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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1-23
화근 1 가사 / 한서노회
이 기록은 우리에게 경계를 하게'하기 위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 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헤르몬 산에 아래 레바논 골자기의 바알갓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 죽였으며(수 11:16-17)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땅 원주민을 다 진멸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삼을 것을 명령하셨다. 여호수아는 이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 각처에 거하는 족속들을 쳐서 물리쳤다. 그러나 이 전쟁은 완전한 명령수행은 되지 못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꼐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 11:21-23)
위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을 남겨 두었다고 했다. 오늘은 여호수아의 이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아낙 사람들을 남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적하고자 한다. 오늘 강해 제목은 禍根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도 중요하게 여기면 그 사람은 상당히 신앙생활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고 그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사소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여기 여호수아가 지나가면서 이야기하듯 다 진멸했습니다. 그저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조금 남았습니다.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였다. 아낙 자손이 여기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저들이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는다. 자, 다음의 말씀을 보자.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삿 16:1)
가사는 블레셋의 여러 도시 중의 하나이다. 삼손이 그곳에서 이방 여인 들릴라를 만난다. 그래서 아무도 대적하지 못했던 삼손은 마침내 잡혀서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유서깊은 땅이다. 이 가사를 만일 여호수아가 당대에 한마디 저 성을 취하라 는 명령을 내렸던들 이 후대에 와서 삼손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또 그마저 비참하게 몰락하는 불행한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남겨 놓을 때는 사소한 문제로 남겨 놓았는데 그것이 자라서 결국 이스라엘을 떨게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일꾼을 삼키는 자리에까지 성장한다는데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남겨놓은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이 어느덧 크게 장성하여 이제는 아무리 강한 자를 대표자로 올려보내도, 삼손이라 할지라도 당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권력을 가지고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이다. 내가 오늘 처치하지 못한 죄의 뿌리들이 싹이 트고 자라서 큰 힘을 갖기 시작하자 이제는 아무 것으로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는 가장 큰 적군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가사라는 지명은 강한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 가장 강한 자를 보내놓고도 실패를 하고야 마는 장소가 될만큼 가사는 강한 곳이되었다. 여호수아 시대에 단 한마디 저곳을 무찌르자 라고 했다면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일이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영웅이 달려가서도 함락시킬 수 없는 곳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안함으로 나중에 어떠한 보복을 당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분은 긴장하여야 한다. 여기 여호수아의 보고서와 같이 그 땅은 평안했다.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의 적군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힘을 내어 방해할만한 세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멈추고 적군을 진멸하는 소탕전을 놔두고 평화를 공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십년이 지나자 이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던 초창기에 우리의 자녀를 바치는 열심을 내지 않아도 예수 믿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에게만은 예수를 열심히 믿는 쪽으로 훈련시키고 항복시키기보다는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자식들은 세상의 축복을 얻도록 하는 쪽으로 타협해서 내 보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일생을 주 앞에 바친다는 것이요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가정에 가사가 남고 가드가 남고 아스돗이 남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다음 시간을 통하여 가드와 아스돗을 살펴 보겠지만 그들이 남겨둔 불씨가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불러 오는지 설명하기가 끔찍할 정도이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우리 속에서 뽑아 내지못한 세상을 향한 그 유혹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와 내 가정의 축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라는 헌신의 결단이다. 축복을 주시면 감사하고, 어려움 중에서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말하며 사는 것이다.
계백장군이 황산벌 싸움에 나가면서 남겨둔 처자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까봐 가족을 모두 죽이고 나간 사실을 상기해 보자. 한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군인도 사명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영적 군사야말로 그가 하는 일을 위하여 만일 하나님이 그의 가정의 불행을 감수하라고 하신다면 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의 가장 큰 병, 우리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사가 어디며, 가드가 어디고, 아스돗이 어디냐 하면 바로 이 지점이다. 나를 채우고 남는 것으로 내놓으려고 하니까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신앙이 내가 내 놓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를 내놓으라고 하시는가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거기에 성장이 있다. 모두 멸절하라! 발본색원해야 한다. 내 안에 가진 신앙의 원리 중에, 방법 중에, 목표 중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방법은 맞는가를 매일
확인해야 한다.
화근 2, 가드(수 1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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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삼상 17:4-7) 이는 이스라엘의 대적 골리앗에 대한 묘사이다. 이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모욕한다.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
우리는 이 다윗과 골리앗 사건을 참으로 잘 안다. 이 사건은 단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천하무적 골리앗을 이겼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가드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라는 데에 사무엘상 17장에 전 의미가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이방 족속들을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을 남겨둔 것은 세상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적한다. 그 결과 사사기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함으로 어떤 심각한 꾸중을 당하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블레셋에게, 모압에게, 암몬에게, 아말렉에게 모든 인근 국가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시달리는가? 적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몰아내지 못한 세상의 것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며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여리고 성은 일곱바퀴 돌고 소리질러 무너뜨리고 승리한 싸움이다. 다 이긴 싸움에서 그들이 쫓아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곳이 가사요, 가드요, 아스돗이다. 이방의 적들에게 계속적인 공격을 당하면서 이스라엘은 이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보지않고 군사 정치적으로 상대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왕을 세워 달라고 간청하고 그래서 사울이 초대 왕이 된다. 이점이 성경기록의 재미있는 점이요, 참으로 지독스럽도록 무서운 부분이다. 우리가 남겨둔 죄의 뿌리가 성장하여 큰 위협이 된 것을 쳐다보지 못하고 커진 사건을 이겨낼 힘만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싸움이다. 그것에 대한 반증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1-37)
이 다윗의 고백에서의 재미있는 점은 상대방의 크기와 관계없다는 원리를 갖고 있는 점이다.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 꺼내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도 이기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자들이 오해하는 싸움의 원리는 이 싸움을 외형적 크기나 세력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다. 적이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은 정도로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골리앗이 나오자 그보다 강한 용사와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풀어야할 문제라는 것을 그가 안다. 이것은 외형적인 싸움이 아니라 원리적인 싸움이다. 즉 너희가 가드에서 남겨두었던 그 죄의 뿌리에 관한 싸움이요, 나타난 현상의 크기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목동 다윗을 들어 골리앗과 싸우게 하시는 것이다. 다윗이 강한 자였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무너드릴 수 있었던 원리가 오늘 다시 몇십 년, 몇백 년 후에 그 자손에게서 싹을 본 것일 뿐이다. 그때 용서해서는 안되었던 것이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었다면 지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절대 방치해서는 안되었던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위협으로 드러났는가에 대해서만은 뼛속깊이 기억하라는 것이 다윗의 사건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결단코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로 말미암아 해결하지 않는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우리 신앙의 약점은 너무 두리뭉실하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사건에서 왜 다윗을 등장시켜야했고 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을 전전긍긍하는 엑스트라로 동원하시는가 하는 대목이다. 그때 없애지 못해 지금 벌벌 떠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같은 원리로 오늘 그것을 제거하여야 한다. 외형의 크기와는 절대 비례하지 않는 신앙의 싸움인 것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수 11:21-22)
결혼할 때 배우자가 신앙없는 것이 지금 당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지금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뿌리를 바로 하지 못할 때 나중에는 그들이 골리앗이 되어 칼을 들고 나오고 극심한 고통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만을 진정 두려워 해야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남편과 아내로 자식으로 길러야 한다. 여러분이 남겨둔 가드에서 골리앗이 무럭무럭 잘도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뿌리를 뽑아야 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고, 온갖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다윗은 피가 거꾸로 역류한다. 이스라엘이 먹는 욕은 오늘 우리가 먹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이라도 저들이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의 이름으로 나가야 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서 골리앗을 넘어 뜨렸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또 보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르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 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손과 매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삼하 21:15-22)
가드 사람들은 결국 다윗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타난 외형의 크기로 누가 더 크냐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뽑아 버려야할 영적인 순결과 거룩에의 싸움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이 교훈을 성경은 여기까지도 지속시키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르러 올라갈 때에 물맷돌 다섯개를 가지고 올라간다. 여기 21장에 있는 이 기록과 비교해서 보면 아마 그때 이 사람들도 다 올라와 있지 않았는가 짐작이 된다. 다윗은 이때 이미 이 네사람을 모두 죽일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동 하나가 골리앗 하나를 감당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데 나머지 네사람까지 합하여 가드의 장대한 자 넷을 모두 죽일 것을 확신하고 물맷돌 다섯개를 들고 올라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영적인 순종으로부터만 시작된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고, 부하들이 골리앗의 아들들과 신복들을 모두 죽였다. 하나님은 다섯개의 물맷돌을 모두 다 사용하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뽑아내어야 한다. 뽑아내는데 실패해서 그것이 크게 지금 나타났다해도 그것을 두려워 말라. 이제라도 다시 무릎꿇어 영적인 문제로 해결하라. 쳐들어온 상대방, 생겨난 사건, 부닥친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만나게 된 내가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한다. 거기서부터라도 문제의 발단의 원인을 캐고 해결하여야 한다. 하나님만 두려워 하면 그만 의지하면 여전히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화근 3, 아스돗(수 1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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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삼상 4:1-2)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사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왜 우리가 저들 이방인에게 졌을까?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언약궤를 생각했다. 그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중에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천했고, 블레셋은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다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삼상 4:10)
그날에는 삼만명이 죽었다. 알렉산더가 동방을 정복하러 출정할 때에 동원된 숫자가 삼만 오천이었다. 대단히 많은 숫자가 죽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병사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법궤까지 빼앗겼다. 법궤를 빼앗긴 장소는 에벤에셀이었고 이 법궤는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않았던 땅 아스돗으로 옮겨갔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삼상 5:1-2)
이 사건을 인하여 이스라엘은 기가 죽었다. 여호와의 안약궤를 빼앗기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전투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배로 기록되고 우리에게 중요한 멧세지가 되는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한다.
5:1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는 우리가 언약궤를 지켰고 또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이 시점까지 도운 것으로 미래가 약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을 이 본문만큼 멋있게 설명하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어제의 승리와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생활의 싸움이다. 하나님이 도와오신 이곳에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겨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치욕스럽게도 다곤의 신전에 바쳐지는 불상사가 생겨나는 싸움이 아스돗의 싸움이다. 또 아스돗이라는 이름은 재미있게도 요새'라는 뜻이다. 적군의 요새가 이스라엘 군의 최강의 힘을 가지고도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에벤에셀에서부터 빼앗긴 언약궤, 그래서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곤보다 못해서 이 전쟁에 실패한 것이 아님을 5장에 기록하고 있다. 다곤의 신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넣어 놓았더니 다음날 다곤의 팔 다리가 잘려서 몸뚱아리만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발견한다. 게다가 온역이 일어나고 많은 재앙이 생겨서 결국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 만다. 그러면 이 에벤에셀 싸움에서 그 싸움의 승패는 다곤이 여호와보다 커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를 얻지 못할만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하였는가? 그건 어제의 일이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은 놀아도 될 것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제의 승리는 어제고 오늘은 새날이다. 오늘은 오늘로써 하나님 앞에 싸워야할 신자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어제 승리한 것으로 오늘 하루는 놀자고 우기지 말라. 그 싸움을 가리켜 에벤에셀 싸움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도우신 것으로, 어제까지 도와 주신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대체하지 말라. 어제까지 도움 받은 것으로 말미암아 오늘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어떻게 했을 때 내가 신앙 생활의 승리를 취득했었는가를 과거의 경험 속에서 승리한 것을 오늘 붙여놓고 앉아 있지 말라는 말씀이 에벤에셀 전투이다. 오늘 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나타난 하나님 언약궤의 상징성이다. 신앙 생활이란 결과적으로 내가 살아야 할 싸움이지 무엇으로 대체할 싸움이 아니다. 언약궤를 갖다 놓을 싸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할 싸움일 뿐이다. 신자의 생활은 종교화와 신앙의 형태화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선 오늘 걸어야 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목표라는 것은 언제나 시각을 직선으로 놓고 보는 법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는 데는 현실이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현실이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눈에 보이게 펼쳐낼 수 있는 복된 무대이다. 그것이 왜 타협의 조건이 되는가? 오늘 우리의 싸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이란 결단코 타협의 요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있다. 막힌 담이 있으면 돌아서 가거나 넘어가야 한다. 막히면 돌아가고, 더 크게 막히면 넘어가는 집요한 물의 성질같이 흐르고 흘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거기에 부딪치는 어떤 방해물도 기어이 뚫어가고 돌아가고 넘어서 가고 싶은 곳에 가고야 마는 현장의 모습들을 현실이라고 한다. 이 현실의 모습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대표적으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행복이라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이다. 이 무대의 조건이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이다. 이 무대의 조건이 우리에게 성공이란 세상적으로 큰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앞에 유혹의 모습으로, 타협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요구를 받는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말자 이것을 우리가 순교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이것을 순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를 잘 못믿는 한이 있어도 애를 일류대학에 보내야겠다 예수를 잘 못믿는 한이 있어도 일단 결혼을 해야겠다 고 말한다. 강도가 들어 목숨과 돈 중 어떤 것을 내놓겠느냐 했을 때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다. 목숨보다 돈이 귀한 사회가 되었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대치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그들의 신앙의 싸움을 대치했다는 것이 그들이 실패한 이유이다. 즉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전투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를 게으르게 하는 요소가 되어 있다면 이것만큼 경계해야 될 무서운 것은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0-14)
신자란 그의 과거가 오늘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내 과거들이 오늘의 전쟁과 내일의 전쟁에 중요한 원리와 경험들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남아있는 내 생애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가 점점 더 굳어지고 점점 더 확실해지는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여야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1)
이스라엘 백성의 기록은 그 역사는 이 기록과 똑같다. 수많은 기적의 과거를 갖고 있는데도 늘 넘어지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어떤 기적의 경험이 있을지라도 지금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말한다. 지금 하나님 편을 들지 않으면 언제나 얻어 터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여러분이 과거에 아무리 큰 기적을 갖고 있어도 이스라엘 만큼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2000년 동안을 세계 민족 앞에 괄시와 천대를 받으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 엄청난 구약의 축복된 기적의 역사를 가졌었는데도 하나님이 절대로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 쫓아 보내셨다. 오늘은 오늘의 싸움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싸움이다. 어제만 꿈꾸고 있지 말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지나온 어제로 오늘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은 승리해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공부해야 할 일이 있고, 오늘 예습할 일이 있고, 오늘 숙제할 일이 있다. 내가 건너야 할 부분에서 갖고 올 신앙의 어떤 형태가 있기보다는 내 마음에서 뽑아버릴 것이 우선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이다.
오늘 여기 이자리까지 온 것 대단히 잘한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여기에다 말뚝을 박아놓아서는 안된다. 늘 밀고 나가야 한다. 여기까지가 늘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만' 이기를 권하고 싶다. 여기까지'라는 여기가 과거여서는 안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언제나 에벤에셀이어야 한다. 그 싸움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은 그것을 증명해 내는 무대로써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이 길을 간 사람중에 슬픔과 아우성 속에 눈을 감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터진' 사람 중에는 우리의 귀청을 따갑게 하는 아우성을 친 사람이 성경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제는 여러분 개인이 판단할 문제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하서 하나님이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여러분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알아서 결단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