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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7080 화첩(畵帖) [9]
산수(算數)
(1)
장영표 씨는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에게는 푹신한 등받이의 크고 안락한 의자가 있었지만, 그 의자에 몸을 파묻어두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아침부터 즐거운 기분에 들떠 마음이 붕붕 날아올랐다.
그가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과 때맞춰 전화벨이 울렸고, 그 전화를 받아든 야간여고생 숙자가 히죽히죽 웃음기를 입술에 떠올리는 것으로 보아 직감이 되는 게 있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자 홍연실의 아이스크림보다 더 청량한 음성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귓속의 솜털마저 경련을 일으켰다.
“선생님, 오늘 마침 짬이 났어요. 무척 뵙고 싶은데, 선생님은 어떠세요?”
“나는 가진 것이 돈과 시간밖에 없다고 했잖아!”
“선생님, 오늘 오후 저희 공장 정전(停電)이래요. 그래서 일찍 작업을 끝내기로 되었걸랑요.”
1, 3주 일요일을 빼고는 봉제공장에서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는 그녀가 뜻밖에도 정전으로 짬이 났으니 제 쪽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물기 오른 보릿대 같이 풋풋하고, 달빛을 머금은 박꽃 같이 순후한 홍연실은 숫처녀 특유의 아카시아 향기 같은 체취를 풍겼다. 보릿대와 박꽃과 아카시아……그것은 40대 중반의 장영표 씨에겐 몸살 나는 향수(鄕愁)요, 가슴 밑바닥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그리움이기도 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산골 마을을 떠나 어언 30년을 도회지 생활에 길들여온 그는 그녀를 만난 첫 순간에 신비하게도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쇠똥 불에 개구리 구워먹던 고향의 어린 시절’이 전류가 흐르듯이 찌릿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장영표 씨가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한 행운이었다. 지난 봄,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유원지에서 차를 못 타 애태우는 두 아가씨를 그가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주었는데, 둘 중에 한 아가씨가 홍연실이었다.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서 보릿대와 박꽃과 아카시아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20살도 더 아래인 그녀에게 눈 질끈 감고 또 만나자는 말을 던졌다.
그녀는 뜻밖에도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 하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한 마디의 말꼬리도 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나 “예” 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을 거역하거나 망설이거나 도사리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이래도 “예”, 저래도 ‘예’, 오로지 물 흐르듯이 따르고 순종(順從)할 따름이었다.
홍연실은 데이트를 할 때도 기특하게 장영표 씨의 마음에 꼭 들게 굴었다. 이를테면 바닷가에서도 함지장수에게 고둥을 사먹는 게 고작이고, 다방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아깝다는 게 그녀의 진지한 주장이었다. 그러니 그녀와 진종일 어울려 다녀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기천 원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재빠르게 그녀가 물기도 했다. 매사 산수(算數)를 따지고 앞세우는 그에게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그녀였다.
장영표 씨는 그녀를 혀끝에서 녹여 먹고 싶고, 이빨로 깨물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벌써 몇 차례나 했는지 모른다. 그의 산술적 계산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에게 인삼이나 녹용보다 더 값진 존재요, 대포주사나 감로수보다 더 젊음을 지탱시켜 줄 명약(名藥) 중의 명약과 같았다. 바로 이런 산술적 계산으로 하여 유부남인 그가 20년 연하 미혼인 그녀를 만나는 것이다.
장영표 씨는 자나 깨나 산수를 부르짖는 사람이다. 그는 시쳇말로 산수를 빼면 시체밖에 남을 게 없었다. 그는 항상 누구에게나 “산수에 밝지 못하면 100촉짜리 전등을 켜놓아도 장님이요, 입에 떨어질 감도 눈두덩이나 콧등을 때린다”고 강조했다. 하기야 눈 뜨고도 코 베 가는데, 셈이 밝아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그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실제 시골의 빈농 집안 출신인 장영표 씨는 지금처럼 도회지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오로지 산수에 밝았던 덕분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그는 묘하게도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산수의 효용성을 뇌리 깊이 전수받았다. 그 때 국어 교사는 단지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했던 것이지만,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섬광처럼 산수의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국어 교사는 ‘치마’ 얘기만 나와도 사지를 비틀며 비명을 지르는 여드름장이 학생들에게 ‘애인 구하는 비법’ 1분 강좌를 했다.
“초등학교 코흘리개 가운데 예쁘장한 아이를 하나 골라 매일 사탕 한 알씩 사주면 된다. 눈 딱 감고 3년만 그 짓 하면 다 된 거야. 몇 년 더 지나봐라. 그 아이 가슴도 볼록하고, 엉덩이가 통통하게 된다. 그 때 가서 본격적인 애인으로 삼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거두는 산수의 비법이노라.”
“피이!”
국어 교사의 ‘애인 구하는 비법’에 잔뜩 기대를 했던 학생들은 일제히 “노망 따먹기 하냐!”며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장영표 군 한 학생만은 이 때 진정한 ‘산수의 비법’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터득한 것이다. 고교생 남학생과 초등학교 상급반 여학생은 4~5세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고, 고교생 남자가 군대를 다녀와 결혼하려 할 때 초등학교 여학생이 결혼 적령기에 이른다, 이것은 틀림없는 ‘산수’였다.
장영표 군은 그 산수의 비법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머리를 산술적으로 굴려 하숙집 이웃에 있는 가구공장의 외동딸에게 점을 찍어놓았다. 그는 그 아이에게 3년 동안 사탕을 사주었고, 다시 3년을 노트며 만화책을 사주었다. 그 뒤로는 생일선물이다, 졸업선물이다 하고 투자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장영표 씨는 자신의 계산대로 그녀 아버지의 가구공장을 도맡아 그 규모를 키워나가면서 마침내 사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몇 해 뒤 불황이 닥쳐 경영난에 직면하자 그는 과감하게 공장을 처분하고 5층짜리 건물 한 채를 사들였다.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5층 건물을 세를 놓아 안정된 수익으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의 산술적 계산의 결과였다.
장영표 씨가 홍연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넥타이를 가다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숙자가 상대방에게 누구이며, 무슨 용무냐고 꼬치꼬치 따져묻는 것으로 봐서 조금도 반가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과연 그의 예감 그대로였다. 건네받은 수화기에선 껄껄하고 어설픈 촌사람의 전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게, 나 고향 마을 쑥밭골 김판돌이다. 나랑 세 사람이 마을대표로 뽑혀 자네를 만나러 왔데이. 우리 동네 진입도로 넓히고 포장하려는데, 협찬금이 필요하다는 그 말이제. 용무는 그것이네, 우리 곧 자네 사무실로 찾아가꾸마.”
“무시기요? 지금 나 급한 일이 있어 바쁜데요. 나 지금 급히 어디 다녀와야 한다고요.”
“어허, 이 사람아, 아무리 바쁘다캐도 우리는 수백 리 길을 자네 만나러 찾아왔는데…. 그라문 우리가 자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랑빨랑 일 보고 돌아오거래이.”
순간 장영표 씨는 머리가 띵했다. 조금 전까지도 홍연실의 데이트 제안으로 온몸이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몰려오는 고향 사람들로 하여 기분을 싹 잡쳤다. 아니, 동네 진입로 포장하는데 왜 협찬금을 내라고 하는 건가? 그런 돈은 나라에서 주거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받아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울화통이 터져 올라 몹시 기분이 나빴다.
(2)
장영표 씨는 자동차 시트의 등받이에서 보릿대 같은 풋풋함과 박꽃 같은 부드러움과 아카시아 향기 같은 향취를 느끼며 사타구니가 근질근질하고 자글자글한 행복감을 느꼈다. 핸들을 잡은 손에도, 가속기 페달을 누르는 발바닥에도 행복이 서물서물 흐르고 있었다. 그는 홍연실이 선물이라며 들고 온 자동차 시트 등받이 카버를 운전석에 씌우고, 옆자리에 그녀를 태우고 해운대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다.
“선생님, 이 등받이 카버는 제가 일하는 틈틈이 버리는 천 조각을 모아 다시 바느질하여 만든 거예요. 선생님께 드리고자 제 정성을 담은 것이니까 어여삐 보고 써주세요.”
그녀가 천 조각을 모자이크 하여 만든 등받이 카버는 알록달록한 여러 색깔들이 뭉쳐져 있는데다 한가운데 커다란 하트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돼 있었다. 산수 쪽 지능이 감성 쪽 지능보다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는 그에게도 그녀가 작은 천 조각들을 재봉틀로 깁고 박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조각한 하트 무늬가 안겨준 감동은 엄청났다. 마치 그녀의 볼록한 젖무덤을 훔쳐본 듯한 흥분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녀가 섬섬옥수로 정성들여 만든 자동차 시트 등받이 카버에 등을 기댄 그는 그것이 천 조각의 카버가 아니라 볼록볼록 숨을 내쉬는 그녀의 젖가슴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바로 옆자리에 살아있는 실체인 홍연실을 태우고 그녀의 미소와 체취까지 독점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건 곱빼기로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순진무구한 그녀는 갑자기 새하얀 볼에 빨간 물감을 들이면서 “어머, 선생님도 짜장면 곱빼기 좋아하셔요?” 하고 까르르 웃었다.
곱빼기, 곱빼기라……! 그는 불현듯 짜장면이 아니라 보리밥 곱빼기가 생각났다. 논매고 밭 매고 농사일로 땀을 흘린 일꾼들이 점심 때 사기그릇에 곱빼기로 두둑하게 담은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후루룩 입속에 퍼 넣고 풋고추를 된장에 쿡 찧어 으깨먹는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이 눈앞에서 물레가 고치를 풀어내듯 펼쳐졌다.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장영표 씨는 그러느라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여 급브레이크를 밟고야 말았다. 후유, 한 차례 식은땀을 흘린 그는 옆자리의 그녀를 쳐다보며 비밀스런 웃음을 칠칠 흘렸다. 그는, 홍연실이 요 아가씨가 참으로 묘한 녀석이로다, 하면서 생각하면 할수록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보릿대 같은 풋풋함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묘하게 그녀를 만난 이후로 줄곧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연실이도 고향이 시골인가? 농촌, 아니면 어촌?”
“아니에요. 전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도회지에서 태어나 도회지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저는 고향이 없는 것 같아 여간 서운하지 않아요.”
“허어, 그 참 묘하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보릿대, 박꽃, 아카시아 향기가 나다니! 그럼, 아버지나 어머니 고향은 물론 시골이겠지?”
“글쎄요, 그걸 잘 알 수가 없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걸 알아볼 틈도 없이 저는 그만 외톨이가 되었어요.”
“어허, 그것 참……!”
그는 또 한 번 탄복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불행한 운명 속에서도 그녀는 박꽃처럼 순후하고, 보릿대처럼 싱싱하고, 아카시아꽃처럼 향기롭게 성장했을까? 그는 몇 차례나 거푸 눈을 닦고 보면 볼수록 그녀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고 수정처럼 구김살 하나 없었다.
그녀는 도회지에서 태어났고, 도회지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장영표 씨 자신은 어째서 그녀로 하여 산골마을 고향과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지, 그는 자신의 이상한 산수에 적잖은 혼란을 느꼈다.
“선생님은 고향이 시골이세요?”
“그래, 난 산골이야.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쇠똥 불에 개구리 구워먹으며 자랐었지.”
“어머나, 정말 멋져요! 제가 선생님에게 이끌리게 된 것도 그래서였나 봐요! 선생님, 앞으로 시골 얘기 많이 들려주실 수 있죠? 그런 얘기는 밤새도록 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시골 얘기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아주 연실을 시골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살면 어떨까?”
“어머나, 선생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럼 제가 꿈꿔오던 일이 이뤄지는 것이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농작물을 키우며 사는 꿈을 꽃밭에 물 주듯이 키워 왔다구요!”
아차차! 장영표 씨는 시골 얘기를 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던 고향 사람들 생각이 떠올랐다. 사무실에는 지금 그들이 코 빠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오기 전에 전화통에서 흘러나오던 김판돌 씨의 껄껄하고 어설픈 목소리를 떠올리자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흘러 진저리를 쳤다.
(빌어먹을! 꽃보다 이쁜 연실이랑 함께 시골로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똥찬, 아니 심장이 터져 졸도할 말을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이게 웬 지랄이냐! 그놈의 고향 마을 특사인지, 주민대표인지 하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남의 사무실에 찾아와 진을 치고 있나! 그래, 용건이라는 것이 마을 진입도로 확, 포장 협찬금을 한 다발 내놓으라는 그 말이렷다? 이거 정말 사람 환장시키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울컥울컥 짜증을 내던 끝에 자동차를 길옆에 세웠다. 그러나 산수에 달통한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얼굴에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에게 차분하고 다감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연실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고, 또 밤새도록 시골 얘기도 하고 싶은데……! 그래서 지구 끝까지라도 함께 드라이브를 할까 하고 작정을 했었는데, 이거 어떡하지? 지금 우리 사무실에 고향 사람들이 찾아와서 날 기다리고 있어. 마을 진입도로 포장하는데 들어갈 경비에 쓰겠다면서 내게 협찬금을 내놓으라는 거야.”
“어머나, 그래요? 그럼 어서 빨리 가보셔야죠. 그보다 더 소중한 일도 없겠네요. 우리는 얼마든지 만날 시간 또 만들 수 있잖아요. 어서 차를 돌리세요. 고향에서 반가운 소님들이 오셨으니 잘 모셔야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요.”
장영표 씨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운대를 눈앞에 두고 여기서 홍연실과 데이트를 일단 끝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에 가슴을 치며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호랑말코 개뼈다귀 같으니라고! 고향 사람 좋아하네……!)
자신의 산수 방식대로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머릿속에는 난데없이 등장한 ‘마을 진입로 포장 협찬금’이란 게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되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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