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의 시 모음
1》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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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월의 노래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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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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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갑사댕기
박목월
안개는 피어서
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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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안(開眼)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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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름 밭에서
박목월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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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것은 연륜이다
박목월
어릴적 하찮은 사랑이나
가슴에 백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주 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