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29절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까닭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또한 그를 위해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사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것만을 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은혜와 고난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복음으로 인해 혹은 복음을 증거 하는 삶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혹은 신학적인 의미에서 고난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를 풀어서 이해하면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건과 관련해서 사람이 괴로움을 겪고 어려움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갑작스럽게 큰 병에 걸려 병원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한 특별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때 고난당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뚜렷한 이유가 있든 아니면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든 성도들이 받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두고 ‘고난’을 말하는 데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수난’이란 말도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용됩니다. 사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고난을 당하다’는 뜻입니다. 의미상으로는 고난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고난은 괴롭고 어려운 상태만을 겨냥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수난은 그것을 당하는 일을 말하고 대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됩니다. 한자어 표현에 따라 달리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이 말에 해당되는 원어는 성경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차이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의미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난’은 그 의미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의 성경적인 의미 혹은 신학적인 의미는 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미 몇 편의 시편(18편, 22편, 56편, 73편, 116편 등)은 고난의 시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시편 역시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고난은 창조 과정에는 없었던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범죄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인간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피조물 역시 동일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때문에 받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은 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욥과 시편 기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고난의 전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들의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분명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겪었던 고난의 특징은 특별한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피하기보다는 이겨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고난을 말할 수 있습니다. 곧 고난이란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일어나도록 하는 과정에서 혹은 하나님의 행위가 나를 대상으로 일어나는 과정에서 혹은 하나님의 뜻과 행위가 나를 통해 일어나도록 순종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혹은 갑자기 큰 병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고난을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을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시편기자나 욥 그리고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잘못이 없음에도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을 그들은 피하지 않고 참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 때문에 신앙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이를 만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세상 가운데 온전히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가 내게 이뤄지도록 순종할 때 겪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일상 언어의 의미와 구별해서 사용하기 위해 고난과 수난을 구분합니다만,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말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이것은 수난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에서 오는 것이지만, 만일 성도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고난으로 말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는 불행한 사건을 겪고 있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고통과 아픔 중에 있는 성도를 심방하는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먼저 성도가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고 또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분명하지 않을 때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참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마약유나 알코올 혹은 성을 의지하거나 혹은 인간관계에 의존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물론 환자들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처방되는 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뤄나가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 뜻을 위해 부름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통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면 고통 이후의 삶을 소망하며 인내하며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 자체가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달았다면 고통을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