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다 놨다 / 김정숙 (2023. 10.)
오늘도 종일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도다리
운명에는 예고가 없다. 구룡포 앞바다를 누빌 때만 해도 이리될 줄 몰랐을 거다. 넓죽하고 도톰한 몸피가 족히 여러 해를 산 월척이다. 그동안 숱한 고비도 있었겠지만, 갯지렁이의 유혹을 집어삼킨 선택은 비참했다.
조카가 이모부 안주로 큰 도다리를 두고 갔다. 솜씨가 부족한 탓에 제때 음식이 되지 못하니 냉동실 자리만 차지한 지 삼 년째다. 몇 번을 버릴까 했어도 멀리서 달려와 준 조카의 마음이 고마워 매번 들었다 놨다 한다.
한복
색이 참 곱다. 당신 아들과 결혼하겠다니 어려운 형편에도 보내 주신 예단이다. 옅은 주황색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 지금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때깔이다. 세월은 지났어도, 한복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보따리가 풍성했다. 참기름, 들기름, 삭힌 깻잎 김치와 어설픈 애호박까지. 때 이른 봄 산에서 다래 순과 취나물을 꺾을 때나. 가을 들판에서 단풍 든 깻잎을 딸 때도 어머님 마음은 하나였을 것이다. 번듯한 곳간은 없지만, 뒤뜰 항아리는 비워두지 않으려 애쓰셨다. 끝없이 내어 주면서도 미안해하시던 어머님.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이다.”
남달리 말씀이 없는 분이라 이 한마디로 마음을 전하신다. 정성껏 싸 주시는 무딘 손끝은 ‘잘들 살아라.’ 하는 바람이 함께 한다. 내리사랑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는 돈을 덜어내지 못한 죄송함과 부끄러움. 바라만 봐도 얼굴이 붉어지는 한복이었다. 이젠 입을 수 없지만 들었다 놨다. 다시 들었다 놨다 한다.
전자레인지
기억 속 어색해 보이는 사진 한 장.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 오른손엔 아직 걸음이 서툰 큰아이가 손잡고 있다. 옆에서 큰 상자를 이고 있는 노모는 힘겨운 표정이다. 커다란 빌딩과 많은 사람이 오가는 용산 거리. 화려하고 분주한 도심 속을 어울리지 않게 그들만이 허우적댄다.
서울로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돼 엄마가 오셨다. 모아둔 용돈으로 살림살이 하나를 장만해 주고픈 마음이 컸나 보다. 마을버스에 지하철까지 타고 큰 시장까지 가서 전자레인지를 샀다. 그 무거운 물건은 엄마의 땀으로 택시비를 대신하고 우리 집에 자리 잡았다. 전자레인지를 옮겨야 할 때마다 무게에 놀라 미안하고 죄송함이 묻어난다. 엄마의 시간은 항상 네 남매를 등에 업고 바윗덩이 무게에 눌려 사셨을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시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이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엄마. 너무 낡아서 들었다 놨다 할 수밖에 없는 저 전자레인지.
보따리
이사를 결정하고는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은 오래된 살림들을 몽땅 정리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달라지는 게 없다.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데 버릴 것과 가지고 갈 것조차 결정하지 못한다. 추억도 미련도 떨치기 힘드니 짐은 쉽게 줄지 않는다.
여기저기 사연이 널려있다. 깨알같이 저장된 그 날의 기록이 다시 소환된다. 함께 나누었던 마음이나 감동들. 깔깔대며 웃었던 그 순간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잘것없는 물건도 정을 덧입히니 귀한 존재가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향한 응원이었고, 내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까지 오는 원동력이었다.
물건도 나처럼 늙어간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억은 항상 그때 그 순간이다. 버려야지 다짐한다. 아직 마음의 유효기간이 남아있는지 종일 망설인다. 살림은 그대로다. 또다시 서성인다.
들었다 놨다 하는 과정의 반복이 인생이 아닐까. 애써 정리하기보다 자연스레 흘러가게 두어야 하지 않을까. 찐빵, 부침개, 떡 등 얼어있던 추억들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하염없이 먹는다. 아까워서일까. 미련 때문일까. 차마 정리하지 못한 마음 탓에 늦은 밤까지 퀭한 눈으로, 사연들을 꼬깃꼬깃 챙긴다.
끝없이 들었다 놨다 한다. 내 마음까지도
첫댓글 김정숙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서도 자주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