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기안이지 기미조이모 기취이반 기미이산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위지어미유 치지어미란 합포지목 생어호말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구층지대 기어누토 천리지행 시어족하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故無敗 위자패지 집자실지 시이성인무위고무패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무집고무실 민지종사 상어기성이패지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신종여시 즉무패사 시이성인 욕불욕 부귀난득지화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 학불학 복중인지소과 이보만물지자연이불감위 의역: 안정된 상태는 유지하기 쉽고, 어떤 현상이 발생하기 전 까지는 조정하기 쉽다. 미약한 상태는 사라지기 쉽고, 역량이 미미하면 흩어지기 쉽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적절하게 처리해야하듯, 혼란스럽기 전에 미리 잘 다스려야 한다. 양팔로 껴안을 정도로 큰 나무도 처음엔 싹에서 자라났고, 9층 누각도 한 줌 흙으로 올린 것이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었다. 억지로 하는 자 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기 마련이라. 따라서 聖人(道)은 無爲로 하기에 실패하지 않고, 집착 하지 않기에 잃지 않는다. 일을 처리함에 이루고도 실패하는데, 마지막 까지 처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욕심을 내지만 聖人(道)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며,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만 聖人(道)은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學을 배우지만 聖人(道)은 學을 배우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며, 사람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다. 聖人은 만물의 자연규율에 보조를 맞출 뿐 감히 하지 않는다. 시간은 단지 흘러갈 뿐이지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이룬다. |
64章의 핵심은 마지막의 無爲에 있다. 그 문장 하나를 위하여 다양한 비유를 들고 나온다. 자연법도는 표현 그대로 자연스럽다. 이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억지로 취하려면 이루기 어렵다.
其安易持 其未兆易謀(기안이지 기미조이모)
안정적인 상태는 유지하기 쉽고, 어떤 현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조정하기 쉽다.
其脆易泮 其微易散(기취이반 기미이산)
미약한 상태는 사라지기 쉽고, 역량이 미미하다면 흩어지기 쉽다.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위지어미유 치지어미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잘 처리하듯, 혼란하기 전에 미리 잘 다스려야 한다.
合抱之木生於毫末(합포지목생어호말)
양팔로 껴안을 정도로 큰 나무도 처음엔 싹에서 자라났고
九層之台起於累土(구층지대기어누토)
9층 누각도 한 줌 흙으로 쌓아 올린 것이요
千里之行始於足下(천리지행시어족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었으니
爲者敗之 執者失之(위자패지 집자실지)
억지로 하는 자 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기 마련이라.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시이성인무위고무패 무집고무실)
따라서 성인은 無爲로 하므로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에 잃지 않는다.
無爲를 설명하고자 많은 비유를 들었다. 모든 사건은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지기에 첫 단계부터 자연스럽게 이루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 과정에 有爲가 개입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결과적으로 억지로 하기에 패하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기에 잃는다.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則無敗事(민지종사 상어기성이패지 신종여시 즉무패사) 사람들이 일을 처리함에 이루고도 실패하는데, 마지막까지 처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시이성인욕불욕 부귀난득지화)
따라서 성인은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며,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聖人은(道)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을 욕심낸다. 물질을 탐하지 않는다. 얻기 어려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탐하지 않는다. 금은보화, 권력과 명예에 흥미가 없다. 天之道는 정반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學不學 復衆人之所過(학불학 복중인지소과)
배우지 않는 방법을 배우며, 사람들의 과실에서 교훈을 얻는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을 더 얻기 위한 學을 멀리하고 자연 법도를 배운다.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이보만물지자연이불감위)
따라서 聖人은 만물의 자연규율에 보조를 맞출 뿐이지 감히 하지 않는다. 道德經에는 감히 하지 못한다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신기한 점은 감히 못 하면서 이루지 못하는 것도 없다. 바로 老子의 無爲다. 현실에서는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老子의 생각을 따라잡기 힘들다. 이 문장을 행하는 주체는 聖人이며 道이다. 궁금한 점은 왜 老子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까? 聖人은 만물을 아이처럼 다루는 존재인데 왜 감히 못하고 주저하는 것일까? 이 문장은 아래의 23章과 연결된다. 無爲는 스스로 그러하지만 극히 피동적이라고 주장한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동어도자 도역락득지)道를 따르면 道가 기꺼이 함께하며
同於德者 德亦樂得之(동어도자 덕역락득지)德을 따르면 德이 기꺼이 함께하며
同於失者 失亦樂得之(동어실자 실역락득지)失을 따르면 失이 기꺼이 함께한다.
또 49章에 있는 아래 문장과도 연결되어 있다.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성인은 일정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이 표현도 극히 피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不敢爲다. 우리는 無爲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때에서야 비로소 老子가 주장하는 道와 無爲를 깨닫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도와 무위를 時間이라 생각하면 무위의 피동적인 행위를 쉽게 이해한다. 時間은 존재하지 않기에 변화도 없지만 반드시 모든 사건에 개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로, 교통사고라는 물상은 시간과 별개의 것처럼 느껴지지만 교통사고가 난 시점에는 시간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문제들을 조금씩 풀어가다 보면 마지막에 道, 無爲에 자유로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