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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굳은 손
박순이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뜨는 것은 자명종 때문이 아니었다.
일흔세 해 동안 몸속 깊이 새겨진 어떤 시계가 그녀를 깨웠다.
눈꺼풀이 채 열리기 전에 먼저 손이 움직였다.
왼손이 오른손의 마디마디를 더듬었다.
마치 잊어버린 물건을 찾듯,
혹은 오랜 친구의 얼굴을 확인하듯.
손마디는 굵었다.
쉰 해 넘게 고추를 썰고 된장을 퍼내고 무거운 냄비를 들었던 손이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는 종종 그 손을 보며 말했다.
"당신 손은 왜 이렇게 나무 같소."
비난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이었다.
남편은 삼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 손은 오직 순이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연립주택 이층, 서울 변두리의 작은 집은 새벽 빛 속에 잠자고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끓이는 동안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어둑한 골목, 가로등 하나가 전봇대 아래 작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원 안에 빗물이 고여 있었고,
빗물 속에 가로등이 또 하나 웅크리고 있었다.
'오늘도 또 하루구나.'
그것은 체념의 말이 아니었다.
노년이란 어쩌면 매 아침 그렇게 스스로에게 허락을 구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이 하루를 살아도 되겠느냐고.
이 몸뚱이로 또 한 번 세상 속으로 나가도 되겠느냐고.
차를 마시고 나서 순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전날 밤 삶아 놓은 계란 열 개와 작은 유리병에 담긴 된장,
그리고 손수 접은 하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손수건에는 파란 실로 작은 별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을 접을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실을 한 번 더 당겼다.
혹시라도 풀릴까봐.
봉지를 문 옆에 걸어두고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를 개고,
방 한쪽 구석 작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탁자 위에는 낡은 성경 한 권과 촛대,
그리고 유리컵에 꽂힌 들국화 몇 송이가 있었다.
들국화는 어제 아파트 화단에서 꺾어온 것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꺾은 것이 아니라 그냥,
꽃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오래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오십 년 묵은 대화였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그녀는 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오 층짜리 연립주택의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는 각 층 문 앞의 냄새를 맡았다.
이 층은 된장찌개, 삼 층은 커피,
사 층은 아무 냄새도 없었다.
사 층에는 혼자 사는 청년이 살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순이는 그를 종종 보았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청년.
어떤 날은 며칠씩 인기척이 없기도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1층 복도 끝,
201호 문에서 소리가 났다.
순이는 잠시 멈추었다.
문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였다. 낮고 지친,
소리를 삼키려 애쓰는 울음.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봉지에서 계란 두 개와 손수건을 꺼내 문앞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초인종은 누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이 때로는 나타나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운 일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뺨을 건드렸다.
늦가을이었다.
은행나무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인도 위에 쌓여 있었다.
순이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사그락, 사그락. 그 소리가 좋았다.
밟힐 때 비로소 소리를 내는 것들이 있다.
잎도 그렇고,
어떤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2 장 삯꾼과 목자 사이
동네 복지관에 가는 길에 박순이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복지관에서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토요일에 그녀는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도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봉사라고 불렀다.
순이는 그 단어가 왠지 불편했다.
봉사란 말이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슈퍼마켓 사장 정씨가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박 여사, 또 오셨어요?
오늘은 뭘 사려고요?"
"두부 두 모하고, 파 조금."
"또 거기 갖다 주려고요?
그 집 아들이 있다면서요.
그 사람들이 해줘야지."
순이는 대답 대신 두부를 집어들었다.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해명하려 했다.
아들이 있어도 못 오는 사정이 있다고,
우리가 조금 도우면 된다고.
그러나 이제는 그 말들이 그냥 공기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오래전 그녀도 정씨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자신이 도움을 주면 상대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그 믿음이 깨질 때마다 그녀는 상처받았다.
배신당했다는 기분, 어리석었다는 자괴감.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부를 들고 가는 이 걸음이,
어쩌면 그 노인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그냥 가는 것이다.
누가 받아들이든 받지 않든,
그 걸음 자체가 이미 완결된 무언가라고.
복지관에 도착하니 자원봉사자 박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리는 삼십대 초반의 여성으로 복지관 사무를 보면서 봉사자들을 조율했다.
그녀는 순이를 보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 선생님, 사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오늘 김 할머니 댁에 들르실 때...
좀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요?"
"저번에 선생님이 갖다 드린 반찬이 있잖아요.
그걸 이웃에 나눠줬대요.
그러면서 선생님 욕을 하셨다고...
왜 이런 걸 가져오냐고,
자기가 거지냐고."
순이는 잠시 멈추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대리가 덧붙였다. "
그래서 제가 선생님한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몇 번을 그러셨거든요."
"알겠어요."
"화나시죠?"
"아니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한때는 났었다. 왜 저러나,
나를 뭘로 보나, 다시는 안 가야지.
그 마음들을 순이는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 안에 있는 것은 화가 아니라
어떤 막연한 안쓰러움이었다.
반찬을 받아 놓고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마음.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한 자존심인가.
"그래도 갈게요."
순이가 말했다.
"두부도 가져왔으니까."
김 할머니 댁은 복지관에서 걸어서 십 분이었다.
낡은 단독주택,
마당에는 고양이 밥그릇이 세 개 있었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순이가 초인종을 누르자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여든 가까운 김 할머니는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의심스러운 눈이었다.
세상의 모든 방문자를 적으로 대하는 눈.
"나요, 박순이." 순이가 말했다.
"두부 가져왔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들어와요."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탁자 위에 약봉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고,
텔레비전은 소리 없이 켜져 있었다.
순이는 두부를 부엌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밥은 드셨어요?"
"먹었어."
"드세요, 그럼."
그게 전부였다.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왜 왔는지, 뭘 바라는지, 어떻게 살라는지.
아무것도.
순이는 그냥 두부를 놓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배달부다.
이 두부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을 할 뿐이다.
누가 시킨 심부름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제 3 장 어두운 밤에도 이름이 있다
그날 저녁, 순이는 오래된 편지 상자를 꺼냈다.
남편이 죽고 나서 한 번도 열지 않은 상자였다.
딸이 두 번 정리해드리겠다고 했지만 순이는 거절했다.
정리란 말이 무서웠다.
정리된 것은 끝난 것이기 때문에.
상자 안에는 편지들이 있었다.
남편의 편지, 딸이 초등학교 때 쓴 카드들,
그리고—상자 맨 밑에—누군가가 보낸 편지 묶음.
노란 고무줄로 묶인 그것을 꺼낼 때 그녀의 손이 잠시 떨렸다.
발신인은 없었다.
받는 이만 있었다.
박순이. 주소는 지금 이 집이 아니라 이십 년 전 살던 곳이었다.
봉투를 열지 않은 채 그냥 간직해 온 편지들. 몇 통이나 됐을까.
순이는 세어보지 않았다.
그 편지들은 이웃집 여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름은 강영미.
그녀는 한때 순이에게 가장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빼앗아간 사람이었다.
이십 년 전 일이었다.
강영미는 순이보다 열 살 어렸다.
남편과 사이가 나빠서 매일 울었고,
아이가 셋이었으며, 돈이 늘 부족했다.
순이는 그녀를 보는 것이 가슴 아팠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갖다 주었다.
영미의 생일에는 케이크를 구웠다.
영미의 남편이 갑자기 사라진 여름에는
두 달 동안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미가 말했다.
"언니, 사실 우리 아이들 학원비가 막혀서요."
순이는 빌려주었다.
그 다음 달에도, 그다음에도.
그러다 어느 해 봄, 영미는 이사를 갔다.
이사 가는 날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돈을 돌려준다는 말도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멀지 않은 동네로 갔다고 했다.
그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순이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이사.
그때 순이는 오래 울었다.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번갈아가며 밤새 그녀를 흔들었다.
그해 가을 영미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과의 편지.
순이는 읽지 않았다.
그 다음에도 왔다. 또 읽지 않았다.
그렇게 묶음이 생겼다.
편지 묶음을 상자에 다시 넣으려다 순이는 멈추었다.
창밖으로 불빛이 하나 켜졌다.
맞은편 건물 어딘가에서.
늦은 밤에 홀로 켜지는 불빛.
누군가 잠을 못 자고 있거나,
아픈 아이 곁에 앉아 있거나,
혹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거나.
어떤 사람의 고통은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영미의 이기심도,
그 빌린 돈도, 그 이사도.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왜 지금 왔을까.
이십 년이 지나서야.
순이는 편지 묶음을 다시 꺼내 고무줄을 풀었다.
그리고 첫 번째 편지를 열었다.
손이 떨렸다. 눈이 좋지 않아서 돋보기를 찾아 쓰고 나서야 글씨가 보였다.
'언니, 나 정말 미안해.'
그 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 순이는 한참 그 첫 줄을 보았다.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울면서 썼을 것이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런 글씨를 쓴 적이 있었으므로.
그날 밤 순이는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
두 통 읽고 나서 다시 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의 묶음과 달랐다.
예전의 묶음은 닫기 위한 것이었고,
오늘의 묶음은 나중에 다시 열기 위한 것이었다.
제 4 장 별 수놓은 손수건
토요일 아침, 사 층의 청년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순이가 계단을 올라가는데 사 층 문이 열리며 그가 나왔다.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 아래 그림자가 짙었고,
머리는 며칠 감지 않은 것 같았다.
점퍼 하나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아래 입은 것이 잠옷 바지인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계단에서 마주쳤다.
청년이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지나가려 했다.
"이른데." 순이가 말했다.
청년이 멈추었다. "아, 네."
"밥은 먹었어요?"
"...지금 나가려고요."
그 말이 이상했다.
아침 여덟 시에, 잠옷 바지를 입고,
어디를 가는 걸까.
순이는 묻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장바구니에서 계란 두 개를 꺼냈다.
"삶아 놓은 거예요. 가면서 먹어요."
청년이 당황한 얼굴로 계란을 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이는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틀 후, 순이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계단 앞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작은 종이봉투.
안에는 유자차 티백 한 묶음과 메모지가 있었다.
메모지에는 글씨가 작게 적혀 있었다.
'할머니, 계란 잘 먹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4층 강준.'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 두 감정이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보며 순이는 오래 서 있었다.
받는 것이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마음.
어쩌면 영미도 그랬을까.
말은 못 하고 편지만 썼을 때.
순이에게서 달아났을 때.
그녀는 유자차 봉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 들국화 옆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날 오후, 순이는 손수건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번에는 별이 아니라 작은 새 한 마리를 수놓았다.
파란 실로 날개를 펼친 새.
수를 놓으면서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의식하지 않았다.
그냥 바늘이 갔다. 파란 실이 따라갔다.
어릴 때 어머니가 그녀에게 수를 가르쳐주었다.
힘을 너무 주면 천이 구겨진다.
너무 느슨하면 모양이 흐트러진다.
딱 맞게, 팽팽하지도 늘어지지도 않게.
그게 어디 수만 그렇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이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너무 꽉 쥐어도, 너무 놓아도 안 된다.
팽팽하게 이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끊지 않는 그 어떤 긴장.
수를 다 놓고 나서 순이는 손수건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사 층 강준의 문 앞에 두고 왔다.
초인종은 누르지 않았다.
편지도 쓰지 않았다.
그냥 두었다.
그가 집에 있든 없든, 보든 버리든.
계단을 내려오며 순이는 생각했다.
이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새를 수놓고 싶었다.
그래서 놓았다.
그리고 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주었다. 그게 전부다.
그 생각이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했다.
제 5 장 목자는 앞에 선다
십일월 중순, 첫 눈이 내렸다.
순이는 창문 앞에 서서 눈을 보았다.
함박눈이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골목을 하얗게 덮었다.
은행나무 잎들이 이제 거의 다 떨어졌는데,
남은 몇 장이 눈을 맞고 있었다.
떨어지기를 유예받은 것들처럼.
전화가 왔다. 딸 미란이었다.
"엄마, 뭐 해?"
"눈 봐."
"또 복지관 가려고?"
"응."
전화 너머로 딸의 한숨이 들렸다.
미란은 늘 그랬다.
한숨을 먼저 쉬고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 좀 해.
무릎도 안 좋잖아.
그 사람들이 뭘 해줬다고."
"눈 와서 미끄러울까봐."
"그러니까 엄마가 가지 말라고."
"내가 아니라 거기 있는 사람들이."
미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엄마는 왜 맨날 그래.
본인 생각은 안 해."
순이는 웃었다.
전화기 너머로 딸이 그 웃음을 들었을 것이다.
"나 생각하는 거야.
가는 게 내가 좋거든."
복지관 가는 길에 순이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눈이 쌓인 인도는 미끄러웠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
지팡이는 집에 있었다.
쓰기 싫어서가 아니라 오늘 양손이 다 필요했다.
왼손에는 두부와 된장이 든 봉지,
오른손에는 유자를 넣어 끓인 따뜻한 국물이 든 보온통.
김 할머니 댁 골목 어귀에서 순이는 멈추었다.
계단이 있었다.
세 개짜리 작은 계단이었지만 눈이 쌓여 있었다.
미끄러워 보였다.
그녀는 잠시 서서 그 계단을 보았다.
목자는 양보다 앞에 선다.
풀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위험한 곳이 있는지 먼저 밟아보기 위해서.
그것이 목자의 일이다.
순이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오늘은 빨리 열렸다.
김 할머니가 문을 열며 말했다.
"이 눈에 왜 왔어요."
"눈 오니까 따뜻한 거 드시라고요."
할머니가 잠시 순이를 보았다.
순이도 할머니를 보았다.
오래 쌓인 불신과,
그 불신 아래 어딘가 있는 무언가.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이기는 어려웠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들어와요."
오늘은 커튼이 조금 열려 있었다.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탁자 위에 약봉지가 여전히 쌓여 있었지만,
그 옆에 작은 화분이 하나 있었다.
다육식물이었다.
통통하고 짧은 잎들이 햇빛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화분 생겼네요."
"아들이 갖다놨어. 쓸데없이."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눈은 화분 쪽을 보고 있었다.
순이는 보온통을 열어 국물을 대접에 따랐다.
유자 향이 퍼졌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할머니가 대접을 두 손으로 잡았다.
손이 떨렸다.
순이는 보지 않는 척했다.
돌아오는 길에 눈이 그쳤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눈 위에 햇살이 부서졌다.
순이는 잠시 서서 그것을 보았다.
골목 어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쁘다는 말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어떤 충만함이었다.
빈 그릇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천천히, 소리 없이.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았다.
제 6 장 향기로운 제물
편지를 다 읽은 것은 십이월 초였다.
강영미의 편지는 모두 일곱 통이었다.
이년에 걸쳐 쓴 것들이었다.
처음 편지는 사과였고,
두 번째는 해명이었고,
세 번째는 다시 사과였다.
네 번째는 달랐다.
영미가 이사한 동네에서 새로 일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반찬 가게.
일이 힘들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다섯 번째 편지에는 수표가 들어 있었다.
빌렸던 돈의 절반.
여섯 번째에 나머지 절반.
일곱 번째는 짧았다.
'언니, 나 이제 괜찮아요.
애들도 다 컸어요.
언니가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으면 해요.
나한테 잘해줬던 것,
잊지 않아요.
건강하게 지내요.'
순이는 일곱 번째 편지를 가장 오래 보았다.
창문으로 겨울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낮은 각도의, 길게 뻗는 겨울 햇살.
이십 년.
이십 년 동안 그녀는 이 편지들을 읽지 않은 채로 살았다.
그사이 영미는 일어났고,
아이들은 자랐고,
돈도 돌려보냈다.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순이는 상처를 안고 살았다.
어리석었다고 느끼며.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후회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울었던 밤들,
그 울음 속에서 다시 일어서기로 한 아침들,
그리고 더 이상 보답을 기대하지 않기로 조용히 결심한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이어져 있었다.
그날 저녁, 순이는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 상자에 담았다.
이번에는 상자를 옷장 깊이 숨기지 않고 탁자 위 성경 옆에 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답장을 썼다.
영미의 주소를 알지 못했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순이는 쓰고 싶었다.
그냥 쓰고 싶어서.
'영미야, 편지 잘 받았어.
늦게 읽었어. 미안해.
이제 읽었으니까 괜찮아.
너도 건강해.'
그것뿐이었다. 더 쓸 말이 없었다.
아니, 더 쓸 필요가 없었다.
편지를 접어 성경 속에 끼워두었다.
부치지 못하는 편지는 가장 오래된 책 안에 두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며칠 후, 강준이 내려왔다.
손에 귤 한 봉지를 들고.
"할머니, 이거요." 그가 말했다.
아직 어색했지만 예전보다는 눈을 더 들었다.
"손수건... 잘 쓰고 있어요. 감사해요."
"잘됐네."
"할머니는, 그냥 그렇게 사세요?"
묘한 질문이었다. 순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라는 게 뭔데요?"
"이렇게... 다 챙겨주시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순이는 귤 봉지를 받으며 웃었다.
"바라지."
청년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귤 같은 거 받고 싶고,
눈 오면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싶고.
그 정도."
강준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눈 아래 그림자가 아직 있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순이는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다.
촛불을 켰다.
들국화는 오래전에 시들었고 지금은 빈 컵만 있었다.
내일 새로 꺾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이 어디선가 왔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순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굵은 마디, 깊이 팬 주름들.
이 손으로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가.
두부를 들고, 계란을 삶고,
실을 꿰고, 편지를 접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서 하루가 되었고,
하루가 쌓여서 일흔세 해가 되었다.
그 손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였다.
남편이 나무 같다고 했던 손.
어쩌면 그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열매를 다른 곳에 맺는다.
자신의 가지 위가 아니라 땅 위에,
새의 발에,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간 씨앗 속에.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더 크게.
순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이 방 안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