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서울대 캠퍼스는 민주화 대행진의 열풍이 불었다. 나는 서울대 불교학생회 회장의 신분으로 학내 서클연합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그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은 심재철(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이었다. 학생들은 매일 같이 서울역 광장으로 나가 민주화의 열망을 시위함으로써 집단의지를 표출하였다. 이때 나는 민주화를 향한 내 순수한 애국심을 상징이라도 하듯 하얀 운동화를 새로 사 신었다. 민주화에 목숨을 바치기라도 할 것처럼 매일 아침 하얀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달려나가 다른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여 신림동 거리로 진출했다. 영등포까지 구호를 외치며 걸어가 한강다리를 건너서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광장에 집결하였다. 길목마다 시위진압 경찰이 있어 행진을 저지하였으나 학생들의 세력이 거침이 없었기에 막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길목 어디쯤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어느 지점에서 나는 경찰에게 쫓긴 적이 있다. 골목으로 튀어 가게로 숨어들자, 가게 주인아줌마는 학생을 숨겨주었다. 당시 서울역광장은 몇 만 명이 운집하였는데 점심때가 되면 어디선가 빵 상자와 삼각봉지 우유가 배달되어 우리는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눈앞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면! 우리의 꿈이 벚꽃처럼 찬란히 피어날 줄 알았는데, 아! 모진 비바람이 꽃잎을 다 흩어버릴 줄이야! 청년들의 꿈은 쿠데타에 짓밟혀졌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모든 캠퍼스는 폐쇄되었다. 한때의 봄꿈은 이렇게 깨어져 나갔다. 나는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발이 허공을 떠있는 듯, 살아있는지 죽은 건지도 모르게 며칠을 지냈다. 이 땅위 내가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악에 더럽혀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러운 세상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 어디로 망명을 갈까, 아마 일제 강점기라면 만주나 중국으로 갔겠지, 테러리스트가 될까,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될까 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이 전생에 불연이 깊은지라 군복무 후 곧바로 입산하여 출가수행자가 되었다. 바람 따라 물 따라 바랑을 메고 이 산 저 산을 헤매면서, 아침놀을 마시며 호연지기를 기르며 저녁놀을 다린 차를 마시기를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번 봄 우연히 서울대 동문인 김동철 거사를 만나 그의 가족과 봄 소풍을 겸하여 서울대 캠퍼스로 봄놀이를 오게 되었다. 30년 만에 보는 서울대 캠퍼스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옛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주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의 계단과 학생식당, 기숙사로 올라가는 순환도로는 여전하다. 70년대 말에서 80년 초엔 월요일 점심때만 되면 아크로폴리스계단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오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온통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었다. 모든 데모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시작된다. 감방에 들어갈 각오를 한 순교자가 “유신철폐, 독재타도!” 라고 선창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함성이 솟구치고 어디선가 짭새들이 들이닥쳐 밀고 당기는 아수라장이 연출된다. 내 몸은 긴장하면서 손발의 근육이 오그라든다. 의식은 격앙되고 두뇌에 불이 밝혀진 듯이 눈앞이 환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이 몸을 도사리게 하여 두 발을 안전한 곳에 붙들어 둔다. 내면의 갈등이 일어나는 사이 벌써 백차가 들이닥쳐 주동자 몇몇을 잡아서 끌고 가면 함성은 사그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정은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전투의지를 안으로 다지며 내공을 쌓았다. 후배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한편, 노동야학(영등포 산업선교)에 나가 노동자를 위한 의식교육에 헌신했다. 평소에 비밀요원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는 공포감이 검은 구름처럼 나를 짓누르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것은 순전히 내가 상상해낸 공포감이었다. 나는 당국에 의해 감시당할 만한 중요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며 큰일을 벌일만한 반정부 학생지하조직과 연계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80년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식당엔 “剪頭漢, 新現惡을 찢어 죽이자!”라는 걸개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된다. 머리를 잘라 죽일 놈 전두환, 새로 나타난 악한 놈 신현확이란 비수가 꽂힌 험한 구호였다. 학생들의 비분강개가 담긴 표현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옆엔 “목표가 정당하다면 수단과 방법도 비폭력적으로”라는 의미의 걸개가 걸려있었는데 불교학생회 선배 몇 분이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에서 이성적인 대응과, 비폭력적인 저항을 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 시점에서 당시 학생들에겐 뜬금없는 비웃음거리였으리라. 나도 그때엔 그 선배들이 너무나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30년이 지난 지금 그 학생들이 꿈꾸었던 민주화는 실현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진행 중인가?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그 학생들이 지금은 제도권에 진출하여 뜻을 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학생시절의 순수성을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보면 자기네의 청년시절의 꿈을 배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라, 젊음의 순수는 때가 묻기가 쉽다. 세상이 호락호락 하지 않기에 그들도 살기 위해선, 살아남기 위해선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변명하려 하겠지. 학생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순수했던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내면에 권력을 향한 욕망이 잠재해 있었던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이 비현실적이었나? 그들은 세상과 너무 쉽게 타협했다. 그들은 너무 쉽게 지조를 버렸다. 그들은 젊은 시절에 고민했던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등이란 가치를 자기의 삶과 직장에서 실천하지 못했다. 대졸자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발판으로 기득권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의 이익을 먼저 챙겼다. 민주도 좋고 자유평등정의도 좋지만 '내가 먼저 살고 보자'는데 무슨 말을 붙일까보냐? 누가 먼저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민주사회의 가치를 구현하려 하겠는가?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욕계(欲界)라 한다. 욕계는 무명에 휩싸여 있다.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하나 둘 셋 넷...
꽃잎은 찬란해도 지고야 마는 것, Bright indeed the flower may be,
But surely not for long.
이 세상 그 누군들 영원할 수 있으리, In this life, who indeed, will not someday be gone?
흐르는 세상 속 머나먼 봉우리를 넘어서 Passing beyond the furthest peak in
The Province of shifting stream,
취한 소리도 않고 얕은 꿈도 꾸지 않으리. No longer will I drunken speak;
Nor gaze at shallow dream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