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새 학기
방학이 끝날 때가 다가왔다. 숙제를 3일 만에 해치웠다. 문제는 일기장이다. 일기내용은 딱 두 줄을 채우고 끝을 낼 때 '다녀왔다 밥 먹었다 보았다 즐거웠다 놀았다 슬펐다 혼났다 고마웠다 '로 억지로 꾸몄는데 날씨를 알 수 없어서 '해 구름 흐림 비' 를 교차로 바꾸어 썼는데 겨울이라 눈이 오는 날이 영 마음에 걸렸다. 크리스마스나 설날 정월 보름날 같은 기억이 되는 날로 해서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눈오는 날을 껴 넣었다.
그런 엉터리 숙제물이 전시하는데 뽑혔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몰래 전시실에 들러 숙제 물을 꺼내왔다. 새 학년이 되는 겨울에는 짧은 봄 방학이 있었다. 덤으로 얻은 것 같아 긴 겨울 방학보다 더욱 고소했다. 그리고는 새 학기는 시작된다. 반 편성도 다시 하고 선생님들도 전근을 가시고 또 새로 전학 온 아이들도 생겨난다. 안양이 커져 가면서 갈수록 전학 온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조회 시간에 새로 전근 오신 선생님은 인사를 하고 편성된 반 별로 교실을 향한다. 그때처럼 학교가 조용하던 때는 없다. 새 반이 편성되면 서먹서먹하고 같은 반에서 올라온 아이들끼리만 어울린다. 한동안은 말 수 적어진 아이들로 교실은 조용하다. 탐색의 과정이 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는 누구든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 비단 아이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 편성의 주된 요지가 여러 사람이 화합하는 인화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닐까. 한동안 조용하던 반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특출 난 아이들 몇몇이 장난을 선동할 때부터다. 관심이 일고 보아주기를 바라는 심정들이 일시에 제 철을 만났다. 조용히 하라는 선생님 말이 나올 때가 바로 그 상황이다. 그래도 여간해서는 참새들 마냥 짹짹 거리는 소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사투리가 심한 아이들은 입을 오므려가며 표준말을 하려했지만 그것이 곧 웃음꺼리였으며 새로 생긴 짝꿍에게 친해지자고 연필을 하나 건네주는 것도 학기 초의 풍경이다. 신학기에는 청소를 무척 많이 한다. 일부러 그러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학교가 높은 곳에 위치한 탓인지 물이 부족하여 물 부족으로 학교밑창에 친구 집 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왔다. 먹먹한 학기 초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힘이 센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일을 도왔다.
신학기는 선생님이 제일 바쁜 때다. 청소 확인 검사를 받으러 가면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글을 옮겨 적고 계시거나 계획표 같은 것을 만들고 계셨다. 그 무렵의 나의 행동발달 사항은 소심하고 매사 소극적임이라고 아마 써 있을 게다. 나는 평소 갖은 생각을 일어서서 말을 하려 하면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음악 실기 우수학교로 지정된 우리 학교는 학기 초 부터 분주했다.
50대가 넘는 풍금이 교무실 바로 옆 교실에 따로 있었는데 풍금소리가 학기 초 부터 울려 퍼졌다. 아이들 또한 긴장감을 갖고 새 학기를 맞는다. 새 표준전과나 동아전과는 동네 형 것을 빌렸지만 공책이나 책이 모두 새것이다. 새로움은 각오와 희망을 새기게 한다. 무엇보다 각오를 다진 아이들은 송구부 아이들이었다. 우리학교 송구부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팀이었다. 송구가 유명하다보니 서울에 은평 학교에서 전학을 온 고아 아이들도 생겼으며 그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축구선수가 되었다.
안양중학교하고 안양공고가 축구명문이 된 것이 모두 그 아이들 덕분이다. 당시 유명하던 장봉두 장영두 기덕서 차명수 문영서...봉두와 영두는 형제였는데 차명수는 훗날 부모님을 찾았다.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선수는 이재호다. 원래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같은 학년이 되었다. 청소년 대표를 지내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꼽히던 이재호는 고려대 3학년 시절인 지난 1977년 6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대학연맹전 경기 도중 상대 선수와 헤딩 경합을 하다 충돌 후 뇌진탕으로 쓰러져 보름동안 의식을 잃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안양공고 고려대학교 축구선수 출신으로 명성을 날리고 지금은 몸이 불편한 이재호 선수...나는 대한축구협회가 설립한 사회공헌 기구인 재단법인 축구사랑 나눔재단(이사장 이갑진)은 축구 경기중 큰 사고를 당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신영록, 이재호 에게 후원 성금 각 5백만 원씩을 전달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다. 참 애석하고 아까운 친구다. 안양 중 출신의 이영표가 바로 내 후배이기도 하다.
안양이 축구의 명문이 된 데는 국민학교 때 송구부를 가르친 박상호 선생님하고 중학교때 체육선생님이셨던 김진강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시면서도 축구 코치를 겸하였던 그들의 불같은 열정이 요즘도 생각이 난다. 선수들은 신학기 상관없이 골 망이 쳐진 운동장에서 살았다. 박선생님은 선수들 감독하랴 아이들 가르치랴 늘 바빴다. 우리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음악에는 소질이 없으셨는지 대신 여선생님이 들어와 우리를 가르쳤다.
송구부가 그 해 전국을 제패하자 음악을 가르친 선생님은 박 선생님하고 결혼을 하고 학기 중인데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신학기 들어 한달 쯤 지나면 어느 새 아이들은 한 목소리다. 그쯤엔 다른 반 아이들하고 달리기 시합이나 축구 게임을 한다. 작년까지도 우리 선수였던 아이가 다른 반 대표이고 우리 팀은 작년에 애를 먹였던 아이가 달리기 대표선수이다. 소속감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작년의 우리선수 허점을 탓하고 단결하고 또 단결하여 한 반의 큰 함성은 선생님의 흐뭇한 미소가 된다.
문득 다시 떠오르는 우리학교의 교훈 성실 인화 단결. 그쯤의 인화와 단결력에 성실함만 보태면 우리 반은 최고였을 것인데 아쉽게도 공부만은 늘 우리 반이 꼴찌였다. 반 편성이 잘못되어 그런지는 모르지만. 곤지암에 사시는 박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선생님은 중풍을 앓으셔서 말을 하지 못하셨다. 당시는 훌쩍 큰 키에 강골이셨던 선생님이신지라 빗자루만 들어도 숨죽이던 우리였는데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그 당시 전근을 가셨던 사모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 일부러 운동장에 나가서는 음악을 대신 가르치라고 한 거야. 나중에 저녁 사준다고 꼬드기려고.” 여전히 행복한 미소의 두 분이다. 당시 화장실에 적힌 두 분 선생님의 사랑 얘기 또한 혹여 그 당시 보탬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그 글 쓴 녀석은 새학기 때 잔꾀를 발휘해 모두를 웃기고 그로 단체로 기합도 여러 번 받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팔을 못 쓰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눈물이 났던 곤지암을 찾던 날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다음해 선생님은 아쉽게도 운명하셨다. 법학공부를 포기하고 학교에 전념하려니 운동이 최고 위안이었다는 열성파 박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축구 명문 안양이란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같이 번쩍 볼을 들어 올려 골 망을 흔들던 박선생님의 활기찬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이는 그 시절 전국제패의 위업을 일군 강한 의지를 가르침의 큰 본보기로 보여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는 그 시대 작은 거인이었다. 아마 나뿐 아니라 그 시절을 어둑하게 지낸 아이들에게는 마음의 천사라 할 작은 거인 한 둘은 꼭 마음 속에 자리할 것이다. 그 시대 선생님들은 용기를 일깨우고 의식이나 정감이 모두 한 결 같이 넘쳐흘렀다. 모두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첫댓글 박상호선생님과 결혼한 분이 김청자선생님 이었지
그렇지요~~~우연한 기회에 2002년 광주 초월리에 살고 계신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 박상호교장선생님은 건강이 안 좋으시고 김선생님꼐서는 명퇴하시고 간호를 하고 계셨어요
김진강선생님은 1981년 발령 받았던 군자종고에서 같이 근무를 했었지요. 말을 안 듣던 고2 남학생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잘 듣는 일이 벌어졌는데..........그 아이들이 졸업 후 42살이 되어 만나서 들은 사실~~~제가 학교 뒤 벤취에 앉아 훌쩍거리는 것을 본 김진강선생님의 무서운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덕분에 수업을 잘 했지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