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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51살에 備忘錄
오늘 저만큼 지나간 시간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놓고 마주 해본다.
이 시대의 한 여자의 남편
아이들의 아버지인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또 나의 부모님한테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리고 나를 아는 인연들은 또한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만의 존재에서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게 아마 가족이고 인간관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자신에 삶의 영역에서는 존재의 가치가 그 만큼 소중한지 모른다.
1956년5월2일 난 3남 3여의 형제 중에 막내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행운아 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막내둥이라는 특권이 그런 호사를 얻었는지 모른다.
자라면서 난 뭐든지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위로는 형님2 누님3 분이 있어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머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 워고 나만을 사랑해 주는 분이 였 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정말 열심히 사셨던 가장 위대한 아버지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꼼꼼 하시고 항상 남보다 몇 배는 더 열심이었던 아버지에 모습.
자린고비처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던 아버지의 모습.
난 그런 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답습 했는지 모른다.
각자 보는 시각에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난 아버지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선생님은 정말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으로 느꼈으며.
밥도 다르게 먹고 화장실도 틀린 줄 알았다.
적어도 중학교 정도 까지는 .
크리스마스 선물도 정말 산타가 주고 가는 줄 알았다.
금음날 일 찍자면 눈썹이 하야케 쉰다고 하는 말도 진짜인줄 알았다.
보름날 신발을 뒤집어 놓지 않으면 정말로 귀신이 내 신을 신어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 줄 알았다.
그만큼 어린 시절에 내 정신세계는 순수하고 깨끗했는지 모른다.
미신을 정말로 믿었던 저만큼 어린 시절
해 만지면 동내 성황당 앞길은 감히 지나가지도 못한 것 같다.
반딧불이 여름밤을 떠다니던 아득한 그런 시골 강릉에서 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며 우리를 키어고
철이 없던 시절에는 당연히 부모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어쩌면 부모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헌신적인 사랑인 아닌가 싶다.
난 부모님이 아끼고 사랑해 준만큼 부모님의 기대에 너무도 미치지 못 한것 같다.
없는 살림에 공부라도 시키고 싶으셨던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난 너무도 헤아리지 못한 것 같다.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었던지 일찌감치 학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길이 너무도 힘든 길임을 그때 깨 닿기에는 너무도 어리고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지금 내 삶이 힘들고 고단해도 난 결코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부모님에 뜻을 이해하고 알기에는 너무도 만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난 너무도 일찍이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시작 했다.
어쩌면 어린나이에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좀더 잘 살고 싶어 부모님과 고향을 떠났는지 모른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낮선 객지에서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서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나의 새로운 인생은 마치 독립투사처럼 용감했는지 모른다.
세워놓고 코 베어 간다는 낮선 서울 바닥에서 고단한 삶을 그렇게 시작 했는지 모른다.
가끔 눈 물젖은 빵 하고 말을 들으면 그것이 마치 내 인생인 것처럼
입안에 단 내나는 인내가 어쩌면 내 삶에 전부이고 미천 이었는지 모른다.
기숙사에서 쪽방에서 내 삶의 하루가 역사처럼 이어져 갔는지 모른다.
숫한 만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렇게 거친 서울 바닥에서의 인생 아마 그게 산전수전 이였을 게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져 가면서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은 둔해 지고 가끔은 잊고 지낸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도 어느 때에는 귀소본능처럼 너무도 고향이 그립고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는 단숨에 달려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난 큰 형님을 잃었다.
(1979음력7월6일)
나와는 15년 차이 형님은 39세 라는 나이에 위암으로 꽃다운 삶을 접어야 했다.
가족 사남매를 두고 이 세상에 마지막 삶에 물감을 던지고 그렇게 먼저 가셨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
아!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님은 어쩌고.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저 어린 조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형수님.
막내둥이는 아직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젖먹이 어린것.
모두 가슴에 너무도 큰 빈자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난 형님이 난 너무도 미웠다.
아니 눈물마저 말라버린 통한 에 시간들.
그렇게 멈추어버린 그해 가을
난 잠시 객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큰 형님이 이른 봄부터 시작해 놓은 농사일들을 수확했다.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보냈지만 해보지 않은 농사일은 너무도 힘들고 서툴기만 했다.
사람들은 흔히 하는 일이 힘들고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마다 에이~ 농사나 지으러 갈까, 하는데
세상에 농사만큼 힘든 일이 없다.
농사는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농사는 경험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철학과도 같은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 때를 얻었게 잘 잡을 수가 있나 에 따라 우리에 인생도 달라진다.
때를 놓치면 우리는 뒤로 처질 수박에 없다.
그해 가을 그렇게 서투른 솜씨로 부모님을 도와 가을 수확을 정신없이 끝냈다.
가을도 끝나고 초겨울로 치 닿는 한가한 틈을 틈타 고민스러운 번뇌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님을 도와 계속 농사일을 해야 하나?
아니면.
동지(冬至)로 가는 긴 긴 겨울밤 내내 뒤척이기를 여러 날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방에서는 부모님의 긴 한숨 소리와 눈물 찍어 내는 소리는 겨울밤이 깊을수록 괴로움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님에 마음은 엇떠 했을까?
세월이 한참을 지난 지금도 난 그 깊이를 헤아리기 가 어렵다.
마음에 상처가 너무도 깊었던 부모님은 어느 날부터인지 막내아들인 나까지 짝지어 보내고 싶다는
속내를 내 보이시며 아직 어린 나를 혼인시키려고 하신다.
아마 그래서 난 그때 철이 너무 일찍 들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고 마음에 짐을 덜어 드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륜지 대사라는 결혼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
내 생에 얼떨결에 선도 한번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봄부터 가을까지 한 해 동안 농사일을 하고
시골보다 도시생활에 익숙해 있던 나는 부모님에 권유로 농사라는 무거운 짐을 남기고 서울로 올라 왔다.
또다시 혼자가 된 객지에서 고단한 나의 삶이 시작 되었고
밤이면 고향에 부모님 생각
먼저 가신 형님에 대한 그리움 긴긴밤 눈가에 촉촉한 물기를 그렇게 흘렸는지 모른다.
아마 그게 원인 이였을까?
어느 날부터 두통에 시달리던 나는 급기야 회사에 병가를 신청하고 한양대학 병원 신경정신과에
입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름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두통은 쉽게 낳지 않았다.
퇴원하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두통에 시달리기는 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 이후 두통은 몇 해를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1982년 어느 해 봄 나는 지금에 집사람 중전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 여친 친구로 우리 집 쪽방에서 함께 밤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몇 해를 안 보이다가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집에서 다시 만나나게 된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젖고 급기에는 결혼까지 약속을 하고 그해 여름 강릉 집으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번갯불에 콩 복 듯이 그해 가을 9월9일 날 우리는 웨딩마치를 올리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총각시절 친구를 좋아했고 그러면 서 저축해 놓은 돈 한 푼 없이 결혼을 하고 나니 내내 걱정이 마음을 괴롭혀 는 지 모른다.
우리는 망우리 우림시장 언덕에 250만 원짜리 코딱지만한 전 세집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겨우 방 한 칸 빛도 안 들어오는 작은 방에 처마 끝에 매달린 부엌 신혼 때에는 제법 날씬했던 새댁 엉덩이도 조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곳에서 우리 큰애도 낳았다.
비록 없이 시작한 신혼살림이지만 적어도 그때 우리는 무지 행복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우리 집 맏이도 낳았다.
우리 큰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난 너무도 좋아 어찌 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혼자 웃음을 흘리곤 한다.
그리고 알뜰한 중전 덕에 우리는 이 태후 전세 일 천만짜리 아래층 독채로 얻어 이사를 했다.
방도 두칸 부엌도 별도 널찍한 거실에 실내에 화장실 까지 갖춘 적어도 그때는 궁전 같았다.
하루아침에 엄청난 부자 가된 기분이었고 역시 결혼이라고 하니 연탄집게라도 살림이 되는구나.
그리고 이사 간 집에서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큰 가마솥에 돼지머리를 삼는데 그만 가마솥 밑이 빠지는 꿈을 꾸었다.
그냥 일상적인 꿈이겠지.
그리고 다음날 정심 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우연히 신문을 폈는데 아파트 분양광고가 눈에 띄었다.
그 당시 내 집에 대한 관심이 누구 보다 만은 터라 관심 있게 보니 아파트 미분양 광고 이었다.
나는 잠시 하던 일을 미루고 아파트 모델 하우스가 있는 잠원동 으로 달려갔다.
좋고 많은 평수는 다 나가고 몇 개 안남은 중에 하나를 골라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19평 분양가가 2230만원 은행 기본융자 을 빼니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날이 9월 9일 결혼 만3년 만에 내 집을 장만 했다.
정말로 기뻐다. 아마 내생에 그렇게 좋은 날이 몇 번이나 될까?
맨 손으로 시작해서 얻은 내 생에 첫 집을.
집 사람도 좋아 했지만 주위에서 더 만이 축하를 해 주었다.
정말로 열심히 살아온 보람을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뭘 그 까짓것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그러나 싶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너무도 좋은 생에 첫 집이였다.
남에 집에서 세사는 사람들에 설음 아마 살아본 사람이면 기억들 하실 게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 주인집으로 전화라도 한번 받으러 가자면 이 눈치 저 눈치 다 보며 죄인 아닌 죄인처럼 낮추어 살아야만 했던 기억.
전기세 물세 화장실 등등.
그리고 1986년 우리는 새집으로 이사해서 그해 86아시안 게임도 즐겨다.
몇 가지의 새 가구와 식탁도 놓았다.
그리고 정말로 괜찮던 회사도 그만두고 조그마한 개인 일을 시작 했다.
그리고 막내둥이도 그 집에서 낳았는데 이상하게 그 집과 인연이 없었었는지 우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정말로 행복했었고 더 행복한 미래도 이 집에서 이루리라 목표하고 기대도 했는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환에 연속으로 우리는 서서히 지처 갔는지 모른다.
주위에서는 집하고 운 때가 맞지 않아 그러니 이사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미신을 싫어했고 믿고 싶지도 안았던 나의 똥고집은 쉽사리 그 말을 수궁하지 못하고 버터지만 사정은 전과 다름없이 우환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한번은 우리 중전이 콩을 삶은 뜨거운 물에 얼굴을 다 디운 적도 있었고.
큰아들은 놀이터에서 철봉을 하다가 오른쪽 팔을 다쳤는데 일만 명중에 한 사람이 다칠까 말까한다는 성장 판을 다쳤다.
당당 4시간 넘는 수술도 했다. 이후 후유증 까지 걱정해야 하는 근심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 탈 없이 대한민국 해병대948기로 멋진 국방에 의무를 마치고 지금 대학 복학을 했고 말로 다 쓸 수 없는 우환에 시달림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살고 있던 그 집을 을 전세 놓고 서대문구 남가좌동 으로 전 세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차츰 우환이 덜하고 아이들도 건강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하던 일을 접고 다시 회사 생활로 돌아 왔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
비 오는 날 발바닥에 먼지 날 정도로.
1996년 난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아이엠에프라는 직격탄을 받고 지방근무로 좌천당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적어도 나만은 비켜 갈 줄 알았던 경제의 한파가 주말 부부라는 이상기류를 만들었고 그 생활을 1년8개월 넘게 해야 했다.
아마 결혼을 통틀어 제일 어려 워 던 때가 아닌가 싶다.
1999년5월6일(음력3월21일) 난 그곳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그때 어머님 연세 78세.
청청벼락 과도 같은 부고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막내아들을 아끼고 사랑 해 주셨던 어머님.
그런 어머님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고 먹고 사는데 만 급급했던 나.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통한에 설어 움은 이내 통곡으로 날 몸부림치게 했는지 모른다.
아! 사랑하는 어머님
다시는 불러 볼 수도 볼 수도 없는 어머님.
사는 게 힘들어 제대로 해 드린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가시다니.
큰 아들 먼저 앞세운 게 큰 죄라도 지은 양 언제나 가슴으로 눈물 찍어 내던 어머님.
암이라는 병명으로 장기 투병 중에도 옆에서 수발한번 제대로 못해드린 이 불효 가슴을 칩니다.
그렇게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머님을 먼 산 대관령 산자락 왕산 골에 묻고 돌아오던 날 난 살면서 그렇게 텅 빈 가슴은 처음 느껴 는지 모른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맨 발로 뛰어 나오실 것만 같은 어머니에 그리움은 이내 눈물로 희뿌연 안개를 만들었고 흐느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난 밭둑에서 먼 하늘은 그렇게 처다 봤는지 모른다.
사랑 하는 어머님!
그렇게 어머님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을 인정 할 수밖에.
이제 텅 빈 집에 팔순을 넘어 혼자되신 허리 굽은 우리 아버지.
어찌 해야 하나?
작은 형님도 계시고 큰형님 조카들도 있기는 하지만 함께 살기를 한사코 거부 하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옛집에 남아 살아온 인생을 그리워하며 추억했을지도 모른다.
긴긴날 긴긴밤을 그렇게. 다만 겉으로 표현을 안 했을 뿐이지 어머니에 빈 자리는 너무도 컸을 겁니다.
세월은 누구하나를 위해 존재 하지 않듯 슬픔 때문에 멈추어 서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여름도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도 어김없이 오고.
어쩌면 그 계절이 바뀐대 마다 흘리고 간 아버지에 대한 걱정은 너무도 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던 시간은 그해 한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아 얼마 있을 쯤
2000년 (음력1월24일) 고향에 조카로부터 또 한번에 청천 벼락같은 부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식사를 잘 마치고 조카랑 이야기를 하다 그렇게 돌아 가셨다고.
아버지 연세 84세.
난데없는 천둥소리 에 난 그렇게 통한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돌아가신지 일년도 채 안되어 아버지마저.
아! 아버지.
다시는 불러 볼 수도 볼 수도 없는 아버지.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 워 던 철부지 시절 왜 좀더 가까이서 좀더 잘 해드리지 못했을까?
이제는 나도 아이들에 아버지 한집안에 가장으로 그 시절에 아버지를 이해하고도 남을 아픔뿐인데.
그해 그렇게 아버지마저 어머니 산소에 합장을 하고 내 나이 사십을 넘어 홀연히 두 분 부모님을 다 잃었다.
이제 다시는 불러 볼 수 도 없는 아버지 어머니.
어버이날 빨간 카네이션 달아드릴 가슴마저 빼앗아가 버린 저 무정한 세월.
세월은 그렇게 사람에 인연을 모질게 끊어 놓고 하늘에 구름은 너무도 청명하게 흘러간다.
고향.
부모님.
언제나 마음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는 그 곳도 언제부터인가 고향이 객지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아마 부모님이 안 계시는 고향이 여서 일 것 같다.
예전에는 명절이 저 만큼만 보여도 그날을 손 곱다 지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명절도 그런 가슴 뛰는 애틋한 그리움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 것 같다.
언제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던 어머니.
당신이 손수 농사지은 것이면 무엇이든 주고 싶어 하시던 어머니.
그래서 고향에 다녀 올 때는 언제나 큰 보따리가 양손에 들려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부모가 자식 생각 하는 만큼 깊은 사랑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세월이 지나 이제 먹고 살만해서 돌아보니 이미 안 계시는 부모님.
시간은 예민하던 속살을 무딜 게 하는 만병통치라도 되는 것일까?
어느새 사는데 바빠 조금씩 둔해지는 그리움.
그렇게 바쁜 일상에 바퀴는 지나간 그리움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어서 가고
또다시 전쟁터 같은 삶을 숨 가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민 초중에 하나가 되어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는지 모른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까도 말 했지만 비 오는 날 발바닥에 먼지 날 정도로 집사람과 난 열심히 살았다.
아끼고 절약하고 가끔은 고픈 배를 수도꼭지에서 해결하기도 했다.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리고 없는 이의 재산은 꿀벌 개미 같이 부지런히 일 하는 것 밖에 또 있겠는가.
그렇게 땀 흘린 보람은 2005년 8월에 노후 대책으로 경기도 여주에 큼지막한 땅도 하나 장만하고
그동안 너무도 열심히 살아온 중전 앞으로 기분 좋게 등기도 해 주었다.
정말로 부자가 된 기분 이 였 다. 그 땅에 다 무엇을 할까?
며칠 간 은 행복한 고민에 밤잠도 설쳤는지 모른다.
어쩌면 삶에 가치가 물질을 절실히 필요해서 일까?
아니면 삶에 가치가 내가 내친 세상과의 약속을 위해서 일까?
난 가끔 주변에서 부모로서 부모에 역할을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모습을 볼 때면 속이 치밀어 오르곤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난 내 자신과 이런 약속을 했다.
담배 절대 안하기. 놀음 안하기. 땐 스 춤 안 추기. 지나친 과음은 안하기.
그러나 가끔은 소주 서너 잔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약술로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다. 보약처럼.
그러고 기분이 좋으면 목청 좋게 노래도 즐긴다.
어린 나이였지만 주의에서 그로인해 파탄 나는 모습을 너무 일찍 보고 자란지 모른다.
또 부모를 모르고 패륜아 같은 일륜은 정말로 싫어했다.
적어도 내 안에는 부모님은 하늘같았고 형제간에는 두터운 의의가 있어야 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가추면 그 관계는 오래 가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은 처음부터 하지 말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며.
한번 약속한 일은 끝까지 지킬 줄 아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번은 절친한 고향친구가 어려운 처지를 당했을 때 나 아닌 집 사람이 조금에 도움을 준적이 있다.
친척 중에 장사를 하는 가계에 소개를 해 준 것이다.
장사를 하고 현금 돈을 만지는 곳이 여서 혹 잘못 이라도 하면 하는 생각에 선뜻 말을 못할 때 집 사람이 과감하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고. 그 당시 어려워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던 것을 한자리에 모여 살수 있게 친척은 방도 마련해주고 전화도 놔 주고 나중에는 먹고 살수 있게 장사도 물러 주었다.
그 후 그 친구는 항상 고마워하고 볼 때마다 잊지 않을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아마1992년 쯤 일까?
당시 그 친구 동생이 부동산 쪽이 일을 했는데 하루는 동작구 쪽에 재개발 아파트 속칭 딱지라는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 친구에 말을 빌리자면 금방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는 것처럼 그리고 돈도 좀 벌 것처럼 장황한 설명으로 순진했던 나를 자석처럼 끌어 들였다.
그는 자기 형한테 하라고 권했지만 심성이 너무 착하던 그에 형은 난 공짜로 버는 건 싫어하면서 거절 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내가 그럼 내가 하자고 해서 하게 되었는데 당시 딱지 가격이 일천삼백만원에 일명 피 값이 칠백만원 합해서 거액 이천만원에 그 딱지를 사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되지도 안을 것을 사기를 친 것이 였 다.
어쩌면 오해 인지 몰라도 그 형과 한패가 되어 묵인 아래 그랬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나 말고 다른 고향친구 에게도 그런 짓을 한걸 알게 되었고 지금도 난 그 의문에 분노 하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복잡한 땅 서울시 공원부지에 담보에 근저당에 속칭 가라 딱지에 토지세를 못 내서 성업공사에 관리처분 까지 될 지경 이였고 얽히고설키고 아직 해결이 안 된 그 땅을 산지도 15~6년은 되지 않았나 싶다. 요즘도 중전한테 그 이야기만 나오면 난 죽어지내곤 한다.
난 어쩌면 친구 동생 보다 친구를 믿었던 게 나의 더 큰 실수 이었는지 모른다.
고향에서 자랄 때 보고 서울에서 처음 본 동생.
법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친구 그런 착한 친구의 동생이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당시 돈에 여유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저 기회려니 하고 내 민 손이 썩은 동화 줄이 이었다는 사실이 날 너무 실망을 시켰다.
적어도 난 객지에서 고향 친구인 그를 누구보다 더 믿었는데 나만 혼자 짝사랑 한건가?
그는 나를 친구보다 자신의 삶에서 잠시 필요로 한때 수단에서 도구쯤으로 생각했을까?
그 일로 인해 그 친구와도 등을 돌리게 되었고 하루아침에 돈 잃고 사람 잃는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용서가 안 되는 일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난 고향 친구고 객지 친구고 믿음이라는 단어를 상실 했는지 모른다.
한 3년 동안 난 누구도 만나지 않는 고독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돈을 떠나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마음에 문을 닿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어쩌면 혼자라는데 익숙해 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적어도 뛰는 시간만큼은 나와의 싸움이고 인내를 요구 하는 절실한 고통 이였으니까.
그렇게 하프도 풀도 100km 울트라도 산을 오르고 더 높은 산을 찾아 올랐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마라톤을 통해서 새로 만나 친구들과 새로운 세상에서 나를 추슬러 갔는지 모른다.
적어도 그곳에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한 가지 뛰는 것이 좋아서 만난 사람들이 이었으니까.
누가 뭐를 하던 그것은 그곳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삶에 일부분이 이었으니까
운동화 러닝 팬티 만 있으면 그곳에서는 만이 있든 적든 만이 알든 모르든 함께 땀 흘리며 공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정신없이 뛰었는지 모른다.
뛰는 순간만은 나라는 존재에서 어쩌면 해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지 모른다.
가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동한이던 모습이 나이 들어 보인다고 말을 건네곤 한다.
세월은 약이라도 될까? 그렇게 나쁜 기억을 저만큼 밀어 내고 가끔 저려 올 듯 스치듯 생각나곤 한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용기는 용서라는데 아직 난 그런 용기가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가끔 고향에 가도 남아 있는 친구 누구도 선뜻 화해를 이야기 못하는 것을 보면 상처 나기 쉬운 우정은 상당히 예민해 하는 것 같다.
세월은 그렇게 평탄지 않게 흘러 어느새 내 나이 51세 라는 중년에 모습으로 저 만큼 지나온 시간을 등 굽어보게 하다니 약자 앞에 세월은 그저 무정 할 뿐이구나.
구멍 큰 그물코 사이로 빠져 나간 무정한 세월.
맹물로 머리를 감아도 검은 물이 빠지고 하얀 속살을 들어내는 머리카락.
속살처럼 해 맑던 얼굴에 깊이 팬 주름은 어쩔 수 없는 세월 앞에 약자가 인간이 아닌가 싶다.
어느새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한참은 짧은 몽당연필 같은 긴 한숨.
그래도 나에게는
내 사랑 하는 아내.
내 사랑 하는 아들 들.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에 동반자가 아닌가.
그래서 힘들고 고단해도 내가 사는 것에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내 비록 가장으로 넉넉하게는 못 해주어도 난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최선을 다해 존재 하는 것도 가족이라는 속살이 있어서 일깨다.
가끔은 삶이 너무 고단해 투정처럼 내뱉는 긴 독백도
가끔은 작은 기쁨에도 하얀 치아를 다 내 놓고 목젖을 보일 때도 가족이 있어 살아가는 이유인지 모른다.
가끔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아내와 시장 보는 즐거움도 이 나이에는 좋은 덕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가끔은 몸무게가 엉덩이 살로 처진 아내를 위해 진공청소기도 돌리고.
가끔은 생전에 안하던 닭살 돋는 말이지만 사랑해 라고 얼굴도 붉혀보고.
지금까지 묵 뚝뚝 하던 속내가 하루아침에 바뀌기가 그리 쉽지는 안을 테지만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는 그 자리이기에 가끔은 퉁명할지도 모른다.
오늘 문득 스쳐 지나가는 세월 사이로 저 만큼만 물러 설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애원을 하지도 안는다.
오늘 지나간 시간 사이로 지우지 못하는 앙금 하나가 있더라도 굿이 지워 달라고 애원을 하지도 안는다.
오늘 사무치도록 그리운 그리움 저리도록 남기고간 아주 진한 인연도 돼 돌아와 달라고 애원도 안는다.
오늘 가끔은 독선적으로 살아온 내 방식에 되돌릴 수 없는 하자가 있을지라도 이해 해달라고 애원 안는다.
오늘 삶이 내가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나약한 방정식에 묶여 있어도 굿이 벗어 나 달라고 애원 안한다.
다만 과거보다 지금 서 있는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저만큼 지나온 낮 익은 세월 뒤편으로 잘 했든 못했든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그저 남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