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井山
부산광역시 금정구·북구와 양산시 동면과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801m. 부산의 북쪽에 솟은 산이다. 최고봉인 고당봉을 비롯하여
계명봉·상계봉·원효봉·장군봉·파리봉·의상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북서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대체로 완경사를
이루며, 동쪽과 서쪽 사면에서는 각각 수영강과 낙동강의 지류가
발원하여 두 하천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산 능선에는 곳곳에
노출이 심한 암반이 나타나며,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북동쪽 기슭에 자리한 범어사는 678년(문무왕 18)에 의상이
창건한 절로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사찰을 이룬다.
범어사 주변에는 계명암·내원암 등 여러 개의 암자가 있다.
남쪽에는 1703년(숙종 29)에 축성된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이
있으며 본래 동래산성이었으나 개칭된 것이다.
여러 차례의 훼손과 증축을 거치다가 1972년에 복원되었다.
둘레 1만 7,336m, 높이 1.5~3.2m의 우리나라 최대 산성이다.
산록에는 금강공원·성지곡공원 등이 자리하며,
금강공원에서 산성고개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이밖에 양산시 동면 가산리의 마애여래입상, 장군봉에 있는
은동굴·동래온천·산성마을 등이 있어 부산시민의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당봉(姑堂峰)
금정산의 주봉은 해발 801.5m의 고당봉으로 백두대간이 동해를 따라
흘러나와 이곳에 우뚝 세워 놓은 것이다. 이 암봉에 서면 부산시가와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아름다움을 가리켜 소금강(小金剛)이라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고당봉은 우리나라 10대사찰 중 하나인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 정상의 이름이
왜 고당봉이며, 그 이름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금정산의 주봉 이름이 여러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쓰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당봉의 이름은 지금까지 무려 7가지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씌어져 왔다.
1740년 편찬된 《동래부지》에 나오는 지도에는 '고암(姑岩)'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마다 그 이름 을 고암(姑岩), 고당봉(姑堂峰), 고담봉(高潭峰),
고단봉(高壇峰), 고당봉(高堂峰), 고당봉 (姑黨峰), 고당봉(高幢峰)이라 하여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당봉의 정확한
명칭을 찾기 위해 금정구청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에게 의뢰하여 그 이름 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도 의견이 여러가지 나왔으나,
토론과 검정을 거쳐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高 幢峰)'의 두 가지
의견이 나왔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우리 나라는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 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도 할미신이므로 할미 고(姑), 집 당(堂)의
고당봉(姑堂峰)이 옳다"는 丁仲煥博士(전 동아대교수)의 주장이 있었다.
또한 이에 맞선 朱永澤씨(향토사학자)의 주장도 그 타당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는 금정산 8경에 '고당귀운(高幢歸雲)'이 있는 사실 등을 근거로
금정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의상 대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高幢峰)으로
명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당봉이란 이름이 있 기에 그 아래 범어사를
창건하게 되었음을 '고당(高幢) 주령은 一山의 靈을 진하여 諸佛의
도장을 스스로 지었으며····' 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기도 하였다.
또 다른 근거로는 ≪범어 사 창건사적≫에 의상대사가 대왕과 함께
금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 7日 7夜를 독경한 곳이 바로 금정산 고
당봉이며,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 다는 뜻을 보더라도 '고당봉(高幢峰)이라는 명칭이 옳다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1902년 발간된 ≪궤범어사서기궤유전≫ 산령축에 의하면,
"지금부터 40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 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 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어느날 스님께서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姑母靈神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지켜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이에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번의
제사를 지내니 아주 번 창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고당의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할미당집이다. 이러한 영험을 알 고 전국 무당과 보살들이
밤낮 기도를 올리는 거점으로 사람들에 의해 영험한 금정산의
정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고당이 고당봉으로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정중환 박사는 우리 고유의 샤마니즘의 민속신앙속에서
‘고당봉(姑堂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신라·고려시대의 불교는
호국의 뜻이 더 위에 있음을 지적, 범어사도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설화가 전해오는 것과 같이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호국정신의 발로였음을 지적하였다. 금정구청에서는 이러한 토론과
격론을 거쳐 대부분의 역사(민속)학자 및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공식적으로 고당봉 정상에는 고당봉(姑堂 峰)으로 확정되어
표석비를 세웠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