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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셨다
장코뱅 추천 3 조회 314 26.06.06 07:26 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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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6.06 07:41

    첫댓글 즐거운 호국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작성자 26.06.06 07:43

    <호크마 주석: 로마서>

    =====10:1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이다. 여기 쓰인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 )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 작성자 26.06.06 07:44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10:2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 )은

  • 작성자 26.06.06 07:44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 )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 작성자 26.06.06 07:44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10:3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 작성자 26.06.06 07:45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 )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 )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 작성자 26.06.06 07:45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 )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

  • 작성자 26.06.06 07:45

    (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 작성자 26.06.06 07:46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 )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 )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 작성자 26.06.06 07:46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 작성자 26.06.06 07:47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작성자 26.06.06 07:47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 )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 아뷩손)는 6절의 '하늘'(* ,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 )는 히브리어 '테홈'(* )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 작성자 26.06.06 07:48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 )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 )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

  • 작성자 26.06.06 07:48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 )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 작성자 26.06.06 07:49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 )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 작성자 26.06.06 07:49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 )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 )는 미래형으로

  • 작성자 26.06.06 07:50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 )와 '호몰로게이타이'(* )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작성자 26.06.06 07:51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 26.06.06 09:16

    풀성하고 자세한 설명에 공감합니다.

  • 작성자 26.06.06 08:00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5:17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 작성자 26.06.06 08:00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 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 작성자 26.06.06 08:01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 작성자 26.06.06 08:01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일획(一點 一劃)(* ,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 작성자 26.06.06 09:11

    '요오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 )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 작성자 26.06.06 09:12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5:19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 작성자 26.06.06 09:12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 작성자 26.06.06 09:13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 작성자 26.06.06 09:13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 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 작성자 26.06.06 09:13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 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 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 26.06.06 09:42

    네, 본문이 말하듯 율법폐기론의 미혹을 예방하는 좋은 말씀입니다.

  • 26.06.06 09:43

    *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에게 감히 도달할 수 없던 완벽한 의를 이루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 '율법의 마침'이라는 선언이 방종이나 폐기론으로 흐르지 않도록 마태복음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주시니, 이신칭의의 참된 가치와 복음의 균형 잡힌 깊이가 더욱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선물로 받았음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그 은혜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묵상하게 하는 귀한 나눔입니다.

  • 26.06.06 09:45

    저더 나름대로 묵상 내용의 본론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의로우시며 인간에게 절대적인 거룩함의 기준을 요구하시지만,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종교적 노력이나 행위로는 결코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위로부터 거저 내려오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전인적인 역사를 통해 얻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을 종결하셨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공적으로 승인하시는 완벽한 법적 자격인 의를 단번에 선물해 주셨습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판결을 내리시는 의사봉의 선언처럼 거저 주신 칭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결코 방종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옳은 행실을 나타내는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내며, 이는 장차 다가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부가 입을 깨끗한 세마포 예복으로 단장될 것입니다.

  • 작성자 26.06.06 12:01

    좋습니다^^

  • 26.06.06 09:46

    * 온 우주에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고백하오니, 스스로의 헛된 열심과 행위의 자랑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이 거저 주신 칭의의 은혜만을 겸손히 붙잡게 하시고

    * 십자가 복음이라는 온전한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워주시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이 구원의 감격을 세상 가운데 입술로 당당히 시인하며 선포하는 삶이 되게 하시며

    *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시고 의롭다 선언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구별된 성화의 열매를 맺어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작성자 26.06.06 11:54

    아멘!

  • 26.06.06 12:04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거룩함이나 의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준이시고, 인간은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을 낼 수 있지만 어차피 함량 미달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아시고,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성육신하신 아들을 보내주셔서 그 아들이 율법을 완성하실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계명을 예수께서 다 이루어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어내신 공로에 의지하여, 그에게 편승하여 비로소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경작자, 제사장, 왕으로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존재였듯이, 구원 받은 성도도 성화로써 의로운 행실로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기본적인 삶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잘 알려주는 성경 묵상으로 우리의 현 위치를 점검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타 종교에서 선행과 자비를 강조해도 영적 교만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합당합니다.

  • 작성자 26.06.06 12:10

    풍성하고 깊은 분별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 26.06.06 15:59

    좋은 내용이에요. 공감합니다22

  • 26.06.06 16:01

    하나님만이 가지신 절대적인 의의 기준 앞에 철저히 무력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내 공로나 행위의 열심을 의지하려 했던 영적 교만을 먼저 회개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도덕적 실천이나 종교적 고행으로도 채울 수 없던 그 거룩한 기준을, 오직 십자가 복음이라는 온전한 지식과 믿음을 통해 거저 선물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마음의 진실한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당당한 입술의 고백으로 피어나는 전인적인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내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주권 앞에 온전히 복종하기를 소망합니다.

    값없이 의롭다 칭해 주신 재판장 하나님의 엄중한 은혜를 입은 자답게, 이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세상과 구별된 옳은 행실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결단합니다.

  • 26.06.07 17: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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