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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7-30, 41-43
주의 전 / 은혜목회정보
눅 7: 2-10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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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함석헌선생과 김교신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을 일반 신문들이 크게 다룬 것을 여러 성도님들도 읽으셨을 것입니다. 모 일간지에는 "교회 조직, 제도 거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재조명 활발"이란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한 곳이 아니고 여러 중앙지에서 그분들의 이름들이 올려졌습니다. 이분들은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분들인데 제도권 교회에 의하여 "이단자"로 낙인되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그들의 탄생 100주년에 높이 기리고 있는 배경에는 한국의 교회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과거에 날카롭게 비판한 제도권 교회 안의 문제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거나 더 심해지고 있기에 일반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부각하였다고도 생각됩니다.
지난 3월에 기독시민사회연대가 교회의 헌금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도 거의 모든 중앙의 일간지들이 다투어 실었습니다. 그 날 기자 회견을 하면서 오늘의 기자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일반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주고 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기독교의 2000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제도적인 교회에 실망하여 제도교회를 뛰쳐나가서 이단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보이는 제도나 교회의 건물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김교신이나 함석헌선생도 기성교회에 몸을 담았다가 어처구니없는 불의를 보고서 무교회주의를 표방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리고는 그것을 글로 써서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만들어서 300여명의 회원끼리 돌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정신과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실로 쾌남아들이었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고 신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는데 독재정권에 항의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상계를 만들었던 장준하씨도 그 중의 한 분입니다. 장준하선생도 새문안교회의 강신명목사님을 가끔 면담차 찾아는 오면서도 한번도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사상계와 종교계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인데 만약 이분들처럼 교회 건물이나 제도 없는 믿음만을 모두가 가졌다면 오늘의 한국의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문제는 철학의 핵심에서 늘 문제가 되는 형식과 내용의 문제입니다.
칸트가 말한 대로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 라는 말 그대로 겉도 속도 모두 필요합니다. 속은 비고 껍데기만 있다면 공허합니다. 내용물만 있고 그 것을 담을 껍데기가 없다면 그 내용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결국은 없어지고 맙니다. 어느 것 한쪽이라도 없으면 둘 다 쓸모가 없게됩니다. 컵은 물을 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은 컵이 있어야 계속적으로 보존됩니다. 보이는 교회나 제도라는 형식과 아니 보이는 믿음의 내용이 모두 필요합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형식이 타락을 만든다고 하여 거부했는데 그들의 그 좋은 사상은 틀을 가지지 못하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당대와 그 후배 일대에 끝여버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들을 읽으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무교회를 같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핵심문제는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주의 전"이 거룩한 이유는 거기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가 거룩지 못해서 뛰쳐나갔습니다. 타락한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거부하였습니다.
거룩한 주의 전의 원형을 창세기 28장에서 찾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였다가 들통이 나자 도망을 하는데 하란으로 향하다가 밤을 만나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까지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그 사닥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문득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래서 네가 지금 누운 땅을 너와 너의 후손들에게 주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야곱이 잠을 깨어 두렵고 떨면서 "과연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이곳이 곧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베고 자던 돌을 취하여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거기가 곧 성전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주의 전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지은 건축된 예배 처소가 아니고 야곱이 혼자 기도하던 곳이었습니다. 형식이 전혀 없는 자리가 하나님의 전이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십일조를 드리기로 서약했습니다. 교회는 아직도 지어지지 않았고 상징적인 돌만 뎅그러니 있고 물질의 10의 하나는 서약되었습니다.
여기에 내용과 형식의 애매성을 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겠다고 했으니 야곱의 발이 닿는 곳마다가 벧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형식 안에 머물지 않고 어디나 계시는 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거룩한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 어디나입니다. 꼭 보이는 성전, 보이는 건축물 안에만 계시지 않는 분입니다.
창 5장에 가서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고 자녀들을 많이 둔 후에 자기가 도망하던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그곳에 가서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도 건물이 아니고 단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피난을 했다가 결국 노예로 살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어간에 주의 전이 따로 장만된 적이 없습니다. 그 이후 해방되어 다시 고향으로 가는 어간에도 특별한 예배 처소는 없었고 천막을 치고 거기서 예배하였습니다. 그 천막은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계속해서 이동하기 위해서 지어진 천막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10계명을 받은 이후 그것을 보관하는 법궤를 위하여 처음으로 성막을 만들었는데 출26장에서 30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건축계획안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집의 설계도가 주어지고 그 보이는 성막을 섬기는 제도와 사람들이 뽑힙니다. 처음으로 제사장이 따로 세워졌습니다. 이 성막 역시 이동하는 집이었습니다.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서도 여전히 성막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삼하 7;1절 이하에 보면 다윗왕이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아름다운 궁전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으니 이건 말이 아니다."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나단을 통하여 성전건축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이 처음으로 성전건축을 제안했을 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이렇게 처음에 반응하셨던 하나님은 13절에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의 위를 견고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보이는 성전 건축을 좋아하신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태도가 좀 애매하긴 합니다. 건축물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면서도 다윗의 소원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재료만 다 모아 놓고 하나님의 집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아버지의 원대로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고 오늘 그 봉헌식에서 봉헌사를 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의 허락으로, 그리고 아버지 다윗 왕의 준비로 성전을 짓는 솔로몬의 마음에 보이는 성전의 중요성을 어찌 모를 이가 있겠습니까? 종교적인 의미를 깊이 알기에 모든 정성을 다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봉헌사에는 보이는 장소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곳이 어디 이 땅의 건축물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고 말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고 했습니다.
성도 자신들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모르는가?"라고 물음에서 주의 전이 건물이 아니고 아니 보이는 마음에 있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집사 제도를 세웠고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성직을 세웠습니다. 형식도 무시하지 않았기에 초대교회가 든든하게 발전해 갔던 것입니다.
타락한 구교를 거부한 개혁자들은 보이는 교회보다는 보이지 않는 교회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는 믿는 자들 개개인의 마음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구교의 형식을 타파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반주도 없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오로지 말씀 설
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교회를 계속적으로 유지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느끼고 좋은 악기도 들여오고 아름다운 예배당도 건립하여 주의 전을 꾸몄습니다.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의 믿음이 아름다운 예배당 안에서 더욱 발전되고 지속됩니다.
첫 성전을 지어 놓고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 성전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비록 성전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멀리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그런 전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41절:"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들으시고 무릇 이방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소서."
이방인들은 당시만 해도 감히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인데 그들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들의 기도가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솔로몬의 기도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마음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예배당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무교회 주의자들의 세대가 한 두 세대로 끝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물론 제도의 교회의 문제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
옳습니다. 두 세사람이 모이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고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야외도 좋고 골방도 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필요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마루방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함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축복이 있음을 솔로몬의 기도는 알려줍니다. 집의 방들이 각기 제 구실이 있는 것처럼 예배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성전을 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신약의 본문이 알려줍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은 성전을 짓는 데 공로가 있는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그의 부하가 고침 받는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주의 전을 지은 이방인 백부장을 예수님은 칭찬하시고 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성전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관 건축의 필요성과 중요성 나아가서 그 일에 참여함에서 얻는 축복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주의 전을 향하여 기도하시고 주의 전에 모여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토록 중요한 주의 성전을 유지하고 또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주의 전을 짓고 망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주의 전을 짓는 일을 반대하다가 망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습니다. 주의 전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 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 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하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전에 나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을 위하여 정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예배시간을 잘 지켜서 주의 전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기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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