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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을 위한 따뜻함의 시학
---정영미의 시세계
권혁재(시인)
1.
금번 상재한 정미영의 첫 시집 {능소화 핀 집은 ‘어떤’ 대상을 위한 따뜻한 시학들로 읽힌다. 그에게 ‘어떤’의 의미는 막연한 대상이나 가치가 없는 ‘어떤’이라기보다는 개념을 포괄하고 당위성을 대변하는 ‘어떤’으로써 목적이나 주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어떤’은 두 가지 면에서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형식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상의 측면이다. 먼저 형식적인 측면은 시의 운율, 문체 등과 관련하여 시인이 시를 직조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기법이나 그만의 독특한 톤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내용상의 측면은 서정, 감각, 이미지, 주제 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시인의 시세계나 뚜렷한 개성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정미영에게 ‘어떤’은 분리수거를 하다 겪게 되는 “버려진 것들의 일부는 땅에 묻히고/ 일부는 또 버려지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수거함 같은 장례식장”(「어떤 장례식장」)으로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도 없이 문상을 하는 현실의 공간에서의 ‘어떤’ 곳이자 “바람이 성호를 그으며 지나가는” 의식으로 “시간의 흔적이 뒤섞여 있는 몰골들”에서 자아를 확인하는 ‘어떤’ 곳이기도 하다. 또 ‘어떤’은 “생각 뭉치 때문”(「어떤 처방전」)에 아픈 “중심을 잡아주는” ‘어떤’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화살이 무디다거나 비아냥거려도/ 시위를 늘 중심에 두고 있다”(「오랜 말」). 그에게 ‘어떤’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행위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결국 ‘어떤’의 시가 되도록 잘 획득해낸다.
정미영에게 시론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내용이고 시작품에서의 시론은 정미영 자신이 크나큰 시론이 된다. 그에게 시는 정미영 너머의 있는 시로서 정미영을 관통하여 표적지에 꽂힌 화살과 다름없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에게 ‘어떤’은 형식상이나 내용상 모두를 차치하더라도 시로서 ‘어떤’을 아우르는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정미영의 시는 ‘어떤’의 의미나 강조만으로 이미 대상들을 충분히 따뜻하게 보듬고 자아나 타자를 떳떳하게 드러내 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받은 상처나 고통, 그리고 빛바랜 기억들이 뒤섞여 혼재하고 있지만 정미영은 여타의 유파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여 왔다.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학」에 나오는 것처럼 그도 나름대로의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하는 ‘어떤’ 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며 부단히 시를 써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그의 시가 그러하리라고 여겨진다.
정미영에게 ‘어떤’ 대상들은 “잊혀진다는 것은/ 혼자 조용히 그리움을 삭히는 것”(「공중전화」)으로 나타나다, “주인을 기다리던 반려견의 눈빛”(「가을비」)에서 “칸나로 붉게 떨어”지는 뜨거운 흐느낌을 뚝뚝 흘리는 가을비 같은 것으로, “살다 보면 뒤쪽이 더 진실일 때가 있다”(「사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고 쌓여가는 세월에서 화석이 되는 것을 “한 소절씩 앓는 소리를 내며/ 덤덤히 돌아가는 선풍기 같다”(「오래 된다는 것」)는 사실적인 표현에서도 “살아간다는 것은 소소해서/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거나/ 내가 향기에 흔들리는 것이다”(「감국을 따던 날」)라고 자아를 받아들이며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심지어 “열섬에 갇힌 도시의 사람들”(「열대야」)마저 “움켜쥐지 못한 때의 얼룩이 그림자처럼/ 오랫동안 마음 한켠에 갇혀”(「때를 놓치다」) 있는 현대인의 녹록하지 못한 생활에서 “그늘진 틈 사이로 난 햇살 위를 길 삼아/ 겨울을 건너”(「춘분」) “봄도 조금씩 꽃피며 따뜻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어떤’에 대한 예시와 희망으로 대상들을 위로하며 보듬고 있다.
전철에는 달팽이가 앉아 있어요
모두가 같은 모양의 수신기를 차고
외계로부터 전파를 받아
스마트 속으로 스마트하게 접속해요
두리번거리며 총을 쏘고 있는
젊은 눈과 마주쳤어요
눈길을 돌려
같은 종족이라는 표시로
깊숙이 넣어둔 무전기를 꺼내
만지작거립니다
내가 지구 밖으로 떨어져 나와
이 전철 안에 있는 걸까요
낯선 것들이 펼쳐져 있어서
정복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색한 표정으로 순간이동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가 종착지일까요
첫 사람
첫 눈빛이 그리워져서
휴대폰을 눌러
따뜻한 고향으로 전화를 하고 싶은
여기는 어디일까요
-「달팽이 전철」 전문
「달팽이 전철」은 달팽이처럼 더디게 사유하는 현대인들의 행동과 모습을 특징적으로 잘 잡아 희화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시의 묘사나 내용이 전철을 타고 오고 가는 현대인들이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그야말로 스마트한 각자의 생활방식을 새로 만들어 적응하며 생존하여 왔다. 눈을 뜨면 스마트폰을 찾게 되었고 잠자기 전에도 확인을 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그만큼 중독되어 있다 하여도 과한 말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중독이 심하면 밥을 먹으면서도 보고,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놓친다. 하물며 전철 안은 오죽하겠는가. 비슷한 사람들의 비슷한 모습, “외계로부터 전파를 받아/ 스마트 속으로 스마트하게 접속”을 하고 “같은 종족이라는 표시로/ 깊숙이 넣어둔 무전기를 꺼내” 동족임을 증명한다. 정미영이 바라본 전철 안의 기괴한 풍경은 “낯선 것들이 펼쳐져 있어서/ 정복당한 것인지도”, 아니면 “지구 밖으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헷갈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순간이동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는 달팽이 전철 안은 “첫 사람/ 첫 눈빛이 그리워져서/ 휴대폰을 눌러/ 따뜻한 고향으로 전화를 하고 싶은” 그런 곳인데, 현실은 달팽이처럼 우글거리며 모두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같은 종족의 표시”로 앉아 있다. 이런 진지한 관찰을 하는 화자에 정미영은 어떤 방어기제나 폭력적인 시어를 전혀 선택하지 않고 “낯선 것들이 펼쳐져 있어서/ 정복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정중한 인정과 순간이동에 대한 따뜻한 말로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 하고 있다.
은행나무 사거리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유리로 된 집이 있다
한때 사랑에 애타던 사람들이
문 앞에서 서성이던 곳
그 집에 들렀던 사람이라면
눈물 한쪽 분량쯤 되는 기억을
넘기고 있을 텐데
딸깍이던 소리에 조바심 내면서
수화기 너머로 주고받던 무수한 사연은
푸른 은행나무 길을 휘돌아나간 바람처럼
여러 번 새잎이 돋아도
돌아오지 않는다
잊혀진다는 것은
혼자 조용히 그리움을 삭히는 것
빗장을 닫아걸고
덧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은행나무 사거리 빵집 앞에는
아직도 유리로 만든 집이 있다
-「공중전화」 전문
이 시는 앞의 「달팽이 전철」과는 다르게 정미영만의 시풍이나 문체가 잘 드러난 시가 아닌가 싶다. 서사나 서정이 무난하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고 앞뒤 구절이 잘 맞아 이해도 쉽게 되지만 받아들이는 서정의 진폭도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중전화”를 “유리로 된 집”이나 “한때 사랑에 애타던 사람들이/ 문 앞에서 서성이던 곳”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에서 “딸깍이던 소리에 조바심을 내면서/ 수화기 너머로 주고받던 무수한 사연은/ 푸른 은행나무 길을 휘돌아나간 바람처럼/ 여러 번 새잎이 돋아도/ 돌아오지 않는다”로 청각 효과를 내며 이미지의 상승효과를 등가시켜 나타낸다. 그러면서 “잊혀진다는 것은/ 혼자 조용히 그리움을 삭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딸각이던 소리에 조바심을 내면서”의 부분과 병치를 이루면서 “유리로 된 집”에 대한 특성과 여러 풍경들을 ‘어떤’에 반추시키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었음을 잘 지적해낸다. 정미영에게 「공중전화」는 “잊혀진다는 것은/ 혼자 조용히 그리움을 삭히는 것”으로 화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은행나무 사거리 빵집 앞”에 있는 “유리로 만든 집”을 떠올리며 혼자 “조바심 내면서” 지난 시간의 공중전화를 통해 다시 대화를 하고 싶은 자성의 시간이 응축된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수채화같이 맑게 잘 드러낸 작품이다. 정미영에게 “공중전화”는 한때의 사랑이나 그리움을 삭히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어떤’ 곳에서 서정의 대상이 되면서 또한 ‘어떤’의 동기가 될만한 시학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정미영의 시는 화자가 대상으로 투사가 되거나 관념이 짙은 선택적 화자를 인위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조용한 위로」에서 선인장의 상처를 보고 화자의 아픔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천 가지의 아픔으로/ 꽃을 피워냈을/ 고요한 인내”로 견뎌온 선인장의 아픔에서 화자의 “슬픈 마음을 다독”이는 현상은 정미영의 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은 동일화나 투사가 아닌 자기 연민, 또는 자의식으로 스스로를 조용히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어떤’의 시적 자아나 화자가 선택적 화자로 확장해나가는 단계는 「개망초」에 와서 애원이나 부탁의 형식으로 바뀌나 대상을 향해 본질의 이름을 부르는 조용한 ‘어떤’의 의미는 강도가 높고 결 곧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겠다. “이름 앞에 개자는 붙이지 말아요”라든가 “개자가 들어가는 순간 시선이 바뀌고 말아요”라는 부분은 ‘어떤’ 대상이 ‘어떤’ 이유로 꽃이 되거나 천덕꾸러기가 되는 이중적인 성격의 ‘어떤’ 경계를 지니고 있음을 “잔잔하고 향기”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지적해낸다.
시를 읽으면 그 시인의 심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심성만으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람을 바탕으로 한 시인은 사람 냄새가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정미영의 시가 그렇다. 정미영은 시의 제재나 주제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암표, 문턱, 달빛마을, 양팔 저울” 등 생경한 제목이나 시어로 시를 세밀하게 주조해내는 저력을 은근히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작 행위는 시를 사랑하는 저변에 깔린 진정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시는 쓸데없는 관념이 개입하거나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현란한 서사도 없다. 정미영이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바라볼 때나 “콘크리트 담장 아래서/ 아가를 가슴에 안고 잡다한 물건을/ 팔고 있는 여인”(「삼월」)을 마주하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부부」) 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어디서라도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불신의 벽”(「감시카메라」)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도 죄를 지은 듯 매일 움찔하게 되는 것들이다.
찬비가 내린다
붉은 장미를 사 들고 그에게 간다
꽃처럼 향기롭게 잘 웃던 그가
1층 병실 끝 볕이 잘 들지 않는 방에 누워 있다
한때는 새벽 초침 소리처럼 밝았던 그가
지금은 겨울 저녁 같이 흐리다
의사는 이따금 와
차가운 손을 이마에 대곤
어제 했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돌아간다
알코올 솜 냄새가 장미의 향기를 덮은 병실
그래도 어디서 봄이 오고 있는지
장미 향기가 조금씩 풀썩거린다
-「입춘」 전문
입춘은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로 봄이 오거나 봄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지닌다. 입춘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겨우내 잠들었던 생명들이 봄에 다시 깨어나 생명 활동을 다시 시작함을 알려준다. 입춘이 오면 꽃은 향기롭고 시계 초침은 밝고, 병실을 덮은 장미 향기가 풀썩거리는데, 그는 여전히 찬비가 내리는 1층 병실 끝방에 누워 있고, 의사는 어제 했던 말을 반복하며 돌아가는 저녁이 겨울 같은 흐린 날이다.
정미영은 입춘과 대비되는 여러 환경과 분위기를 배치함으로써 병실에 누워있는 그의 ‘어떤’ 상태를 알코올 냄새로 조금씩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 뿐, 그의 상태나 앞으로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는 일말의 예고도 하지 않는다. 미숙한 듯 보이는 “입춘”을 통해 정미영이 노리는 시적 효과는 미숙함 속에서의 미숙함을 소거하는데 그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입춘”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된다는 절기상의 의미이지만 병실에 누워있는 그를 통해 “장미 향기가 조금씩 풀썩”거리며 봄이 오고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에서 미숙함을 소거하고 완숙함으로 정치시키려는 화자의 ‘어떤’ 입춘에 대한 갈망이 여실히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정미영에게 “입춘”은 뒤섞여 있고 혼란스러운 계절의 절서를 바로 잡아 세워놓은 온당하고 바른 처사에 대한 ‘어떤’ 결과나 기대치가 봄날같이 “풀썩” 일어서는 날인 것이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단단히 뭉친 말씨를 뱉어냈다
그날 이후
누군가를 만날 때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처럼
다시 뱉어내고 싶은 게 있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삼켜버린 그 말씨가
입 밖으로 역주행할 것 같아
산목련 얼굴빛도 하얘졌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있다가 흘린 것이
내 마음 어디쯤서 싹이 터 올라오는지
자꾸 목이 간지러웠다
산목련도 입이 가려운지
바람에 헛기침을 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깊은 산골짝
어쩌면 산목련 쯤으로 보였던 거다
저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말없이 지는,
들은 비밀이 시시하고 싱거운지
보름달이 귀를 갖다 대면
산목련은 희죽희죽 웃으며 더 하얘졌다
-「산목련, 비밀을 듣다」 전문
비밀은 듣는 순간부터 재앙이 된다는 말이 있다. 더군다나 “예고도 없이” 듣게 되는 “단단히 뭉친 말씨” 같은 비밀은 더욱 그러하다. 화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듣게 된 비밀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처럼” 다시 뱉어내고 싶었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한 듯 산목련 얼굴빛도 하얗게 변하였다. 비밀을 들은 이후로 “내 마음 어디쯤서 싹이 터 올라오는지/ 자꾸 목이 간지러워” 오고 “산목련도 입이 가려운지/ 바람에 헛기침을 했다”. 비밀을 발설하고 싶은 마음이 산목련 싹처럼 돋아오르고 그런 산목련도 입이 자꾸 가려워 헛기침을 한다. 그녀에게 화자는 깊은 산골짝에서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말없이 지는”, 산목련 한그루로 얕잡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화자에게 너도 별수 없는 산목련에 불과하다며 과소평가를 한 것이 ‘어떤’ 비밀을 제공한 그녀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 두 가지 ‘어떤’ 모른다는 사실에서 화자와 그녀 사이에 있는 비밀이 시시하고 싱거운 것은 아닌지 가늠하는 보름달의 등장은 결말을 “희죽희죽 웃으며” 밝게 마무리하게 해준다. 여기서 정미영의 시가 어둡지 않고 심각하지도 않고 따뜻한 시학으로 시의 톤을 잘 조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시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무거운 주제를 분산시킬 수 있는 시의 힘을 지닐 수 있어서 가능하다 하겠다.
3.
정미영의 시에는 눈물이 자주 비추는 ‘어떤’ “기다림의 속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 찔레꽃, 남매, 전화기, 배롱꽃, 명자꽃, 시계’ 등 아버지에서부터 꽃과 그리고 시계들, 다양한 대상으로 이루어져 ‘어떤’의 인연을 주도하고 있다. “엄마가 가시에 찔린 채 피운”(「찔레꽃」) 찔레꽃 이름을 부르면 엄마의 눈물이 바람 자락에 섞여 화자 자신도 눈물이 난다는 부분은 가시에 찔린 채 엄마하고 동일시되는 찔레꽃에서 엄마를 유추해내는 따뜻한 심급이 시로 발현되고 있다.
“은사시나무 한그루로 잠들”(「남매」)은 동생의 이미지나 꽃잎이 흩어져 가슴 한켠을 뻐근하게 하는 「오얏꽃 질 무렵」이나 “슬픔을 먹고 사는 것인지/ 새벽안개처럼 차고/ 쓸쓸”하다는 「기억」은 이미 ‘어떤’ 대상을 위한 “기억” 속에 ‘기억’으로 자리한 것을 다시 “기억”으로 불러와 “기억”의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기억”의 속성들을 재정립하고 있다. 정미영에게 기억은 “형용사”처럼 색깔이 불분명하고 “오래된 시계”처럼 “멈추어버린 시간을 끄집어내”는 것이며, “한 사람이 길 밖으로 떠나고/ 한 사람이/ 길 안으로 들어와 옷깃이 스치면” “누군가의/ 체온/ 웃음소리”(「인연」)를 들으며 감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련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그가 터득한 시를 위한 ‘어떤’ 기법은 초조하거나 조급한 상태에서는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미영에게 시는 마주치는 하나의 대상과 사건이지 반드시 시로 타고 넘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가 시를 바라보며 만들어 가는 과정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 시가 시로 보여질 때까지 그는 최대한 느긋하고 가슴에 와닿는 파문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파동치는 시의 줄기를 엮어낸다. 그만큼 그는 시를 엮는데도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그 심정은 “기억 저편에서/ 전화를 받을까 봐/ 그래서/ 전하지 못한 말 하게 될까 봐”(「주인 잃은 전화」) 스스로 자기 시의 검열에 앞서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정미영은 “차마 끝까지 번호를 누르지 못”하듯 함부로 시에 대한 방점을 찍지 않는다.
음식마다 짜다고 하는 엄마
철부지 막내를 먼저 보내고
단 것 좋아하던 아들에게
가진 것 다 내어 주면서부터
엄마의 입은 소금밭이 되었다
음식 타박 한 번 안 하고
엄마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막내
짠맛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며
점점 야위어 가는 엄마
쉽게 비어지지 않는 냉장고
눈물로 절여진 가슴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소금꽃이 웃자랄수록
단맛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엄마
엄마가 맛을 잃어버렸다
-「맛을 잃어버리다」 전문
정미영 시인은 부모에 대한 효도가 자별하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도 부모에 대한 시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대개의 시인이 첫 시집에 많이 수록하는 작품이 가족이나 육친에 대한 작품들이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듯 보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용이나 주제가 한 군데로 편중된 단점을 노출하게 된다. 그러나 슬픈 가족사나 유년의 기억에 내재 된 편린 등을 시인이 육화하여 그것들을 다 들추어낼 때, 그 이후의 시들은 분명 내면이 깊어진 시다운 시로 무장하여 나타날 것이라 믿어진다.
이 시는 막내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가 ‘입맛’과 ‘맛’을 잃어버리면서 신산한 삶을 살아오며 눈물에 절여진 엄마의 가슴과 소금밭이 된 엄마의 입맛을 감각적인 서정시로 잘 짚어내었다. 죽은 막내를 가슴에 묻은 “엄마의 입은 소금밭이 되었”고 “짠맛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며/ 점점 야위어 가”고 있다. 입이 하나 줄고 아들 생각에 먹지를 못해 냉장고는 쉽게 비워지지 않고, 단 것을 좋아하던 아들과 더불어 단맛을 그리워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맛을 잃어버렸다”. 아니 엄마가 아들을 잃어버렸다. 입맛을 잃은 엄마보다도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이 더 극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정미영의 수작이라 할만하다.
“엄마가 맛을 잃어버렸다”라는 마지막 행에 엄마의 아픔을 집약시켜 한 행으로 마무리를 한 데서 그가 시를 통해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심정도 울분이나 눈물이 범람하지 않게 담대하게 엮어내는 과정에서 그의 느긋한 시심을 추측할 수 있다.
목련나무 아래서
소녀 둘이
손으로 봄을 이야기 한다
겨울에서 풀려난 꽃은
순백의 빛깔로
그 여린 손에서 다시 피어난다
찬바람이 헤적일 때
소리는 가라앉고
말들은 더 침묵하고,
다만 그 깊은 눈동자에 핀
하얀 봄날
목련꽃 몽글몽글 피어나듯 고요히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수화」 전문
정미영의 시에는 아름다운 꽃이나 꽃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예쁘고 귀한 꽃은 “수화”이다. 수화는 농인 장애우들이 상호간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손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시각언어다. 어떻게 보면 수화도 손으로 만들어낸 꽃의 한 가지이다. 그런 수화가 “목련나무 아래서/ 소녀 둘이/ 손으로 봄을 이야기”하며 피어나고 있다. 그것도 “겨울에서 풀려”나 “순백의 빛깔로/ 그 여린 손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수화를 하는 “소리는 가라앉고/ 말들은 더 침묵”하며 긴장의 시간으로 고요에 쌓여 있다가 “눈동자에 핀/ 하얀 봄날”을 무사히 건너왔다는 기쁨으로 수화도 잠시 경건한 시간을 뒤돌아본다. “목련꽃 몽글몽글 피어나듯” 다시 오래도록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들의 수화에 봄이 오고 “겨울에서 풀려난 꽃”들이 “그들의 이야기”로 “순백의 빛깔”로 몽글몽글 피어난다.
수화를 통해 “꽃”을 이야기하는 이중적인 구조의 서정 방식은 정미영의 의도치 않은 자연스러운 기법에서 발로된 것이며, 손으로 말을 만들어 결국 꽃을 피워내 상대에게 전달하는 ‘어떤’ 수화 한 송이가 봄날을 깨우며 피어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낸 것이 「수화」이다. 정미영에게 수화는 꽃으로, 손으로 하는 말로, 소녀 둘의 손 끝에 매달려 피어나는 꽃이자 메시지가 되어 봄날을 가로지르는 따뜻한 대상이 된다. 「수화」는 정미영만이 시로서 포착해낼 수 있는 것으로, “침묵”과 “고요”로 인해 “수화”가 밝아지고 그 뜻이 더욱 숙연해지게 다가온다.
‘어떤’ 대상을 위한 따뜻한 시학으로 읽히는 정미영의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 그에게 ‘어떤’은 형식이나 내용을 떠나서 시를 아우르는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대상물을 충분히 따뜻하게 보듬고 자아나 타자를 떳떳하게 드러내놓는다. 정미영은 진지한 관찰을 통해 시를 쓸 때, 어떤 방어기제나 폭력적인 시어를 전혀 선택하지 않을뿐더러, 투사가 아닌 자기 연민, 또는 자의식으로 스스로를 조용히 끌어안고 감내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 정미영의 시가 어둡지 않는 것은 시의 톤을 잘 조절하여 그가 시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무거운 주제를 분산시키는 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스스로 자기 시의 검열에 불안해하는 정미영이 자서에서 밝혔듯이 “버거워 무디게 지나가는 삶도, 시도, 사랑도 제자리걸음”을 하지 말고 바람에 날리는 산목련처럼 먼 길을 떠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