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튜터들의 공개 뒷담화, 돈 래그
학생을 앉혀 놓고 '뒷담화'하는 평가 시스템
교수, 강의, 전공, 시험이 없는 대신 세인트존스에는 학생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다른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돈 래그don rag'라 불리는 아주 특별한 학생 평가 제도다.
우선 어원부터 파헤쳐보면 돈don은 영국에서 건너온 단어로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를 뜻한다.
래그rag는 '꾸짖다', ' 책망하다', '타박하다'의 뜻이 있다.
즉, 돈 래그는 '교수가 꾸짖는다'는 뜻이다.
누구를?
당연히 학생을!
돈 래그는 말 그대로 교수가 학생을 꾸짖을 수 있도록 학교에서 마련해준 공식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한 학기 동안 학생이 들었던 수업(4~5개)을 담당한 튜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돈 래그인 것이다.
시험 대신 이런 학생 평가 제도를 채택하다 보니 세인트존스에서는 학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돈 래그 주don rag week'가 시작된다.
학생들은 이 일주일을 '죽음의 주dead week'라고 부른다.
이 주에는 월, 목 세미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수업들이 취소 된다.
방학 전 마지막 일주일 동안 수업들이 취소되니 천국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이 천국 같아야 할 일주일을 '죽음의 주'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학기 동안 학교생활과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에 따라서 학생들은 죽음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 래그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상상 속의 내 모습과 남이 보는 내 모습의 차이를 알고 나면 어떤 때는 충격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즐거워지기도 한다.
이렇든 저렇든 객관적인 자기 모습과 맞닥뜨린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안 그래도 이렇게 무서운 돈 래그를 더욱더 무섭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돈 래그의 스타일이다.
돈 래그는 '청문회'가 아니라 '뒷담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학생을 앉혀 놓고
"인마, 너 왜 수업 시간에 항상 아는 척만 해?" 하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튜터들이 모여 앉아 그 한 명의 학생에 대해 자기들끼리 얘기를 한다
"이 학생은 내 수업에서 맨날 아는 척만 해요."
"아, 그래요? 그 학생, 내 수업에선 늘 졸기만 하던데?"
주인공인 학생은 그 자리에 있음에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이러니 학생들이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돈 래그가 세인트존스에서 개발한 신개념 학생 고문(?) 방법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왈핀 전 부총장은 말했다.
"돈 래그는 미국 아니, 이 세상 어떤 대학교에도 없다. 있다면 세인트존스에서 가져간 시스템일 것이다."
특히 아직 누군가에게 적나라한 평가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1, 2학년 때는 돈 래그 후 항상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방을 나오기 일쑤다.
매번 그렇게 흑독하게 평가를 하느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혹한 평가를 받으며 돈 래그를 마치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과 격려를 듬뿍 받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병 주고 약 주는 돈 래그
나는 공부 면에 있어서는 특히 겸손을 넘어선 자기 비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수업이 어려우면 전부 다 내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질문이 있어도 못 했던 적도 많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멍청해서, 게을러서 더 많이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걸 모르는 거야. 다른 애들은 분명 다 알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튜터들은 그런 내 성격까지 다 파악을 하고 있었다
"미스 조의 질문은 좋은 것들이 많은데 자기 혼자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어보지 않습니다. 결국 질문을 해보면 다른 친구들도 몰라서 아무도 대답 못 하는 그런 것들인데 말이죠.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질문을 더 할 필요가 있어요."
"미스 조는 아폴로니오스가 어려운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어려운 건데 말이죠. 허허허!"
"제 수업에서 미스 조는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배우고 토론한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넘어가는 학생들이 많은데, 미스 조는 항상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질문하기 때문에 반 학생들은 물론 튜터도 모른다는 사실에 솔직해져야 하죠."
이런 애기를 듣고 있으면 용기가 불쑥 솟고
'아아~ 튜터님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탭댄스라도 추고 싶어진다.
하지만 정말로 못하고 있는 수업에 대한 평가를 들을 때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미스 조는 이번 학기 모든 퀴즈에서 낙오했습니다. 희랍어 번역은 시키면 잘하고 준비도 잘해오는 듯하지만 절대 나서서 하지 않습니다. 토론에 전혀 참여하지 않아서 플라톤의 <메논Menon>을 토론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고요. 리포트는 두 개를 썼는데 둘 다 문법이 엉망이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심각하게 걱정이 됐습니다. 다음 학기에도 이대로라면 절대 만족할 만 한 수업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식의 혹독하지만 객관적인 비판을 받고 나면 '그래도 한 학기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려다가도 분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긴장도 잔뜩 하게 된다.
그걸 원동력으로 다음 학기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그다음 학기 돈 래그에서는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교수들이 어떻게 학생 하나하나의 성향까지 다 알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사실 교수들이 자기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을 파악한다는 건 우리나라나 미국의 큰 대학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종합대학university에 비해 소규모인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교수들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코멘트를 해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세인트존스는 다른 리버럴 아츠 칼리지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다.
거의 고등학교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 래그가 가능한 것이다.
돈 래그는 학생을 불러다 놓고 학생 뒷담화를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튜터들의 뒷담화가 끝나고 나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학생에게도 드디어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
튜터들이 한 이야기 중 자신을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 코멘트를 달기도 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제일 중요한 돈 래그의 핵심, 결정의 시간이 온다.
이것이 돈 래그의 진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이 한 학기 동안 어떤 식으로 공부를 했는지, 배움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보였고 어떤 결과물을 보여줬는지 튜터들이 함께 이야기해본 후 학생의 앞으로의 학업 방향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
돈 래그 마지막 단계에서 튜터들은
"이 학생이 다음 학기로 진급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때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일이 커진다.
학생의 다음 학기 진학을 튜터가 반대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학생이 수업 준비를 너무 안 해오거나 경고를 줬음에도 결
석을 너무 자주 했을 경우, 퀴즈나 리포트 쓰기 등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세인트존스의 토론식 수업이 학생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 발전이 보이지 않는 경우 등등.
하지만 그렇게 튜터가 학생의 진학을 반대한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곧장 쫓겨나지는 않는다.
"이 학생은 다음 학기로 진급할 수 있지만 더 나은 리포트를 쓰기 위해 라이팅 어시스턴트writing assistant를 찾아가세요."
하는 식의 조건이 붙을 수 있는 것이다.
{* 라이팅 어시스턴트는 글쓰기를 도와주고 교정을 봐주는 친구다. 수학. 음악, 언어, 글쓰기 통 과목별로 도우미 학생이 있다. 학교에서 그 분야를 잘하는 재학생들을 고용해 그 분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나 역시 1학년 때는 리포트의 문법 문제로 라이팅 어시스턴트에게 가라는 조건을 단 채 다음 학기에 진급할 수 있었다.
또는 다음 학기에는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급하는 학생도 있고,. 각자의 문제 종류에 따라서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이건 아주 굉장한 조언이다.
한 학기 동안 학생을 지켜본 튜터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학생이 배움을 얻는 데 있어서 가장 부족한 요소들을 지적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 소중한 조언을 철저하게 지키고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말 발전된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세인트존스에만 있는 무시무시하지만 너무나 현명한 학생 평가 시스템, 돈 래그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번 일주일 동안, 외딴 곳으로 들어가 회사 직원들은 물론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만나지 않고 회사와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그는 이 기간을 '생각하는 주think week'라고 말한다.
세인트존스에서 '죽음의 주'라고 불리는 돈 래그가 빌 게이츠의 생각하는 주와 비슷했다는 걸 이제야 느끼고 있다.
물론 세미나를 제외한 모든 수업들이 끝나고 돈 래그만 남겨 놓은 학생들은 한 학기가 끝난 것을 자축하고 놀기 바쁜 게 사실이다.
나 역시 학교를 다닐 때 이 기간에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돈 래그에 들어갈 때만 긴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기록은 해두고 싶었기에 돈 래그 후에는 하루 정도 시간을 들여 돈 래그에서 들었던 말을 전부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튜터들이 보는 나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 고 다음 학기에는 그걸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시간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현명한 인생 선배(튜터)들에게 조언
을 받는 것에 익숙했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그렇게 나를 평가해주는 사람도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벌벌 떨었던 세인트존스만의 특별한 학생 평가제도인 돈 래그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죽음의 주'를 만들어 나를 점검하고 있다.
비록 튜터들만큼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고 믿는다.
돈 래그를 통해 이런 연습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중에서
세인트존스를 소개합니다
조한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