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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4편 14절-18절: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4절: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면 말거리가 되는 것이 많다. 좋은 소문으로 말거리가 되는 것도 있고, 나쁜 소문으로 말거리가 되는 것도 있다. 좋은 뜻으로 말거리가 되면 그 사람이 가는 곳곳마다 서로 반기고 대우가 좋다. 그러나 나쁜 뜻으로 말거리가 되면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피해버리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또한 자기를 무시하고 조롱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당하는 본인의 마음이 어떨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나쁜 뜻으로 손가락질을 하거나, 또는 칭찬의 뜻으로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듣는 자기의 마음이 어떨까?
학교에서 어머니를 오라고 해서 가면 부모들끼리 쑥덕거리는 게 있다. ‘저 사람 누구 엄마다. 그 집 애가 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에게 늘 칭찬을 듣는다’ 라고 하면 그 소리를 듣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 기분이 좋을까? 반대로 ‘맨날 친구들끼리 싸워서 병원에도 자주 가고, 선생님에게도 불려가고, 때로는 지서에도 끌려가는 아이의 부모다’ 라고 한다면 이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 만일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건 철면피고, 사람이 가질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가 철면피라면 그 자식도 분명히 그 모양이다. ‘부모가 저러니 자식은 오죽하겠느냐?’ 이렇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가도록 해야 한다. ‘너희들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면 착한 행실, 선한 행실이 무엇이냐? 남 도와주고, 업어주고, 닦아주고 이런 걸 말하는 거냐? 그 이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언행심사나 품성이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나가는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말이 나와야 한다. 이게 선한 행위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때로는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도 돕는다.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가도록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아무개가 참 믿음이 좋다. 그 사람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없다’ 라는 소리가 나가야 한다. 이렇게 믿어나가는 것이 주님을 높이는 거고, 우리가 주님을 높이면 높이는 자기가 올라간다. 하나님을 올리면 자기가 올라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높이는 게 좋겠느냐,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게 좋겠느냐?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소원 목적을 알면 알수록 자기도 그 차원으로 올라가는 거다. 모르면 내려가 버린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알게 하면 다른 사람도 올라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안 좋은 말거리가 나가도록 살면 안 된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가는 곳곳마다 친구들이 좋아하고, 이웃사람이 좋아하고, ‘왜 자주 놀러 안 오느냐?’ 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심심해서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나 시간 없는데’ 라고 하고, 또 다음에 전화를 하면 ‘나 지금 어디 가는데’ 라고 해서 ‘너는 왜 날마다 바쁘냐?’ 라고 하면 ‘그래, 날마다 바쁘다’ 라고 하는 건지?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이게 좋은 뜻이냐, 나쁜 뜻이냐? 나쁜 뜻이다. 상대방이 나를 보자마자 왜 머리를 흔들까? 고개를 숙인다면 모르겠는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거다. 보자마자 진절머리가 나고, 아무개의 이름을 듣자마자 진절머리가 난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독한 것들’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흔드는 거다. 이건 나이가 들어서 머리를 흔드는 것과는 다른 거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머리를 흔드는 거냐? 일반적으로 욕심이 많거나, 게으르고, 거기에 성질까지 고약하고, 거기에 거짓말도 잘 하는 사람을 만나면 흉악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흔든다. 또 한 뜻으로 보면 이방 세상 사람이 믿는 사람에게 신앙을 양보해서 자기들과 타협을 하자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믿는 사람이 진리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절개를 굽히지 않고 목숨을 내대고 나갈 때 이방사람이 믿는 사람에게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며 머리를 흔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이 지독은 좋은 지독이냐, 안 좋은 지독이냐? 좋은 지독이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인격 면에서 수치감을 느끼는 존재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자기가 말거리가 되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릴 때 진리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기의 신앙사상과 정신을 철두철미하게 심사를 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자기를 복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말이다. 상대방이 머리를 흔들 때 일단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를 심사하라. 우리는 완전자가 아니니 누가 나를 보고 머리를 흔든다면 자기를 한 번 생각을 해야 한다. 자기를 쳐다봐라.
주님은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죽으셨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비꼬고 머리를 흔드는 자들이 있었다. 주님은 절대 완전자이시고 절대 선한 분이니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당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돌아가신 것은, 첫째는 주님은 진리문제에 있어서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목숨을 내어놓을지라도 타협이 없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타협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목사님들은 어떠냐? 자기를 하나님과 원수로 만들어 놓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과 타협을 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평화’ 운운하고 있지 않느냐?
두 번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악을 다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거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죽으셨고, 또 살아나셨다. 세 번째는 당신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죄악 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거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자꾸 좋지 않게 말거리를 만들면 그것을 듣는 내 편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는 그 소리를 들을 때 달려가서 그 입을 잡아 뜯어버린다? 두 번째는 이빨을 갈면서 ‘만나기만 해 봐라’ 하겠느냐? 세 번째는 ‘귀신이 그 놈 안 잡아가고 뭐 하느냐?’ 라고 하면서 그 놈을 잡아가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네 번째는 그 놈을 회개시켜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할 거냐? 이런 식으로 악한 자를 회개하도록 기도를 하는 게 좋은 마음이냐, 나쁜 마음이냐? 그 속에 뭔가 들어있다. 다섯 번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생명 길, 좁은 길로만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 거다? 이 마음은 누구 마음 같으냐? 우리교인들 마음이냐?
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능욕’의 일반적인 뜻은 업신여기고 욕을 보이는 거다. 좀 자극적으로 말을 한다면 힘없는 여자가 강간을 당한 것과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간음’은 결혼 당사자도 아니면서 하는 행위다. ‘강간’은 부녀들에게 하는 짓이다. ‘간통’은 남의 부부에게 하는 짓이다. 이런 일을 당했을 경우 이건 자기의 인격에 관한 문제라서 누구에게 가서 말을 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기의 무능함과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비통에 빠지고 만다.
신앙 면에서 보면 신앙정조, 즉 신앙인격에 관한 정조가 있다.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가 세상과 세상 것이 좋아서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고 가는 것은 신앙정조를 파는 것으로, 이는 자기의 신앙인격 면에서 능욕이고 수치스러움인데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 남편의 얼굴도 똥이 되는 것인데 어느 남편이 그것을 가만 보고 있겠느냐? 말하자면 주님도 성도가 세상에 신앙정조를 파는 것을 가만 보고 계시지 않는다. ‘교회는 주님의 아내라’ 함은 주님과 성도는 한 몸으로, 최고의 사랑과 애정의 관계를 말하는 거다.
또 어떤 ‘능욕’이 있는가 하니 분명히 불의인 줄을 알면서도 힘이 약해서 당하고만 있는 것. 이런 경우에도 가슴이 메어지는 일이다.
성경에 보면 계명도 있고, 율례도 있고, 규례도 있고, 율법도 있다. 율법이라고 하면 주로 신앙의 전체적인 면을 말한다. ‘규례니, 율례니’ 할 때는 어떤 부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십계명을 두고 볼 때 이건 명령이다. 명령이란 믿음이 있던 없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키라는 거다. 이유와 변명이 안 통한다. 그래서 명령을 안 지키면 형벌에 붙여지는 거다. 문자적 표면적 명령을 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이 잘 되라고 영을 위해서 영 주격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다. 이걸 어기면 신앙정조를 팔게 되는 거다. 우리가 신앙정조를 팔면 신앙 면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이다.
16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비방’은 남을 헐뜯어 말하는 것이고, ‘후욕’은 꾸짖고 욕설을 하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신앙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코웃음을 치더니, 이방세상을 의지하고 죄를 짓더니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과 그 후손들이 환난을 당하고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면 조상들과 후손들이 무슨 연관관계가 있기에 조상들로 인해서 후손들이 고통을 겪는 것일까? 성경의 역사를 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첫째는 어린아이와 후손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어른들과 조상들을 뼈아프게 회개시키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아이들과 후손들로 조상들과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을 맛보게 해서 후손들로 하여금 조상들과 어른들이 지은 죄를 다시 안 짓게 함이요, 세 번째는 영적으로 보면 정신 사상적으로 활동을 해서 온 결과들은 자기가 심고 뿌린 것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거다. 자기가 활동을 한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영광이 아니면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거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사단 마귀가 활동하는 곳이고, 따라서 세상은 악한 자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금방 좋아하다가 금방 미워하고, 또 스스로 시험에 걸리기도 하고, 또 단체로 비진리적 사단 마귀의 유혹과 미혹의 작전에 걸려들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자들 모두는 영의 눈도 밝아야 하고, 영의 귀도 열려있어야 한다. 어둡고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몰라서 자기 스스로에게 비방거리를 만들고 후욕거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삼가 조심해야 한다.
믿는 우리는 세상 일반적 윤리 도덕성의 범죄는 물론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에서 빗나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저 집에서 맨날 부부끼리 싸우고 애들은 울고 집을 뛰쳐나가더라’ 라고 한다든지, ‘집사 장로가 되어서 교회는 안 가고 주일마다 놀러가더라’ 라고 한다든지, ‘저 집은 목사 집이면서 자식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기에 아이들이 머리를 저렇게 노랗게 물을 들이고 다니느냐?’ 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보면 교회들이 거짓 종들의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서 세상적 인본주의적 비진리적 홍수에 휘말려서 영적인 면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음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못 느낀다면 큰일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교인들이 세속화된 종교적 유행바람이던, 시대적 이방세상의 유행바람이던 이런 것들에 날려 다니고 불려 다닌다면 이 교인이 무겁다는 거냐, 가볍다는 거냐? 가벼우니까 날려 다니는 거다. 가벼울수록 더 잘 날려 다닌다.
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현재 환난 핍박으로 고통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고 신앙정조를 잘 지키고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지만 죄를 깨닫고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여 주를 기억하고 그 언약을 굳게 믿는 신앙을 가졌다는 거다. 죄로 인해서 현재적으로 계속 핍박이 오고 있지만 죄를 지었을 때의 그 자기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거다.
두 번째는 죄를 범한 조상들로 인해서 후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징계의 고통이 미치고 있지만 현실은 이렇다 할지라도 후손인 자신들은 조상들이 잘못해서 징계를 받은 그 죄를 주님을 기억하여 다시는 짓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는 거다. 우리에게도 이게 있어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늘 술을 먹고 엄마를 두들겨 패는 것을 보면서 자랐는데 이것을 본 아이가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다. ‘아버지가 그러니 나도 그러겠다’ 이렇게 나가는 아이가 있고, ‘아버지는 그랬지만 나는 절대 안 그런다’ 이게 있다. 누구로 인해서 고통이 왔던 주를 기억하고 그 언약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게 된다. 주를 기억하고 그 언약을 믿는 자는 뭘 지킨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부모의 잘못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건데, 그것을 보고 빨리빨리 깨달아야 한다. 깨닫는 것이 자기 복이 되는 거다. 못 깨닫고 부모를 향해서 ‘왜 날 낳았느냐? 못 먹이고 못 입힐 바에야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느냐?’ 이거 안 된다. 큰일 날 소리다.
18절: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퇴축’이란 마음이 뒤로 물러나는 것인데,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신앙의 마음만큼은 물러나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기억하여 신앙정조를 버리지 않았고, 진리생명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거다.
신앙정신에는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이 있고, 넓은 길을 가는 신앙이 있다. 오늘날 자기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느 길로 간다고 느끼느냐?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자기는 지금 이 두 길 중에 어느 한 길로 가고 있는 거다. 한 쪽 발은 좁은 길로 가고, 한 쪽 발은 넓은 길로 갈 수는 없는 거다. 이러다가는 빨리 죽는다. 신앙의 길도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다. 자기는 지금 이 두 길 중에 한 쪽 길로 가고 있는 거다. 교회도 보면 대표적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교회가 어느 길로 가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설교를 들어보면 넓은 길을 제시하는 건지, 좁은 길을 제시하는 건지 드러난다. 그러면 우리 궁극교회는 목사와 교인들이 어느 길로 가고 있다고 느껴지느냐?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좁은 길은 생명 길이다.
이제 신앙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리본질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기독교 신앙이 뭔지 알았느냐? 그렇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야지 싸워보지도 않고 마음부터 물러나면 이건 이미 진 거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정신적으로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정신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했다는 거다. 그러면 주의 길, 주님이 가신 길이 뭐냐? 골고다 길이다. 생명 길, 좁은 길이다. 주님은 당신은 넓은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는 좁은 길로 가라고 한 거냐? 그런 법은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