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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향녀와 정을 나눈 사내
단지흥은 화산 아래 객점에서 주백통을 만났다. 주백통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를 만날 것 같아 농부와 함께 객점에 들어 있었다. 단지흥은 주백통을 보자 정중히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주 형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이렇듯 뜻밖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허허허……."
"단황 나으리, 그만 해 두시우, 그만요, 헤헤헤……."
주백통은 손사래를 쳐 가며 사양을 했다.
단지흥은 왕중양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은즉, 이 사람이 왕중양의 사제인지라 각별히 예를 갖추었다.
농부는 대환희 보살에게 잡혀 끌려 다닐 때 이미 단지흥이 화산으로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황제의 안위를 확인하고는 자기 한 몸이야 어찌 되든 염두에 두지 않고 매우 기뻐했었다. 하나 이제 주백통의 도움으로 그 역시 보살의 손에서 놓여나 단지흥과 이렇듯 마주앉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단지흥과 선비를 번갈아 보며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폐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소인들은 폐하의 안위가 염려되어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는데 이렇듯 폐하를 마주 대하니 죽다 살아난 듯하옵니다. 그래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농부가 묻자 단지흥과 선비는 약속이나 한 것마냥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드는 것이었다. 단지흥이 그 일을 더는 입에 올릴 눈치가 아니자 선비가 얼른 나섰다.
"아이고 말도 말게나. 내 천천히 얘기해 줌세. 그건 그렇고 나무꾼과 어부 소식은 못 들었나?"
"아직 못 들었네."
농부는 시무룩하니 대꾸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섰다.
"내 이 사람 선비에게 자네들 얘기는 들었네. 나무꾼과 어부도 화산 주변을 벗어나진 않았을 테니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농부와 선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은 다시 주백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한데 주 진인께선 앞으로 어디로 가시려오?"
주백통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얼버무렸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갈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주 진인께선 나와 함께 대리로 가십시다. 그곳은 실로 아름다운 곳이라오. 창산도 푸르고 이해도 푸르니 그 좋은 경치를 안 보시면 후회막급이오. 주 진인께서는 나만 따라가십시다."
주백통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단황 나으리께서 날 데리고만 가 주신다면 난 폐하의 친구가 되는 셈인데, 그렇담 나도 단황 나으리처럼 즐겨도 되는지……."
"그야 여부가 있겠소. 그대가 황제처럼 나날을 보내고 싶어해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소."
주백통은 어린아이마냥 펄쩍펄쩍 뛰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난 폐하를 따라가겠습니다."
"주 진인께서 대리에 가시는데 중양 진인께 알리지 않아도 되겠소?"
주백통은 머리를 쓱 늘여 빼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 기색은 얼핏 괴이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내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종래로 사형께서는 절 상관하지 않아요. 그분은 다만 장래에 제가 전진교의 구성(救星)이 될 거라고만 말씀하셨지요. 그러시면서 전진교 일에 대해서는 저더러 되도록 관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 또 무슨 진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폐하께선 저더러 진인 진인 하지 마시고 그냥 백통이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됩니다."
단지흥은 일국의 황제이나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라 주백통의 말을 듣고도 달리 생각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대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2, 3일씩 걷고는 하루씩 휴식했다. 아직 어부와 나무꾼은 만나지 못했으나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시각을 다투어 대리로 먼저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네 사람은 발길을 다그쳤다.
그날도 발에 땀이 나도록 걷고 있는데 멀리 득의루(得意樓)란 객점이 눈에 띄었다. 단지흥이 선뜻 운을 뗐다.
"인생에서 뜻을 이루려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느니, 우리도 잠시 즐기다 갑시다!"
그러자 주백통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좋아요, 좋아요!"
농부와 선비는 한시 바삐 대리로 돌아갔으면 했지만 단지흥이 먼저 운을 뗐는지라 묵묵히 따랐다.
네 사람은 함께 누각 위로 올라갔다. 누각 위에선 이미 몇몇 호객들이 한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과 요리를 주문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지고 그들은 피로도 풀 겸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일각쯤 지났을까, 얼핏 옆 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들려 왔다. 들어 보니 그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은 중년의 청수 검객을 한껏 치켜 세우고 있었다. 그 청수 검객은 기색은 담담했으나 어딘가 심정이 개운치 못한 듯 보였다.
"곽 대협께선 너무 그렇게 불쾌해하실 것 없소이다. 아, 대협께서 화산에서 그 향녀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은 건 다 대협의 도량이 넓기 때문인 게요. 향녀들이 아무리 성가시게 군다 해도 곽 대협께서야 어디 여인들과 똑같이 나가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 누가 곽 대협을 뭐라 하지도 않으니 자, 어서 술이나 드시지요!"
그 중년의 청수 검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향녀란 소리에 단지흥과 선비는 귀가 번쩍 뜨였다. 주백통도 청수 검객을 유심히 바라보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필시 어디서 본 듯한데 아리송하니 도무지 어디서 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 대협, 듣자니 그 왕중양이란 분이 화산에서 영웅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합디다. 네 사람이 일시에 손을 썼는데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왕중양이란 분의 기공은 단연 천하 으뜸이지요. 그리고 뭐라더라, 서역에서 왔다는 구양봉이란 사람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그 사람의 합마공만 해도 당해 낼 자가 없다더군요. 그런데도 그 사람도 중양 진인 손에 패하고 말았다지요?"
저쪽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입에 침을 튀겼다.
주백통은 그 사람들이 자기 사형의 무공이 천하 으뜸이라고 하자 으쓱해져서 앞뒤 분간 없이 떠들어댔다.
"맞네, 맞아. 바로 서독, 동사, 그 밖에 북개에다가 여기 계신 단황 나으리까지 네 사람이 일제히 덤벼들었어도 우리 사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단 말이야."
단지흥은 솔직한 사람이라 사심 없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렇습니다. 백통 형, 당신의 무공도 당신 사형인 중양 진인과 마찬가지일 게요. 그날 당신도 나와 한판 겨뤘어야 하는데, 정말 아쉽군요."
그러자 주백통은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저쪽에서 또 누군가가 말했다.
"됐네. 우린 곽 사형과는 남도 아닌데 체면 차릴 필요 있나? 내 보기엔 일찌감치 일을 끝내야 할 것 같아. 함께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하는 게 중요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쪽에 앉았던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면서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필시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사뭇 호기심이 일어 채근했다.
"백통 형, 우리도 뒤따라가 봅시다, 저 사람들이 뭘 하는가!"
주백통이 마다할 리 없었다. 일행은 황급히 앞서 나간 사람들을 쫓아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가을 바람에 정신이 번쩍번쩍 났다. 앞서 나간 사람들은 뭐라고 떠들어대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밖에 있는 큰 뜨락에 다다라서야 발길을 멈췄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얼른 대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하나 나와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러자 선비가 단지흥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단지흥은 웃음을 지으며 선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곳엔 오로지 단지흥이 있을 뿐 그 무슨 황제는 없네. 자네는 나에게 뜨락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할 참이었지?"
선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자못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당신은 엄연히 황제인데 어찌하여 그러시오?"
"강호엔 험난한 풍파가 있고, 황제에게는 지난한 근심이 있네."
단지흥은 마치 시 한 구절을 읖조리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기실 자기는 비록 황제 노릇을 하고는 있으나 강호 무객의 처지가 부럽고, 뿐더러 갖가지 위험을 견뎌 내는 것이 진짜 사내대장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백통 역시 무림호걸인지라 그 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훌륭하십니다. 단황 나으리는 황제 노릇은 걷어치우고 아예 강호 무객 노릇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농부와 선비는 그제야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간 사람들은 뜨락을 지나 곧추 대청으로 나아갔다.
단지흥 일행은 모두 집 밖에 서 있었다. 단지흥이 눈짓을 하자 선비가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주백통이 단박에 면박을 주었다.
"바보 같으니, 그렇게 소리쳐 부르면 무슨 재미가 있어? 모두들 듣고 숨어 버리면 어떻게 찾아내려고?"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이내 삐꺽 하며 문이 열리더니 문틈으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모두 사내들이네?"
여인은 단지흥 일행을 보고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머리를 도로 문 안으로 쓱 집어 넣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다시 불러 보지요."
선비는 주백통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또다시 외쳤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집 안에서 누군가 대꾸를 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이니 어서 들어오시오!"
또다시 삐꺽 하고 문이 열리고 좀전의 그 여인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오시지요!"
일행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한복판에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 두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영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집 안주인인 듯싶었다. 그 두 노인은 단지흥네들이 들어가도 일어나지 않고, 고개 한번 까딱하는 법도 없었다.
"늙은 몸이라 인사를 올릴 수 없으니 용서하세요."
안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알아차리고 얼른 예의를 차렸다.
"문득 뛰어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백통은 예의고 뭐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먼저 들어왔던 청수 검객네들은 모두 대청 아래에 줄지어 서서 허리를 낮추 굽히고 잠잠히 서 있었다. 그 곁에 처녀도 하나 서 있었다.
이윽고 영감이 자기 소개를 했다.
"이 늙은 것은 화산파의 장문(掌門)이고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문하입니다. 오늘 이 노구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건 우리 화산파의 문풍 (門風)을 바로잡기 위해서지요."
장문인의 말이 떨어지자 화산파의 제자들은 저마다 두려운 기색으로 더욱 허리를 낮추었다. 두 노인은 만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무슨 일로 무척 속이 상해 있는 듯싶었다. 아마도 이 화산파 제자들 중 누가 밖에서 무슨 과오를 저지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화산검을 가져 오너라!"
장문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를 뒤로 동여맨 동자 둘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한 자루 검을 받쳐들고 나왔다. 단지흥과 주백통 두 사람은 이것이 예전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자(風淸子)가 쓰던 집법검 (執法劍)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화산파에서 일단 이 검을 내오게 되면 대대적인 처벌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입도 벙긋 못하고 서 있었다.
"화산파는 종래로 강호에서 명문(名門)에 속하는 큰 파였느니라. 이번에 왕중양 진인께서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화산에서 고금에 없는 무예 시합을 열었도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화산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장문인의 말이 길어지자 안주인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자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사설을 싹 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들에게 오늘 화산파의 형당(刑堂)에서 너희들의 과실에 대해 중벌을 내리려 하노라!"
보아하니 낄 자리가 아닌 터, 단지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산파 장문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화산파에서 오늘 내무를 처리하시는데 외인인 우리가 방해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남이 화산파의 내부 일을 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 안주인이 웃으면서 톡 끼여들었다.
"화산파가 무슨 남이 알아서는 안 될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러자 장문인은 다소 불평스런 기색이면서도 더는 말을 안 했다.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뜻이 분명하자 단지흥은 할 수 없이 읍을 하고는 도로 두어 걸음 물러나왔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장문인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명송이, 나오거라!"
대협 곽명송은 화산파의 수제자였다. 곽명송은 넙죽넙죽 걸어나와 노인들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사숙님,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명송아,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로 네가 화산파의 가장 큰 제자이니라. 그래서 나는 감히 너를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못했거늘, 요사이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곽명송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중히 답했다.
"사숙님, 저는 요사이 강호를 다니면서 선한 일을 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못 됩니다."
그러자 안주인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으래? 네가 하고 다닌 일이 모두 대단한 게 아니라구? 내 듣기로는 네가 놀라운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럼 그 말이 모두 거짓이더냐? 한치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아뢰거라!"
곽명송은 몹시 의아했다. 사숙모께서 무슨 일을 두고 저러시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명송은 다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사숙모님, 무슨 일을 지칭하시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허, 모른다? 네가 한 짓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자, 갖다 보거라! 이걸 보고도 딴소리를 하는지 내 두고 보리라!"
안주인이 종이 한 장을 곽명송에게 내던졌다. 곽명송은 날아오는 종이를 묘하게 받아 들었다. 단지흥은 내심 그 솜씨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곽명송은 묵묵히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대번에 핼쑥해져서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이 일은……."
"명송아, 화산파의 법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넌 법도를 어겼느니라. 네 죄를 알렷다?"
안주인이 추상같이 추궁하자 곽명송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숙을 바라보았다.
"사숙님, 전 그때……."
"또 변명을 하려는고? 네가 한 짓이렷다? 사실대로만 고해라!"
장문인도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눈에서는 마치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싶었다. 곽명송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했다.
"저, 저는 다만……."
"명송아, 사부님이 살아 계셨을 때 사부님은 너만 편애하시며 부러 너의 사매(師妹)도 홀대했었느니라. 오늘 넌 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네 스스로 후과를 처리하거라."
안주인은 적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쥐죽은듯이 숨을 죽이고 한옆에 서 있던 처녀가 울상이 되어서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조르르 달려 나와 대뜸 입을 열었다.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곽명송 곁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아버지, 어머니! 큰 사형께서는 종래로 의리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분토같이 여기셨어요. 사형께선 화산파에 누가 될 짓을 저지를 분이 아니니 섦게 대하지 마세요."
"명주(明珠)야, 넌 물러서거라. 여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안주인이 말을 막았다. 처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영감이 말을 이었다.
"명송아, 네가 남의 여인을 간음한 일이 있으니 투서가 들어온 게 아니냐. 그 사람들은 조만간 화산파를 찾아와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 그래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게 제일 좋겠지요!"
곽명송은 가벼이 탄식을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자들은 사뭇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에게 검을 갖다 주었다. 그는 검을 받아 들더니 잠시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한 순간, 그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칼을 힘껏 치켜 들었다. 자신의 목을 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처녀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형, 그따위 바보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러나 곽명송은 아랑곳 않고 자기 목을 향해 검을 힘껏 내리찍었다. 화산파 제자들도 발을 동당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일순 한옆에 비켜서 있던 단지흥이 가볍게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가 일며 검날이 옆으로 살짝 비켜 갔다. 그 틈에 화산파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우르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장문인은 아무 말 없이 쏘아보고 있더니 단지흥에게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내쏘았다.
"이보시오, 손님! 당신이 이렇게 하는 건 우리 화산파의 내부 일을 참섭하는 것이오!"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중히 말했다.
"난 화산파 일을 참섭한 게 아니오. 다만 당신들 화산파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걸 막았을 따름이오."
"그건 살인이 아니라 화산파 법도요. 난 진작부터 당신이 대리의 황제라는 걸 알고 있은즉,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이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묵과한 것이오. 그런데 항차 황제라고 해서 우리 화산파 일에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이오?"
단지흥은 웃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단황 나으리, 듣건대는 당신은 화산 무예 시합에서 솜씨를 보였다더군요. 천하에 다섯 고수가 있는데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이 다섯 사람을 이르는 것 아니오? 그래, 당신이 다섯 고수에 꼽히는 남제이니 만큼 우리 화산파를 무너뜨리기야 누워서 떡먹기겠지!"
장문인은 한사코 목청을 돋웠다. 단지흥은 그저 생각 없이 곽명송을 구해 낸 걸 가지고 그가 이처럼 걸고 넘어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전 다만 이 곽 대협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걸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 사람이 참말로 화산파를 대신하여 죽을 만한 죄를 지었는가, 저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명송아, 저분 뜻이 정히 그러시다니 네가 직접 네가 한 짓을 말씀드려라."
장문인은 호기롭게 내쏘았다. 그러자 곽명송은 단지흥을 향해 깍듯이 예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단황 나으리, 사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제가 지은 죄는 너무도 크므로 황제께서 저를 대신하여 죄를 사해 달라고 청을 드려도 전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곽명송은 말을 마치더니 그 종이 한 장을 단지흥에게 넘겨주었다. 단지흥은 급히 받아 들어 펼쳐 보았다. 하나 그 종이에는 기이하게도 열 몇 자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단지흥은 곽명송이 어떤 여인과 남모르게 무슨 정사를 치렀는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지라 그 열 몇 자 되는 글을 아무리 새겨 보아 봤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기실 설사 곽명송이 남의 소녀를 간음했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도무지 그 소녀가 편지로 곽명송의 죄를 공소하고 화산파의 처사에 증오를 느껴 복수하려는 내용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또한 이 편지만 보고서는 곽명송을 그리는 것인지, 찾아서 복수하겠다는 것인지 그 심사조차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문인은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했다.
"명송아, 네가 간음 죄를 지었은즉, 의당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느리라. 그렇게 해야 우리 화산파의 기개가 손상받지 않는 거다."
그리고는 그는 뒤미처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남제께서는 고명한 분이기는 하지만 명송이를 한평생 건사할 순 없지 않겠소이까? 당신이 일단 떠나가면 저 명송이는 결국 죽어야만 하오."
단지흥은 그 편지도 기이할 뿐더러 다소 의외의 일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 순간 주백통이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뜸 내뱉었다.
"이봐요, 노인장! 당신은 저 사람이 죽어선 안 된다는 걸 왜 모르시오? 사람들은 저 사람을 대협이라 부르며 그가 큰일을 해내리라고 믿고 있소. 당신이 저 사람을 죽이는 건 음덕(陰德)이 없는 짓 아니오?"
주백통은 그제야 그가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만난 그 청수 검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주백통의 이 한마디에 처녀가 반색을 하며 그때껏 곽 대협이 한 선행을 쭉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큰 사형께선 하남에 있는 열일곱 가족을 구해 주었고 약탈당한 보물들도 다 찾아 주었지요. 또 사형께서는 호위표국(虎威 局)의 열여섯 사람도……."
장문인이 버럭 성을 내며 그 말을 가로챘다.
"주둥아리 놀리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그러나 처녀는 순순히 굽어 들지 않고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는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참말이에요. 큰 사형은 우리 화산파를 위해 적지 않게 힘을 썼다구요."
단지흥은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자못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남녀간의 일로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었다.
"화산파는 천하의 명문대파(名門大派)인데 함부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걸 천하 무림에서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없을 텐데요?"
단지흥이 다시 나서자 안주인이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화산파 일에 참섭하겠단 말이오?"
단지흥이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데 그 틈을 비집고 주백통이 냅다 윽박질렀다.
"허 참,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소? 화산파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화산파, 화산파, 그러시오? 우리가 참견하고 싶으면 참견하는 게지, 그게 뭐 어떻단 말이오?"
그러자 곽명송이 대뜸 나섰다. 그는 자기 하나 때문에 사숙과 사숙모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단황 나으리, 이 곽명송은 일찍이 당신을 모르고 지낸 것이 실로 유감입니다. 그 후더운 사랑에 대해서는 내세에서 보답하렵니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잘끈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주백통은 단박에 그것을 눈치채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대혈을 눌러 놓았다.
"당신은 죽으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은 여러 사람 앞에 왜 죽어야만 하는가를 똑똑히 얘기해야 해. 그래야만 죽도록 내버려둘 테야."
주백통이 냅다 고함을 질러대자 곽명송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 사매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고려할 여지가 없군요.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곽명송은 강호를 다니다가 우연히 한 여협을 알게 되었다. 그 처녀는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아주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통해 함께 강호를 돌아다녔다. 그는 처녀의 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만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원한다는 것만 알 따름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한 객점에 묵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십여 일 동안이나 큰 비가 내렸다. 하는 수 없이 객점에 계속 머물면서 처녀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 정이
통하여 그 처녀와…….
곽명송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갑자기 처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 사형은 참말로……."
그 처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매, 이건 참말이야. 나도 그날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말았다. 그러자 장문인이 끼여들었다.
"네가 맘을 옳게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된 거야……."
"넌 여자가 꽃같이 생겼으니까 갑자기 짐승 같은 짓을 할 마음을 품게 된 게야. 거기에 무슨 영문 모를 일이 있단 말이냐?"
안주인이 호통을 쳤다. 이제 처녀는 목놓아 울어댔다. 그녀는 마음 깊이 이 큰 사형을 사모하고 있었다. 단지흥 일행도 단박에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처녀는 곽명송을 사모하므로 죽더라도 곽명송 편을 들 것이었지만 그 사형이 참말로 이런 짓을 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넨 그 여인이 누군지 아는가?"
단지흥이 물었다.
'보아하니 단황 나으리도 방법이 없는 모양이로군. 어리석게 그 여자가 누구냐 하는 걸 물어 어디다 쓴단 말인가? 곽명송이 남의 처녀를 간음한 것만 해도 작은 죄가 아닌데.'
주백통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누군지는 전 모릅니다. 기이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얼굴도 기억할 수 없구요."
곽명송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단지흥이 웃으면서 또 물었다.
"곽 대협, 자넨 그 여인과 처음이었나?"
곽명송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단지흥이 계속 엉뚱하게 물어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렇담, 곽 대협! 자넨 그 여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네.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게야."
"단황 나으리, 당신의 호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옵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도와주어도 이제 와선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보아하니 사내가 계집과 함께 있으면 시끄러운 점이 아주 많구나. 난 절대로 계집과 함께 있지 않을 테야.'
주백통은 여전히 혼자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질기게 다시 말했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광명정대하게 처신해야 하네. 자네가 그 일을 인정했으면 됐지 한평생 죄를 짊어질 필요가 있나?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자결을 하고?"
곽명송은 잠시 묵묵부답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간신히 한마디했다.
"전 정녕 그 여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여인…… 그 여인의…… 가슴이……."
곽명송이 거기까지 말하자 단지흥의 가슴은 대번에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성마르게 곽명송을 재촉했다.
"그 여인의 가슴이 어쨌다는 말인가? 속이지 말고 어서 사실대로 말하게!"
곽명송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여인은 가슴이, 젖가슴이…… 문드러지고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단지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산파의 사숙과 사숙모,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문제의 여인이 이런 여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곽명송은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마냥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그 여인은 유방이 문드러져 없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그 여인은 계속 '다치지 말아요. 그랬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하고 말하더란 말입니다. 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참말로 후회했지요."
곽명송은 비분에 잠겨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를 질렀다.
단지흥은 선비와 농부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곽명송을 보고 활짝 웃었다.
"내 자네한테 알려 주지. 난 얼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꾼 적이 있었지. 꿈속에서 숱한 여인들을 만났다네. 바로 그 여인들이 모둔 유방이 없더란 말일세. 그 여인들은 자기의 젖가슴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전심전력으로 사내들을 미워하지 않겠나? 그 여인들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사내들을 못살게 굴고 천하의 훌륭한 사내들을 자기들 손으로 죽여 버리는 것이었네……. 알고 보니 난 몽약이 든 미향에 중독되어……."
처녀는 어느새 울음을 멈추었다. 그 여인은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다보았다. 여인의 두 눈에서 얼핏 따스한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단지흥이 자기의 남부끄러운 경험까지 들춰 내면서까지 사형의 고충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것으로 사형에게 품게 된 한 가닥 의심도 말끔히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지흥에게 각별히 따스한 마음을 보냈다.
그러나 장문인은 싸늘히 냉소를 머금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곽명송은 눈을 반짝 빛내며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꿈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단지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명송이 다시 재우쳐 물었다.
"그럼 왜 조사해 보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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