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우리 역대 왕조에서
임금을 가리키는 호칭은
시대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역사가 다양하고
다이내믹했다는 얘기죠.
왕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4가지였습니다.
아명(兒名)․휘(諱)․
자(字)․호(號)인데,
이 가운데 일반 백성과 차별화
됐던 것은 휘와 호였습니다.
특히, ‘호’는 일반인도 쓰는 호
말고도 묘호(廟號)․시호(諡號)․
존호(尊號)를 붙였으니까,
실제 왕의 이름은 최대
7개까지 있었던 것이죠.
< 왕이 태어나면서
얻는 이름 – 휘(諱) >
휘는 쉽게 말해 왕의 본명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방원(태종),
이도(세종), 이산(정조),
이형(고종) 등이 왕의 휘죠.
왕의 휘가 특별했던 것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조선 태종과 단종을 빼고는
모두 외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죠.
피휘(避諱)라 해서 왕의 이름을
부르거나 문서에
쓸 수 없도록 금했거든요.
그래서 왕이 될 왕자의 이름은
실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 그것도
외자로 지었던 것이죠.
이성계도 왕이 되고
나서 이단으로 개명했죠.
왕의 존엄을 세우는 목적도
있었지만, 좋은 뜻을 가진
한자 수가 한정되어 있잖아요.
백성들도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배려의 뜻이 있었던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까지는피휘 관습이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몽골처럼 왕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죠. 추모대왕,
온조왕, 혁거세거서간 식이죠.
그러나 중국의 유학한자가
이 땅에 정착되면서 피휘가
엄격해 졌던 것이죠.
조선시대 사례인데요.
영조 26년(1796년) 대구
유생 이양채가 상소를 올립니다.
대구(大丘)의 구(丘)자가
공자 이름과 같은 구(丘)라서
향교 제사 때마다 공자의
이름을 범하게 되니까 도시
이름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죠.
영조가 혀를 끌끌 차며 기각
했지만 후대에 슬며시 대구
(大邱)로
바뀌다가 철종 때
지금의 대구(大邱)로
완전히 둔갑했죠.
고구려 연개소문도
피해자인데요.
중국 사서에 연개소문의 이름은
천개소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을 피하기
위해 ‘연’씨 성을 ‘천’으로
고쳐버린 것이죠.
유학자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중국 사료를 따라 개소문의
성을 천씨라고 쓰고 있고요.
현대판 피휘도 있죠.
지금 북한 주민들이
‘일성’․‘정일’․‘정은’이란 이름을
쓸 수 없다고 하니까
한반도의 절반은 아직도
절대왕조 그늘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 왕이 죽고 종묘 제사에
붙이는 이름-묘호(廟號) >
왕이 죽고 27달이 지나 왕의
신위를 종묘에 모셔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호칭이 묘호입니다.
태조, 세조, 세종 등 우리에게
친숙한 왕의 이름이 묘호죠.
묘호는 후대 왕과 신하들이
정하는데, 끝에 ‘조(祖)’나
‘종(宗)’을 붙였습니다.
‘조’는 왕조를 창업했거나
국난을 극복한 임금에게 붙였고,
그밖에는 ‘종’을 붙였죠.
그러다보니 ‘조’가 ‘종’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죠.
고려는 창업자인 태조 왕건만
‘조’가 붙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태조 이성계를 포함해,
모두 7명이 ‘조’로 불렸습니다.
우선,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공신들이
왕위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이죠.
선조는 처음 묘호가
선종이었습니다.
아들 광해군이 국난을 극복한
공을 강조하며 선조로 바꿨죠.
인조도
세조와 마찬가지입니다.
반정세력이 입지를 키우기
위해 인조의 위상을 높인 것이죠.
영조․정조․순조도
처음에는 종을 붙였습니다.
순조는 강화도령 철종을 왕으로
만든 순원왕후가 철종을 움직여
남편의 격을 높인 것이죠.
영조와 정조는 고종이
‘조’로 바꿨고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조일전쟁과
병자호란에 책임이 크고
사후대응도 칠칠치 못했던
선조와 인조가 ‘조’의 호칭을
받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죠.
세종도 ‘종’을
붙였는데 말이죠
오늘날 우리 정치가 명심할
대목이죠. 후손에게 존중받는
것이 중요하지 번드르르한
이름을 갖다 붙였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죠.
사실 고려에도 ‘조’로
불릴만한 왕이 많았습니다.
조선보다 외침이 더 많았거든요.
대표적인 명군이 8대 현종
(1009~1031년)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사생아가
왕이 된 유일한 인물일
것 같은데요.
강감찬을 중용해 귀주대첩으로
25년 대 거란 전쟁을 끝냈고,
고려실록 편찬․초조대장경 간행․
개성 나성 축조․민생구호 등
문․무에 걸친 업적으로
도약기를 이끌어냈죠.
또 이후 왕실이 현종의
후손으로 이어졌거든요.
명실상부한 고려의
중시조로 볼 수 있죠.
삼국시대도 묘호를
붙인 사례가 있었습니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602~661년)죠.
당이 시비를 걸었지만
신문왕이 관철했죠.
고구려도 삼국사기에 6대
태조대왕(47~165년)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구려 태조는
재위 시 부른 호칭이고,
중국식의 묘호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가 있습니다.해얼도 같은 의견인데요.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태왕’이라 부르고 연호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천하의 중심을 자부하며
고유방식을 고수했던 고구려가
전성기 광개토태왕이나
장수왕도 아니고,
유독 태조왕에게 중국식 묘호를
붙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죠.
한편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군(君)으로 기록된 임금도
있습니다.
폐위되어 왕자 때
작호를 붙인 것이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실록이라
하지 않고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로 표현하고 있죠.
더 심한 대우를 받은 왕이
고려 32대 우왕과 33대
창왕입니다.
둘 모두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핏줄이라고
폐위당해 처형됐는데요.
그것도 모자라 고려사에서
‘신우’, ‘신창’으로 호칭하며
신하의 기록을 담은
‘반역 열전’에 넣어 놨죠.
권력이 모질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죠.
< 왕의 공덕을 기리는 이름 –
시호(諡號)․존호(尊號) >
시호는 왕이 죽으면 후대
왕과 신하들이 왕의 업적을
기려 올리는 이름입니다.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도
주는 점에서 묘호와 다르죠.
충무공
이순신의 충무가 시호죠.
고려는 몽골(원) 간섭기에
몽골(원) 대칸에게서
시호를 받았습니다.
몽골에 충성하라는 뜻으로
앞에 충자를 붙였는데,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6명이죠.
조선은 처음부터
명에서 시호를 받았고요.
왕의 공덕을 기리는
이름으로 존호도 있는데요.
왕이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
모두 올릴 수 있는 점이
시호와 다르죠.
< 왕의 그 밖의 이름들 –
아명(兒名)․자(字)․호(號) >
다음은 왕과 일반인이
공통적으로 쓰는
이름입니다.
옛날에는 아기들이 병으로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 일부러
천하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야 귀신이 쉽게 알고
잡아가지 못해 건강하게
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세종의 아기 때 이름이
‘막동이’,
고종은
‘개똥이’였다고 하죠.
‘자’는 성인 관례를
치르고 받는 이름입니다.
유학한자문화권에서 이름은
왕․부모․ 스승이 아니면
쉽게 부르지 않는 관념이
있어서 관례 후에 새
이름을 지었던 것이죠.
‘호’는 자신의 취미나 성격 등을
반영해 스스로도 지을 수 있는
지금의 필명이나 예명처럼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별명이죠.
정조도 호가 있는데
‘홍재’였죠.
https://m.cafe.daum.net/wkwl/YC3N/398?svc=cafeapp
정보 2ㅡ우리 역대 왕조에서ㅡ 임금을 가리키는 호칭은ㅡ 시대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ㅡ 그만큼
왕은 자신을 어떻게 불렀을까? 그런데 정작 왕은 스스로를 뭐라고 불렀을까요? 고려와 조선이 달랐는데요.고려는 황제국을 지향하여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으로 때에 따라 탄력적으로
m.cafe.daum.net
https://m.cafe.daum.net/rnqdmsekfl/VQoX/1623?svc=cafeapp
조선 왕들의 사망원인ㅡ제1대 태조ㅡ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ㅡ 중풍으로 74세에승하 ㅡ 제2
조선 왕들의 사망원인* 제1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에승하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