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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택
마 10:1-4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협력자를 사람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그와 더불어 일을 해나가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인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수키 위해 신실한 협력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협력자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열두 사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먼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마태는 세관 앞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일히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입니다.
선택이란 여럿 중에서 골라 뽑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아내로 선택받은 처녀가 갖는 행복감도 이런 것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택도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온 천지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토록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바로 나를 골라서 뽑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같추지 못한 우리들을 일일히 구별하셔서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렘1:5)
2)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십니다.
선택은 그 행위 자체로 끝나지 아니하고 책임의 의무까지 연결이 됩니다. 우리도 일단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내용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는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책임은 책임을 지는 사람의 신실성과 주변의 환경 등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그 실현 여부가 확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을 굳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2. 예수님의 선택기준은 세속적인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1) 세속적인 선택은 외모를 중요시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기가 좋기 때문에 먹기도 좋을지는 몰라도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없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버섯도 빛깔이 곱고 화려한 것에는 독이 있어 먹지를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세속적인 안목으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창13:10)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선택하기 쉬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선택하고 싶은 것에 일단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험의 근원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입니다. 찰나의 작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모를 중시하여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택하고 그리스도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선택은 내용을 중요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세상은 외모를 보고 나를 배척할지 모릅니다. 세상 친구들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므로 나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중심이 항상 여호와를 가까이 하고 그만을 전심으로 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나를 알아보시고 선택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미련한 자와 악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택하여 권능을 주시고 가르쳐서 훌륭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님께서 택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강한 권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문에 통달하지도 못했습니다. 재능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부끄럽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보냄받은 자들의 사명
마 10:5-8
1. 보냄받은 자들의 사명
1) 그들이 선포할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행1:8)고 하신 말씀과 대조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이방인의 길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나 돼지처럼 여겨진 이방인들을 비유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복음이 그들에 의해 ㅅㅇ함을 입을 것을 주의하라(마7:6)는 것이며,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와 같이 복음이 다른 종교와 타협이 되고 섞여 그 순수성을 잃을까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왕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하여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고 악을 행하게 되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기며 곁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들이 되었습니다. (렘50:6) 그래서 이들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방황하며 쉴 곳을 구하게 되었으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였습니다. (마9:36) 따라서 예수님은 목자없이 방황하며 그릇된 종교지도자들로 인해 잃어버린 양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9: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잃어버린 양떼들을 참 목자인 자신에게 되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낙심한 자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2) 그들이 선포할 내용은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4,17) 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도 천국이 가까왔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 천국에 대한 선포는 다음과 같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로서 확실해 집니다. (1) 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이란 의원이 필요한 자들이며 육신이 약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찾아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을 뿐 아니라 (마8:17), 의원이 되신(마9:12)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2)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란 생명이 없고 생기가 없어서 활동력이 없을 뿐 아니라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찾아가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요14:6) 죽은 자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3)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부정한 병으로 인정받아 따로 고립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자,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4)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귀신들로 인해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귀신을 물리치신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입니다.
2. 보냄을 받은 자들의 자세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절)고 말씀하셨고 보냄받은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1) 보냄 받은 자들은 청지기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준 능력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이기 위한 도구들이지 제자들을 높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능력들은 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들을 자신을 위해 쓰거나 한 달란트 받은 어리석은 종처럼 땅에 묻어 두는 것이 나니라 겸손히 주님을 위해 전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저 받은대로 거저 주면 주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러 주시며 더 많은 것을 맡길 것입니다. (마25:23) 따라서 맡겨진 능력들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 보냄받은 자들은 의무자들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공로없는 제자들에게 거져주신 것은 또한 그들 역시 거저 주어야 하는 필연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껏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한 의무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로부터 같은 물을 공급받는 사해는 물을 배수하지 못하므로 죽은 물이라 불리지만 요단강은 자신이 받은 물을 배수함으로써 살아있는 물이 되는 것처럼 믿는 우리들, 주님의 제자 된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신 재능들을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함으로 잘했다 칭찬받을 뿐 아니라 더 큰 축복을 누리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전도자의 자세
마 10:9,10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주기 위해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세와 그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주님께로 부름받은 그의 제자이기 때문이며, 제자들과 같이 복음을 전해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치는 전도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 그들은 타향길을 떠나는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1) 그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신분과 위치가 바뀌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그들의 삶과 인격이 변화되었듯이 이제 그들의 신분도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부도 아니며 세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군이란 분명한 신분을 소유했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여행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도 인생행로에 오른 여행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신분이 없습니다. 또 있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한 신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빼앗을 수 없는 신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신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2) 그들은 분명한 여행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여행은 쾌락이나 낭만을 즐기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이 아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의 여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행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를 영광되게 하고 그 뜻대로 살며 그분만을 전하는 삶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전도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 우리는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소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지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의 여행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에 온 힘을 기울이지 말고, 또 금과 은이 없어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세상적인 것에 애착을 버리고 빈마음으로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2)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떠나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강한 신념을 가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주어져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 우리는 이 같은 것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3. 일군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1)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은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분명히 '일군'이라는 조건이 붙어다닙니다. 게으른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군 된 자로서 부지런히 땀 흘리고 수고하는 자에게는 그들에게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신 방법으로 그 일군을 먹이기도 하십니다. (왕상17:6) 그러므로 복음전도의 여행길을 떠나는 하나님의 일군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먹여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2)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군의 대가로 우리가 받을 상급을 단지 '먹을 것'에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최선을 다하는 동안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상급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바울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게 될 큰 상급을 구하면서 일군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전도자의 사역
마 10:11-13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내어 보내시면서 여러가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5-10에서는 전도자의 전도내용과 자세를 말씀하셨고 이어서 전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방법은 다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전도는 합당한 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합당한 자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내어보내실 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7: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합당한 자는 어떠한 자를 말합니까? (1) 그리스도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가 복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비난할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사53:5) 그러므로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주님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가 복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2) 합당한 자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 수가 많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선교 단체의 주요 목표가 '캠퍼스 복음화'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여러명을 훈련시켜 스켑으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가지 질문이 던져졌는데 그것은 '캠퍼스 복음화의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이때 대부분이 대답하기를 '캠퍼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주님을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명이 '모든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소수의 무리를 택해서 진리 안으로 양육하는 것이 전도자의 목적이며 초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강제적으로 침투하여 믿게 하는 방법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라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눅19:10)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때는 곧 그 사람에게서 돌이켜야 합니다. (마10:14)
3) 합당한 자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은 복음에 합당치 않다'라고 생각하여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부한 자들은 그들의 부 때문에 복음을 외면할 수는 있습니다.(마19:22) 그러나 복음은 부와 빈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RSV번역성경을 보면 '성과 촌'을 Town 과 Village로 기록하고 있는데 Town 은 Village 보다 큰 도시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도시나 시골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즉 부한 자나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말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전도는 사랑의 교제로서 이루어집니다.
1)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전해 준 그들을 그냥 보내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보다 많은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필요의 갈급함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전도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삭개오가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에 머물고자 하신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눅19:5)
2) 그들에게서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서 입니다.
전도자는 일용할 양식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것을 공급받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이러한 사랑을 갖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그들에게 평안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평안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평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평안을 빌어 준 자에게 그 평안이 합당하지 않으면 평안을 빈 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마 10:14,15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과 함께 복음 전도자의 여러가지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면 중 특별히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만났을 경우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함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태도
1)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으로서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전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듯이 복음도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믿음은 마음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을 줄 모르는 마음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주기 위해서는 먼저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일은 곧 낮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마음을 열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듣지 아니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따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여겨 믿고 따르려고 노력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10:17) 성도는 귀를 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8:18)라고 하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고 말씀하셨습니다.
3)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죄는 점진적으로 양심을 마비시켜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합니다. 신경이 마비된 신체 조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혹 안다고 하여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의식이 없이 행한 범죄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을 하나님께로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을 수가 있고 그의 말씀에 경청하며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전도자의 태도
1) 그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제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들의 성이나 집에서 떠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전도자들을 보호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악의 장소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악의 속성은 미혹하여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이 융합할 수 없고 선과 악이 상존치 못하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는 멍에를 함께 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나갈 때에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낙6:11). 이 말씀은 자신이 그리고 복음이 그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제자들이 떨어버린 먼지가 나중 심판날에 그들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해 듣고도 받아들이지 아니한 죄는 더욱 무거워 심판날에 가혹한 형벌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3.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받을 형벌
이러한 사람들이 받을 형벌에 대해 예수께서는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신 표본적인 도시입니다. (욥1:7)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날에 소돔이나 고모라보다 더욱 엄청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이신 에수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당연한 형벌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영생이 주어지니 그를 배척하면 멸망이 뒤따릅니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승리를 위한 권면
마 10:16
성도의 신앙생활은 싸움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말합니다. (엡6:12) 성도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하면 아니됩니다. 마귀한테 패하면 그의 종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를 보기 좋게 물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이기신 것은 그의 제자인 우리들도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대적하여야 하겠습니다.
1. 성도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
1)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심정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쩔 수 없이 악한 세계로 제자들을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뿍 담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귀한 독생자를 사탄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는 않을까 죄를 짓고 불안에 떨고 있지 않을까 하여 우리를 걱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늘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양'과 '이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양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종종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자신을 양으로 표현하였스니다. 다윗의 이러한 표현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양의 성품과 성도가 지녀야 할 성품과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로 양은 성질이 온순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양은 자신을 지켜 주는 목자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기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셔야만 우리의 삶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째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요10:3-6) (2) 이리는 마귀와 그를 좇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리는 성질이 포악하고 행동이 민첩한 육식 동물입니다. 양이 성도와 관계 있는 동물이라 한다면 이리는 성도를 괴롭히고 유혹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끌어들이는 마귀와 비슷한 습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리가 즐겨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목자의 보호를 벗어난 양은 이리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또 이리는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성도를 유혹하여 믿음을 빼앗기 위해 두루 돌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양이 이리를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이 이리를 이긴다고 하면 아마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은 소년 다윗에 의해 거꾸러졌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의 몇몇 제자들과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으로 점령되었습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연약한 새싹이 땅 거죽을 뚫고 올라옵니다. 모두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 내용입니다. 성도도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의 비결은 예수게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 성도의 승리를 위한 예수님의 권면
1) 지혜로와야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성경의 지도자들은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어려서부터 지혜롭게 성장하시고 그 지혜를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13:54) 성도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우리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2) 순결해야 합니다.
순결은 깨끗한 것을 가리킵니다. 곧 아무 흠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처녀의 순결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순결은 더 고귀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그래서 약점을 발견하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결한 신앙생활을 한답면 마귀는 우리를 집적거리지 못합니다. 성도의 순결함은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도 한 점 티도 없는 순결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핍박
마 10:17,18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하며 고통스런 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이 있기까지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고난에 대한 기록 역시 그들이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고난과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자들은 사람들을 삼가해야 합니다.
1) 이들은 복음 전도자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이리들, 곧 먹이를 찾기에 급급해 하는 야수의 존재와 같습니다. 또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핍박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서 폐하고자 획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우글거립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가족이 그 인물로 대두되기도 합니다. 특히 때가 가까와짐에 따라 그들의 극성도 심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해짐에 따라 우리도 더욱 강건하게 대적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2) 제자들은 그들을 구별하여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핍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 당시 제자들의 복음 전도 영역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방인들에게는 그 복음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대문입니다. 제자들이 구별하여 복음을 전도해야 하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복음을 받는 자의 마음밭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을 구원의 대열로 이끌고자 하여도 이미 사탄에게 잡혀 있는 자의 마음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잘 구별하여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목마른 영혼을 빛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핍박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1) 그 핍박은 그리스도를 인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받는 핍박은 당연히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인하여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같은 핍박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복받기 위함이 아니요 그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또 그 핍박을 감수하리라는 각오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가족과 이웃과 나아가서는 국가의 핍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예를 보기도 하며 듣기도 했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핍박 뿐 아니라 국가의핍박도 무서운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고난도 잠시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무한대의 시간에 비하면 이 고난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핍박받음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커다란 상급이 핍박받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수험생이 피나는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의 고통 끝에 빛나는 영광을 받게 됨과 같습니다.
3. 이 핍박이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1) 핍박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핍박을 받는 것도 일종의 사역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심을 수 있는 계기가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무언의 증거도 큰 힘을 발합니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도하려는 그 행실을 통해 핍박자들의 양심은 그 복음에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나 또는 무언의 행위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4. 핍박받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예수님께서는 그 핍박에 대한 보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핍박받을 때 더욱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핍박하는 자들을 휘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고 말했습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의 상급이 큰 만큼 우리는 핍박하는 자들을 위한 관용과 저들의 영혼을 위해 죄 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넓은 사랑의 마음도 함께 소유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
마 10:19,20
제자들의 파송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와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부득불 소환될 경우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 그는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이 총독들이나 임금 앞으로 끌려가게 될 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한시가 급한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우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렇듯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로와 도우심을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약1:5) 주의 사랑을 믿고 구함으로 그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2. 성령께서는 우리가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1)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리 담력이 세고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위험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 로마의 박해를 말미암아 원형 극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너무도 담대하며 태연자약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스데반 집사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대제사장들 앞에서 설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대처할 방법과 그 자세까지도 가르쳐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까를 위해서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담대하게 우리의 대적자들 앞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태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2) 무엇을 말할까를 가르쳐 주십니다.
지혜자는 잠언에 이르기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16:1) 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시어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심을 뜻합니다. 그 무식했던 어부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여 한꺼번에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실은 분명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입술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다가 총독들이나 임금 앞에 끌려 갔을 때 성령께서 그들의 말을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의지로써 변론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하려 할 때에도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2:13) 증거해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1)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영혼을 좀 먹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근심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할 뿐이며,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까지도 해치게 됩니다. 그러넫 이러한 경고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불안의 짐을 지고 홀로 걷고자 하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몸소 지시려 하는데 우리는 왜 붙들고만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깁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근심케 하는 요소와 원인을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해결받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간구하면 그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며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
마 10:21-2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기독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또 하나의 교리는 종말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서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더욱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1. 사회의 기존 윤리의식이 깨어질 것입니다.
장차 형제가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사회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단위는 가정입니다. 고대에는 이 가정을 이루는 기초로 하여 씨족을 형성했고, 이 씨족이 발전하여 부족과 국가를 이루어 현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파괴는 곧 사회의 기존 질서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은 곧 사회의 기존 윤리 의식이 깨어질 것을 예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되는 풍조에 대한 예언이라고 전제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종말을 우리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사회적 책임을 최선을 다해 이행해야 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2. 성도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나'. 재림의 특징은 기존의 사회 윤리 의식이 깨어지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에 대한 가혹한 핍박입니다. 사회적인 풍조와는 다르게 선하게 살려는 유별난 행동과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사실은 악한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때 이를 이겨낼 방법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인내해야 합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종말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교훈하시는 것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주겠다거나 그것을 거부하라가 아니라 그 고통을 정면으로 부딪혀서 고통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적으로가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때까지 입니다. 이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을 두려워하여 회피한다면 그 고통은 우리를 압박하며 끝까지 우리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우리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환난당하는 세상에서 담대해야 할 것입니다. (요16:33)
2) 지혜로와야 합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회와 이해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 회피하지 않는 한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값없이 내어버리지 말고 아끼라는 것입니다. 즉 비둘기 같은 순결을 잃지 않는 한에서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당당하게 우리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아끼는 지혜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우리는 기존의 사회 윤리 의식이 깨어진 상태에서 우리의 도덕성을 지키고 주의 이름으로 받는 핍박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복음 전파의 사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로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내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며, 말씀을 증거자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얻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도 소망 중에 담대히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정확한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정확히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도 그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고 못박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단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토대위에서 늘 긴장하고 준비하는 재림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신앙을 갖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닮자
마 10:24,25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우리에게 명하신 일들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그리고 많이 알아야 하며, 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생활인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외모를 흉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닮는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삶의 모습과 방법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사랑으로서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형벌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한 사랑을 본받아야 할까요?
1)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로 해석하는 자리에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며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하셨습니다.(마22:27)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를 섬기기에 최선을 다했으며 하나님의 명을 좇아 결국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실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전체를 기울여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22:39)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교훈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격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 예수님의 지혜를 닮아야 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은 제자보다 훌륭해야 하며,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15:14)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하신 참 스승이 되십니다. 그의 가르침은 완벽했으며, 그의 이상은 지고했고 그의 교훈은 가장 정의롭고 순결하였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있게 '나를 다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인간은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간에 누구든지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의 절대자를 찾기도 하며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속적인 종교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경륜 가운데 인류의 구속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취의 비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시며,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배우고 그러므로 지혜를 얻게 되며 구우너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스승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인격까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온유하신 희망의 모습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그들의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생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매한 인생들에게 삶의 지혜를 심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기간은 온 인류가 추구해야 하며, 기대하는 모든 삶의 기준이 적나라하게 실현된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은 그가 본래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삶의 지혜를 본받읍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위대한 생애의 터전 위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라
마 10:26,27
비밀이란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믿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2:14)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지만 육에 속한 자는 철저하게 이것이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은 어디에서 전해야 할까요? 본문은 그 장소를 '광명한 곳'과 '집 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복음은 거리낌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에서 복음에 대해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1)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때문에 복음은 그냥 받아들일 수 없고 오직 회개한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일 먼저 복음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그 특성상 죄에 대한 책망을 함께 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복음의 책망과 그로 인해 당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복음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가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후 그는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자기가 죄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거리낌없이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비록 복음이 우리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다 할지라도 결코 복음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부끄럼움은 영원한 형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2)부끄럼움이 없는 복음은 힘있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단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구원의 도를 제시하는 생명의 길이므로 확신을 갖고 힘써 전파되어야 합니다.
2.복음은 확신을 가지고 전해져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감추어진 죄악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진 것'은 헬라어로 수동 분사<케칼룀메논>이라는 단어로 쓰여지는데,이 뜻은 '지금까지 감추어졌고 지금도 감추어진'이란 의미로 그 뒤에 오는 형용사 '숨은'<크류톤>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감추어지고 숨겨져 있는 죄악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숨겨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전하게 될 때 악한 사탄의 권세는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2)복음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와 죄에 대한 심령의 애통함이 없는 자, 그리고 영혼의 갈급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은 감추어지고 그들의 죄악만이 밝혀지게 되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진정으로 영혼의 갈급함이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그들의 죄는 사하여지고 복음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자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러분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복음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된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올 것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핍박하며 죽이려 달려드는 악한 무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령이 갈급한 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해야 하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귀한 복음의 말씀을 우리 이웃에게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명령을 기어고하고 우리의 사명을 깨달읍시다.
전도자의 열정
마10:28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전도자의 열정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의 전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전도자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전도자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전도를 위해서였으며(막1:38).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훈련시키신 것도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내용인데 여기서 전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열정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1.전도자에게는 구령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으면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구령의 열정이 없으면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전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열정은 어떻게 해서 소유할 수 있습니까?
1)구령의 열정은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자에게서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면에서 구원의 열정이 있었던 전도자입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에게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의 기쁨을 갖을 때에만 이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주기 위해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구령의 열정은 주님의 명령에 순복할 때 일어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전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전도한다면 전도자의 삶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3)구령의 열정은 사명감을 확신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리신 말씀입니다. 그 사명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핍박으로 인해 죽음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록 사람들이 핍박하여 죽일지도 모르나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신 말씀을 통해섣 이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존시 이러한 사명감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늘나라를 이 땅의 것과 비슷하게 인식함으로 서로가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막10:37).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고 자신들의 사명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순교까지 당하는 열정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2.전도자의 열정은 주님의 약속에 의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라고 말씀하셨는데 '두려워말라'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1)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약속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소유하지 않는 자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멸망의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자는 드물 것이며, 죽음까지 각오하고 전도하고자 하는 자는 더구나 없을 것입니다.
2)전도자에게 하늘에 상급이 있다는 약속입니다(마5:12).
이러한 약속 때문에 위대한 전도자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3)고난 중에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전도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수고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라고 말합니다(고전15:10).
3.전도자의 열정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본문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 말고 전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도는 죽음을 초월해서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승천하실 때에 마지막으로 명령하시길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도를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죽음을 초월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마10:29-31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다루시는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자녀들을 생각하고 계시며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보살피십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그르 섬기며 기도하며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녀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야말로 그의 관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 세상 모든 만물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모으는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복과 관련된 모든 일에 관여하고 계시며,그들의 생활을 세심하게 보살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도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같이 성도를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 관계된 필요를 모른 척하시겠습니까? '참새'를 먹이시는 하나님께서,'조그마한 머리카락'까지도 그저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육을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크나큰 오해요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아는 성도는 어려움 앞에서도 '내가 어떻게 잘못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랑하고 아끼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온전케 되기까지 붙드십니다. 즉 귀중한 보석들이 계속적인 정련과 마광의 반복 행위 후에 마침내 아름다운 장식장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은 끝까지 보호하시는 사랑이요 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하고 보석처럼 빛날 수 있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생기 있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답게 가꾸시는 그의 단련 작업은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디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도의 현재와 미래지사를 통찰하십니다. 그리고 친히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 주십니다. 때문에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지 못하고 잠시 육체의 소욕을 따라 범죄를 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봄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함을 간절히 구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새사람으로 그리고 그의 선하신 뜻을 쫓는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렘18:3,4).
3.성도가 확신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참새보다도 아니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져들은 그의 뜻을 앎으로써 참된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1)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염려하거나 고민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많은 문제들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갑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뢰해야 합니다(빌4:6,7).
2)성도의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롬8:2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도록 섭리하실 때 성도들을 들어 그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때로는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진행톩 하십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 베푸시는 섭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가장 안전한 길이며, 최상의 경영입니다.
3)성도에게 부과된 일은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무대에 선 우리들이 무위 도식 하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염려 없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합당한 일들을 실제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그의 선하심을 만방에 알릴 뿐 아니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4)성도의 삶이라고 해서 기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항상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마귀의 끊임없는 공격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려 웃음을 앗아갈 때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대하면서 결국은 생활속에 그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8:20).
그리스도를 시인하라
마10:32,33
1.성도의 시인
1)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신앙 생활의 기본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면서 이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믿음을 소유하는 것 만큼 쉽ㄱ도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반면 믿음을 지킥 가꾸는 일은 많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야 그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라도 확실하게 시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느 장소 누구에게라도 그가 온 인류의 구주이심을 자신있게 시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그리스도를 시인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의미합니다.
전도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팧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케 하여 믿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되며,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됩니다(눅4:18).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구원의 문에 들어섭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복음도 전하는 자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를 시인하는 자만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
1)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계 역사는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져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용감한 성도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숱한 박해와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보존하며,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겉으로 나타나는 만용이 아니었습니다. 만용은 소 영웅 심리에서 비롯되는 혈기이며 과오입니다.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가졌던 용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선입니다. 그러나 사랑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밖에 모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쾌락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그를 시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사랑의 행위를 자신도 할 수 있게 됩니다.
3.그리스도를 시인한 사람들
1)베드로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내가 누구냐'라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습니다.
2)나다나엘
예수님으로부터 '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고 시인하였다.
3)수가 성의 여인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의 물을 예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그녀는 동네로 달려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라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습니다
4.그리스도를 시인한 자들이 받을 상급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축복과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한 행복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시인합시다. 그리할 때 그는 우리를 자랑스럽고 영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구주의 오심과 제자들의 고난
마10:34-36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기 전에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을 영접함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님이 오신 목적과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주님이 오신 목적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이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사람들의 생각이 그릇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생각함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마5:17에도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십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고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셔서 온전한 자로 세워 주십니다.
2)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이며,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화입니다(요14:27). 또한 이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자기 자신의 죄와 싸워 이긴 후에 오는 평화입니다. 이렇듯 세상과 다른 평화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약속되었습니다.
3)주님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분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눅12:51).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람들의 죄로 물들고 타락한 상태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며,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죄된 모든 생활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상태를 겪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원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에(히4:12)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토록 자극시킵니다(계2:16).
2.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
주님께서는 미가서7:6의 말씀을 인용해서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대적함으로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죄 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의 가지에 붙어 있기에 이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기에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에게로 나아오기를 꺼려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들을 미워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주의 이름을 위해 미움을 받으며(마10:21),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롬8:17).
2)주를 믿는 사람들은 가족들마저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한 가정 안에서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오는 핍박 중의 하나입니다. 한 가정안에서 신앙을 달리하게 되거나 주님을 믿는 식구로 말미암아 그 집이 어려움을 받게 되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에 내어직 됩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하심으로써 자신을 위해 집이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마19:29).
3)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첫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마10:22). 둘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부모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마19:29). 세째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마5:10).네째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합니다(롬8:17). 그리고 그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날선 검보다도 예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가 담대히 외쳐야 하며,주님을 위해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되 가정까지도 포기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상급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견디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도
마10:37
본문은 내용을 얼핏 보면 예수님은 가족산의 사랑조차도 무시해 버린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한 것은 가족간의 사랑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적 의미는 우선권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그 질문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가 더 우선적이냐?', '가족의 주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이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관심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도가 어떠한 정도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의 말씀은 던져진 것입니다.
1.부모의 자식간의 사랑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또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인지 상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랑 중에서 이것만큼 극진하고 헌신적인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또는 자기 부모를 위해서는 자식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정도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싶고도 넓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맺어져 있는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으며,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이 세상의 어떤 소유물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을 끊고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신이 잘려져 가는 아픔과도 같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잃는 고통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듯 진함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자신의 사랑에 비유한 것은 자신의 뒤를 좇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세상을 버리는 고통과 아픔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하려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아멘으로 응답하려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버릴 수 없는 최후의 것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없이 버릴 때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나 자녀에 대한 의무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어야 하며 주의 뜻을 좇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만이 진정한 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믿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2.아브라함의 예
본문에 나오는 제자의 도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기 삶에 우선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졵였습니다. 이삭은 자기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기치 못한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이삭을 제단에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항변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 모리아 산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귀한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고자 한 아브라함의 믿음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자으이 도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걸림이 되는 모든 장애물,즉 게으름,나태함, 주저하는 마음, 불신앙, 그리고 세상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들을 거침없이 잘라버리고,즉시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귀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아씸없이 드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며 예수를 기쁨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와 같지 않다면 주님께 참된 제자의 도를 따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3.따르는 보상
본문의 시험은 그 어떤 시험보다 혹독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잔인한 듯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러한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소유가 모자라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처럼 하시는 것은 우리를 보다 더 성장시키고 우리에게 더없이 축복을 주시기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기 전과 받은 후에 상태를 비교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후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도 시험에거 승리한 후 몇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의도는 항상 선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처럼 힘든 제자의 도를 요구하실 때에는 그만큼 축복도 많이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주께서 요구하실 때 언제라도 즉시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나를 따르려거든
마 10:38,39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의 말씀으로 특별히 자기를 좇는 자들이 미리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그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또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좇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요구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지녀야 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1. 네 십자가를 지라
1)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범죄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적용되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롬5:8) 우리 인간들도 자기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자식의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 슬픔을 못이겨 심장이 터지는 아픔을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를 모른 체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벌레만도 못한 추악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3:16) 그래서 인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을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고전1:18)
2)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질 수도 없거니와 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으시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단번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1) 성도의 십자가는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십자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며, 거기에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은 더욱 중차대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부탁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자기의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진정한 의미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여러 형태의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지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목숨을 아끼지 말아라
1) 육체의 목숨을 아끼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 연한은 잠간이라고 표현해도 될만큼 빨리 지나갑니다. '내일 일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이러한 육의 목숨만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겨서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 앞에 허상인 육의 일만 좇다가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선택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잠간 뿐인 육의 생명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영의 생명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육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좇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육체의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오늘도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그랬으며, 초대교회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좇읍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며, 이땅에서는 물론 저 천국의 축복을 보장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히 사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와 전하는 자
마 10:40,4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신 후 전도 사역을 위해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내리신 말씀은 실천하기 힘들고 어려운 명령들이었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9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28절)'는 말씀 등으로 제자들을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1. 전도자를 위한 도우심과 축복
1) 전도자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도우심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40절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전도자와 함께 하셔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1) 전도자에게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17절)고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셔서 힘과 용기를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이사야서를 통한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이 말씀은 전도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가운데 그러한 도우심을 주시리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고난이나 핍박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붙들어 주신다는 믿음 안에서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주님께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뢰고 그만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2) 전도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하기 이전에 먼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능력에 의지하여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1:14-17) 이들의 전도는 전도의 모양만 띠었을 뿐 전도가 아닌 지식의 자랑이나 변론에 그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도는 필경 실패하게 될 것이요 큰 망신과 함께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는 인정받지 못하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도 보장받지 못하는 불쌍하고도 불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전도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41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전도자에게 상급이 있음을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거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여 전도를 해야 하며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도자에게 '상'이 있음을 말씀해 주심으로 전도자에게 용기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상은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나라의 소망이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확신과 또 그것을 받을 자신이 없기에 그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만이 성도가 영원히 거할 믿는 자들의 처소요 도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나그네와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모든 가치를 하늘에 두어 '너희 보화를 하늘에 쌍아두라'(마6:20) 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영접하는 자를 위한 축복
1)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전도자를 영접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까지 받아들이는 지회가 부여됨을 뜻합니다. 무조건 전도자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은 많이 보게 되는데 이러한 자들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해서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자는 심령의 영혼이 갈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구원의 복을 얻을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2)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상이 있습니다. (41절)
이들은 구원의 축복 뿐 아니라 전도자들에게 복음을 듣기 위해 그들을 영접함으로 먹을 것과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왕하4:1-7)
선행의 보상
마 10:42
본문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행했을 때 오는 대가에 대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1)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며, 또한 스승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라는 말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약한 자들,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모든 자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셨으며,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 주시는 사랑의 모습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도 행하도록 선행의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15)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베풀면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또한 사도 바울도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롬12:9-13)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합시다. 그것은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이자 우리의 모든 기준이 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믿음을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있을 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약2:15-2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쳤을 때에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약2:21)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행함을 동반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행함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약2:22),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도 무시했던 어린아이(마19:13)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내 형제 중에 지금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하신 후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는 말씀에서 분명히 증거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주님께 베푸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선행을 베풀때에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행하기를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6:2-4) 이렇게 행하면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마6:5)
2. 선행에 대한 보상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름으로 소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 25장 31절 이하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른편에 둔 양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비록 무심코, 또는 믿는 자로서 당연히 행한 일을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칭찬과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께 선을 베풀었다고 주장한 자들은 영벌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은밀히 행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마7:21-23).
따라서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은밀히 행해야 하며,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주님에게 베푸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과도 연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주님을 따르고 믿는 제자들인 우리들은 선을 마땅히 행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갈6:9)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 안에서 착한 일을 베풂으로 주님께 칭찬받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제노회 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