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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념반조(一念返照)
화두의심의 본질은 한 생각을 통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를 깨닫는데 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라고 일념반조(一念返照)로써의 의심을 함으로 해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를 알아차린다. 생각이 잃어나기 이전 자리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경계이다. 화두의심이라는 창조적 긴장을 통해 본연자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대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번뇌를 생각할 필요가 없고, 불법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법과 번뇌가 모두 바깥의 일입니다. 그러나 또 바깥의 일이라는 생각을 지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십시오(廻光返照).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며, 행위를 할 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행위하는 바가 이미 갖추어지면 내 마음의 뜻을 따라 빈틈없이 준비되면 모자람도 남음도 없으니, 바로 이러한 때에 누구의 은혜를 입어서 이와 같이 공부합니까? 날이 가고 달이 가다보면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저절로 적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혜는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묻고 있다. 번뇌이니 보리이니 하는 분별은 망상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별을 떠나서 불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두의 특징은 생각을 돌이켜 물어 생각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데 있다. 범부는 일상에서 경계(境界)에 빠져 망상을 주인삼아 살아가고 있다. 즉 인식의 대상을 부여잡고 생각을 일으켜 집착하는 분별 망념으로 울고 웃는 것이다. 바깥 경계는 분별이다. 문제는 분별로서의 생각이다. 이 분별과 망상은 언제나 대상을 향해 있다. 화두는 일단 분별과 망상의 생각을 돌이키는 작용을 한다. 생각을 돌이킨다는 것은 분별 망념을 멈춘다는 것이다. 화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질문을 통해 생각을 돌이키는 것이다.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설사 선지식에 의해 물음이 제기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 물음을 통해 알아차리는 그 자리를 비춰보게 한다.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 혹은 일념반조(一念返照)라고 말한다.
양좌주가 경론을 강의하다가 마조를 뵈었다. 마조가 물었다. 듣자하니 좌주는 경론을 많이 강의한다는데 사실인가? 양좌주가 말했다. 감히 그렇다 하기가 민망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하였소? 마음을 가지고 강의하였습니다. 마음은 재주부리는 아이와 같고 뜻은 아이를 부리는 자와 같거늘, 어떻게 경전을 강설하겠는가? 양좌주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마음이 강의를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를 한다는 말입니까? 허공은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가 수긍하지 않고 바로 나가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여! 양좌주가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是甚麽)? 양좌주가 활연대오(豁然大悟) 하고서 예배하였다.
좌주는 경론에 정통한 강사이다. 생각의 지해(知解)로써 강설함에 걸림이 없다. 그러나 마조는 이 생각을 멈추게 하고 있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생각이 멈춘 생각 이전의 자리이다. 즉 분별을 멈추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게 지시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조사선의 수증 방편이다.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는 그 자리를 직시하게 한다. 오직 바라보는 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일체의 분별 망념을 초월할 수 있다. 번뇌 망념에 물든 생각을 돌이켜 자신의 본래 마음을 곧장 들여다보게 하여, 보는 그 자리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 반조의 방법을 활용한 조사선의 방법론이다. 마조의 한 마디 말 아래 양좌주가 바로 깨닫게 하는 방식의 조사선 수증방편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말한다.
육조가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때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이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이른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일체의 분별 망념을 멈추라는 것이다. 일체의 이원(二元)적 분별을 하기 이전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를 비추어보아라. 그러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그대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일체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선악에 물들기 이전의 본래 그 상태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를 체험하여 깨달으면 된다. 이것이 조사선에서 구사하는 질문을 통한 반조의 방법이다. 반조를 통해 알음알이(지식)에 의한 일체의 분별의식이 사라져야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위산영우는 지식이 출중하고 언변이 뛰어난 향엄지한을 향해 이렇게 지시하였다.
내가 듣기로 그대는 백장 선사(先師)의 처소에 있을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했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뜻으로 알아차리고 알음알이(識)로 헤아리는 것이니 바로 생사의 근원이 된다. 이제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일을 한 마디 일러 보아라.
배우고 익혀서 아는 알음알이로는 생각 이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없다. 마조선사가 일깨운 “이것이 무엇인가?”와 육조혜능이 말한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는 물음과 위산영우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일구(一句)”는 스승이 제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에 의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로 마음자리인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이것이 조사선의 수증방편이 되는 것이다. 조사선의 물음은 밖의 경계를 향해 있는 생각을 안으로 돌이켜 본래심, 즉 본래부처(중도실상)를 비춰보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회광반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번뇌 망념 <바라보기>,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 셋째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다. 사실 이러한 한 생각은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찰나적 심리현상을 단계적 과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은 초심자들이 실제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바로 일념이 현전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망념에 휘둘러 제대로 참구하기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현실적 고충 때문이다. 화두가 바로 일념으로 참구되어진다면 이러한 단계적 방편의 지시는 전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제방 선덕들의 방망이를 기다리며 눈썹을 아끼지 않고 방편을 세우고자 한다. 시대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는 간화선 대중화는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 번뇌 망념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인식의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고 생각과 생각하는 자를 분리시켜 지켜본다는 의미이다. 마치 위빠사나에서 생각의 대상인 법을 알아차려 지켜보는 것과 같이 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분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초보자에게는 이러한 단련을 거쳐 번뇌 망념을 철저히 객관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질 필요가 있다. 생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결국 번뇌 망념이 공(空)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때에 번뇌가 본래 공하므로 바라보되 바라봄이 없는 바라봄이 되는 것이다. 즉 번뇌 망념에 휘둘려 고통을 느끼는 인식의 체계를 전환함으로 해서 분별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국면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이 첫 번째 단계인 <망념 바라보기>만 잘 단련하여도 의식을 전환하고 오염식인 말라식을 바꾸어 인격적 수양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평생을 수행하고도 수준 높은 인격적 소양을 함양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수행의 첫 단계에 대한 단련을 소홀히 한 원인도 작용하고 있다.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이란 앞의 바라보기를 통해 바로 망념의 분별심을 타파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개념적인 분석으로 아는 분별심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므로『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 오직 분별심을 멀리하고(唯嫌揀擇), 다만 미움과 사랑만 버리면(但莫憎愛), 툭 트여 밝게 깨달을 것이다(洞然明白).”라고 말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해 있는 분별의 망념은 개념과 분석으로 아는 알음알이(知解)에 불과하다. 이 지해의 알음알이는 이원적 분별에 의한 번뇌 망념이기 때문에 분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분별 이전의 자리란 불이중도의 경계이다. 생각 이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량분별을 타파하여야 한다. 첫 번째 망념의 바라보기와 두 번째 분별심의 멈춤은 거의 간격없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앙산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 부처의 머무는 곳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無思) 묘한 이치로써 돌이켜 신령스러운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생각하라(返思).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상(性相)이 상주하여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요, 진불이 여여(如如)하리라.’ 분별심의 멈춤은 반조(返照)로 이루어진다. 이때에 지금까지 분별로써 알고 있던 알음알이를 멈추고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오직 모르는 마음은 분별 이전을 향한 마음이다. 모든 사량분별을 멈추어 판단을 정지하고 일체를 부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분별의 세계를 한꺼번에 내려놓고(放下着) 오직 “판단정지”를 외침과 동시에 모름의 장벽에 부딪쳐야 한다. 따라서 종문 제일의 책(宗門第一書)이라 불리는『벽암록』에서도 제1칙으로 “달마불식(達磨不識)”과 제2칙으로 “조주의 명백함에도 있지 않음(趙州不在明白)”의 공안을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양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가장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不識).
조주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하지만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 분별함에 떨어지거나 명백함(明白)에 떨어진다. 노승은 명백함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대들은 오히려 명백함에 머무는 것을 보호하고 아낀다. 그렇지 않은가. 이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이미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까? 나도 모른다(不知).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모름은 알고 모르고의 모름이 아닌 절대의 모름이다. 오직 모를 뿐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여 간택(揀擇)하면 어긋난다. 일체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모름을 유지하라. 오직 모를 뿐인 그곳에서 하나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은 “부지불식(不知不識: 생각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듯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오늘 밤에 다 끝나는데, 열에 다섯 쌍은 선수행을 하면서 선을 알지 못하며(不知) 도를 배우면서도 역시 도를 알지 못한다(不識).
다만 이 부지불식(不知不識)의 네 글자가 바로 삼세 모든 부처님의 골수이며 일대 장교(一大藏敎)의 근원이다.” 오직 모름은 간화의 출발점이다. 알지 못하기에 알려고 하는 그 마음, 알지 못하기에 꽉 막힌 답답함이 화두의심의 동력이 된다.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간절하게 의심하라. 의심뿐인 그 상태를 유지하여 참구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참구의 관건은 “저절로(自然)”에 있다. 억지로 작위적으로 참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이 저절로의 의심이 일체 분별의식을 부수고 본래면목을 깨닫게 한다. 즉 일체의 분별이 다하여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무념(無念)으로 나아가라. 그곳이 우리가 돌아갈 자리이자 본래면목 자리이다. 본래면목을 깨치기 위해 모든 분별과 망념을 내려놓은 그 부정의 자리에서 간절히 의심하여라.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은 일체의 정식(情識), 즉 분별 망념이 끊어진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다만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가 진실하게 참구하려고 한다면, 다만 일체를 놓아 버리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곳을 향해 문득 이 한 생각이 부서지면, 부처님도 그대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된 것이 바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앉아 의심의 한 생각마저 부서질 때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사량하고 분별하는 일체의 알음알이를 부정하고 망념이 끊어진 자리에 앉아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뭣고? 라고 참구하라.
셋째,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이란 대상을 향해 분별하던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의 마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마음이란 일체의 분별을 떠난 본래심을 말한다. 즉 밖으로 향하던 생각을 현전일념(現前一念)인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의해 안으로 돌이켜 생각 이전 자리와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 이전 자리는 생각이 일어난 바 없이 일어났음으로 그 실체가 없기에 공(空)한 것을 말한다. 공한 그것마저 공하므로 창조적 보리정념(菩提正念)이 일어나게 된다. 일체의 분별의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의 마음, 즉 즉심(卽心)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즉심이 부처이기(卽心是佛) 때문이다. 분주의 무업선사는 원래 좌주였다. 어느 날 마조대사를 뵙고 물었다.
삼승(三乘)의 문자는 거의 다 그 뜻을 궁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듣기를 선문에서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말한다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조가 말했다. 단지 그대가 모르는 그 마음이 곧 즉심시불이다. 달리 어떤 것이 있겠느냐.
모르는 마음으로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가 생각 이전 자리이다. 생각 이전과 직면하는 것이 즉심이요, 즉심이 바로 부처이다. 달리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으면 삿된 외도이다. 부처가 무엇인가. 일체 분별 망념을 떠난 불이중도의 참마음이다.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란 분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는 중도의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도의 무심이 바로 생각 이전의 자리인 본래의 마음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본연불성(本然佛性)인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선지식의 지시에 의해 즉각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화두참구를 통해 망념을 소멸하여 점진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이 마음은 곧 없는 마음(無心)이니, 일체의 모습을 떠나서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무심하기만 하면 바로 구경의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에 무심하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해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의 수행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빠르고 더딤이 있다. 법문을 듣고 한 생각에 바로 무심한 자도 있고,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回向)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심한 자도 있고, 십지(十地)에 이르러서 무심한 자도 있다. 그러나 빠르건 더디건 무심하면 그만이지, 다시 수행하거나 깨달을 것은 없다.
어떠한 수행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안과 화두 또한 방편이다. 한 순간에 바로 계합하든 삼현(三賢) ․ 십성(十聖)에 계합하든 결국 무심에 계합하는 것이다. 염불로 계합하면 염불선(念佛禪)이 되며, 주력으로 계합하면 지주선(持呪禪)이 되며, 화두로 계합하면 간화선(看話禪)이 된다. 화두 참선을 곧바로 질러가는 문이라 하여 경절문(徑截門)이라 부른다. 일체가 공한 그 자리, 즉 본래부처의 자리에서 바로 화두를 보아 직지인심(直指人心)을 깨쳐 들어가는 것이 간화 경절문이다. 일념에 상응하여 무심을 체득하기 위해 “이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전일념을 돌이켜 그대로 무심에 상응하여야 한다.
화두 참구로 일념반조(一念返照)하는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참구)을 통해 ① 망념 <바라보기> ⟶ ② 분별 망념의 <멈춤> ⟶ ③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 ⟶ ④ 본래심(부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화두참구의 방법
스승이 던진 질문에 의해 바로 생각 이전 자리에 직면하여 본래 마음을 체험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특별한 기연이 아니면 매우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화두를 장치하여 참구하게 만든 것이다. 생각하는 그대는 누구이며, 생각을 바라보는 이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현전일념(現前一念)은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줄여서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다.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무엇이 공겁(空劫) 이전의 자기인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팔만 사천의 의문도 결국은 이뭣고라는 의심으로 귀결된다. 대혜선사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오직 하나의 의심일 뿐입니다. 화두 위에서 의심이 타파되면 곧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타파됩니다. 화두가 타파되지 않았으면 바로 그 화두를 붙잡고 화두와 서로 맞붙어 버티고 계십시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옛사람의 공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에서 대하는 경계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모두 삿된 마구니의 권속일 것입니다.
화두 참구의 본질은 의심을 통해 사량분별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대혜가 지시하고 있는 화두를 의심하게 하는 방법은 수행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활쏘기를 익히는 것과 같이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제시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가 끼어들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번뇌 망념을 누른 그곳에서 오직 의심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마치 야생의 망아지를 길들여 고삐를 다잡고 안장을 채워 눌러서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화두를 참구함에는 의심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 역시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계기에서 조사의 언구를 의심함으로 하여 기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원오)에게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도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조금 시원하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나(대혜)는 홀연히 앞뒤의 생각이 끊어졌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채, 도리어 맑고 텅 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입실하게 되었을 때, 원오선사는 말했다. “그대가 그런 자리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려 활발발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 (조사의) 언구에 의심을 하지 않는 이것이 큰 병통이다. ……
노화상께서 이에 말씀하셨다. ‘내가 묻기를, 있다는 구절과 없다는 구절이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댄 것과 같을 때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묘사하려고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리려고 해도 그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물었다. ‘홀연히 나무가 넘어져 등나무가 말라 죽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서로 뒤따른다.’ 나(대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닫고는 말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대혜가 담당선사로부터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후, 원오선사의 회상에서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시원하다.”라는 법문을 듣고 첫 번째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 원오선사의 지시에 의해 언구를 의심하여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간화선 수증의 정절(程節: 단계)을 엿볼 수 있다. 제1단계에서 “홀연히 앞뒤의 생각이 끊어지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채, 도리어 맑고 텅 빈 자리”로 표현되는 공적(空寂)한 경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때에 스승 원오는 점검하기를 “그대가 그런 자리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려 활발발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2단계에서 조사의 언구를 의심할 것을 지시받아 참구하던 도중에 원오의 “홀연히 나무가 넘어져 등나무가 말라 죽을 때에는 어떠합니까?”라는 말 아래 바로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 활발발한 지혜가 펼쳐지고 있다.
화두 참구의 수증(修證)단계에서 말하면 첫 번째 단계에서 공적함을 깨닫고, 두 번째 단계에서 지혜를 성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증의 구조는 우리나라의 선사인 태고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한다. 이 생사에 부딪혀 온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라.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한 그곳을 일러 고요함(寂)이라 한다.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하고, 고요함 가운데서도 화두가 어둡지 않음을 일러 신령스런 지혜(靈知)라고 한다. 이 텅 빈 고요함(空寂) 가운데 신령스런 지혜(靈知)가 있어 무너지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공부하면 멀지 않아 공(功)을 이룰 것이다.
여기서 화두 참구의 과정을 먼저 공적(空寂)을 이루고, 나중에 영지(靈知)를 이루는 과정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차제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공적과 영지가 분리될 수 없는 성적(惺寂)의 등지(等持)인 것이다. 먼저 생사의 마음에서 온 힘을 다해 화두를 들게 되면 생사의 마음이 다해 공적(空寂)함이 이르게 된다. 공적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에 떨어지고, 화두가 분명하고 또렷하면 영지(靈知)가 된다. 이것을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 마음의 생사 ⟶ 화두참구 ⟶ 공적(空寂)한 마음
↳ 윤회
제2단계: 마음의 공적 ⟶ 화두참구 ⟶ 영지(靈知)한 마음
↳ 무기
제1단계에서는 생사(生死)에 물든 마음이 일어났다(起) 사라졌다(滅)를 반복할 때, 참선자는 힘을 다해 화두를 들면, 생멸이 다하게 된다. 만약 이때 화두를 들지 않고 생멸하는 마음에 끌려가면, 육도의 윤회에 빠지게 된다. 마음이 산란함을 화두로 대치(對治)함으로써 마음의 공적(空寂)을 이룰 수가 있다. 여기서 공적이란 마음이 텅 비워지고 산란함이 사라져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로서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2단계에서는 일단 마음이 고요해진 선정 상태(空寂)에서 출발하는데, 이때도 역시 지속적인 화두를 참구하게 된다. 만약 이때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에 떨어진다.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있어서 어둡지 않고 환하게 밝아진 것을 ‘신령한 지혜(靈知)’라고 말한다.
이러한 화두 참구의 구조는 조사선의 수증구조와 동일한 지평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마 이래 중국 선종의 수증 방편의 핵심이 다름 아닌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있기 때문에, 간화선에서 화두참구의 구조 역시 이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깨달아 알고(念起卽覺), 깨달으면 바로 없어진다(覺之卽無).”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의 반조(返照)이다. 공안이나 화두에 의해 물음이 주어지고 이 물음에 의해 자심을 반조하는 형태로 수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반조하여 바로 대오(大悟)하면 생사가 타파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화두를 참구하여야 한다. 다만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지속적으로 참구하게 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언구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기본으로 전제되어진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혜선사가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 화두는 “있다는 구절(有句)과 없다는 구절(無句)이 마치 등나무가 나뭇가지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을 때에는 어떠한가?”라는 것이다. 공안의 일구(一句)인 화두를 의심하므로 해서 참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화두 참구의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항상 의심이 순일하게 지속되게 한다는 의미의 “시시제시(時時提撕)”이다. 곧 언제 어디서나 늘 화두의심이 현전하게 하여 “하루 24시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끊어짐 없게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화두의 의정이 타파되는 그 순간까지 끊어짐이 없이 한결같이 이어져 가야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간화행자는 참구함에 오로지 화두의심에 전심전력할 뿐 분별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생각 생각에 간절히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어 나가서 한 티끌의 망념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재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간화행자는 오로지 화두에 전념해야 할 뿐, 의식으로 분석하고 추리해서는 안 되며, 또 마음으로 이해하고 추측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분별망념을 화두일념으로 모아 마치 쥐가 쇠뿔의 덫에 들어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벽에 부딪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일체의 분별의식을 멈추고 오직 의심만 남게 하여 종국에 철저히 의단(疑團)으로서의 일념만이 역력(歷歷)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화두를 참구함에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간절하게 밀고나가야 한다. 간절하게 의정이 지속되어 마음의 길이 끊어지게 되면 조사의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한결같은 지속심이다. 이것을 “무간단(無間斷)”이라고 하는데 간단(間斷)이 없다는 것은 곧 “틈이 없다” 혹은 “끊어짐이 없다”는 말이니, 화두참구가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쳐야 한다. 옛사람들은 참선할 때 끊어짐 없이 참구하는 모양을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혹은 “닭이 알을 품을 때”에 비유해서 말하곤 한다.
무릇 참구하는 공안위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듯 하며, 굶주린 자가 밥을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해야 하며, 어린 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투철히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참구함에 있어서 뜻대로 잘 되지 않는데 있다. “1년 참구하면 초참(初參)이요, 2년 참구하면 구참(久參)이요, 3년 참구하면 불참(不參)이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신심을 내어 조금 참구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지속심(持續心)을 잃어버리고 그만 퇴굴심(退屈心)을 내고 만다.
물러난다(退屈)는 의미는 보리심이 물러난다, 장원(長遠)한 마음이 물러난다, 정진하는 마음이 물러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 예배하기도 싫고, 선지식을 친견하기도 싫고, 도우(道友)를 가까이 하기도 싫고, 화두를 들기도 싫고, 그저 마음대로 방탕하고 싶은 마음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마음은 똑같다. 마음껏 놀고 싶고, 마음껏 편하고 싶고, 마음껏 먹고 싶고, 마음껏 자고 싶어, 이대로 살다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퇴굴심이다. 지철선사는 이렇게 퇴굴심이 일어나는 것은 “용심이 너무 지나쳤거나 혹은 숙세의 업장은 깊고 선근이 미약한 탓”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때에는 불보살전에 나아가 간절하게 발로(發露)참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참회하고 불보살이 도와주실 것을 기원하며 다시 용맹스럽게 화두를 들게 되면 망념이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사라지고 의정이 순일정념(純一淨念)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만약에 이와 같이 화두를 참구하는데 의정이 사라지고 화두가 잘 들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혜선사는 이러한 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생사대사(生死大事)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그 어떠한 화두라도 자신의 나고 죽는 문제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사를 보는 것이야 말로 “생사화두(生死話頭)”를 참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가장 큰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제기되어지는 것이 생사의 일이라면 생사화두가 현성공안이 되는 것이다. 대혜는 생사대사(生死大事)로 귀결되는 현성공안의 “생사가 겹치는 곳(生死交加)”에서 참구하여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옮겨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태어난 곳을 모르고 죽어 가는 곳을 몰라 의심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생사가 겹쳐지는 때(生死交加)이다. 이때를 당하여 반드시 생사가 겹쳐지는 곳을 향해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하여도 화두가 되지 않고, 공부를 하여도 공부에 진전이 없을 때 물러나지 말고 더욱 용맹심을 내어 생사를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생사가 겹쳐지는 곳(生死交加)”에서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넘어가야 한다.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심이 이어져 한 덩어리(打成一片)가 되니 털끝만치도 그 틈이 없게 되는 것이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쫓아내도 쫓겨나지 아니하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늘 앞에 있되, 마치 물을 따라 흘러가는 배와 같아 전혀 손 쓸 데가 없는 바로 이때가 힘을 얻는 시절이다.
화두를 참구함에 화두 하는 자(能)와 화두 됨(所)이 하나가 되어 의정(疑情)이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덩어리)이 되어야 한다. 즉 자신이 의심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의정이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 함에 힘을 덜게 된다. 화두참구에 힘을 덜고(省力) 힘을 얻으면(得力) 화두를 억지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게 된다. 이것을 “자연화두(自然話頭)”라고 한다. 자연화두란 억지로 참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다만 바른 신심을 발해서 진력하는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있으면 저절로 화두(自然話頭)가 현전하리라. 만약 용을 써서 화두를 들 때에는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하리라.” 즉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는 때가 되면 세월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자연화두로 간격 없이 깨어있는 상태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표현한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화두가 한결같아(話頭一如) 일체 번뇌망념을 여의어 고요한 상태를 적적(寂寂)이라 하고, 의정이 한결같이 지속되어 화두로 깨어있음이 성성(惺惺)의 경계이다. 이는 곧 적적하면서 성성하고(寂寂而惺惺), 성성하면서 적적한(惺惺而寂寂)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가(永嘉)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고 성성망상(惺惺妄想)은 그르며,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옳지만 적적무기(寂寂無記)는 그르다”고 말했다. 이미 고요한(寂寂) 가운데 멍하니 있는 상태(無記)를 용납하지 않고, 또렷한(惺惺) 가운데 어지러운 생각(亂想)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든 망심이 어찌 일어나겠는가?
깨어있는 가운데 고요해야지 망상으로 산란함은 잘못된 것이며,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어야지 아무 생각 없음(無記)에 빠짐은 잘못된 것이다. 즉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고요하되 화두로 깨어있고, 화두일념으로 깨어있되 경계에 걸림이 없어 항상 고요한 순일무잡(純一無雜)의 상태로 화두함을 말한다. 화두를 함에 있어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상태가 유지 되지 않으면 혼침(昏沈), 도거(掉擧), 무기(無記)에 빠지기 쉽고, 또한 마군의 경계에 침범당하기 쉽다. 몽산덕이 역시 번뇌가 쉬어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현전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고요함(定) 가운데 반드시 화두가 현전해야 한다. 고요함(定)을 탐하여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 화두를 잊으면 공(空)에 떨어져 도리어 고요함이 미(迷)하게 된다. 고요함(定) 가운데서 힘을 얻기는 쉽다. 그러니 반드시 성성(惺惺)하여 어둡지 않아야 한다.
고요한 가운데 힘을 얻기는 쉬우나, 또한 그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혼침(昏沈)이나 무기(無記)에 떨어질 염려가 있다. 그래서 고요함 가운데(寂寂) 항상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몽산화상이 말한 “참선의 묘(妙)는 성성(惺惺)함에 있다”는 말의 의미이다. 사실 남종선의 “정혜등지(定慧等持)”의 사상에서 볼 때, 선정(禪定) 가운데 지혜(智慧)가 현전하고, 지혜가 현전하는 그것 역시 선정을 여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선가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화두참구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빈틈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마음의 길이 끊어지는 화두삼매(話頭三昧)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하면 화두할 때 화두 함(能)과 화두 되어짐(所)이 하나 되어 주객(主客)과 능소(能所)가 끊어져 일여함이 화두삼매인 것이다. 즉 화두가 일여한 경계에 이르러 화두 하는 자도 없고(能空) 화두 함도 없으니(所空), 움직임(動)과 고요함(靜) 밝음(寤)과 어두움(寐)이 함께 공(空)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며,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실은 움직임(動)도 없고 고요함(靜)도 없으며, 깨어있음(寤)도 없고 잠듦(寐)도 없는 화두삼매(話頭三昧)가 현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