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여행6 - 이스이엔 옆에 요시키엔을 보고 걸어서 도다이지 절에 가다!
2024년 11월 23일 교토에서 나라역(奈良駅) 에 도착하여 사쿠라이역 (櫻井駅) 근처 하세데라
(長谷寺장곡사) 를 구경하고는 돌아와 호텔에 체크인후 덴푸라 우동을 먹고는......
고후쿠지興福寺(흥복사) 와 나라공원(奈良公園) 을 거쳐 이스이엔(依水園 의수원) 에 갑니다.
몇 번이나 물어서 골목 중간에 자리한 이스이엔 (依水園 의수원) 에 1,200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초가 지붕의 일본 고유양식인 집이 한 채 나타나는데 뒤돌아가니 연못 이
보이니 입장료가 비싼 탓인지 사람의 인적이 없는 고요함 그 자체인데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이스이엔 (依水園 의수원) 은 에도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전원(前園) 과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진 후원
(後園) 이라는 두개 지천 회유식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산슈테이(三秀亭 삼수정) 에서 연못
을 바라보는 단풍도 멋지지만, 연못이 앞에 있고 산슈테이를 배경으로 한 풍경도 촬영 스폿이랍니다.
이스이엔을 나오니 바로 옆에 요시키엔 (吉城園 길성원) 인데 옛날에 왔을 때를 회상해 보는데....
고후쿠지(興福寺 흥복사) 의 고승 마니슈인이 거주했던 전통 일본식 정원 으로 미로 같은
꼬불꼬불한 길들이 오르내리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정원이 나타나니 둘레길을 걷는 기분입니다.
마당에는 솔이끼가 깔려 있으며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풍취를 자아내는데 조금
높은 언덕에 팔각형 정자가 지어져 있어 앉아서 내려다 보며 구경
하니 편하고 좋은데...... 의자는 나무를 이어 붙인게 무척이나 운치가 있습니다.
중국 상해의 예원과 베이징의 이화원, 소주의 졸정원, 난징의 잔웬정원 과 전장의 자오산정원
을 보았으며 일본에서는 3대 정원인 가나자와시의 겐로쿠엔, 오카야마시 고라쿠엔,
그리고 미토시의 가이라쿠엔에 야마구치 조에이지 절과 교토 킨카쿠지와 긴카쿠지를 보았습니다.
거다가 가마쿠라의 겐초지와 교토의 료안지 절 과 헤이안진구의 신엔을 보았으며 이번 여행
에서는 하라다니엔과 과 텐류지의 소겐치 정원에 여기 이스이엔과 요시키엔을 봅니다.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동양 3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원을 만들었는데
서양의 정원 문화 와 다른 점은 "정신적인 관점" 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양 전원들이 "조형미" 를 살린 서양의 정원 과는 다르게 동양은 자연 친화적
이며 권위적이기 보다는 ......인간 중심적으로 정원에서
명상 과 함께 자연을 생각하면서 보는 기쁨을 얻는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동양 3국의 조경은 "도가" 사상 혹은 "선" 사상의 영향으로 비정형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많습니다.
3국에서 공통적으로 쓰인 자연적 요소는 "수목과 물 그리고 암석" 이라고 생각되는데.....
중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는 소주의 "졸정원과 유원, 이화원, 승덕 이궁" 입니다.
다시 걸어서 골목길을 통과해 빠져 나가니 저만치 도다이지 東大寺(동대사) 절이 보이기로 큰 문으로 들어
가니 많은 관광객 속에 인도인 아니 방글라데시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는게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차분하게 둘러보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문은
도다이지의 난다이몬(南大門) 인데 우린 안으로 들어온게 아니라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난다이몬(南大門) 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긴 참배로
를 걸어서 목조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대불전으로 갑니다.
도다이지 (東大寺 동대사 とうだいじ ) 는 일본 화엄종(華厳宗) 의 대본산으로 일본의 호국불교를
상징하는데 일본을 비롯해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대불전(大仏殿/ 다이부쓰덴) 과
최대 크기의 청동 불상, 그리고 거대한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난다이몬)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도다이지는 큰 절이니 그 밖에 이월당, 삼월당, 계단당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크기
에서 비견될 만한 건물로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에 있는 고에이도가 있습니다.
1709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대불전을 재건한 뒤 200년간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었으나,
현대에 스페인의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 미국의 틸라묵 항공 박물관
(Tillamook Air Museum) 그리고 노르웨이의 미에스토르네 (Mjøstårnet) 빌딩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법당으로서는 아직도 대불전(大仏殿) 이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인데, 8세기 도다이지(東大寺)
낙성식은 일본 승려들은 물론이고 신라, 발해, 당나라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온 승려들
뿐만 아니라 인도,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의 승려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유명한 국제적인 행사였습니다.
도다이지(동대사) 건축에 신라 출신 목수가 총감독을 맡고, 거대 불상은 백제 출신이
디자인 했다고 하며, 사자 석상의 경우 송나라 출신이 작업했으니....
1300년전 바다를 건너온 중국에서 시작된 불교 문화는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 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된 긴쇼지(金鐘寺, 금종사)
를 그 기원으로 하며.... 대불전(大仏殿) 은 758년에 준공되었으니
최초로 세워진 대불전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도다이지(東大寺 ) 는 쇼무 덴노가 구니(國) 마다 세운 고쿠분지 (國分寺, 국분사)
의 수장으로 덴노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 후에 2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현재는 대불전과 이월당과 삼월당, 남대문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인데.... 과거의
위상은 다이부쓰덴(大仏殿)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불전(大仏殿)의 첫번째 화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1년 헤이시(平) 정권이
난토(南都) 의 승병들을 추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승병 진압을 띠고 난토로 파견된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가 한밤중에 기습을 앞두고
"불을 밝히라 (횃불을 가져오라)" 고 한 것을 부하가 "전부 불태워라" 로
잘못 알아듣고는 불을 놓은 것이 온 경내로 옮겨붙어 절이 통째로 불타 버렸다고 합니다.
석달 만에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망한 뒤에 시게히라도
겐지(源) 군에게 포로로 잡혀 난토로 호송되어 분노한 승병들에게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화재는 센고쿠(戰國) 시대에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1567년에 일어났다고 알려졌으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미요시측의 키리시탄 (크리스챤) 에 의한 방화 라고
말했으며 최근 연구에서 실화에 의한 불이 도다이지 주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대불전도 이
화재에 불타버렸다고 추측되고 있어 히사히데의 직접 범행을 증명해주는 증거는 희박하다고 합니다.
화재 2번은 모두 승병뿐 아니라 다이부쓰덴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들도 2천여명에
달했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았으니..... 현재의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된 세번째 금당 입니다.
현재의 대불전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인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이는데, 이때 대불전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는데....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 m, 측면 50 m, 높이 489 m 에 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번째 도다이지 대불전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方広寺) 대불전을
건립하였고, 1592년에 '게이초 후시미 지진(慶長伏見地震)' 으로 붕괴
되었으니 불상도 가슴이 무너지고 왼손이 떨어지며 온몸에 금이 가는 대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라 지키라고 만들었더니 네 몸도 하나 못 지키느냐?"
라고 외치며 불상의 미간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는 야사가 있으며 이후
1610년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됩니다.
남대문과 대불전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 (다이부쓰요)> 으로,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다르며,
일본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니,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인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이 연결하는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대불전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 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었으니, 대불양식은 8세기에 지어진 도다이지가 불타버리고 다시 지은 12-13세기에
나타난 양식으로...... 처음 때의 양식과는 다소 다른데, 첫번째 재건 당시 지어져 지금까지 남은
남대문과, 한번 더 불타 사라지고 에도 시대에 2번째로 재건된 다이부츠덴 역시 이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불전은 1709년 세번째로 재건된 것으로 과거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2천톤에 달하는 기와 무게 때문에 지붕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
불퉁하게 흐트러지니.....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메이지 유신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정적 문제도 있었고 버팀목을 바쳐
놓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현대의 대불전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74~1980년대에 재건됐습니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근대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으니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나무 여러개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기와 수를 줄여 지붕 무게를 12% 감소시켰으니 몇몇 사람들은 현대 건축물로 보기도 하나 유용한
신기술이 들어왔는데도 써먹지 않는게 더 이상한 노릇이고 고딕 성당처럼 지어진지 수백년이 넘은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리· 개축 과정을 거치며 해당 시기의 유행 및 기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불전 안에는 높이 14.9 8m에 무게 452 t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청동 대불 역시 여러번 화재 등으로
부분이 녹거나 파괴되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상당한 크기기 때문에 일부분은 남아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현재의 대불은 1691년에 완성된 것으로, 불상의 하부는 처음 만들어졌던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특히 불상이 앉은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거대한 손바닥에는 성인 16명이 올라갈 정도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대불의 좌우에 허공장보살과 여의륜관음을, 대불 뒷편으로는 광목천왕상과 다문천왕상을
모셨으며, 남대문에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금강역사 입상이 2좌가 있고 또
대불전 명물로 구멍이 뚫린 기둥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치 액땜을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성인이 들어가면 다리가 움직일 여유 공간이 사라지면서 팔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니, 팔 힘이 보통 이하라면
상대방이 반대편에서 팔을 당겨줘야 간신히 빠져나올수 있는데, 들어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오기에는 체력이 받쳐 주지 않고서는 힘들며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불전 앞마당에는 청동 등이 하나 서 있는데, 대개 모르고 지나가지만 국보이니, 도다이지에서
몇 안되는 나라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로 조각이 아름답고 글씨도 새겨져 있으며
그 밖에도 중문과 좌우 회랑에다가 대불전 좌우의 불상 모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