고 살아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배가 고파본 사람은 배고픔을 아는데, 지금 30대, 40대는 배고픈 줄을 잘 몰라요. 내가 살아보니 1978년부터 통일쌀이 나와서 밥 좀 먹더라고요. 참, 박정희 정권에서 일 많이 했어요. 뭐 어쩌니, 저쩌니 해도 .. 가끔 우리 선생들이 뭐라고 하면, 내가 뭐라 하냐 하면 “정치가 뭐냐, 배고픈 사람 배불리고, 다리 쭉 펼쳐 잠자게 하는 것이고, 그게 정치 아니냐”라고 해요.
그 뒤 아들에게 야학을 넘겨놓고, 아들이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안 되거든. 이 학교가 스스로는 잘 안되거든요. 그래서 학원을 해야겠다. 학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이 학교를 해야겠다. 그러니 어머니는 여생을 편안히 살아가라고.. 그래서 암사동 480-1에서 있는 것을 다.. 내가 할 때는 아이들을 스트레스를 해소 하는 달콤한 소리도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뭐 해 먹이도 안돼. 그래서 학교 농악대를 만들었어. 건국대 학생들이 애 많이 썼지요. 농악대 학생들이 와서 지도도 하고.. 교회도 많이 나갔어요. 괭과리, 북 두드리고 하는 애들은 온 갓 근심은 다 없어지지요. 내가 여자니까 장구춤도, 북춤도 가르치고 했어요. 풍물 할 때 입는 옷도 다 했어요.
학원을 한다고 하니까 학원이라는 곳에 학교가 들어가니 청소년도 줄어들고, 주부학생도 늘었잖아요. 아이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선생님 우리 못 살아서 잘 살라고 학교에 왔잖습니까. 공부하고, 한 달 내내 이 새끼, 저 새끼 소리 들어가면 일을 해도 50만원밖에 안 주는데, 하루 저녁 가서 맛있고, 좋은 집 있다고 가자고 하는 “삐기”라 하나 뭐라 하나. 그 일을 하면 하루에 5만원 벌잖아요. 애들이 의식이 깨진 거예요. 옛날에 하다하다 안되면 면서기라고 해야지 했는데 지금 면서기가 아무나 들어가나요? 그래서 학교도 잘 안되고, 학원도 잘 안 되고.. 선생들은 많고, 집값은 비싸고.. 그래서 내가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교보생명을 15년을 다녔거든요. 발톱이 3개나 빠졌어요. 딸이 자꾸 크니까 엄마 보험 회사 다니면 이미지 나빠지니까 이제 그만두라고 하니까.. 그래서 분식점을 채려가지고 김밥도 만들고, 뭐도 만들고 했어요. 그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못 했어요. 그래도 세 번이나 쓰려졌는데 하늘이 이래 해 준거만 해도 다행이지요. 그러니까 아들이 한 달이 몇 백 만원씩 적자가 나니..
요새 어디 자원봉사자가 어디 제대로 있습니까? 십원 땡전 하나 안 주는데, 요즘은 과외만 해도 돈 벌이가 되잖아요. 몇 푼이라도 학교에서 줘야 제 시간을 맞추지 안 그러면 그냥 일 있다고 빠지고, 시험 본다고 안 오고.. 그전에는 선생들이 줄을 섰거든.. 선생 구하기도 어렵고, 석 달인가 하면 학점 받는다고. 그거 하고나면 고만 안 오고.. 천상 선생도 몇 푼 안 주면 안 되는 거야. 이 늙은이가 있을 때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이 과목 저 과목 가르쳤는데, 선생을 수십 년을 했으니, 선생이 없을 때는 이 과목도 들어가고 저 과목도 들어가고 이래 했는데.. 너무 빚이 채여서 그곳을 정리를 하고 또 옮겼잖아요. 아들이 “도저히 이것은 어머이 같은 사람이나 하지 난 도저히 못 견디겠습니다.”해요. 우리가 보세요. 부모와 자식이 그렇게 애 터지게 키웠다고 해서 그 자식이 부모 고생을 압니까? 학생들이 안다지만, 선생의 노고를 알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신에 받쳐서 지가 좋아서 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아직 안 죽었는데, 학교를 끝내서는 안 되고 내 목숨 살아있는 동안에는 도로 받을게. 근데 교장은 니가 해라. 난 허리가 아파서 밖에는 못 돌아다니잖아. 내 글 가르치고 하는 것은 내가 할게. 그리고 며느리도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며느아 너도 좀 도와줘라”해서 아들은 수학전문학원 하고.. 나는 할 수 없다 해서 집으로 가야지 전에 양평서도 할 때 안방에도 책가방가지고 와서 했고, 방 한 칸밖에 없는 데도 했는데.. 2)
이 학교가 다 옮기기 전에 야간은 먼저 왔어요. 야간은 내가 거기서 하다가 내가 칠십이 넘으니까 아들이 “이제 쓰러지면 뼈도 안 붙고 하니 야간은 이제 오지마세요”해요. 요새는 병원에서 청소부도 해도 몇 층에서 뭐 나왔다고 써야하는데 글 몰라서 “선생님 집으로 따라 갈까요”해서 집으로 따라 왔잖아요. 하다가 학생들 보고, 우리 졸업생들이 공인중계사 시험을 쳐서 여러 명이 합격을 했어요. 학교를 할 건물을 알아봐라 했더니 건물이 보증금도 많고, 월세도 많고, 칸막이 하려면 돈 들어가고, 다 돈 들어가요. 그래 어쩌겠습니까? 할 수 없다. 내가 우리 며느리보고 몇 명이라도 배울 사람이 있다고 할 때는 내 죽을 때 까지는 할 테니까 너 좀 도와 달라하고 그래서 지금 집으로 와가지고 3부 수업을 합니다. 아침에 10부터 1시까지 공부하고, 3시부터 6시까지 공부하고,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그래서 학생들이 오고 선생님들이 봐주고 해요. 우리 선생님들이 옛날 선생님들 모이는 모임이 있어요. 그 선생님들이 언제라도 부르라 해요. 근데 야학하는 선생님들은 내가 수십 년을 하다 보니 다 미래가 잘 풀려요. 와서 그래요. “선생님, 내가 가르치려 왔다가 배우고 갑니다. 선생들은 그래도 부모 도움으로 초, 중, 고, 대학 다 다녔잖아요. 부모 도움으로 지가 벌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전부터 청소년아이들에게 불우청소년하고 하면 그런 말 하려면 오지 말라 했어요. 내가 맨날 장한 청소년이라고 해요. 훌륭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립하고, 자활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요. 너는 스스로 공장가 가지고 너 스스로 먹고, 입고 살고, 빨래하고, 너 스스로 다하고, 너가 공장에 가서 일한 것으로 수출도 하고, 나라의 세금도 내고 봉사도 하고, 너가 훌륭한 애들 아니냐. 내가 훌륭하다고 살 때야 내가 비참하다고 살 때는 아들이 행동이 달라져요. 많이 밝아지고, 의기왕성하고.. 내가 오래 살다보니 우리 제자들도 사장하는 애도 있고, 여름에는 제자가 하나 자식 같은 애가 저 통영에 조선회사 부장을 해. 어찌나 선생대접을 잘 하는지 저 엄마이상으로 잘해. 저 마누라한테도 칭찬을 받고, 똑바로 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저 노력해서 대학도 나오고 했잖아요. 시집간 제자들도 열세 살, 열 네 살 되는 애들이 이제는 오십이 넘어가고 사십년 전에 온 애들도 오고했어요.
뭔가 쓰러진 사람 조금이라도 일으켜주면, 조금만 가르쳐주면, 한글도 몰랐던 사람, 영어도 몰랐던 사람을 가르쳐주면 좋아하는 모습이 뭘 가지고 느끼겠어요. 가만히 보며 우리 야학 선생들이 “정” 때문에 해요 정을 돈을 주고 살수가 있느냐는 거죠. 우리 선생님 중에는 대학교수도 여러 명이 되요.
살다보니 일류 농사꾼이 되고 해요. 내가 모 심기에 14년을 다니면서 못 줄을 잡았어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일꾼이 못되고, 모심기를 못 하니까. 선생님 살려달라고 하니까. 애들은 어떻게 말을 잘 들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내 보고 “저 여자는 김일성이 보다고 더 무섭다고, 아이들이 손을 요렇게(왼손을 가리키며) 하면 딱 넘어가고, 손을 요렇게(오른쪽을 가리키며)하면 딱 넘어간다고”해요. 농사를 지으려면 질소, 인산 등등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해요. 내 사촌 언니는 서울에서 꽤 잘사는 사람이거든요. 그 언니는 나보고 맨 날 “미친년”이라고 해 쌌는데.
이 세상에 재산도 무형의 재산도 있고, 유형의 재산도 있는 거라.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땅이나 돈이나 하는 것은 유형이지만 그건 순간 사라지고 없어지잖아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무형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자신도 밝게 살 뿐만이 아니라, 자녀에게도 대대로 의미를 가르치고, 희망을 가르치고 사니까. 야학선생은 고생도 되고, 정부나 어디 지원을 받고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왜냐하면 내 스스로 일어서려고 해야지 남이 아무도 안 살아줘요. 누가 야학 선생 하라고 떠밀어서 선생하나요. 지가 좋아서 하지.
내가 살아보니까 우리 학교 교훈이 “배우자, 땀 흘리자, 의(義)에 죽자”인데, 개척정신, 협동정신, 의인정신인데, 아무리 해도 선생이 개척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는 말 가지고는 안돼. 행동이 따르는 말은 효험이 있어도.
저기 잠실에서 부동산 하는 제자가 있는데. 그 애가 어릴 때 누구 오면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고, 물 한 모금 먹고 싶은 것은 그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돼야 하지. 제자들이 선생들을 찾아와도 내가 사랑한다는 말은 안 돼. 쓰레기에 나물이라고 묻히고, 밥이라도 한 그릇해서 먹이야지. 근데 농사도 논이 없으니 안 되겠더라고요.
(경기도 양평에서 농촌 야학하던 얘기로 되돌아감) 그래서 논을 만들자. 논은 그때 개간도 잘 안 할 때인데. 바윗돌, 돌멩이 굉장한데.. 저 하천가에.. 잠실에 있는 제자보고 이장님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어요. 저기를 다 쳐서 논을 만들었으면 하는데. 그래 애가 가서는 물어보고는 하는 말이 “선생님, 거기가 논이 되면, 대한민국 논이 발길에 채여서 다니지도 못 한 되요” 라고 해요. 그래 집안에 오빠가 서울서 회사를 하는데 불도저가 몇 대 있었어요. 불도저를 보내달라고 했어요. “오빠, 나, 배가 고파서 살기 어렵다” 그랬더니 불도저가 두 대가 왔어요. 그때는 한 시간을 치는데 2천 7백 원이었어요. 그것만 적어 놔라. 언제 가는 갚아야 되니. 쳐줬어요. 돌을 들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참 좋은 말입니다. 나를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도와주지만 남을 돕기 위해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줘요. 우리 학생들이 운동장에 집합을 시켜서 집에 가서 삼태기하고 호미 한 자루씩 다 가져 온나. 그러면 떡 해 먹고 싶으면 떡 해 먹고, 밥 해먹고 싶으면 밥해 먹고.. 그래가지고 내가 논 가운데 앉고 돌을 걷어 냈잖아요. 남학생들은 가에다 둘러놓고.. 근데, 돌만 걷어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농업전서”라는 책을 보니까 돌만 걷어 내서는 안 되고, 물 수 밑에 밭 전 자가 논 답(畓)자 아닙니까? 밭 위에 물만 있으면 논이 되는데, 흙을 27㎝를 넣으면 논이 된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츄럭(트럭)을 이리저리 마련해가지고 산비탈을 뻘건 흙을 막 퍼다 부어서 콩을 심었더니 콩이 일곱 가마니가 나왔어요. 들어가는 공은 많았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하는 야학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거든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을 배워가지고 지가 판사도 되고, 대단한 인물이 모두 되잖아요. 그 꿈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선생이 힘들어도 참는단 말이죠. 그래 흙을 깔고, 첫해는 콩을 수확하고, 이듬해는 흙을 더 넣었는데 흙 까는 것을 “가리질”이라고 하는데 가리질 하는 것이 어려워요. 동창회를 소집해서 동창들 보고 “너 후배들도 배부르고, 선생도 배부르고 밥 먹고 살자” 하루 와서 흙을 깔아 달라고 했어요. 깔아주면 재학생들은 개구리 잡아서 반찬 해 준다고 개구리 잡으로 다니고, 막 이래 가지고.. 해병대, 공수특전단 출신 제자들이 모아가지고 우물파고, 밑에 돌을 쌓을 때는 기술자가 와야 돼요. 면장 찾아가서 양수기도 빌리고, 농협에 가서 비닐도 외상으로 얻고 논을 한 두마지기 빌려서 못 자리를 했어요. 쌀 미(米)자가 손이 팔십 여덟 번 가야지 쌀이 된다고 그러잖습니까? 정말로 농업전수 책을 읽어 가면서 하니까 손이 많이 들어도 못 자리를 하고 모를 심고해서 첫해가 벼가 칠십 가마가 나왔어요. 칠십 가마가 나왔는데 푸대가 하도 커서 한 푸대만 갖다가 찧으면 쌀이 일곱 말이 나왔고, 싸리기만 내 말이 나왔어요. 그런 부자가 없어. 얼마든지 밥해먹고, 한 달에 쌀 세가마를 먹어도 충당이 돼요. 그러니까 없던 곳에서 있는 것을 만들었잖아요. 졸업생들이 오면 “ 선생님, 내 비탈에서 논 두 다랭이 일구었어요” 그래요. 산비탈에서 물 졸졸 내려오는 곳에서 논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말만 가지고 무에서 유를 찾자,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찾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 청년들이 평생 살아가는데 한번쯤은 뜻을 가져보면, 내가 선생한테도 그런 말을 해요. 학원원장들이 많거든요. 적어도 3년은 죽는다고 생각하고 풀만 쑤어먹고 살아라. 그러면 뭐가 이루어질 거니까. 우리가 우리 아들이나 주부들한테 해주는 소리도 그냥, 뭐.. 형편없는 것을 갈아가지고, 옥그릇을 만들어서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하고 보내는 것이 야학하는 사람들의 희망이지 소망이지. 어디 가서 힘들다고 여가서 손 벌리고, 저 가서 손 벌리고 이래해서는 .. 그전에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학력인가 내서 지금은 번듯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근데, 제일 우리한테는 결실이 뭐냐 하면 제자가 결실이라. 선생을 얼마나 존경하느냐. 선생을 얼마나 본을 보느냐 선생이 우리를 미끼로 해서 목적물로 생각해야지, 수단화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야학선생들을 가치 있는 삶으로 산다 생각하는데, 우리 대학생 선생들은 그래요 “선생님, 봉사하는 것도 이, 삼년이지 평생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힘이 대게 들 때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열아홉 살로 되돌아간다면, 갈수만 있다면, 포기를 하고 해 보겠는데, 이제는 못 되돌린다 말이죠.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어야지.
질 문: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물어보겠습니다.
부산에서 야학하실 때 그 당시에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이종임: 그때 애들은 초등학교 과정, 몇 없었어요. 영어배우고, 한문 배우고 했어요.
질 문: 그럼, 검정고시를 가르치신 건가요?
이종임: 거서는 오래 안 했어요. 검정고시는 중하게 생각 안했어요. 그것이 왜냐하면 칠십 몇 년도 들어가니까 인가있는 학교와 인가 없는 학교가 가리 지더라고요. 정부에 인가 있는 학교가 자꾸 투서질을 하거든요. 유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고, 무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으니까 무상으로 가는 학교에 얘들이 많이 오지, 유상으로 하는 학교에 많이 가겠습니까? 그러니 인가, 비인가가 문제가 되고, 얘들이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전수학교는 가거든요. 자꾸 정리가 되요. 전수학교도 운동장 있으면 검정고시도 몇 개 안치고.. 고등공민학교도 이것 갖추라, 저것 갖추라 사그리 없어졌잖아요. 제도권에 묶이니까.. 나는 애당초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학교를 하겠다고 한 것도 없고, 부산에 있을 때도 내가 4급 지방 공무원을 해서 할 때도 있었고, 이래 해 왔으니까. 집안에 과수원 만평이 있었고, 뭐라도 우리 것을 우리재산을 없애고 하고, 학교 건물을 하나 얻어도.. 지금도 내 호주머니에 돈 몇 천 만원만 있고, 다달이 월세 내수도 있어도 집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죠. “어디 가서 손 벌리고, 어디 가서 지원해 주세요” 하는 것 고만 딱 하기가 싫어요.
질 문: 지금까지 말씀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야학을 계속 하실 거지요?
이종임: 그럼요, 내 죽을 때 까지 해야지. 그 다음에는 딸이 이을지, 아들이 이을지 내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해야지..
질 문: 현재 운영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종임: 어려운 것이 왜 없겠습니까? 항상 봐도 우리 이런 학교는 선생들도 다 좋고, 물질이 어려운 것이 만날 어렵지요. 이제는 아들이 학원을 해서 도와주고..
질 문: 아드님은 수업도 도와주고 하시는 거지요?
이종임: 인제, 엄마가 힘들 때는 와서 가르치고, 지 학원 안할 때는 도와주고.. 내가 교육철학이나 들어보면, 우리 선생들을 내가 참 이뻐해요. 요만한 건물에다가 큰 고기를 넣어두면 그게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선생들은 이 만치(크게 원을 그리며) 배웠는데, 요만큼(작은 원을 그리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몸을 요렇게(몸을 작게 움츠리며) 오거리야 배워지니, 선생들이 얼마나 애를 써냐, 얼마나 고생을 하냐 싶은데, 학생들은 그것을 못 느낄 것예요.
질 문: 선생님, 지금까지 야학을 하면서 야학이 왜 존재하는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종임: 보세요. 배울 수 있는 기관이 없어서 못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원이 많이 있잖아요. 근데 돈이 없잖아요. 돈이 없고,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가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하지도 못해요. 그러니 첫째는 경제능력이 안되고, 둘째는 그들의 심리파악을 못하고, 그 사람들이 정말로 요구하는 사항이 뭔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은.. 내가 못 산 대신에 이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세상을 살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은 야학 선생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대학교수가 유치원 애들을 못 가르치듯이, 거기에 맞는 선생은 첫째는 그 사람들에 대해 애착을 가져야 해요. 그런데 아무나 남 답답하다고 아무나 사랑해주나요. 지 천성이 착해야 되지. 그런 사람들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봉사하고 사는 거죠. 그러니 야학은 꼭 있어야 하겠다.
질 문: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다른 야학의 교사나 학생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이종임: 내가 하는 것 자체로 내가 즐겁게,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 왜냐하면 야학 선생님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거든요. 그렇다고 제자들이 선생 속을 모르거든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했다는 것을 상대방이 몰라준다고 섭섭한 마음이 있다면 이거를 못해요. 그러니 내가 고생하고, 내가 힘든 만큼 너가 잘 되는 것이 내가 멀리 바라 볼 때 내가 하나의 기쁨으로 남는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하면.. 또 언젠가는 그 마음이 자라서 사회에 나가 보면 자기도 많이 성장해 있어요. 그러니 하는 일에 만족하고 공과를 따지지 말고 살면 되요.
질 문: 오늘 선생님 찾아뵙고,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것 같아 저도 오늘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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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훌륭하신 선생님이시네요.^^
전에 한번 뵌적이 있었는데..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