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청주]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55, 10 - 11
† 복음 : 마태 6, 7 - 15
★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충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룬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자세와 함께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큰 흐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주인으로 계시듯, 이 땅에서도 세상의 주인이
되시도록 필요한 은혜(일용할 양식, 용서, 항구한
의로움, 구원)를 청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도할
때에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분께서는 실제로 수난 전날 저녁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그럼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까? 기도를 하며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까?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사는 것인데, 정작 그 기도를 바치는 우리 자신은
그러한 마음 없이, 오히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사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문의 내용과는 다른 지향을 두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 참다운 기도가 아닙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 6,7-15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어제는 제 동창신부들과 함께 양평에 다녀왔습니다. 10년
전 뜻밖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먼저 간 동창신부의 부모님께
세배를 하기 위해서이지요. 주님 곁으로 간 동창신부를
대신해서 매년 세배를 드리러 갔는데, 작년에 부모님께서
양평으로 이사를 가셔서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먼 거리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평까지 가는 길, 약 1시간 30분 정도 가는 길에서
자주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부모님께
세배하러 가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갑자기
우리의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 창밖으로 쓰레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 속도를 내지 못해서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는 차 등등을 보면서 나쁜 마음이 문득문득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불쾌한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지요.
문제는 차를 타고 있었던 다른 동창신부들도 제 말에
동조하면서 문제의 차와 사람을 탓하더라는 것이지요.
마음은 이렇게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좋은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반대로 나쁜 마음은 나쁜 마음으로 전달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인간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에 따라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처럼 나쁜 쪽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은 세상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기 위해 어떻게든 다른 이들을
누르고 첫째 자리에 서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삶은
우리를 너무나도 힘들게 만들뿐입니다. 반대로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굳이 다른 이들을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기억들이,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의미 있는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기억하는 적극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억, 좋은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아닌 사랑의 관계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의 말미에 용서에 대한 말씀을 넣으셨지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잘 기억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좋은 마음은
내 이웃들에게도 온전하게 전달되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곳곳에 알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 용기 있게 사는
것이다(스티브 잡스).
우리보다 먼저 주님 곁으로 간 동창신부 부모님과의 식사.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방법
부모님께 대드는 아이들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자신의
부모는 너무 고지식해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 한 마디에 그대로 토를 달고 싸우듯이
대듭니다. 그러나 아빠 엄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이
있을까요? 부모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컸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부족한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응원해주는 분은
부모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이렇게 부모님께 대드는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께도 대들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대화를 직접 나눌 수 있는
부모에게도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도 않고
말씀도 전해주지 않는 하느님께 충성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느님 없이 우리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까지
희생하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만 묵상하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마치 부모에게 대들 듯이
하느님께도 대듭니다. 왜 차별 하냐고, 왜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왜 세상의 기준을 채워주지
않으냐면서... 온갖 불평불만을 하느님께 내던집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듯이, 하느님의
사랑 역시 우리의 삶 안에서 쉽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 역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2013년 다해 2월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강조하십니다.
‘빈말’이란 어떤 말입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 실현할
의지가 조금도 없는 말을 빈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자주 쓰는 대표적인 빈말은 아마도 이런
말들이겠지요. “언제 밥 한번 먹자.”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제가 기도할게요.”
하루 온 종일 머릿속은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하느님께 할애하는 시간은 쥐꼬리만 하면서,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은 단 1분도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내 생애의
모든 것이신 주님!”이라고 외친다면 ‘빈말’뿐인 기도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신 말씀은 삶이 따라주지 않는 기도, 기도와
삶이 별개인 기도생활을 경계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진심이 담긴 기도,
진정성이 있는 기도,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기도와 삶이
일치하는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돈보스코 성인과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 창립한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녀가 남긴 기도와 관련된
일화는 기도가 부족한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한번은 한 자매가 당시 원장이었던 마자렐로 수녀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수녀님, 지금 몇 시예요?” 그랬더니
마자렐로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지금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마자렐로 수녀님께서 꽤나 슬픈 표정을 짓고
계셨답니다. 수녀님의 그런 모습에 걱정이 된 다른 수녀님께서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자렐로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이걸 어떡하죠? 제가 15분 동안이나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런 수녀님이야말로 “나의 주님, 내 생애의 모든 것이신
주님!”이라고 힘주어 기도할만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는 정녕 진심어린 기도, 진정성이 있는 기도,
참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시대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방인들이 드리던 기도는 정말 요란했습니다. 기도를
주관하는 지도자는 큰 목소리로 줄줄이 수많은 잡신들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불려나온 신들에게 때로 사정사정한다든지
때로 강요하고 압박을 가해서 억지로라도 청을 들어주게 하는
식의 기도였습니다.
가만히 따져보니 그들의 기도는 우리나라에서 무당들이 벌이는
굿판과 방식이 유사했습니다. 얼마나 억지스럽고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기도 습관은 자연스럽게
유다 사회 안으로 스며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말잔치뿐인 기도, 정말이지 납득하기 힘든 어색한 기도 앞에
기가 차지도 않았던 예수님이셨기에 올바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 우리의 모둔 근심걱정, 우리가 매일 지고
가고 있는 고통과 십자가를 환희 들여다보고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좋은 길, 결국
구원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애를 쓰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데 줄줄이 잡신의 이름을 불러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 데 수 백가지 걱정에
시달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는 일,
그분 사랑과 자비의 손길에 우리 삶 전체를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드릴 기도는 주님 의지에 우리 전체를 맡기는 일입니다. 그
겸손했던 샤를르 드 후꼬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게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승이의 눈망울
2013년 다해 2월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복음 : 마태 6,7 - 15
어떤 분이 성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절실해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당신은 꼭
들어주시는 분이시잖아요. 저는 꼭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요.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세요. 전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을래요. ...”
저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려 하다가도 그 사람이 그것을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거나 맡긴 것을 달라는 듯이 청하면,
왠지 기분이 상해서 해 주려던 것이 다시 주기 싫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 대해서는 그런 경우가
없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거나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당신의 자비가 크게 부각되는
것을 좋아하시지, 우리가 말을 많이 하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은총을 얻어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은총의 주도권자는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이래저래 한다고
해서 그분의 결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천만 관객을 향해 질주하는 영화 ‘7번방의 선물’
중에 잊혀지지 않는 눈빛연기가 있습니다. 바로 바보
용구의 딸인 ‘예승이의 눈빛’입니다.
용구는 큰 범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아 교도소
7번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 곳에는 그 교도소의 짱으로
통하는 조폭 밀수범 오달수와 다른 흉악범들이 있었습니다.
용구는 어린이 유괴, 강간, 살인이라는 죄목이 있었기
때문에 오달수에게 사람도 아니라며 심하게 구타를
당합니다. 그러나 본성이 착한 용구는 다른 조직이
오달수를 해하려 할 때 달려들어 용구를 구하고 자신이
대신 상해를 입게 됩니다. 이에 오달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답을 하려고 하는데, 용구의 청은 딸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소리 뻥뻥 쳐 놓은 오달수는
어쩔 수 없이, 용구 딸 예승이를 빵 박스에 넣어서
7번방으로 밀반입 합니다. 만약 이것을 들통 나면 7번방에
있는 모두가 커다란 질책을 받을 것도 분명하고 광복절
특사와 같은 것도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방에 있던 한 명, 다혈질 모범수 신봉식이 간수가 지나갈
때 이 소리를 질러 간수를 부릅니다. 같은 방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설득하고, 말하면 죽는다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봉식은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특사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수가 문 앞에 서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섭니다. 그 때 문 밑에는 예승이가
신봉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봉식이 이 방에 아이가
있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 아이는 신봉식의 손을
잡으며 어른들은 가질 수 없는 맑고 애절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봅니다. 이 때 간수는 자기를
왜 불렀느냐고 신봉식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신봉식은
주저하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저 ... 저 ... 빵 하나만 더 주세요 ... 흑 흑”
교도관은 “니가 쟝발쟝이냐?”하며 자기 모자 속에 있던
빵을 구겨서 신봉식 입에 처넣습니다.
신봉식의 마음을 돌린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설득이 아니었습니다. 안 들어주면 안
믿겠다는 으름장도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다만 ‘다 아시잖아요. 아빠가 절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잠시만 아빠와 함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 담긴 순결한 어린이의 눈망울이 모범수 신봉식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빼놓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기도의 말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나만의 기도
방법을 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는 한 신부님이 자기 성당에 이상한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한 자매님이 마치 교주처럼 “옜다! 기도
받아라.”라고 하며 기도 할당량이 적힌 쪽지를 나누어
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기도를 하고 나중에
그 자매에게 다시 보고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려
20~30명이 그 한 사람에게 그렇게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신통해도 이건 아닙니다. 기도는 얼마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승이처럼 청하는 사람이 ‘얼마나
깨끗하냐’, 또 ‘얼마나 절실하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말이나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고 사랑스러워야 들어주고 싶고, 또 그만큼 애절하면
하느님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기도를 잘 해서
은총을 ‘얻어 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은총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주인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맡겨놓은 무엇을 청구하는 것이
청원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위해 기도할 때 먼저 ‘예승이와
같은 눈망울’이 있는지부터 자신을 살펴봅시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루 먹을 것만 있는 마음은
2013년 다해 2월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하루 먹을 것만 있는 마음은
하루 먹을 음식만 있다면 그 음식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하루 먹을 것만 있다는 마음으로 음식을 소중하게 먹으면
좋을 겁니다. 먹을 음식이 언제나 넉넉하게 넘친다면
거기에서 그칠 인간이 아니지요.
욕심이 눈을 뜨면서 돈 명예 권력 멋내기 등으로 치닫기
시작할 거고요. 윤리적 혼란을 일으키며 사회를 부패의
바람으로 오염시킬 겁니다. 그러나 하루 먹을 것만 있는
마음은 맑은 눈과 귀를 갖게 될 겁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마태오 6,11)”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묵상 글 -
◈ [대구] 용서의 삶
배 한 척이 캄캄한 어둠을 헤치며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장의 눈앞에 밝은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불빛과 충돌할 상황이었습니다. 선장은 급히
무선 장치로 달려가 항로를 동쪽으로 10도 틀라는 긴급
메시지를 상대에게 보냈습니다. 몇 초 후에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항로를
서쪽으로 10도 트시오.” 화가 난 선장은 다시 암호문을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그러니 당신이 항로를
변경하라.” 몇 초 후에 두 번째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등 수병이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항로
변경하십시오.” 함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이 배는 전함이야! 우리는 항로를 바꿀 수
없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우리도 이 해군 함장처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온갖 이유를 대면서 내가 바뀌기를 거부합니다. ‘나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나한테 너무 못되게 굴었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내가
항로를 바꿔야 합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불행과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자면,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워하는 그 사람을 더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다음 날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 주요한 신부(대구대교구 효성중학교 교목실장) -
◈ [기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2013년 다해 2월19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마태 6,7-15)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이 세상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본당마다 한 달에 한번 어르신들이나 병자들을 위한
병자영성체가 있습니다. 병자영성체를 하다보면 어르신들
중에 마귀의 유혹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평소와 다르게 성체를 영해드리려 할 때 입을 다물고
거부합니다. 심한 경우는 저를 때리기도 합니다.
단순히 치매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이 그 영혼을 데려가기 위해서 방해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때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혹은 머리에 손을 얹고
구마기도를 바치거나 혹은 같이 성모송을 바치자고 청하며
기도하면 이내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성체를 다 모신 후 깊은 한숨을 쉬시며 안도하기도 하십니다.
심한 경우는 십분 이상도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임종자들의 경우는 더 심한 경우도 많습니다. 심한 경우는
얼굴에 이빨자국 비슷하게 내며 그 영혼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인내를 갖고 그분의 곁에서 성가와 묵주기도를 바치며
천사들과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면 그 영혼이 힘을 입게 됩니다.
마침내 일그러졌던 얼굴이 펴지고 평화가 느껴지게 됩니다.
마귀 사탄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듯이 그 죄 값을 요구하며
끝까지 그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려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는 빠지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는 구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수한 유혹에 자신을 맞기며 깊은 통회 없이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래서 삶도 변하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세속적인 쾌락과
비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체험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영혼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곁의 오른 편의 죄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자비를 청하지만, 왼쪽의 죄수는 죽으면서 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회개한다는
생각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통회하고 회개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내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
하느님 나라가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회개하지 않고, 그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나에게 너무나도 먼 곳이고,
그곳에 가도 어색해서 지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제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제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지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한 번 생겨난 것은
- 이해욱신부
<후속> 19. 한 번 생겨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한 번 생겨난 모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모습을 달리할 뿐입니다."
외부로부터 생겨난 것이든, 내부로부터 생겨난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생겨난 모든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겨났다"는 것은 인식(認識;사물을 깨달아 아는
일)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해하고 판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나 물소리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건축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듣고 시끄럽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고 행복을 느끼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미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하며
미워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음란한 생각으로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난폭한 운전으로 위험을 초래한 운전자에게 마음속으로
욕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정말로 나도 한 번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해 보고 싶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생겨난
것입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은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악마로부터
생겨난 모든 악한 것도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지향을 지니고 되풀이 하는 "화살기도"도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되풀이 한만큼의 효과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미사참례와 묵주기도도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선과 헌금과 봉사도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안에 쌓이고 또 쌓이고 자꾸
쌓이면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안에 쌓이고 또 쌓이고 자꾸
쌓이면 내가 악인이 됩니다.
음란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안에 쌓이고 또 쌓이고 자꾸
쌓이면 내가 색광이 됩니다.
폭력게임과 음란영화가 뇌리에 쌓이고 또 쌓이고 자꾸
쌓여 오늘날의 끔찍한 성폭행과 엽기적 살인이 일어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청취생심(聽取生心)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도 될 듯합니다.
자꾸 보고 듣고 하면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 안에
자꾸 쌓이어 언젠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겨난 모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모습을 달리할 뿐입니다."
접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에 들어온다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귀에 들린다고 그냥 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가려서 듣고 가려서 보아야 됩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거룩한 것을 자꾸 보고 듣고 해야 합니다.
나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을 자꾸 자꾸 멀리하고 피해야
합니다.
아침을 시작하는 시간을 TV에 나타나는 세상의 얼룩진 모습과
소식을 접하기보다, 창을 열고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며
"온 세상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를 노래하며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백배 더 낫습니다.
집에 돌아와 사랑과 재물과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과
질투와 시기와 중상과 모략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비인간적
TV 드라마에 빠지는 것보다 재미있는 내셔널지오그라피,
히스토리, 다큐 채널 등이나 아니면,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 채널을 접하는 것이 백배 더 낫습니다.
눈에 들어온 모든 장면과 소리는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모습을 달리하여 내 안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숨어 있던 그것들이 언젠가 반드시 현실의 내
생활 속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초보인 분들을 잘 인도하여 주님께로 이끌어
드려야 하지만, 신앙인이라 하여 아무나 다 가리지 않고
만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너무나 세속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한 신앙인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영신생활적인 면에서는 더 중요합니다.
내 자신이 다른 이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그런 영성적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늘 주위의 모든 상황을 잘 가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거룩히 사는 신앙인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 영혼에
매우 유익합니다.
어느 분께서 "아휴, 사람이 사는 걸 그렇게 복잡하게, 이것저것
다 신경 쓰고 어떻게 사누?"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이 그만큼 소중한 인생이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이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인생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것이라면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되는 대로 쉽게 막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가리고 복잡하게 살기를 싫어하는 분일수록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시길 바랍니다.
왜냐구요?
하느님께 내맡기면 이것저것 복잡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더 나아가 내 안에서 나를
대신 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는다구요?
그렇다면 일단 한 번 내맡겨 보시라구요.
그렇게 되는가 아닌가 말입니다.
한 번 생겨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 하느님께
내맡기려는 마음으로, 또는 하느님을 한 번 사랑해 보려는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오니,
저를 이끌어 주소서!"나"주님, 제가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를약 3개월 정도 열심히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힘드시다고요? 당연한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힘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정도는
사실 힘든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얻는데 그 정도는 너무나
미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삶 즉,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보다는 좀 어렵습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他者에 의해서이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탈피(變態)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이 든다고 움직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돌(광석)도 내부에서 움직이고(파동)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든
내려가든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있다는 것은 곧 내려가는 것이며, 내려가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합니다.날개를 붙이고 조금 힘들어도 조금만
날아봅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날개’중에서)
조금만 날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뜻이 "양력(敭力)"이 되어
기가 막히게 잘 떠받혀 주십니다. 그 다음은 그 양력
(하느님의 뜻)을 타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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