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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탈출
발렌시아 북쪽 비에라 마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집주인이자 헤르난데스의 여동생인 마나가 2층 윤
우일의 방으로 올라왔다. 마나는 풍만한 체격의 30대 후반의 여자였는데 꽤 미인이었다. 탁자 위에 우
유와 빵, 방금 구운 햄 소시지를 담은 쟁반을 놓은 마나가 윤우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권을 이리 내요. 입국 스탬프를 받아 올 테니까.]
발렌시아 시청에 근무한다는 마나의 영어는 유창했다. 윤우일이 여권을 찾아 건네자 마나가 다른 쪽
손을 다시 내밀었다.
[수수료가 2천 달러 들어요.]
머리를 끄덕인 윤우일이 주머니에서 만 달러 짜리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만 달러를 드릴 테니 나하고 하루만 같이 일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돈뭉치와 윤우일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은행에 가는 일이오.]
[어떤 은행?]
[외국계 은행이 발렌시아에 몇 개나 있습니까?]
[대여섯 개,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그럼 그곳에 갑시다.]
윤우일이 돈뭉치를 내밀자 마나가 서슴없이 받더니 주르르 넘겨 보았다. 그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윤우일을 보았다.
[당신, 헤르난데스한테는 얼마나 주었지요? 이보다 많지요?]
[당신 오빠한테 물어보시오.]
마나의 시선이 방 쪽에 쌓여진 가방 쪽으로 옮겨졌다.
[저 가방 안에는 뭐가 들었지요? 밀수품이 틀림없지요?]
[저 가방을 실을 벤이 필요해요. 하루만 빌릴 수 있지요?]
가방에서 시선을 뗀 마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운전은 내가 하지 않겠어요. 밀수에 연루되기는 싫으니까.]
헤르난데스는 어젯밤 이곳까지 안내해준 다음에 곧 돌아갔는데 마나에겐 자세한 내막은 말해주지 않
았다.
마나가 방을 나가자 윤우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돈가방은 아직 22개나 남았다.
그는 이곳에 올 때까지 가슴을 조여야만 했다. 헤르난데스는 이사벨라 호를 한밤중에 비에라 마을 앞
해상에 정박시킨 다음 보트에 가방을 옮겨 싣고는 바닷가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마나에게 연락해서
빈 트럭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트럭이 도착하자 서둘러 가방을 실어준 다음 도망치듯이 바닷가를 떠나
버렸다.
마나가 돌아왔을 때는 오후 1시경이었다. 그때는 마나의 외동딸 멜리아도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는데
낯선 윤우일이 두려운지 2층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나는 남편과 사별하고 멜리아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사흘 전에 트리폴리에서 입국한 것으로 스탬프를 찍었어요.]
마나가 여권을 건네주며 말했다.
[물론 컴퓨터에도 입력을 시켰으니까 출국할 때도 문제가 없을 거예요.]
[벤은?]
[운전사 딸려서 하루 빌리는데 4백 달러더군요. 30분쯤 후면 여기로 도착할 거예요.]
[외국계 은행은 알아보았습니까?]
[전화번호를 적어 왔어요.]
윤우일은 마나가 건네주는 쪽지를 받았다. 마나는 이 일에서 빠지려는 것이다.
[마나, 저 가방은 밀수품이 아니오.]
정색한 윤우일이 턱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모두 돈가방입니다.]
그러자 마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윤우일은 가방 한 개를 들고 와 지퍼를 열어 보였다. 그러자
안에 든 돈뭉치가 드러났고, 마나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그리고 이 돈은 추적당하지도 않는 돈이오.]
[믿기지가 않아요.]
입술도 달삭이지 않고 말한 마나가 머리를 저었다.
[그럼 왜 밀입국을 했지요?]
[정부간의 비밀거래로 오간 돈이었소. 그것을 내가 가로챈 것이지.]
[리비아 돈인가?]
[아니, 북한 돈.]
윤우일이 마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스페인 정부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돈이오. 물론 발각이 된다면 골치가 아프겠지만 은행은 두말하
지 않고 받아줄 거요.]
[그래도...]
[마나, 나하고 같이 은행에만 갑시다. 당신은 은행에 안내만 해주면 돼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
니까.]
그리고는 윤우일이 가방에서 만 달러 짜리 뭉치 10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몇 시간 일한 대가로 10만 달러를 드리지. 은행을 알려주고 차 안에서 기다려만 주는 대가치고는 굉
장하지 않소?]
윤우일이 스위스 은행을 비롯하여 모두 외국계 은행 여러 곳에 돈을 분산해서 예치를 끝냈을 때는 저
녁 7시였다. 은행들은 몇 백만 달러를 가져온다는 고객의 연락에 퇴근시간도 늦추고 기다려 주었다.
마나는 첫 번째 은행에서의 입금이 순조롭게 끝나는 걸 보더니 두 번째 은행에 갔을 때는 자진해서 운
전사를 경계했다. 차를 몰고 내빼버리면 만사가 끝장인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은행에 도착했을 때
은행 앞에서 건장한 사내 하나를 차에 태웠다. 마나의 사촌동생 고메스였다. 그 뒤부터는 윤우일은 안
심하고 은행일을 보았고, 마나는 고메스와 함께 차에 남아 가방을 지켰다.
외국계 은행은 여권까지 제시하고 거액을 예치하는 윤우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이
상하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신분 확인용으로 내놓는 여권을 보지도 않는 척하면서 일
사천리로 비밀 계좌를 만들어 주었다.
벤을 보내고 발렌시아 거리에 셋만 남겨졌을 때 마나는 고메스에게 100달러 짜리 지폐 한 장을 주어
돌려보냈다. 체격은 산처럼 컸지만 조금 둔한 고메스는 100달러 지폐를 받더니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서둘러 사라졌다. 그는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킴, 오늘 밤은 집에 돌아가지 않겠죠?]
어둑해진 거리에서 마나가 윤우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멜리아가 집에서 기다리지 않을까요?]
[전화하면 돼요. 아마 내가 늦는다면 좋아할 걸요. 열두 살짜리가 벌써 남자 친구가 있다니까요. 아마
그 녀석을 끌어들일지도 몰라요.]
그리고는 마나가 대뜸 윤우일의 팔을 끼었다.
[난 흥분이 돼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
마나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저녁 먹고 나서 한잔해요.]
그들이 시내의 호텔 방으로 들어선 시간은 저녁 11시였다. 저녁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마나가 호텔로
윤우일을 이끈 것이다.
윤우일이 문을 잠그자 마나는 기다렸다는 듯 재킷을 벗어 의자 위로 던졌다. 3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는 팽팽했고 가슴은 볼륨이 컸다.
마나가 윤우일을 똑바로 보았다. 술기운이 퍼진 두 볼이 상기 되어 있었고 두 눈은 반짝였다.
[킴, 난 동양인은 처음이야.]
윤우일이 입술 끝으로 웃으며 다가가 마나의 허리를 두 손으로 안았다.
[마나, 당신은 좋은 여자야.]
이내 입술이 겹쳐졌다. 마나의 혀가 뱀처럼 끔틀거리며 윤우일의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들은 입
술을 마주 댄 체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
마나의 알몸은 풍만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가슴에 허리는 굵었지만 탄력이 있었고 허벅지는 단
단했다.
양탄자 위로 마나를 쓰러뜨린 윤우일은 금방 공격하지 않았다. 마나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천천
히 젖꼭지를 애무하자 곧 굵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우일은 마나의 허벅지 사이의 숲을 부드럽
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샘물은 이미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마나는 허리를 들어
올리면서 비명과 같은 신음을 뱉었다.
이윽고 마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윤우일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끌었다.
[킴, 어서 ........... 제발 ..........]
윤우일은 천천히 마나의 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마나의 샘이 고무처럼 탄력이
있었던 것이다.
절정에 오른 듯 마나가 허리를 힘껏 치켜 올렸다. 뜨거운 샘은 더욱 위축되었다. 윤우일은 두 팔로 방
바닥을 짚고는 거칠게 마나의 샘을 파고들었다.
샘물은 더욱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윤우일은 그럴수록 더욱 세차게 돌진했다.
이윽고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마나가 미칠 듯이 온몸을 엉키면서 굳어졌다. 하지만 윤우일은 멈추
지 않았다. 잠시 후 마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팔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윤우일은 땀으로 범벅
이 된 채 계속해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늘어져 있던 마나가 겨우 눈을 뜨더니 헐떡이며 윤우
일을 보았다.
[킴, 아, 난 지쳤어 .......]
사정하듯 마나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윤우일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어졌다.
마나가 다시 두 팔과 다리로 윤우일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소리지를 기력도 없는 듯이 허리를 틀
더니 윤우일의 공격이 더 세졌을 때는 터지듯 다시 분출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눈만 뒤집듯 떴을 뿐이었다. 소리지를 기력도 떨어진 것이다.
가쁜 숨소리에 섞인 옅은 신음을 뱉으면서 온몸을 떨던 마나는 마침내 사지를 내던지듯 방바닥에 내
려놓더니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았다. 그녀는 숨이 끊어질 듯 몰아쉬면서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윤우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도 마나는 알몸인 채 방바닥에 사지를 편 채 누워 있었다. 윤우일은 욕실
에서 들고온 대형 타월로 마나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는 창가
로 다가가 섰다.
창 밖으로 휘황한 거리의 불빛이 내다보였다.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은 윤우일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김희연...............
마나를 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김희연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언제부터인가
절박하거나 격한 분위기에 쌓여졌을 때 김희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포트
워스 훈련장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윤우일은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새벽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윤우일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 오후 2시경이었다. 열차와 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시
간이 꽤 걸렸다. 그의 경계 대상은 리비아도 북한 당국도 아닌 미국이었다. 김성진이란 이름의 한국
여권도 CIA가 만들어준 것이어서 공항을 이용했다가는 즉각 탐지될 것이 뻔했다. CIA가 카이바를 시
켜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돈에 욕심이 난 카이바의 단독 행동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것으로 용병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2천 6백만 달러는 그 대가인 것이다. 돈을
탈취당한 북한과 리비아가 어떻게 조정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CIA
는 그 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카이바를 시켜 제거하려고
했다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바티칸시 근처의 거리에서 택시를 내린 윤우일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인근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안
은 동양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자리를 잡아 앉자마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맥주.]
종업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윤우일이 주문을 했다.
[그리고 전화를 쓰고 싶은데.]
주머니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 손에 쥐어주자 종업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저기 안쪽에 공중전화가 있습니다.]
윤우일은 사내가 가리킨 카페 안쪽의 통로로 천천히 다가갔다. 공중전화는 통로 끝 벽에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서미향은 먼저 손목시계부터 보았다. 호텔 프런트는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5시에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오전 전화는 오늘도 계실 것이냐는 내용이었고 오후에는 필요한 것이 있느
냐고 했다. 3류 호텔이었지만 깨끗했고 직원들의 매너가 좋은 곳이었다. 벨이 일곱 번째 울렸을 때 서
미향은 숨은 내뿜고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로마에 온 지 오늘로 6일째가 된다. 이덕수와의 약속이
사흘이나 늦어진 것이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서미향은 가만 있었다.
[여보세요.]
수화구에서는 한국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미향의 온몸이 순간 굳어졌다. 머리끝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이덕수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다.
[저 ................ 거기 서미향씨 계십니까?]
수화구의 목소리가 조금 초조한 듯 물었을 때 서미향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
려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저는 이덕수씨하고 트리폴리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덕수 씨가 호텔 전화번호를 주면서 연
락을 하라고 했습니다.]
[......]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북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전화를 했겠습니까? 그냥 찾아갔을 것 아닙니까?]
그제야 눈을 치켜 뜬 서미향이 앞쪽의 벽을 보았다. 사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서미향 씨 듣고 계십니까?]
[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쯤이 지난 오후 5시 경에 윤우일은 마르크 모텔 203호 앞에 서 있었다. 마르코 모텔
은 3층 건물로 객실이 20여 개밖에 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그가 벨을 눌렀을 때 곧 보안경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는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서미향은 진 바지에 청색 셔츠 차림이었다. 늘씬한 체격에 눈이 또렷했지만 불안한 표
정이었다. 뒤쪽에서 아이 소리가 나더니 여자아이가 다가와 서미향의 바지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제가 전화했던 김성진입니다.]
윤우일이 애써 부드럽게 인사말을 건넸다. 서미향은 대답 대신 잠자코 비껴섰다. 들어오라는 몸짓이
었다. 그녀는 윤우일이 들어서자 목을 늘여 복도를 살피더니 문을 굳게 잠궜다.
[너는 엄마 닮았구나.]
눈만 말똥이며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윤우일이 웃어 보이며 말을 걸자 서미향이 물었다.
[애 아빠는 어디 계세요?]
불안한 목소리였다. 윤우일이 몸을 돌려 서미향을 똑바로 보았다.
[트리폴리를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이덕수한테서 받은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마르코 모텔의 전화번호와 서미향이
사용한 중국 여권의 이름이 적힌 쪽지였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부인과 아이를 부탁했습니다.]
서미향은 쪽지에다 시선만 준 채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가 아까부터 그녀의 바지를 잡아당기
면서 칭얼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충격에 싸여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윤우일이 길게 숨을 내쉬었
다.
[배를 타고 오다가 총을 맞았지요........... 시신은 바다에 수장시켰습니다...... 죄송합....]
[그만해요.]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스르르 쓰러지고 말았다.
서미향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였다. 침대 위에 눕히고 머리에는 찬 수건을 얹어 놓은
터라 눈을 뜬 그녀는 먼저 수건부터 걷어내었다. 그리고는 윤우일을 올려다보았다. 화장기가 없는 파
리한 얼굴이었지만 피부는 매끄러웠고 곧은 콧날과 단정한 입술은 갸름한 얼굴과 조화가 잘 되었다.
서미향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며 윤우일의 가슴께에 멎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와락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윤우일은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대형 타월로 포대기를 만들어 아이를 감싸안고 있었다. 아이는 윤우
일의 가슴에 얼굴을 붙이고는 평화롭게 잠이 들어 있었다.
[그냥 누워 계십시오. 지금은 서둘 것 없으니까.]
아이가 깰까봐 허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윤우일이 말했다.
[이런 일에 익숙지가 않아서 아까는 불쑥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이해하십시오.]
서미향이 시선을 다시 천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했다.
[이덕수 씨는 부인과 아이를 한국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아이를 안은 채 윤우일이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부인이 다른 곳을 원한다면 그곳으로 가도록 해드리지요.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이를 이리 주세요.]
이윽고 서미향이 입을 열었다. 윤우일이 몸을 돌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윤우일을 향해 손
을 내밀었다. 윤우일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서미향의 침대에 눕혔다.
[조금 피곤합니다. 이곳에서 한숨 자도 되겠습니까?]
윤우일이 턱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트윈 룸이어서 침대는 두 개가 있었다.
[스페인에서 사흘 밤낮을 달려왔지요. 비행기를 타면 금방 추적당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잠을
못 잤습니다.]
서미향과 시선이 마주친 윤우일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날 CIA가 쫓고 있을 겁니다. 이덕수 씨를 살해한 자가 CIA 연락원이었고 내가 그 자를 죽였으니까
요.]
[주무세요.]
서미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CIA 마드리드 사무소장 월터 마린은 보좌관 젠킨스가 방으로 들어서자 대뜸 소리쳤다.
[놈은 다른 은행에도 분산 입금시켰어.]
[다른 은행에는 가명에다 비밀계좌로 해 놓았기 때문에 공식 요청을 하지 않는 한 추적이 어렵습니
다.]
털썩 앞자리에 앉은 젠킨스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방금 미국계 은행인 퍼블릭 뱅크 마드리드 본사에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 퍼블릭 뱅크에서도 입금 확인만 해주었을 뿐입니다. 정부에서 동결 요청을 해오면 검토해보
겠지만 지금이라도 놈이 출금을 요구하면 내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교활한 놈!]
마틴도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트리폴리 작전은 성공이었다. 미사일 판매대금을 강탈당한 북한은 청
진호에서 마악 시작하려던 하역작업을 중지시켰는데 지금도 청진호는 제3부두에 묶여져 있었다. 리비
아는 대금을 지급한 후에 사건이 일어났으니 미사일을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북한은 리비아 영
토에서 일어난 일이니 돈을 받아야 내준다는 입장으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놈이 발렌시아까지 오다니 대단한데요. 어떻게 그곳까지...]
젠킨스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주름살을 펴고 마틴을 보았다.
[도대체 본부는 뭘 하고 있었길래!]
[병신 같은 특수부 놈들!]
쓴웃음을 지은 마틴이 동조했다.
[그놈들 하는 짓이 다 그래. 뒤가 깨끗하지를 못하다구.]
이번 작전은 집행부 소관이어서 마틴과 젠킨스는 특수부의 요청이 오고 나서야 윤곽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특수부는 2천 6백만 달러의 현금이 입금된 은행을 수색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을 해왔다
가 마틴의 항의를 받고 나서야 사건을 대충 말해주었다. 그래서 확인된 은행이 퍼블릭 은행 발렌시아
지점이었다. 한국인 김성진은 100달러짜리 현금 4백만 달러를 당당하게 여권까지 제시하고 비밀계좌
로 입금시켰다.
[집행부장 윈필드가 똥을 밟았군.]
담배를 꺼내 문 마틴이 선고를 내리듯이 말했다.
[한국놈 용병을 믿은 것이 잘못이야.]
[하지만 작전의 반은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러자 젠킨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마틴을 보았다.
[어쨌든 돈은 북한놈들 손에서 빼냈고 미사일도 아직 넘기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놈이 스페인에 남아 있을 리는 없어.]
피터 오웬이 회색빛 눈동자를 굴리며 창 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밤 11시의 오페라로 안쪽의 주택가
에는 가끔씩 지나는 차량들의 진동음만 울렸다.
오웬은 50대 중반이었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체격에 아직도 1년에 두어 번씩 마라톤 풀코스를 주파한
다. 시간이 없어서 골프를 못 치는 대신에 매일 아침에 10킬로미터씩 조깅을 하고 100발씩 사격을 하
는데 그의 꿈은 특수부장으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특수부 간부들의 진급이 늦다는 소
문도 있었다.
오웬의 시선이 피터슨에게로 옮겨졌다.
[이봐, 죤, 놈이 어디로 튀었을 것 같나?]
[동남아 쪽이 아닐까요?]
죠지 피터슨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쪽이 즐기기 좋거든요. 동양인이라 얼른 눈에 띄지도 않을것이고.]
[즐긴단 말이지?]
[2천 6백만 달러입니다, 보스. 하루에 만 달러씩 써도 7년이 넘게 쓰고 5천 달러씩이라면 15년 가깝게
쓸 수 있습니다. 또......]
[닥쳐! 이 개작식아!]
오웬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금방 표정이 원상태로 돌아왔고 피터슨 또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피터슨은 이번 작전의 책임자로 오웬이 아끼는 간부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들 둘이 이번 작전의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었다.
[이덕수가 자기 가족을 만나기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 것 같나?]
불쑥 오웬이 묻자 피터슨은 입맛부터 다셨다. 30대 후반의 그는 현장 출신이어서 추리 쪽에 자신이 없
었다.
[보스, 그곳도 동남아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덕수의 아내와 딸의 여권 조회는 각 공항마다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서미향이란 이름의 북한
여권의 소지자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행부장 윈필드의 작전이 마음이 들지 않아.]
마침내 오웬이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뱉기 싫은 말을 했다. 그는 좀처럼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
다.
[놈이 맘을 먹었다면 카이바뿐만이 아니라 이덕수까지 제거했을지도 몰라. 이덕수를 살려줄 이유가
없어.]
피터슨은 입을 다물고 거들지 않았다. 사건 다음날 아침, 어선과 조우하기로 했던 핵잠수함 네바다 호
는 목표지점에서 서쪽으로 3백 5십 킬로나 떨어진 지중해 상에서 표류하는 어선을 찾아내었다. 그러
나 어선은 비어 있었다. 돈가방은 물론이고 사람도 없었다. 네바다 호에 승선했던 CIA 요원 둘은 어선
의 선실에서 핏자국과 두 발의 탄피, 그리고 바닥에 박힌 탄환 한 개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핏자국은
씻어냈지만 지금 몰타성에 예인된 어선에서 샘플을 채취해가서 분석 중이었다. 오웬이 지친 듯 두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어쨌든 김성진, 아니 윤우일이란 한국 놈을 잡아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다 체크하도록!]
어쨌든 윤우일은 특수부 소속이었다. 그에 대한 책임은 특수부가 져야 하는 것이다. 윤우일이 안내원
겸 연락원 카이바를 제거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돈을 보자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곧 스페인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 시간대에 사고 지점을 지나 발렌시아로 간 배는 세 척뿐이니까
요.]
피터슨이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오웬의 찌푸린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윤우일을 실어 나른 배를 알
아낸다고 해도 이쪽은 너무 늦은 것이다.
다음날 아침, 윤우일은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서미향이 다가와 섰다.
[저, 한국으로는 가지 않겠어요.]
윤우일의 시선을 받은 서미향이 머리를 돌려 벽 쪽을 보았다.
[한국에는 인연도 없고 주목받는 것도 싫어요.]
[하지만 안전할 텐데요.]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로 가겠어요.]
윤우일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터라 온 몸이 가뿐했고 활력이 솟았지만 마음은
가라앉았다. CIA의 추적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자신의 한국행마저도 위태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
아차린 서미향이 미리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는 반발하듯 다시 머리를 들었다.
[나는 그렇지만 부인은 괜찮을 겁니다. 내가 제3국의 한국 대사관에다 손을 써볼 테니까요, 이곳 로마
도 적당하지요.]
[싫어요!]
서미향이 단호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제 중국 여권이 탄로가 나기 전에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그때 아이가 깨어났는지 칭얼거렸다. 서미향은 이내 몸을 돌렸다. 아침 8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준비를 하지요.]
윤우일이 서미향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서 부인과 아이 옷하고 필요한 걸 사오겠습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권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구요. 아무래도 부부로 위장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순간 서미향이 주춤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아이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피터 오웬이 스페인 지사장 월터 마틴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그날 오후 1시경이었다. 월터 마틴은 10
여 년 전 그와 현장에서 몇 번 같이 일해본 적이 있었지만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틴도 그것
을 알고 있었다.
[피턴, 놈이 타고 온 배를 찾았어. 발렌시아 선사 소속의 이사벨라 호야.]
마틴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은 헤르난데스라는 자이고, 놈이 헤르난데스의 여동생 마나라는 년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났
어.]
[혼자?]
[혼자였어.]
마틴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이사벨라 호 선원 하나가 다 불었어. 말타 섬 서쪽 지중해상에서 어선을 만났을 때도 그놈 혼자서 타
고 있었다는 군. 그리고 가방을 이사벨라 호에 옮겨 싣고는 발렌시아 북방 해안으로 가서 놈과 가방을
내려주고 왔다는 거야. 선원은 그 가방에 밀수품이 들어 있다고 하더군.]
[고마워, 월터.]
[또 도와줄 일 있나?]
[그 선장이나 선장 여동생이 그놈의 행방을 알고 있을까?]
[자네가 기대한다면 조사를 해보지.]
그 말은 어쩐지 비웃는 말처럼 들렸다. 오웬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윤우일이 제 위치를 알
려주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오웬이 앞쪽에 앉아 있는 피터슨을 보았다.
[놈은 혼자였어.]
[그런 그놈이 이덕수까지 죽였군요.]
예상했다는 듯이 피터슨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덕수가 거추장스러웠겠지요.]
[그렇다면 서미향을 찾을 필요는 없다.]
오웬이 책상 위에 놓인 서미향의 사진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놈은 김성진이란 이름의 한국 여권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유럽에 있는 여권 위조범들에게 현상금을
걸어라.]
[얼마로 할까요?]
[백만 달러.]
피터슨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오웬은 그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놈을 잡고 나서 준다.]
[보스, 위약하면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많습니다.]
피터슨은 불만이었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듯 무겁게 발을 떼었다.
[셋집이 있습니다.]
두 손에 가득 봉투를 들고 들어선 윤우일이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오다가 봤는데 이곳에서 네 블록 떨어진 주택가였어요. 월세가 2천 달러인데 방이 네 개에 화장실 두
개, 거실도 제법 큰 80평쯤 되는 아파트에요.]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은 윤우일이 옆모습만 보인 채 묵묵히 아이의 옷을 접고 있는 서미향에게 몸
을 돌렸다.
[떠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렇다고 모텔방에만 있으면 발각되기가 쉬워요. 셋집이
더 안전해요.]
[......]
[거긴 선금만 내면 여권 확인도 안 하는 데다 이웃이 누가 사는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관리인한테 월
세하고 시설료만 내면 그만이지요.]
그때 아이가 달려와 탁자 위에 놓인 봉투로 손을 뻗었다.
윤우일이 봉투에서 인형을 꺼내주자 아이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야, 공주인형이다!]
아이가 북한에서 자랐다면 공주란 단어도 몰랐을 것이었다. 윤우일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었을 때
서미향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 우리를 도와주시는 거죠?]
[이덕수 씨하고 약속을 했다지 않습니까?]
[그래도.......]
시선을 내리 깔았던 서미향이 어느새 눈을 크게 뜨고 윤우일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말없이 서 있는 윤우일을 보더니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그냥 떠나도 되었을 텐데요. 우리 애 아빠하고는 처음 만난 사이였을 텐데....]
[난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겁니까?]
그러자 서미향이 시선을 내렸다. 윤우일은 입술 끝을 비틀고 말을 이었다. 사뭇 강압적이었다.
[잘 들으시오. 이덕수 씨가 총에 맞고 죽기 전에 나를 잡고 부탁을 했소. 그때 난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소. 살아서 빠져나간다면 꼭 당신 가족으로 돌보겠다고.]
[........]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동지였소. 생사를 같이하는 입장이었단 말이오. 만일 입장이 반대가 되었더라
도 이덕수 씨는 나처럼 했을 것이오.]
서미향은 석상처럼 굳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가 인형을 세워놓고 까르르 웃었다. 인형은 말하고
걷기까지 했다. 윤우일이 서미향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부인, 날 믿고 의지해 주시오.]
서미향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표현이었다.
윤우일은 그런 그녀를 보며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인형이 넘어졌는지 움직이지 않자 아이가 엄마를
불렀다. 그녀는 말없이 아이에게 다가가 인형의 작동버튼을 찾아주었다. 윤우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오늘 저녁에 당장 옮기도록 합시다. 아파트 안에 가구가 다 있어서 몸만 가면 됩니다.]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은 서미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낙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윤우일은 다시 숨을 내쉬었다. 순간 어선에서 이덕수를 미끼로 삼았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집은 5층 아파트의 3층이었는데 조금 낡았어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응접실에는 양탄자까지 깔
려 있었다. 무엇보다 서미향의 마음에 든 것은 주박에 식기와 취사도구 일체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었
다. 거기에다 생수 몇 병만 넣어져 있었지만 대형 냉장고도 있었으며 TV도 있었다. 집 안을 둘러보는
서미향에게 윤우일이 말했다.
[마침 가구가 다 갖춰진 집이 나와서 다행입니다. 여권을 만들 때까지만 이곳에 있도록 합시다.]
집은 80평형 규모로 셋이 묵기에는 너무 컸지만 5살짜리 순영에게는 훌륭한 놀이공간이었다. 순영이
는 벌써부터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가져온 짐이 가방 세 개밖에 안 되었는데도 정리가 끝났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주방 청소
를 끝낸 서미향이 응접실로 들어와 윤우일의 앞에 앉았다.
[인도네시아로 가고 싶어요.]
[그러지요.]
윤우일이 선선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국이 혼란스럽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숨어 지내기에 유리할 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한국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CIA가 한국행 비행기는 다 체크하고 있을 겁니다.]
서미향의 시선을 받은 윤우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CIA 용병이어서 내 인적 사항은 그 자들이 다 알고 있지요.]
[그럼......]
[일단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순영이는 이미 잠이 들어서 집안은 조용했다. 윤우일이 서미향을 바라보았다.
[중국 여권은 누가 만들어 주었습니까?]
[애 아빠가 파리에서 만들어 왔기 때문에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곧 발각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부인이 로마에 와 있는 것도 알게 되겠지요.]
서미향이 불안한 듯 눈만 깜박이자 윤우일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CIA는 부인을 쫓지는 않을 겁니다. 북한 당국은 찾고 있겠지만.]
[왜 CIA가 우리 그이를 그렇게 했지요?]
정색한 서미향이 윤우일을 보았다.
[믿기지가 않아요. CIA에 협조해서 정보를 다 주었다던데.]
[이용가치가 끝났으니까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우일도 정색했다.
[난 겪어봐서 압니다. 놈들은 언제나 감시자를 따르게 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현장요원도 제거했
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윤우일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서미향을 보았다.
[부인, 지난 일은 잊으세요.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도록 해요. 좋은 일만.]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전 11시경 피터슨이 건들거리며 오웬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파리 로시아르 대로 근처
의 사무실에 임시 본부를 차려놓고 있었다.
[보스, 서미향의 위조 여권을 만든 놈을 찾아냈습니다.]
자리에 앉은 피터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갔던데요. 이름이 양청입니다.]
[그럼 양청의 출입국 내역을 체크하면 이덕수와 만나기로 한 지역은 알아낼 수 있겠군.]
[벌써 지시했습니다.]
오웬이 힐끗 피터슨을 보았다.
[왜? 조화라도 보내주려고?]
[미인이던데요.]
[개수작 그만하고 나가서 하나라도 더 여권 위조범들을 포섭해. 100만 달러라면 눈이 뒤집힐 테니까.]
[할 만한 놈들한테는 다 했습니다.]
입맛을 다신 피터슨이 느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보았더니 프랑스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하루에 잃어버리는 여권이 20개가 넘는다고 하는군요. 여
권 장사도 있답니다.
[내가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윤우일이 불쑥 말하자 사내는 보고 있던 시간표에서 시선을 떼었다. 30대 중반쯤의 나이였으나 한쪽
귀에는 십자가 모양의 귀고리를 달았고 목에는 사슬처럼 굵은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사내가 윤우
일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고향이 어디슈?]
대답대신 윤우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콜로세움 앞이어서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오가고 있었으므
로 그들은 옆으로 비켜섰다. 윤우일을 살피던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호기심이 당긴다는 표정이었
다.
[선생, 한국 분 아니시죠?]
눈만 꿈벅이는 윤우일을 향해 사내가 이번에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관광 가이드 생활만 10년이오. 척보면 압니다.]
[뭘 말입니까?]
윤우일이 어정쩡하게 묻자 사내가 바짝 다가섰다.
[여권을 잃어버렸다면 대사관에 신고하면 끝나는 일인데 날 찾아왔단 말이오, 선생은......]
[.......]
[선생은 북한에서 오셨지요?]
사내가 눈을 치켜뜨고 윤우일을 보았다.
[내가 이런 경우를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거든. 로마에서 한국 여권을 구하면 직통으로 서울에 내릴
수가 있으니까 말이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졌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뜨린 윤우일이 조심스럽게 묻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그런데 용케도 오셨네.]
[이곳에서는 선생님 말대로 직통으로 한국에 갈 수가 있다고 해서.]
[선생 같은 분을 일 년에 두어 명은 만나게 되니까요.]
[여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많이 드는데 능력 있어요?]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우일을 보았다.
[문제는 돈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듭니까?]
[1인당 2만 달러 정도.]
자르듯 말했던 사내가 윤우일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죽였다.
[진짜 여권이라 전혀 문제가 없어요.]
[내 처와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데 조금 깎아줄 수 없습니까?]
윤우일이 절실한 표정으로 사내를 보았다.
[탈북해서 3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 처하고 번 돈입니다.]
[여권 두 개에다 딸까지 넣어야 하니까 4만 달러 이하로는 절대로 안 돼요.]
정색한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윤우일을 똑바로 보았다.
[선생은 운이 좋기도 하고 말입니다. 여권이 마침 두 개가 생겼거든요.]
[3만 7천으로 해 주십시오.]
[3만 8천 5백까지는 해드리지. 남는 것은 절대 없어요.]
그리고는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까놓고 말하지만 여권 주인한테 거의 다 돌아가고 나한테는 5백 달러도 안 떨어져요. 다른 데 가서
물어보시오. 잘못하면 위조 여권이 걸려 공항에서 추방당하게 돼요.]
[3만 8천으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에이 참......]
세차게 혀를 찼던 사내가 콜로세움 입구를 목을 늘이고 보는 시늉을 하더니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
다.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이곳에서 만납시다.]
[한국 여권을 사기로 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온 윤우일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말했다.
[CIA 요원들은 아마 위조 여권 제조자들을 샅샅이 수색하겠지요. 하지만 한국 여권이 팔리고 있다는
건 체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요.]
[식사하세요.]
주방 식탁에 반찬을 올려놓으면서 서미향이 말했다. 딸 순영은 가끔 칭얼대긴 했지만 말은 잘 듣고 어
리광 따위는 부리지 않았다. 셋이 식탁에 앉았을 때 윤우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동안 슈퍼
에 다녀온 서미향은 흰 밥에다 미역국, 불고기 볶음과 상추쌈까지 차려놓았기 때뭉이다. 거기에다 고
추장에 풋고추까지 올려져 있었다.
뭐라고 치하를 하려던 윤우일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는 수저를 들었다. 이덕수가 죽은 지 일주
일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말없이 밥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 반도 안 먹고 깨작거리던 서미향이 잠자
코 일어나 윤우일의 빈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윤우일은 머리만 끄덕여 보이고는 밥 두 그릇을 다 먹
었다. 참으로 몇 년 만에 처음인 맛있는 한국 음식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윤우일은 서미향이 들어서자 고쳐 앉았다. 순영이를 재우
고 돌아온 그녀는 오늘밤은 회색빛 원피스 차림이었다.
[커피 타 드릴까요?]
그녀가 묻자 윤우일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새 집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밤이어서 오늘은 어제보다
안정감이 느껴졌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난 후여서인지 긴장감도 엷어져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온 서미향이 잔을 윤우일의 앞에 내려놓다니 마주 보고 앉았다. 윤우일은 그녀의 두 볼
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순영이를 위해서라도 살아갈 겁니다.]
서미향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영이 아버지 육신을 찾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말씀대로 잊겠어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윤우일이 커피를 삼켰다.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순영이는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서미향은 아직 젊은데다 빼어난 미인이었다. 얼마든지 두 모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
새 생활을 꾸려갈 수가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재산이 있지 않은가? 윤우일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CIA 연락원을 제거하고 싣고 가던 현금을 빼돌렸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지요? 거금이지요.]
윤우일이 똑바로 서미향을 보았다.
[이천만 달러가 넘습니다. 내가 반을 떼어 드릴 테니까 그것으로....]
[싫어요.]
정색한 서미향이 윤우일을 보았다.
[순영이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CIA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게 된다고 했어요. 저는 그것이면 돼요.]
[하지만 배신을 당했지 않습니까?]
윤우일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 목숨 값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저는 100만 달러면 평생을 쓰고도 남아요.]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는 윤우일을 보고는 처음으로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윤 선생님은 참 정직하세요.]
[정직하다니요?]
입맛을 다신 윤우일이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정직하다기보다 돈에 대해서는 담백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오후 3시 정각에 윤우일은 콜로세움 입구로 나갔다. 관광객 사이에서 어제 그 사내가 먼저 알
아보고 다가왔다. 사내는 오늘은 귀걸이도 떼었고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아, 오셨구만.]
사내가 정중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턱으로 도로 쪽을 가리켰다.
[자, 가십시다. 차를 가지고 왔어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서 거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로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됩니다.]
[그곳이 어딘데요?]
[내 집입니다. 거기서 여권을 일단 보시고 선생님과 사모님 사진을 박아 붙이는 작업을 하면 깨끗합니
다. 한국에서도 걸리지가 않아요.]
주위가 떠들썩했는데도 사내는 목소리를 낮췄다.
[왜냐하면 그 여권들은 원 주인이 팔아먹은 것이기 때문이죠. 서른 살, 스물 아홉 살짜리 남녀 여권이
니까 선생님 부부에 딱 맞을 겁니다.]
윤우일이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가 앞장을 섰다.
[선생 때문에 오늘 하루 휴가를 낸 겁니다.]
사내의 차는 낡은 피아트였다. 차 문을 열던 사내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돈은 가져오셨겠죠? 오늘은 계약금만 내셔도 됩니다.]
사내가 윤우일을 데려간 곳은 바티칸 시를 지나 다시 한참을 달린 다음 낡은 아파트가 밀집된 한적한
거리였다. 주택가였지만 거리 표지판도 드물었고 인도에는 행인도 뜸했다. 3층 아파트의 차고에 차를
세운 사내가 손으로 아파트를 가리켰다.
[내 집은 2층입니다. 애들은 학교에 갔고 와이프는 일보러 시내에 갔어요. 자 들어가십시다.]
윤우일은 사내를 따라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거침없이 계단을 올랐는데 1층 복도의 좌우
에 문이 하나씩 닫혀져 있는 것을 보면 두 세대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단에도 복도에도 인적이
없었지만 어느 방에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2층의 우측 방으로 다가간 사내는 열쇠를 꺼내어 문
을 열었다.
[자, 들어가십시다.]
윤우일은 사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방 안에 세 명의 사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 사내 하나가 등으로 문을 밀어 닫고는 웃음 띈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진땀뺐다.]
[어, 고생했어.]
세 사내 중 하나가 말을 받았다. 다른 사내가 윤우일에게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셔.]
모두 한국인들이었지만 나이는 각각이었다. 30대도 있고 4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내도 있다. 윤우일의
시선이 그들을 훑고 갔을 때 그중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탈북자라구? 그런데 돈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았지?]
[당신들은 누구요?]
윤우일이 묻자 제일 체격이 건장한 30대가 소리 없이 이만 드러내고 웃었다.
[한국말 쓰는 걸 보면 몰라? 네 동포야.]
몸을 돌린 윤우일이 문에 등을 붙이고 서있는 관광 가이드를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오? 이 사람들은 누구고?]
[도대체 그런 눈치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돈은 어떻게 모았고?]
가이드가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자, 돈 내놔라. 돈만 내놓으면 그냥 보내줄 테니까 말이야.]
[아니, 그럼 당신들.......]
그러자 나이든 40대가 혀를 찼다.
[이봐, 넌 죽여도 경찰이 용의자를 찾지도 않는 무국적자야. 살고 싶으면 돈만 내놓아라, 어서.]
[빨리 이 자식아!]
건장한 체격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대검을 빼들고 위협을 했다. 눈을 부릅뜬 그는 손에 쥔 대검을 어
지럽게 흔들어 보였다.
[자, 3만 8천 달러를 가져왔겠지? 어서.]
그러자 윤우일이 길게 숨을 뱉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신들은 한국 사람들이군.]
[난 이태리 국적이야.]
나이든 사내가 받아치자 윤우일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파리 지퍼를 열고는 가슴에 차고 있
던 콜트를 꺼내 쥐었다. 소음기까지 끼워져 있어서 검은 총신이 더 길었다.
일순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세 사내는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굳혔고, 윤우일은 총구를 돌려 문을 막
고 서 있는 가이드의 배를 쏘았다.
퍽!
둔한 총성과 함께 사내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더니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뱉으면서 힘없이 엎어졌
다. 사지가 뒤틀린 사내는 방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윤우일은 총구를 돌려 아직도 정신이 반쯤 나
가 있는 대검을 든 사내를 쏘았다. 그리고는 남은 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태리 국적이라고 했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고 말투였다. 윤우일에게 지목을 당한 나이든 사내가 그제야 몸을 떨
었다.
[살려주십시오, 선생님]
[여권을 내놔. 여권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그러자 사내가 눈물을 쏟았다.
[다 드리지요, 살려만 주십시오.]
|
첫댓글
,
항상감사 


므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