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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너는 여호와를 기다리라
(3월 3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3분)
TMI 실천해 보세요
115. 자녀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세요.
116. 이웃이나 동료에게 비타민을 나눠 주세요.
117. 필요한 사람에게 물티슈를 건네세요.
연구 범위: 시 27:14, 롬 8:18~25, 시 131:, 마 18:3, 시 126:, 92:, 막 16:1~8, 벧후 1:19
기억절: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14).
지금까지의 영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장엄한 창조주, 왕, 재판관 앞에서의 경외심, 하나님의 구속과 용서, 구원을 통한 기쁨, 슬픔과 애통함 속에서 굴복하는 순간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에 대한 영광스러운 약속과 하나님을 향한 전 우주적인 예배에 대한 기대감을 나누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우리의 여정은 계속된다. 그런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가 시편에서 발견하는 마지막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태함과 절망에 찬 자포자기한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한 행위이며, 그것이 일관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암울한 저녁을 밝은 새 아침에 대한 기대감으로 변화시킨다(시 30:5, 143:8). 우리의 마음은 매일 새로운 희망과 평안으로 힘을 얻는다. 그것은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게 해주고 주님의 선교지에서 풍성한 수확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시 126:6, 마 9:36~38). 주님을 향한 기다림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분은 모든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풍성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시 37:7~11, 18, 34, 71:1, 119:137, 138).
TMI Time*학습 목표
깨닫기: 시편은 우리가 소망과 인내 가운데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라고 말한다.
느끼기: 그분의 역사를 기억하고 살아있는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안식과 소망을 경험할 수 있다.
행하기: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영광의 아침을 기다린다.
TMI 안으로: 안교 소그룹이 함께 서로를 돌보고 연합함
1.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합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드립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를 확인하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TMI 위로
1. 그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통 어떻게 보내십니까?
2.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히 12:1)
3. 자신을 높이는 교만과 비교되는 속성은 무엇으로 나타나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시 131:2)
4. 하나님은 성경의 역사를 봄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어떻게 적용되기를 원하십니까?(시 126:6)
5. 안식일을 위한 시편은 어떤 개념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기자의 어떤 마음을 표현합니까?(시 92:10)
6. 시편기자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까?(시 30:5)
7. 제자들은 얼마나 주님의 날을 고대했습니까? 그들이 그 압박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빌 2:13)
결론 기다림은 아무리 열정이 넘치는 사람도 무너지게 할 수 있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것을 오늘의 찬양으로 바꿀 수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성별하게 하며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 거하게 한다.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매일 만날 때에 마침내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소망의 아침을 맞을 것이다.
TMI 밖으로: 안교 소그룹이 함께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고 봉사함
1. ‘내가 실천한 TMI 활동 : ( )’을 적고 함께 나눕니다.
2. 각자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내용을 나눕니다.
3. 오늘 오후에 실천할 TMI 활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3월 24일(일)
기다리라는 부르심
시편 27:14, 37:7, 9, 34, 39:7, 40:1, 69:6, 갈라디아서 5:5, 로마서 8:18~25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하라고 간청하는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 37:7, 9)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시 37:34)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18-25)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는 기다림일 것이다. 우리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인생의 어떤 위치에 있든, 우리 모두는 때때로 무언가를 기다려야 한다. 매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부터 의학적 진단을 듣는 일까지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어떤가? 주님을 기다린다는 개념은 시편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가득하다. 기다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물리치는 최고의 약속이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다린다. 당장은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상황을 그분께 맡기고 주님이 최선을 다해서 일하실 것을 확신하고 기다릴 수 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주님께 매달리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겪는 극심한 목마름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다(시 63:1). 시편 기자들은 그분이 주시는 여러 가지 복을 기다리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열망이야말로 인생의 다른 어떤 갈망과 필요를 뛰어넘는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과 온 피조물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복된 만남이 이루어질 마지막 때를 고대하고 있음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얼마나 고대하는 약속인가? 우리가 궁극적인 구원과 하나님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동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롬 8:22)지만 주님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하심으로 절정에 달할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았다(행 1:4~8).
(이어서) 재림이라는 이름 자체에 우리가 기다리는 소망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듯이 새로 지으심은 재림교인으로서 우리가 기다리는 소망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성취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지만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초림하셨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그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분명하게 한다.
<교훈> 우리는 문제, 상황의 해결만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때를 고대하며 기다린다. 인내는 의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고 기다리게 한다.
<묵상> 나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대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그대가 가진 소망은 그대에게 어떤 도움이 됩니까? 기도하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믿음과 신뢰로 기다리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올바른 것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어떤 때는 힘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풍요한 상급을 잃게 될 것임을 나는 보아 왔다. 하나님의 큰 밭에서 일하는 충성된 농부로서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인내하며 소망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고난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유혹과 피곤한 수고로 영혼은 괴로움을 겪을 것이나 우리는 기쁨으로 거두기 위하여 믿음 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교회증언 3권, 327).
<기도>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는 인내심이 부족하여 쉬 지치고 문제의 빠른 해결만을 고대하곤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만나기를 고대하게 하시고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게 도와주옵소서.
3월 25일(월)
젖뗀 아이의 평안
시편 131편을 읽어 보라. 이 시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
하나님의 백성은 신실한 자들을 괴롭게 하는 유혹과 고난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편 기자를 위로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생생한 확신이다. 그는 자신의 교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고백한다. 교만은 사람을 속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자신 너머를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더 높은 실재를 볼 수 없다.
반면에 의인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시 123:1, 2).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기에 겸손해지고 이기심과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큰 일"과 "너무 높은 일"을 구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시 131:1, 흠정역). 이 일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현대 과학은 "가장 단순한" 것조차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적어도 현재로서는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다. 물리적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우리 앞에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더 많이 펼쳐진다.
시편 131:2에 기록된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는 모습의 은유는 평온을 찾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 사람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어린 시절의 아이가 다양한 단계에서 어머니와 맺는 사랑의 관계를 가리킨다.
실체 없는 야망과 교만의 젖을 떼게 하시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요 4:34, 히 5:12~14)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단한 음식”의 더욱 풍성한 영양을 제공해 주신다. 젖뗀 아이와 같다고 표현한 시편 131편의 신뢰는 사실 삶의 고난을 통해 시험과 시련을 겪으며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분임을 발견한 성숙한 믿음이다.
(이어서) 마지막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안녕을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하는 데 활용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을 여러 같지 않은 이유로 여전히 신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증거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입니까?
<교훈> 교만은 자신을 속이고 그 너머를 볼 수 없게 하기에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실재를 볼 수 없다. 의인은 겸손한 아기처럼 눈을 들어 그분을 의지하고 바라본다.
<묵상>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는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적용>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늘에서 큰 사람 ~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게 되려면 겸비에 있어서, 믿음의 단순함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의 순수함에 있어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교만은 멸절되고, 모든 시기는 극복되고, 최상권을 위한 모든 야망은 버린 바 되고, 어린이의 온유와 신뢰가 권장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가 그들의 보호의 반석이요 그들의 강한 망대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것이며 그분께서는 그들을 결코 실망 시키지 않으실 것이다”(교회증언 5권, 130).
<기도> 저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과 믿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로 복잡한 문제와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불신과 낙망에 빠지기도 하니 제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어린아이처럼 온전히 신뢰하며 기쁨으로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게 하옵소서.
3월 26일(화)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시편 126편을 읽어 보라.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가?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말씀이 이 맥락 속에 기록되어 있는가?
“[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
주님께서 베푸셨던 기적적인 구원은 마르지 않는 영감과 미래에 대한 소망의 원천이다. 주님의 구원은 믿을 수 없는 꿈이 현실이 되는 위대한 경험이었다(사 29:7, 8).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시편 126편을 기록한 기자의 세대(시 126:1)는 실제로 포로 상태(시 126:4)에 있었다.
그러나 과거 역사의 기쁨과 안도감이 찬양을 통해 회복되고 그것이 오늘의 현실에 적절하게 적용된다. 이후 세대는 스스로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성경의 역사를 오늘의 경험으로 생생하게 이어간다. 산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일들을 단순히 과거의 누군가를 위해 행하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소중히 여긴다.
실제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향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남방 시내들"(시 126:4)의 심상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갑작스럽고 강력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다. 유다의 남부지역은 건조한 사막 지역이다. 그러다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지면 갑자기 하천을 형성하고 급류로 흘러내린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한 해 농사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신 11:14, 신 28:12). 마찬가지로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두는 모습은(시 126:5, 6) 어려운 현재에서 행복한 미래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약속이다.
추수가 끝나면 고대 히브리 순례자들은 한 해의 열매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지고 온다(출 34:22, 26). 추수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적 교훈을 제공한다.
(이어서) 밭과 과수원, 포도원에 씨를 뿌리고 돌보는 고된 노동이 풍성한 수확의 기쁨으로 보상받는 것처럼, 하나님 백성이 겪고 있는 현재의 시련도 마지막 때에는 구원의 기쁨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큰 추수의 장면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을 가리킨다(아모스 9:13~15, 마 9:37). 여기에서도 기다림이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추수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도 수고의 열매와 결과를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교훈> 산 믿음은 과거에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일을 우리를 위한 일로 소중히 여긴다. 그들이 경험하는 현재의 시련도 마지막에는 구원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묵상> 주님께서 그대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분명하고 틀림없이 보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통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추수의 희망을 안고 씨를 뿌리라 ~ “불신의 악한 마음 때문에 우리가 만나야 할 역경이 많을 것이고, 거룩한 계획과 헌신한 노력이 가로막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이루어져야 한다. 흙은 단단하다. 그러나 묵은 땅은 갈아엎어야 한다. 의의 씨앗이 심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사들이여, 심은 대로 될 일을 될까 안 될까 의심하면서 멈추지 말라. 낭패하지 말라. 실망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교회증언 6권, 420).
<기도> 때로는 광야에 있는 것처럼 목마르고 굶주린 제 영혼을 보게 됩니다. 주님, 믿음의 눈을 떠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기 원합니다. 오늘의 시련도 귀한 열매로 바꾸어 주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고대합니다. 마라나타!
3월 27일(수)
하나님의 안식일의 쉼을 기다림
시편 92편을 읽어 보라. 이 노래는 안식일의 어떤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가?
“[1] [안식일의 찬송 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2]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3]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5]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6]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9]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11]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찬양(시 92:4, 5)하는 것과 의인을 에덴동산 같은 광경으로 묘사(시 92:12~14)하는 것은 분명 안식일이 기념하는 첫 번째 측면인 창조를 가리킨다. 이 시편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원수들을 이기신 주님을 찬양하며(시 92:7~15), 안식일의 두 번째 측면인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한다(신 5:12~15). 따라서 시편 92편은 과거의 창조와 현재의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평화와 질서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시 92:1)이시기 때문에 저 높이 계신 그분의 탁월한 지위는 백성들에게 적들이 넘볼 수 없는 우위를 제공하며 안식의 쉼을 누리게 한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은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낮은 곳으로 손을 펼쳐 주신다. 주님의 창조와 특별히 그 창조하신 세계를 구속하신 역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영감을 준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소망이 없는 타락한 피조 세계 가운데 산다면 특별하게 기뻐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고, 고통받고, 죽으며, 소망 따위는 없는 삶을 산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다!
"신선한 기름"은 새롭게 성별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겠다는 기자의 새로운 헌신을 의미한다(시 92:10). 기름 부음은 제사장이나 왕과 같이 선택된 사람을 성별하기 위해 행해졌다(출 40:15, 삼상 1. 10:1). 시편 92편의 기자는 기름 부음을 묘사하기 위해 일반적인 기름 부음과는 다른, 기름과 제물의 다른 부분을 "섞는 것"을 의미하는 독특한 히브리어 발랄(balal)을 사용했다(출 29:2, 레 2:4, 5). 이는 자신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 원함을 의미한다(롬 12:1).
안식일을 위해 봉헌된 시편에서 성별함의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어서) 안식일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표징이기 때문이다(출 31:13). 레바논의 종려나무와 백향목의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믿음이 자라나,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사랑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안식일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다(겔 20:20).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수적인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주님께서 언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히 4:1~10).
<교훈>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분을 찬양하며 다가올 평화와 질서를 소망한다. 안식일은 약속을 기다릴 쉼과 힘을 주고 그 사람을 성별하게 한다.
<묵상> 시편 92편을 묵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어떤 큰 희망이 제공되어 있습니까?
<적용> 안식일의 쉼과 약속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해 줍니까?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그대의 매일의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영원히 지켜질 안식일 ~ “안식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이 존속하는 한 안식일은 창조주의 능력의 표징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덴이 다시 지상에 회복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의 날은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해 존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매 안식일에’ 영화롭게 된 새 땅의 주민들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마 5:18; 사 66:23)”(시대의 소망, 283).
<기도> 주님 주시는 참 평안을 고대하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때로는 안식일에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죄 많은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저의 삶을 구별할 수 있게 하옵시고 매 안식일 평안을 누리며 참 안식의 주인을 기다리며 기억하게 하옵소서.
3월 28일(목)
아침에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5:3, 30:5, 49:14, 59:16, 92:2, 119:147, 베드로후서 1:19, 요한계시록 22:16을 읽어 보라. 아침이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시간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시 49:14)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시 92:2)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 119:147)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
시편에서 아침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아침은 절망과 고난의 긴 밤을 끝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준다(시 130:5, 6). 시편 143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현재의 죽음의 흑암(시 143:3)을 새 아침의 빛(시 143:8)으로 바꾸어 주시고 무덤(시 143:7)에서 "바른 길"(시 143:10, 쉬운)로 옮겨 주실 것이다.
마가복음 16: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의 아침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일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1-8)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은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아침을 열어주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는 시편 30:5의 약속의 능력을 온전히 경험했다. 우리의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시 30:5, 7).
샛별이 새날의 시작을 알리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영생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기대하게 한다(벧후 1:19).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계 22:16)이시며 우리는 그분이 더 이상 밤과 죄악과 사망이 없는 나라를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계 21:1~8, 25).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고 말할 때 무엇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것은 확실히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
"갈라진 요셉의 무덤 너머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승리를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산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느냐에 따라 생사가 좌우된다.
(이어서) 가장 높은 스랍으로부터 가장 낮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분만이 나는 내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 속에 죽음의 속박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시대의 소망, 785).
<교훈> 아침은 절망과 고난의 긴 밤을 끝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을 주며 죽음의 흑암을 새 아침의 빛으로 바꾸어 주신다.
<묵상>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세포 속에 죽음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대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며 죽음의 일시성을 알려줍니까? 우리는 왜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단두대에 선 바울의 최후 생각 ~ “바울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 즉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신 약속을 굳게 붙잡았다. 그의 사상과 소망은 오직 주님의 재림에 집중되었다. 사형 집행인의 칼이 내려오고 순교자에게 사망의 그늘이 덮일 때 그의 최후의 생각은 그의 최초의 생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큰 부활의 아침에 복 받은 자들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그를 환영하여 주실 생명의 시여자 그리스도를 뵙는 일이었다”(살아남는 이들, 319).
<기도>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메던 우리를 광명한 은혜의 나라로 옮겨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여 내 안의 어두운 것들을 다 몰아내 주시고 주의 빛으로 채워주셔서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3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정로의 계단 8장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을 읽어 보라.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시 37:7, 흠정역). 우리의 기다림이 힘겹고 불확실하며 외로울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의 제자들을 기억해야 한다(행 1:4~11). 제자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느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이 땅에 남겨졌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그날의 제자들보다 열망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들은 분명히 "주님, 지금 우리도 함께 데려가옵소서"하며 간절히 바랐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 생각과 달리 제자들은 좌절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은사를 기다렸고, 권능을 받아 세상에 전했다(행 1:12~14, 2:).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이행 불가능한 명령이다. 아무리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기다림의 무게가 우리의 연약한 자아를 누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갖는 것만이 그 압박을 견디게 해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면 그는 우리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 같이 행하게 될 것이요 또한 같은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사랑하며 그의 안에 거함으로써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정로의 계단, 75). 시편에서 평안과 만족을 찾으며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날마다 만날 것이다.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기다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의 기다림에 대해 토의해 보라. 기다림은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였는가? (롬 4:19~22, 히브리서 11장).
2. 우리의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시 37:34~40)? 모든 것이 마침내 해결될 때 우리는 무엇을 약속받게 될 것인가? 예를 들자면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실종된 정의에 대해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3. 죽은 자들에 관한 한(전 9:5), 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다림은 완성되었는가? 그 대답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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