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에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2차례에 걸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했으나 그것은 외교적인 교섭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1880년 12월 근대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한 후 서구문물의 조사를 위해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은 조준영(趙準永)·박정양(朴定陽)·엄세영(嚴世永)·강문형(姜文馨)·조병직(趙秉稷)·민종묵(閔種默)·이헌영(李永)·심상학(沈相學)·홍영식(洪英植)·어윤중(魚允中)·이원회(李元會)·김용원(金鏞元) 등 12명을 민정시찰을 위한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의 국정을 살피도록 했다. 이 시찰단은 모두 전문위원인 12명의 조사(朝士)와 수행원인 수원(隨員) 2명, 통역관인 통사(通士) 1명, 하인 1명으로, 한 반을 5명으로 편성하여 전체 12반 62명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계통적인 일본 시찰계획이 암행어사로 위장하여 극비리에 추진된 것은 당시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개되고 있어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박정양(朴定陽)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의 정치가이다.
이들 시찰단은 일본의 정부 수뇌들과 접촉하고 각기 분담하여 정부 각 부처의 실무를 자세히 조사했는데, 박정양은 내무성 및 농상무성, 민종묵은 외무성, 어윤중은 대장성, 조준영은 문부성, 엄세영은 사법성, 강문형은 공부성, 홍영식은 육군, 이헌영은 세관 등을 각기 담당분야에 대하여 책임지고 시찰을 해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들은 4월 28일 일본 도쿄[東京]에 도착하여 74일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부의 각 분야를 시찰했으며, 귀국 즉시 각자의 여행기인 문견기록과 함께 시찰보고서를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했다. 이들 기록은 100여 책에 달하는데, 시찰기류(視察記類)와 견문사건류(見聞事件類)로 크게 구별된다.
시찰기류에 나타나듯이 중앙정부의 각 관서를 비롯하여 포병공창 등 산업시찰을 했으며, 도서관·박물관 등 문화시설도 골고루 조사했다. 특히 송헌빈(宋憲斌)의 〈동경일기 東京日記〉, 강진형(姜晉馨)의 〈일동록 日東錄〉 등과 같은 일본견문기가 있으며, 일본의 근대농법을 소개한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 農政新編〉 등은 이후 국내의 개화 풍조를 고조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사유람단원들은 대개 정부 내의 중견관료로 구성되어, 1882년 1월에 통리기무아문 각 사(司)의 개편에 따라 조사 12명은 각기 그 해당 부서의 요직에 배치된 뒤 개화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1880년대 이후 정부집권관료층 안에서 자주적인 국내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