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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바르실래 그리고 분쟁 / 사무엘하 19:31-43
오래 동안 주리고 목말랐던 사람이 음식을 먹게 될 때, 많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배가 고프더라도 욕심부리지 말고, 부드러운 음식부터 천천히 먹어야만 체하지 않고, 피와 살과 뼈가 되어,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배가 고프게 되면 그것을 잊거나 무시한 채, 조급하게 먹다가 탈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원리는 우리의 인생이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잃었던 것을 되찾고, 성공이나 승리를 얻게 될 때,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고, 먼저와 나중, 중요한 것과 대수롭지 않은 것, 본질과 비 본질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의 도리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겉보기에는 성공 같으나, 얼마 오래 가지 못하고,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으나 고통을 당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나 회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근본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으로 하고, 나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려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설령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조급하게 앞당기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마치 곡식이 익을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는 농부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질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은, 공허한 것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흩어져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간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흐트러진 마음은 흐트러진 채 존재하고, 말씀은 하늘의 구름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허함을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들려질 때 정상적인 반응은, 말씀에 의해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갈 곳을 발견함으로써, 한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곳으로 집중된 마음은, 강한 힘으로 존재하게 되고, 오직 하나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현재의 실상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거짓을 안고 살아갑니다. 거짓된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기에, 자기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상을 감추는 거짓된 것에는, 종교 생활이라는 것이 자리합니다. 종교 생활을 동원하여 자신을 포장함으로써, 악한 것을 감추고, 대신 거짓으로 위장하여, 나 아닌 다른 나를 보여주고자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관심 밖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예수!’ 하며 떠들고, ‘십자가’를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짓된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처럼 위장되고 단단히 포장된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 내는 것이 말씀의 기능입니다. 하나하나 벗겨지며, 속살이 드러나게 해서 수치스러운 자신을 보게 함으로서, 자신의 수치를 가려줄 분을 찾게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대한다면, 결국 말씀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진다면, 과연 자신을 ‘성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로 인정할 수 없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성도로 인정할 수 없게 합니까? 반대로 성도로 인정한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성도로 인정하도록 합니까? 골치 아픈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여러분은 성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성도’ 운운하는 종교인으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성도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함으로써, 거짓된 것으로 성도인척하며, 위장을 하고 살아왔던,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은,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만나고, 자신을 속였던 시바를 만나고, 자신이 은혜를 베풀었던 므비보셋을 만납니다. 시므이와 시바는 자신들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척 합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재앙을 막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척,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거짓된 성도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에 대해 솔직했다면, 다윗을 저주하고 속인 일을 고백하며, ‘왕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환영함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얻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으로 위장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위장된 거짓일 수도 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고,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떠들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 모든 것들이, 위장된 거짓에 불과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못을 범한 분의 처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진정한 솔직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진심으로 안다면, 하나님의 처분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회개했으니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용서 받기 위해서, 그리고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고백이기에, 위장된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으니 성도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산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는 이것도 과분하다는 생각 아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에 대해 솔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온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밭을 시바와 반으로 나누라는 다윗의 결정에 대해서도, 억울하다거나 불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부를 시바에게 주라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왔다는 것으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윗에게서 베풀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알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채워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앎으로서, 나오게 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바르실래라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31-32절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바르실래는 큰 부자였으며, 다윗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 다윗과 그의 일행을 보살피고 도와줬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33절에서 바르실래에게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준 일에 대해, 보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이 되어 돌아가는 상황에서, 바르실래가 다윗과 함께 간다면, 그의 남은 인생은 말 그대로 평안이 보장될 것입니다. 왕을 도와준 사람이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34-37절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바르실래는 자신이 늙어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할 수 없으며, 음식의 맛도 알 수 없고, 노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음으로,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한다면, 오히려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과 함께 요단을 건넌 것은, 단지 왕을 배웅하려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는가 하면서 사양합니다. 이러한 바르실래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사양의 미덕을 보이는 겸손입니까?
사람들이 신을 찾아 종교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정성에 대해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응해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신의 반응은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것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이러한 기대가 교회 안에도 난무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하면서 봉사하라고 하고, 충성하라고 하고,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까? 모두가 상급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상으로 복으로 갚으실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상을 기대하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 자신을 위한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위장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을 도왔으면서도, 다윗이 함께 가자는 것을 거부합니다. 다윗을 따라가면, 남은 인생이 편안해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다윗을 따라가면, 오히려 다윗에게 누를 끼칠 뿐이라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베푼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하면,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곧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 같은 자가 예수님과 함께 해봐야, 예수님에게 누만 될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도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볼 때, 그리고 자신에 대해 솔직할 때,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 받을 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을 하고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상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하든, 그 대가로 상을 기대하지도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을 받을 자격도 없으며, 상을 받을 일을 한 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심판에 처할 자를, 예수님을 보내셔서 의인이라 일컬으시고, 자녀 되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솔직한 자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나의 입장에 파묻힌 채 날 위해 살아왔고, 교회를 다닌 것 역시, 내 만족을 꾀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나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오직 내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과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한 일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상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기도를 해도 날 위해 했을 뿐이고, 성경을 읽어도 날 위해 읽었고, 헌금을 해도 날 위해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상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한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인들에게 상급을 말하면서, 열심히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날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 되게 하신 그 자리에서, 무엇이 나를 백성 되게 했는가에 집중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범사에, 곧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실래를 보면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공로 운운하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으면서도, 서로 자신의 잘한 것을 내어 놓고, 반대로 타인의 잘못함은 부풀리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거룩의 자리에 붙들어 놓으시는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40절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이것을 보면,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게 되었을 때, 왕을 호위하여 함께 건넌 사람들은,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지도자 위치에 있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다 백성은 전부가 다윗과 함께한 반면, 이스라엘은 절반만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귀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환하는 모든 행사를,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주관함으로 인해서, 단지 다윗 주변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다윗과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으로 인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41절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이르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위에 대한, 부당함을 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42절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이에 대해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곧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을 모신 것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종친인 까닭이며, 다윗으로부터 그 어떤 특혜를 받은 일도 없기에, 이스라엘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을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립과 다툼은 43절을 보면,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채, 다윗 왕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3절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라는 말은, 다윗 왕과의 혈통적 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숫적인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다윗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위치에 있기에, 다윗에 대해서는 유다보다 더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내세우면서, 누가 다윗과 더 가까운가를 따지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보지 않은 채, 서로 다윗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압살롬이 좋다하며 다윗에게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다윗은 피신을 하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가 더 다윗과 가까운가로 다툰다는 것이야 말로, 똥 묻은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난다며 다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든 이스라엘이든, 다윗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입니다. 다윗 편에서 볼 때는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치 전혀 다윗을 반역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인 것처럼, 다윗에 대한 서로의 위치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배신한 자들일 뿐입니다.
눅 9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눅 9:48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제자들이 따지는 것은 ‘누가 더 공이 많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많은 자가, 천국에서도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사탄의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공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내어 놓을 공로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어린아이는, 자신의 공로가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라는 것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런 사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택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누가 크냐’라는 다툼은, 아예 있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누가 크냐’라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주도권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움으로써,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쟁적으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도 경쟁적으로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경쟁적으로 하며, 심지어 목사를 섬기는 것에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천국과 상관없는 지옥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경쟁과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도, 해당이 전혀 안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공로로 되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로 성도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갈보리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입니까? 그렇게 여겨진다면, 서로의 주도권을 위해 싸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 곧 말씀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공짜로 생명나무에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존재로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다같이 죽고 썩어질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로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모여서 누구의 공로를 내 놓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지금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한 채, 나에게 유리한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피가 가려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 자가 된다’는 말은, 지옥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뺏긴다면, 그 마지막은 결국 지옥의 사람으로 끝나게 될 뿐입니다. 자기 공로가 없는 그가 작은 자로 여김 받으며, 그가 곧 천국의 사람임을 명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랑하기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바르실래의 삶의 모습을 통해, 반드시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누려야만, 존경받는 삶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선한 일을 감당하고,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면서, 겸손히 살아가는 것도 의미 있는 삶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내 삶을 거짓없이 최선을 다해 살고, 내 후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잘 살게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런 소망을 가지고 멋지게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허락하신 말씀 속에, 진정으로 신앙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이 시대, 광야와 같이 메마른 이 시대에, 생수와 같은 사람, 바르실래가 되도록 저희들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