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5. 백충기 수필<강릉 이야기>
<1> 사모곡(思母曲) - 고려가요(高麗歌謠/작자 미상)
호(號)매도 날히어신 마라난 / 낟가티 들리도 업스섀라 / 아버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 위 덩더둥셩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써라 / 아소 님하 /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써라
호미도 날이 있지마는 낫 같이 잘 들 리가 없습니다.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만 아아...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마흔셋에 딸 여섯, 아들 둘 팔 남매의 막내로 나를 낳으셨습니다.
아버님은 위로 딸 넷을 시집보내고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내가 여덟 살 먹던 해였습니다.
어머님은 온갖 궂은일을 다하시며 남은 사 남매도 모두 출가시키고, 아흔넷, 마지막으로 이승을 떠나시던 날 막내인 내 손을 잡고 잠들듯 가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서방과 맏딸, 맏아들까지 셋을 먼저 앞세웠다고 팔자가 드세다 어쩌다 말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천사 같은 어머님이셨습니다. 늦둥이 막내로 얻은 자식이어서 그런지 나는 특별한 어머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나도 작년 2월, 40여 년간 봉직하던 교직을 정년했는데, 자식은 둘을 낳아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늙은이 둘만 남았습니다. 이제 세모(歲暮)가 되고 날씨가 추워지니 불현듯 어머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우리 어머님은 학교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이른바 무식한 분이셨지만 매사를 처리 함에 있어 무척 현명하셨던 분이셨고 특히 유머 감각이 뛰어나셨던 분이셨습니다.
국이나 찌개를 끓였는데 간이 맞지 않고 맛이 신통치 않으면
‘꼭 중놈 마빡 씻은 물처럼 밍밍하다.’ 하시고, <마빡: 이마(강릉 사투리)>
또 누가 무엇이든 휙 집어던지는 것을 보시면
‘꼭 객사(客死)한 놈 지팡이 내던지듯 한다.’ 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형님과 어머니랑 셋이서 밭에서 일하는데 내가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니 고작 야단치신다는 것이 빙그레 웃으시며 ‘그 놈 보채지두 않고 잘 노네....’ 였습니다.
또 뭘 어깨너머로 넘겨다 볼라치면 ‘모가지 짧은 개 절구통 넘겨다보듯 한다.’ 고 하시는가 하면, 당치도 않은 것을 바라는 눈치면 ‘개 지름떡(기름떡) 바라듯 한다.’ 등 헤아릴 수도 없는 속담들을 그때그때 상황에 기가 막히게 맞게 막힘없이 구사하셔서 그때는 그냥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건넌 마을에 사시던 우리 고모할머니는 80이 넘은 노 할머니셨는데 젊었을 때는 무척 고우셨을 듯 그 연세에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동백기름 발라 머리 빗고 앉아 계시면 귀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귀가 어두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맛과 냄새를 몰라 생콩을 씹어도 비린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걸 두고 ‘그 할멈 죄를 받아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젊었을 때 강원도 연곡(連谷) 새말(新村)에서 우리 집과 한동네에 살았는데 아랫마을 진사(進士) 어른과 좀 수상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언젠가 진사댁이 귀띔을 듣고 씩씩거리며 뛰어와 안방 문을 화들짝 열고 들여다보니 흐트러진 이불귀에 고모할머니가 혼자 앉아 있기에
‘우리 영감 여기 왔다갔지?’ 하고 다그쳤더니 발그레해진 볼로 ‘지금 금방 내려갔을 텐데....’ 하더라나....^0^*
내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임(初任)이 경기도 가평이었고 첫해는 하숙했지만, 이듬해 어머님이 오셔서 5년 정도 뒷바라지를 해 주셨습니다. 후일 어머님께서 그 가평에서의 5년이 당신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와 8남매를 낳아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그런 말씀이 나왔을까?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니 어머니께서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나머지 자식들을 시집, 장가를 보내려니 힘든 것은 물론 외로움은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따뜻하고 살가운 말 한마디 더 못해 드린 것이 이토록 가슴 아플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강원도 연곡면 버들이(유등리/柳等里) 선산에 모셨습니다.
어젯밤 얇은 저고리를 입은 어머님이 춥다고 하시는 꿈을 꾸고 흐느끼다가 깼습니다.
<2010년 5월 어버이날에> 이 글은 강릉 사친(思親) 문학 문예지(2021/가을호)에 실렸다.
가평 근무할 때 어머니와 산에 나무하러.... / 사친문학에 실린 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