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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필리아적 지향성과 식물성적 초록 이미지
- 산림문학 통권40호 2020년 겨울호를 읽고 -
위대한 작가들처럼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수필을 쓰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본격수필시학’에 대해 공부하라. 수필의 원리와 전개, 구도와 구성을 익히다 보면 어느새 당신의 문장력은 살아 숨 쉬고, 문학화를 위한 변용과 변주의 펜 끝은 화룡점정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 속에는 압축된 삶의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수필가는 일상 또는 상상 속에서 자연을 그리워하며 삶의 진경을 찾아 나선다. 바로 토포필리아의 구축이다. 자신이 발을 디뎠던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끝없는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끌리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수필가들이 이런 토포필리아적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옥형길의 <농부입문기>, 이종삼의 <가랑비 이슬비>, 조철형의 <학이 앉는 나무>, 홍만희의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 등의 수필은 향토적 녹색 서정이 녹아 있는 수필이다. 이미 제목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이 작품들은 식물성적인 초록 이미지의 향연이 자연적 서정과 만나 정서녹화라는 주제의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타 작품들에 비해 서정성이 매우 짙다.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부터 나오는 정이 바탕이 되어 만물을 껴안는 서정의 힘이 공감을 견인한다. 인류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들 수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자연의 그늘에서 미를 심는 작업이 이들 작품 속에 잘 그려져 있어서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II.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법이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자본주의의 급속화로 기존의 정신 우위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차츰 흑화되고 있다. 녹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한마디로 유년의 추억과 순수가 그리운 시대다. 옥형길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의 보고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성은 토포필리아의 세계가 향기롭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농사야말로 맨 땅에 작은 씨앗을 뿌려 싹틔우고, 잎과 줄기로 자라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니 이는 마술에 가까운 종합예술이며 창조예술이라 할 것이다. 미사일이 핵탄두를 싣고 대양을 건너뛰고 인공위성이 우주 공간을 나르지만 마침내 인류를 먹여 살리는 것은 농부가 아닌가. 농부의 위대함이 새삼 느껴지는 가을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농부가 되지 못했다.
-옥형길의 <농부입문기> 중에서 -
고향을 떠나온 지 반세기가 되어서 일 년에 서너 번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찾는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은 그리움의 거처다. 이 수필을 따라가다 보면, 시골길 곡선이 직선으로 변모되어 어릴 적 그 토속적인 정취는 만날 수 없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그대로인 것도 있다. 논두렁에 서 있는 허수아비다. 어릴 적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가 농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일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맡겨진다. 농부의 길로 걸어가는 것은 그에게 운명이라 할 정도로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겠다. 이 수필의 전개부를 장식하고 있는 쟁기질의 어려움은 농사가 쉬운 일이 아님을 잘 말해준다. 이 수필은 농고 졸업 후 몇 년간의 농사 경험을 토대로 단순히 농사의 힘듦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의 가치 그리고 농부의 중요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따뜻한 훈기를 느끼게 하는 농부의 땀과 숨소리와 맥박을 발견해서 깨달음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 수필은 문학적 가치가 크다.
위의 수필에서 ‘허수아비’ ‘쟁기질’ ‘농우’ 등이 주요 제재라면, 이종삼의 <가랑비 이슬비>는 사람이 주요제재다. 이종삼 수필의 주동인물은 작가의 ‘처제’다. 아내와 처제에 대한 대비, 자신과 동서에 대한 비교 등으로 분위기를 잡고 출발하는 동해행 나들이는 처제의 재치와 기지, 온정과 살가움 덕분으로 사나흘 머물렀다가 온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작가가 처제집에서 아흐레나 묵게 된다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다. 바닷가엔 해당화가 지천이고 꾀꼬리, 뻐꾸기가 아침을 일깨우고, 아침저녁으로 전깃줄에 줄지어 앉은 제비를 보며 작가는 매일 해변을 걸으며 해돋이를 구경하며 좋은 시간을 만끽한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것이 아름답다. 작가의 아내가 집에 가야겠다고 하니,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못가.“하며 더 머물다 가라고 하는 처제의 대꾸가 참으로 맛있게 읽힌다.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일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이 수필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식물성적인 녹색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처제의 의지와 모습이 아름답게 드러나 있어 감동을 준다. 그런 처제의 마음을 잘 그려놓았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되살이’는 생명력이 강한 법이다. 어느덧 처제도 일흔 중반에 접어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되살이의 강한 생명력을 오래오래 지탱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귀경하리라고 마음을 굳힌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시려니 부슬부슬 가는 빗방을이 날린다. “이제 그만 가라고 가랑비가 온다.”는 아내의 말에 “아니야, 있으라고 이슬비가 내리는 거야.”라며 처제는 또 더 묵어가라고 한다. 못말리는 처제다.
- 이종삼의 <가랑비 이슬비> 중에서 -
이종삼 수필 속의 ‘되살이’는 건강한 생명에의 표식들로서 자연과 인간과 생명,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로의 회향을 바라는 작가의 무의식에 내재한 꿈의 그림자 형상이라 하겠다. 낭만과 순수를 머금은 인연에 얽힌 따스한 동해 이야기가 파도소리와 처제의 웃음소리에 섞여 미적 울림통을 강하게 울려준다.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구조물에 둘러싸여 사는 이 시대적 삶에 비켜서서 따뜻한 인연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처제를 통해 ‘생명력’이란 주제를 구축한 것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경외이며 진정한 삶의 원형에 대한 희구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수필의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묘미는 ‘빗방울’을 이화한 데 있다. ‘가야 함’을 ‘가랑비’로, ‘있어야 함’을 ‘이슬비’로 치환하는 재치가 유머를 특징으로 하는 수필의 매력과 절묘하게 매칭되어 깊은 손맛을 우려낸다.
조철형의 <학이 앉는 소나무>는 서식지의 환경변화로 소나무 위에서 학들이 서로 부리를 마주치며 날개 춤을 추던 모습을 볼 수 없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생성된 문명비판 수필이다. 학이 떠나고 그 자리를 백로가 이어주었는데, 농약 때문에 먹이사슬이 끊어지면서 백로마저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작가의 한탄이 전개부 마지막을 수놓는 이 수필은 생태복원을 희구하는 주제의식을 견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생태수필이라고 하겠다. 한마디로 그의 수필은 자연과 같은 삶, 자연을 닮아가는 삶,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흔적 남기기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의 존재가치는 삶의 흔적이고, 작가의 체온이 흔적으로 서려 있을 때 가치를 발한다. 고사리 손으로 물 오른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송기를 채취해서 집으로 가져가면, 어머니는 송기떡을 만들었고, 그 떡은 별미였다. 작가는 아직도 그 향기를 잊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필은 추억의 보고다. 잊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표백이다.
뒷집만 지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영농방법을 개선하고, 오염된 곳을 한시바삐 친환경상태로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 소나무가 있다한들 학이 오지 않는 청산은 무주공산이다. 푸른 소나무에 학이 서식하는 동산이야말로 신선들이 거닐었던 선경이 아니던가.
소나무가 꿈을 꾼다. 학이 날아와 앉고, 실개천과 물꼬에 쌀꾸러미가 돌아온다. 논두렁에 메뚜기가 날고, 밤하늘에 반딧불이가 수를 놓는 꿈을 꾼다. 나도 꿈을 꾼다. 학이 겨울하늘을 날고, 눈 덮인 소나무에서 춤을 추는 꿈을.
- 조철형의 <학이 앉는 소나무> 중에서 -
이 글은 생태계 복원의 시급함을 ‘소나무의 꿈’으로 잘 형상화해서 큰 감동을 주는 수필이다. 소나무의 꿈이란 소극적인 생태복원의 기대만으로 학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작가도 학이 겨울 하늘을 날고 눈 덮인 소나무에서 춤을 추는 꿈을 꾼다. 이로써 이 수필은 인간이 대자연이란 문학의 온상만은 끝내 이탈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생의 참된 의미나 조화의 과정을 여유있게 관조하고 수필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구체적인 자연물 그 이상의 제재는 다시 없다. 소나무와 학, 메뚜기, 반딧불이 같은 자연적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수법도 그렇고, 수필에서 부족한 특성인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생태적 합리성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아름다운 꿈을 가능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순수와 긍정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으로서 자연은 조철형에게 토포필리아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인간은 자연을 모태로 해서 생명활동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것이며, 자연의 질서가 삶의 질서라는 것을 수필을 통해서 깨닫는다고 볼 때, 홍만희에게 자연물은 순리의 삶을 가르치는 스승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홍만희는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고 한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하는 게 자연이다. 홍만희 수필의 가치는 자연 안에서 조화의 소중함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을 발견하는 데서 빛난다. 자연의 메시지는 절대자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홍만희의 시선과 사유가 푸른 서정의 경계를 넘어 자연의 숨소리와 그 맥박, 그 의도를 점철해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녹색수필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삶에도 세상도 새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데 더 많은 애를 써야 한다. 지구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만들어졌다. 자연을 자원으로 여기며 파괴하는 일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아무쪼록 매실 농사를 지으면서 귀하게 여길 농사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 단순히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라 농사가 가진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킬 수 있는 농사꾼이 되고 싶다. 앞으로의 삶을 그 가치로 나무에 기대어 살아가고 싶다.
- 홍만희의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 중에서 -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는 것은 ‘농사가 가진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킬 수 있는 농사꾼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홍만희는 자신도 모르게 나무를 보면 봄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처럼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나무가 봄 채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숙연해진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나무에 관심이 많은가를 알 수가 있다. 나무를 전지하는 작업을 하면서 힘이 들 때면, 매화꽃을 보는 재미로 피로를 상쇄한다고 한다. 어려움을 피해가는 길이 있기에 작가는 농사가 힘들어도 농사를 접지 못한다. 수필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이 글의 핵심은 ‘자연’ 그대로를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생태를 보전하자는 데 있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데 더 많은 애를 써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연을 꿈꾸며, 그리고 자연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작가의 자연친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게 한다. 나무는 자연의 상징이다.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뜻을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고 우회적으로 말할 줄 알기에 그는 문학의 멋은 물론 인간의 향기도 낼 수 있는 것이다.
III.
문학은 예술이기에 ‘품격’과 ‘맛’을 요한다. 창작에 있어서 정해진 어떤 법이라는 것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어떤 방법에 의해 미적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의미의 조형화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측면에서 문학성을 유지해야 한다. 강인철의 <캐나다 퍼스트 네이션>, 김은희의 <내 사랑 사과나무>, 김홍래의 <나무가 좋다>, 윤경덕의 <뱀새와 화새>, 이정웅의 ,순천 임청대 느티나무>, 인민화의 <화폭에 담은 무직갯빛>, 정윤수의 <백마고지 전투> 등의 수필은 지면 관계상 세세히 다루지 못했다. 일독을 권한다.
옥형길 수필의 손맛은 ‘농사’를 ‘마술과 같은 종합예술’로 승화시킨 데 있으며, 이종삼의 수필은 ‘가야 한다’를 ‘가랑비’로, ‘더 있어야 한다’를 ‘이슬비’로 치환한 데서 멋이 한껏 우러난다. 조철형의 <학이 있는 소나무>는 자연생태복원에 대한 소망을 ‘소나무의 꿈’으로 나아가 ‘자신의 꿈’으로 환치해서 나타낸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홍만희의 수필 <나무에 기대어 살고 싶다>는 ‘자연’을 ‘자원’으로 생각하자는 라임을 이용한 댓구에서 문학성이 피어난다고 하겠다. 위에서 다루었던 수필들은 이런 문학성을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 작품들은 하나같이 장소애로 불리는 토포필리아적 가치에 닿아 있어서 생태와 매우 친화적이다.
자연으로, 순수로 회귀하려는 일은 어떤 종교에 심취하는 일보다 의의가 깊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생존권이 위협당하고 생태계가 파괴되어가고 있는 이때, 작가가 자연의 발신음을 듣겠다는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생태적 세계관이고 생태적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산림문학의 정서녹화에 이 이상 더 좋은 것은 없다. 감동을 격조 있게 보여준 데 대해 높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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