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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넷째주일
절망으로 오시는 참 희망
누가복음서 2장 8-20절
심민정 전도사
[두 개의 탄생 이야기]
오늘 오후에는 성탄 발표회가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부 친구들과 유치부 친구들이 오후에 있는 발표회를 준비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 저도 성탄절을 앞두고 발표회를 열심히 준비하곤 했습니다. 성탄 발표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연극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는 규모가 좀 커서 원하는 배역을 맡기 위해서는 오디션을 봐야 했습니다. 예쁜 날개를 맬 수 있는 천사 배역이 인기가 많았고 수염을 붙여야 하는 동방 박사 배역과 허름한 옷을 입어야 하는 목자 배역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목소리는 컸지만 연기력은 꽝이어서 방이 없다고 소리 지르는 여관 주인 역을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탄절 연극 이야기에서는 별을 따라 온 동방박사 그리고 천사의 소식을 듣고 온 목자들이 함께 등장하지만 성경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서 중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동방 박사는 마태복음서에 등장하고 목자들은 누가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누가복음서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이 한 집에서 동방박사들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두 복음서가 다른 이야기로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것은 두 복음서가 각각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는 같지만, 누가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마태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분명한 신학적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두 복음서의 빛에서 각각 살피면서, 오늘의 자리에서 그 의미를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는 왕, 동방 박사, 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마태복음서의 시작과 달리,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 같이 경건하고 가난한 이들, 여자들, 비천한 이들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서는 모든 것을 요셉의 눈으로 보는 반면, 누가복음서는 마리아의 눈으로 보고, 마리아가 마음에 간직해 둔 내용을 전합니다.(눅2:19,51) 마태복음서에서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지만(마1:20) 누가복음서에서 천사는 마리아(눅1:26)에게, 그녀의 친척이자 의로운 제사장인 사가랴(눅1:11)에게, 그리고 목자들(눅2:9)에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의 예수님 탄생이야기는 거창하거나 웅장하기보다 세밀하고 온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노래 중 하나로 여기는 마리아의 찬가(눅1:46-56)가 바로 오늘 본문의 앞 장인 누가복음서 1장에 실려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곱고 차분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이 이 세상을 뒤집는 새소식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구체적 역사 배경 제시의 의미: 거짓 평화와 참 평화의 대조]
누가복음서는 만삭인 마리아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을 받아 호적등록을 하러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떠났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옥타비아누스의 다른 이름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100년에 걸친 전쟁과 내분을 종결시키고 로마에 평화를 가져온 이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구원하고 온 세상을 구원한 구원자라는 의미에서 ‘아우구스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호적등록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시행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서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라는 구체적인 역사 배경을 제시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온 세상이 구원자라 불렀던 아우구스투스와 진정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고도 불리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가져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룬 평화는 폭력과 살인, 전쟁으로 이룬 평화였고, 또 다른 폭력과 죽음을 대가로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힘으로 내리 누르고, 위에 있는 몇몇만 누릴 수 있었던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작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숨긴 거짓 평화였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의도적으로 이 거짓 평화와 거짓 구원자를 참 평화이자 참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대조시켜 비교합니다.
[목자들, 기쁜 소식의 안내자]
그렇다면 참 평화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사람들은 목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목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당히 낭만적입니다. 아름다운 초원, 하얗고 깨끗한 양들, 온화해 보이는 목자들이 우리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러나 당시 목자는 대접받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밤중에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라면 그 양떼의 주인이 아니라 대신 양을 쳐주고 먹고 사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자들은 가장 낮은 계층이자 사람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고 이들, 베들레헴 중심이 아니라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바로 그이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는 가장 먼저 기쁨의 소식,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즘 신조어 중에 ‘인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그룹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반대로 그룹 중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로 ‘아싸’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인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하나님은 ‘아싸’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아싸인 목자들은 보고 들은 바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여겼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시대 목자와 같은 사람들, 아싸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참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쁨의 소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들의 음성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며 “하늘에는 영광”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높이 올라갔을 때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반장이 되면 영광, 국회의원이라도 되면 정말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반면에 낮아지는 것은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로 여깁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때에도 그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럼 예수님 시대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온 세상 사람들은 전쟁의 승리자,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칭송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한 인간이었지만 적들을 물리치고 이기고 또 이기고, 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 신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땅 위의 영광은 물론 하늘의 영광까지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세상의 영광을 거슬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 세상 사람들이 치욕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은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가 아니라 낮아지고 낮아져 결국 십자가에까지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치욕이라 말했지만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 성육신의 신비이고 성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낮아지셔서 인간 안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의 마지막 비밀이라고 신학자 본회퍼는 전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높아지고 또 높아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높아지는 영광, 황제의 영광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낮아지는 영광,, 성육신의 영광을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의 평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에 진정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은 계속해서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주요 관심은 낮아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리에서 생각해보자면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죽음을 무릅쓰고 이 땅에 온 난민들, 교회에서 버림받고 복음에게서조차 소외된 성소수자들, 가부장제 역사 속에 짓눌린 여성들, 열 아홉, 스물 네 살의 꽃다운 나이로 돈과 효율에 목숨을 잃은 하청업체 청년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의 평화를, 이 사회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까지 다 평화를 누리는 세상은 유토피아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평화가 아닙니다. 로마의 평화이자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이루고 싶어 합니까? 내 익숙한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정도의 평화, 내 안위가 위협받지 않는 정도의 평화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잠시 평온함을 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평화가 아니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참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아기로 오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참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를 이어도 끊이지 않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은총의 날은 이스라엘을 절망과 어둠 속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입니다. 어둠 가득한 삶에 빛을 비추어 주실 분, 죽음의 그늘 아래서 버티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실 분, 모든 폭력과 불의를 몰아내고 공평과 정의를 펼치실 분, 마침내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 실 분! 그 분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슈퍼맨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는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몸조차 지킬 수 없는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보듬어 안고 감싸주고 사랑해야 할 아기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센 힘이 우리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손을 내밀게 하는 것은 연약함입니다. 인간은 연약함 앞에서 잃어버리고 살던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연약한 아기,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신비 있습니다. 구원은 그저 주저앉아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구원은 우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들게 하고 죽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무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안도록 세우시고 사랑하고 살도록 세웁니다. 구원받는 삶은 다름이 아니라 아기로 오신 예수님과 품고 일어서서 새롭게 일구어 가는 삶이 바로 구원 받는 삶인 것입니다.
[절망으로 오신 참 희망]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말의 여물통, 말의 먹이통에 누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새번역 성서에는 구유라고만 나오지만, 공동번역성서는 이 구유가 말구유였다고 전합니다. 말은 당시에 흔한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귀도 아니고 말의 먹이통일까요? 당시 말은 로마의 기병대, 로마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월절을 앞둔 유대 사람들을 기선제압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숫자의 로마 기병대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꼬기라도 하시듯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로마를 상징하는 말, 그리고 그 말의 밥통에 예수님이 누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로마체제의 밥이 되신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먹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상징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해결사의 모습도 아닌 아기의 모습으로, 다른 곳도 아닌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사실은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구걸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일으켜 구원을 이뤄가게 하시는 분이시고, 잡아먹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먹잇감이 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절망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참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낮고 낮은 모습으로, 절망한 사람들 가운데서 절망스런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신비이고 여기에 우리의 참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스런 오늘을 살아갈 그리스도인의 태도]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대림절기는 교회력의 시작이지만 세상달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한 취업포털사이트가 성인들을 대상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았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 일이 많아 몹시 바쁘다는 뜻의 다사다망(多事多忙),
- 겉모습은 마른나무와 같고 마음은 재와 같다는 뜻의 고목사회(枯木死灰),
- 애를 썼으나 보람이 없다는 노이무공(勞而無功),
-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
허무와 절망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이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자들이 전하여 준 말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2:19)고 성서는 전합니다. 누가복음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에 관한 말들을 깊이 간직하고 되새겼다는 말을 여러 번 합니다(2:19, 51).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 말했을 때, 마리아는 놀랐지만 담대히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담대히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을 품었을 때부터 마리아의 삶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깨달음을 얻으면서도 마음을 졸였을 것이고 예수님께 다가오는 수난을 떠올리며 가슴을 후비는 아픔을 수없이 견디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주님이 오시면 하찮은 자들과 비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에 찬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말을 고이 간직하고 깊이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의 믿음도 마리아와 같기를 바랍니다.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가 이전과 같이 먹고, 이전과 같이 살 수 없듯,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품어 키워나가는 우리 신앙의 모습도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여러분, 절망 가운데 희망으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읍시다. 절망가운데 있더라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되새기며 아기 예수님을 키워낸 긍지의 신앙을 지켜나갑시다. 우리가 긍지의 신앙을 가지고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키워나갈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참 희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오심은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낮고 낮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영광을 찾습니다. 어리석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낮은 곳을 바라보며 진정한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모습을 절망이라 할지라도 연약함 가운데 우리를 세우시는 참 구원의 비밀을 우리가 알게 하시고 서로를 보듬고 끌어안으며 참 희망을 맛보게 하소서. 절망과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리아와 같은 믿음을 주시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온 삶을 다 바쳐 주님을 품고 키워내는 마리아의 삶을 우리도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소서. 참 희망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