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연 시집 {바위를 낚다} 출간
이병연李秉姸 시인은 1959년 충남 공주에서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82년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2001년 공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시에 있어서의 은유 교육 방법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중등학교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부여중학교 교감, 면천중학교 교장을 거쳐 이인중학교에서 2022년 2월 정년퇴임을 했다.
2016년 계간지 [시세계]에 「장미꽃비누」, 「콩나물」, 「해바라기」로 등단하였고, 시집에 『꽃이 보이는 날』과 『적막은 새로운 길을 낸다』가 있다. 충남시인협회, 풀꽃시문학회, 세종마루시낭독회, 애지문학회, 공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금강여성문학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병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바위를 낚다}에서도 그의 시는 일관되게 인간의 가장 비근한 정한情恨에 근거하고 있다. 연인에 대한 연민, 어머니와 이웃에 대한 애정, 운명에 대한 순정. 비근하고 보편적인 제재가 그의 시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다. 시에 대해 별다른 조예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게 시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과 그의 시가 딱 맞아떨어지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이병연 시인은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를 행하는 천성적 시인이다. 그의 시선을 거치면 어떤 밋밋한 풍경이나 하찮은 사물도 유의미한 삶의 징표가 된다. 그는 과장된 수사나 거친 목청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절박하고 처절한 삶을 재현해낸다. 첫 시집 이후 지속적으로 삶에 대한 끝없는 응시와 통찰을 보여주는 그를 깊이의 시인이라고 해도 좋겠다.
낚싯대 하나 들고/ 제주 바다를 여러 날 거닐었다/ 수시로 입질이 왔다// 질펀히 내려앉은 바위/ 이름 없이 산 것들 줄지어 낚는다/ 널뛰는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울퉁불퉁한데/ 움푹 팬 가슴엔/ 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물러 있다// 허공에 힘껏 줄을 던져/ 깎아지른 절벽을 낚는다/ 정을 쪼듯 내리치는 물살에 새겨진 문신/ 상처가 깊을수록/ 지느러미의 골이 빛난다// 덜컥 입질이 왔다 이번엔 정말 크고 센 놈이다/ 머리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기둥처럼 떼로 서 있는 놈/ 하늘이 같이 끌려 온다/ 낚싯대가 휘청인다/ 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 세로로 그어놓은 금이 햇살에 도드라진다// 몸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 바다에서 낚은 것을 바다로 돌려보내고//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날/ 바위 낚시를 떠나야겠다
- 「바위를 낚다」 전문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분히 생을 응시하는 이병연 시인의 시적 태도는, 심화된 시적 성찰의 경지로 나아간다. 작품 내내 내성적 목소리로 진술되다가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날/ 바위 낚시를 떠나야겠다”라는 마지막 연에서 내면 독백은 보다 객관화된다. 이러한 진술은 내면 독백이 단순히 감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화자의 내면 독백이 개인적 삶의 감정을 넘어 일반 독자 모두가 흔히 느끼는 보편적 감정으로 확산되는 역할을 한다.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움푹 팬 가슴엔” “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문, 바위에 시인의 시선이 고정된다. “물살에 새겨진 문신”을 보며 시인은 “몸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에까지 마음을 밀어 넣는다. 하지만 “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한다. 당신과 나만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이런 운명에 놓여 있다.
하늘을 향해 기둥처럼 서 있는 바위의 “움푹 팬 가슴”과 ‘깊은 상처’ “세로로 그어놓은 금”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생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자연물을 통해 한층 진실되게 전달된다. 이 작품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위’라는 이미지 표현에 의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전달하는 효과를 갖고, 그 이미지 표현이 환기하는 시적인 정서가 독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삶과 운명에 대한 시인의 성찰은 ‘낚시’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감상에 빠지지 않는 객관적 시선을 확보하고, 다시 ‘바위’라는 구체적 사물에 대한 이미지 표현을 통해 보다 진실한 감동을 주고 있다. 마치 일기를 쓰듯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적 태도, 자신의 내면을 수사적으로 장식하지 않고, 맑고 투명한 언어로 고백하여 진실한 감동을 주는 시적 표현 방법은 내성적인 목소리와 투명한 서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로 완성되는 지를 보여준다. 이병연 시인은 감상적으로 치부되는 감정에 내재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자신의 시적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꽃은 눈이 멀도록 눈부시게 왔다 간다// 황홀한 순간,/ 꽃은 사진 찍듯 저장되지// 세상이 텅 빈 공갈빵 같은 날/ 오래된 기억을 클릭해// 내가 삭은 식혜 속 밥알 같은 날/ 잊고 지내던 나를 불러내// 꽃은 빛깔만 고운 게 아니야/ 화심에 맺은 순정/ 부르기만 하면 잠근 문을 열고 맨발로 기어 나오지// 사는 것 잠깐이라/ 사랑을 안고 갔다는 꽃의 말// 장롱에 오래 넣어둔 옷처럼/ 접혔던 꽃잎이 허공을 밀어내며 피어나// 한 생이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
-「꽃의 말」 전문
이병연 시인은 자신 혼자만을 위해 감정을 소비하는 시인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문제, 생의 본질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항상 삶의 누추한 변방을 서성이면서도 가장 순수한 영혼의 바탕을 유지하려고 스스로를 가다듬는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꽃’ ‘벌’ ‘숲’ ‘바위’ ‘식물’ 등 자연에 대한 관심이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자연 자체의 미감이나 생명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시인은 자연의 순환구조처럼 인간의 육체성, 삶 또한 순환되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존재 탐구의 상상력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꽃이 빚어내는 황홀한 순간에 대한 인식 역시 자연으로서의 인간,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시작은 시인(화자)의 작은 흥겨움이 느껴지는 읊조림과 같다. 작품을 지배하는 기조는 일상의 자잘하고 기본적인 욕망 충족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현대인의 소박한 생활 정서에 근거한다. “세상이 텅 빈 공갈빵 같은” 일상에서, ‘나’는 “삭은 식혜 속 밥알” 같은데, 순정한 ‘꽃’이 피고, 꽃은 내게 황홀의 순간을 선사한다.
꽃의 은유적 의미는 비단 이 작품에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긴 장마에 빛나”는 나리꽃(「장마에 나리꽃은 피고」)이나 “검정 배낭 속에 꽂힌 파(꽃)”(「배낭에 꽂힌 파다발」), “눈이 닿는 곳마다/ 아픈 땟물/ 죽죽 빠져나”가는 꽃(「때죽나무꽃」), “선홍빛 백일홍”(「기약」), 봄볕에 “팝콘처럼 펑펑 쏟아져 나온 꽃”(「봄날에는」), “누군가 할퀸 적 있다고 귀띔하고 싶”은 매발톱꽃“(「매발톱꽃」) 등 구체적 이미지로 시집 전반에 두루 활용되고 있다.
시인이 소박한 생활인으로서 내비치는 발언들은 아주 평명(平明)한 언어로 표출되어 시의 표현과 형상을 위한 별다른 시적 의장이 구사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 평명한 언어들에 내재된 미묘한 의미작용에 힘입어, 생기 있는 시의 언어로 거듭나는 매력이 있다. 세상 사는 일은 잠깐의 순간이어서 “사랑을 안고 갔다는 꽃의 말”은, 꽃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말이다.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여 사태의 진술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느낌의 중심이 놓이기를 의도하는 화법은, 독자에게 각별하게 호소된다. “잊고 지내던 나를” 꽃이 불러내는 것처럼, 새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 인식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꽃이 이 세상에 다녀가는 황홀의 순간 대신 사랑의 영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시인이 우리의 삶을 어떤 가치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생이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라는 읊조림의 시구는 의미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강한 호소력까지 겸비하게 된다. 사진을 찍듯 저장되고, 클릭해서 소환하는 ‘순간’ 대신, 호명하면 맨발로 뛰어나오는 ‘순정’의 가치를, 시인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기 있게 환기한다. 실제로 시인이 지닌 이러한 인식은 “아름답게 사라지는 것들이/ 허무의 몸집을 키우네”라며 “잠시 왔던 것들이 돌아가는 이승에서/ 눈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다/ 예고 없이 녹아내”리는 풍경을 그린 「아름다운 사람」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이병연 시집 {바위를 낚다},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