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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북천역 승강장에 오전 11시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와 정차해 있다. 장태익 부역장이 승객들의 승하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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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등 소설로 현대사에 큰 족적 남겨
- 국제신보 재직 땐 군부에 항거한 논설로 옥고
- 코스모스 유명한 북천역 일대 복선화 한창
- 인근 생가터·문학관엔 그의 발자취 고스란히
이병주 |
태평양전쟁과 일제 강제징병,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남북 분단, 5·16쿠데타와 필화사건으로 인한 감옥살이….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열차가 멈춰선 건 1992년 4월이었다. 그로부터 23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추억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새록새록 솟아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수난을 고스란히 겪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에 희생된 뭇 삶의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는 인간적인 소설로 대중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지리산의 작가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1921~1992) 이야기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보듯 우리의 21세기는 여전히 20세기의 자장 안에 있고, 그런 해묵은 갈등이 재연될 때마다 그의 '소설로 쓴 한국 현대사'는 환기되고 있다. 노동·사회단체들의 대정부 투쟁 열기가 고조되던 지난 8일, 한 해를 차분히 정리할 만한 여행지를 물색하다 나림의 고향인 경남 하동군 북천면을 찾았다. 승자보다 패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던 그의 문학을 더듬어 가다 보면 훈기 도는 내일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곡선 대 직선
북천역 역사. |
코스모스역으로 유명한 북천역부터 들렀다. 북천의 관문이기도 하거니와 철도가 나림이 온몸으로 부딪혔던 격동의 현대사를 상징한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열차는 시간표대로 오전 10시5분 정각에 승강장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전남 보성까지 운행하는, 무궁화호를 개조한 관광열차였다. 7, 8명의 승객이 내려 시든 코스모스를 베어낸 자리에 설치해 놓은 바람개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태익(54) 부역장은 "내년 6월이면 북천을 포함한 진주~광양 구간(68.9㎞)의 경전선이 새로 개통된다"고 말했다. 현재의 굽이진 단선철도가 곧게 뻗은 복선철도로 대체된다고 했다. 승강장에서 광양 방면으로 500m가량 떨어진 곳에는 현 철도를 직각으로 가로지르는 새 철도가 완공 단계에 있었다. 장 부역장은 "철도를 직선화해 열차 운행속도가 빨라지는 건 좋은데, 느림의 정취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며 곡선 철도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그는 말 또한 느려 '슬로시티 시민'처럼 느껴졌다.
역 승강장에서 500m 앞쪽으로 보이는 신설 직선 복선철도. |
직선 철도는 나림이 살았던 험난한 세월과 겹쳐진다. 굴곡 없는 역사를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남과 북에 공히 독재권력이 들어서 지배기반 공고화를 획책하고 국민을 억압했다는 점에서 그 통로가 일방통행의 직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1961년 박정희 군부세력이 5·16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당시 '국제신보(본지의 전신)' 주필로 재직하고 있던 나림은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는 내용의 비판 논설을 썼다. 그 바람에 나림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7개월간 복역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해방 공간의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이데올로기화한 이념과 권력에 대한 혐오를 더욱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나림은 당시의 일을 형상화한 등단작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무슨 죄인지도 모르고 벌만 받는 것처럼 따분한 처지란 없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나의 죄를 찾았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교묘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꼭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인데 적용할 법조문이 없을 때 섭리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망에서 진실을 붙잡다
이병주 생가터. |
그리고 필화사건은 그로 하여금 지배욕으로 똘똘 뭉친 권력이라는 것은 언제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고, 그런 지배자(승자)의 역사는 선량한 사람에게 자자손손 내려갈 오명을 기록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인생에 대한 허무감은 깊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대문학(大文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인생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란 교훈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니체도 마찬가지고, 루쉰도 마찬가지고,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다." 나림은 자신의 문학적 편력기인 '허망과 진실'에서 이같이 토로했다. 하지만 허망의 늪에 빠진 건 아니다. 오히려 허망을 진실에 다가가는 발판으로 삼는다. "허망 그 자체에서 진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허망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진실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그가 일생 추구한 문학관의 요체다.
이후 나림은 해방 전후 젊은 지식인들의 좌우 갈등을 그린 '관부연락선', 빨치산 항쟁기 '지리산', 이승만 정권 시기를 다룬 '산하', 박정희 정권을 소재로 한 '그해 5월' 등 현대사 시리즈 역작들을 쏟아냈다. 이들 작품에는 한결같이 허망에서 진실을 포착하려는 문학정신이 관류하고 있다. 그의 이런 문학과 인생 역정은 북천역에서 2㎞ 남짓 떨어진 북천면 직전리 이명산 기슭에 지어진 '이병주 문학관'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2008년 건립된 이병주 문학관은 대지 2992㎡, 건물면적 504㎡의 2층 건물로 전시실과 강당, 창작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은 '냉전시대의 자유인, 그 삶과 문학' '한국의 발자크, 지리산을 품다' '끝나지 않은 역사, 산하에 새긴 작가혼' '아직도 계속되는 월광 이야기' 등 시기별로 네 구역으로 나눠 꾸며졌다.
나림의 북천초등학교, 진주농고 후배인 최증수 이병주문학관장은 "제게 이병주 선생님은 책 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되신 교훈적인 모델"이라고 했다. 최 관장은 나림 문학 선양의 최대 공신이다. 1999년 북천초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 나림의 저서와 자료를 모으기 시작해, 2001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이듬해부터 이병주문학제를 매년 개최하고 문학관을 건립하는 데까지 모든 일을 주관해 왔다. 그런 그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관장직에서 물러난다. 최 관장은 "국제문학제로 확대된 이병주문학제의 격이 매년 높아지고 있어 이병주 문학이 한국문학의 수준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체 위한 개인 희생은 포학"
이병주문학관 의 관장인 최증수 씨가 업무를 보고 있다. 최 씨는 이병주의 고교 후배이다. |
최 관장에게 나림의 생가가 보존돼 있는지 물었더니, "생가터에는 다른 사람이 집을 지어 살고, (나림의 선친이) 술도가를 했던 이웃 화정마을에는 (나림의) 친척 한 분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 관장이 그려준 약도를 들고 나림의 생가터를 찾아 나섰다. 생가터는 북천역에서 1.5㎞가량 떨어진 남포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 정자나무 뒤편에 자리한 생가터에는 자연석을 쌓아 올린 펜션 형태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나림 집안과 관련된 자취는 정자나무 옆에 세워진 나림 삼촌의 항일운동 사적비가 유일했다. 고향에 생가가 보존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타계하기 두 달 전까지 집필 차 미국에 머무는 등 평생 국내외를 주유하며 자유를 추구했던 삶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나림의 그런 인생관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체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로 나타났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사상은 자기는 희생되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이다. 그 사상이 어떤 전염성을 가지고 '전체를 위해 기꺼이 나는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사람을 만들어 낼진 모르나 그것은 자기 마취의 상태를 만들었을 뿐, 그 근본엔 포학의 논리가 있다. 인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 이외에 혁명의 명분이 있을 까닭이 없을 때 혁명을 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소수일 망정 죽일 수는,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종래의 혁명이 모두 당초의 목적과는 빗나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혁명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지만, 나림의 사상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분단을 빙자하거나 국격을 앞세워 소수의 주장과 권리를 무시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직선사회'다. 그 사회에는 침묵 아니면 질주만 존재할 따름이다.
# 권력에 칼 겨눈 명칼럼들, '증언의 소설가'로 불려
- 이병주 언론인 경험이 필력의 원천으로
나림의 칼럼은 소설만큼 빼어나다. '동상의 사상'이란 제목의 칼럼을 한번 보자. "남산에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섰을 땐 그런 계절이었고, 그 동상을 무너뜨렸을 땐 또 그런 계절이었다. 동상의 의미가 시간의 의미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얘기다. 결론은 시간의 의미를 이겨내지 못할 동상은 아예 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동상의 윤리다." 강제된 권위나 존경의 허구를 간단명료한 논리로 지적하며 윤리적 명제로 정리해 읽는 이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쏙쏙 들어오게 한다.
"악인의 악, 특히 자기를 악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악행엔 한도가 있다. 그는 곧 숨이 가빠진다. 기껏 물건을 훔친다든가, 한 사람의 애정을 노린다든가, 사람을 몇 죽일 뿐이다. 그런데 선인이 선행이라고 믿고 행하는 악엔 한도가 없다. 예를 들어 종교적 신념으로,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가를 살펴보면 알 일이다. 로마제국 초기, 예수교 신자들은 질서를 수호하는 선인들에 의해 가장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런데 이런 쓰라린 과거를 지닌 예수교가 중세에 이르러서는 신의 이름으로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을 통해 무수히 이교도를 살해했다."
'인간에의 길'이란 제목의 칼럼인데, 풍부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인다.
나림의 명칼럼, 명소설의 탄생 배경에 대해 한길사는 2006년 30권짜리 이병주 전집을 내며 이렇게 설명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개와 용기를 지닌 사관(史官)이자 언관(言官)이고자 했던 언론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은 그의 문학정신의 튼튼한 자양분을 이루며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탁월한 평가를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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