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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樂浪公主)가 살던 죽령군(竹潭城)은 어디인가?
<삼국사기>는 왜 죽령(竹嶺)의 정체를 왜곡 하였는가?
신라 진흥왕 12년(서기551)에 신라,백제,고구려는 참으로 크나큰 전쟁을 치룬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실로 국세가 막강하던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와 백제가 연맹하여 유린한 대단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요동반도의 10여개군과 남평양을 잃었습니다.
신라의 거칠부장군이 여덟명의 신라의 명장들을 대동하고 고구려 공격에 나섰던 출발점에 죽령(竹嶺)이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령의 위치를 <삼국사기>는 한반도의 경기지방이라고 왜곡시켰습니다.
죽령은 요동반도의 남단에 있었던 남옥저와 낙랑국 그리고 후한의 낙랑군이 있던 자리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본기>의 진흥왕 12년조에는 이 전쟁기록을 단 두줄로 처리하여 축소은패를 시도한
흔적이 보이는것입니다. 열전을 통하여 거칠부의 기록을 봅니다.
당토황여전도(唐土皇與全圖) 위에 올린 서진군국도의 낙랑과 대방의 위치를 기명없이 표시한 지도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 지도에는 한반도의 지도에 경상도가 없다는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위치도 경기도의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그린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얘기지요.
당시 신라는 장산군도에서 상륙하여 벽류하를 북상하여 철령,즉 길림지역까지 진출한것입니다.
이때가 라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110여년 전 일입니다.
이후 이 지역을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기록은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제동맹을 이끈 거칠부
<신라의 전성기를 꼽으라면, 신라영토가 가장 북쪽으로 진축하였던 6세기 중엽진흥왕 시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진흥왕 시대를 이끌었던 두 인물이 이사부장군과 거칠부(居七夫)였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모두 내물왕계 자손이며, 신라왕족이었는데 이사부가 4대손이었고, 거칠부가 5대손
이었으니 종친서열상 이사부가 더 높다.
따라서 거칠부는 어려서부터 나라에 큰 뜻을 품고 있었지만, 이사부라는 거물의 그림자에 가려, 초기에는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떠돌다가 스스로 첩자가 되어 고구려 국경안으로 숨어
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거칠부는 고구려 국경안에서 혜량(惠亮)이라는 승려를 만나 깊은 가르침을 받고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혜량역시 거칠부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경우 자신을
해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또 거칠부역시 혜량을 끝까지 스승으로 모실것을 약속하였는데, 이 같은
그들의 맹약은 이후 신라의 고구려 공략에 중대한 기폭제가 되었다.
거칠부는 귀국후 대아찬직을 받게 된다. 그리고 545년(진흥왕 6) 이사부 장군의 건의에 따라 왕명으로
시행된 신라의 《국사(國史)》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는 파진찬직을 더하여, 국사편찬의 전권을 부여 받았는데, 그가 편찬의 전권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학문적인 수준이 높았음을 뜻한다.
하지만 국사편찬작업은 비록 지위는 높았지만, 핵심요직은 아니었다.
역시 삼국시대에서는 전선에 나가 전공을 세워야지만, 진정한 대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기 551년 진흥왕 12년, 그는 신라총장을 맡아 나제동맹을 이끌며 고구려를 공략하게 된다.
그런데 신라는 고구려군과 직접적으로 싸우기 보다는 영토를 넓히는 실리적인 전략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백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동안, 신라는 별다른 전쟁도 없이 죽령(竹嶺) 이북의 10여성을
획득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전의 스승이었던 혜량과 재회하게 되었다. 더구나 혜량은 '지금 고구려는 정치가
어지러워 곧 멸망할 것이니, 신라로 귀화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이같은 혜량의 회의적인 시각에는 당시 불안정하였던 고구려의 정세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양원왕이 왕권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그는 부왕이었던 안원왕의 다른 왕자를 지지하던
세군(細群)에게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
따라서 고구려 양원왕은 집권초기부터 상당한 심각한 왕권분쟁이 있었고, 양원왕 재위 7년만인 551년에는
북방초원의 신흥 유목민족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돌궐에게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
받기도 하였다. 바로 나제동맹의 결성과 고구려 공략은 이러한 국제정세와 맞물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거칠부는 별다른 전쟁도 치루지 않고 10여성을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고승인 혜량과
함께 마차를 타고 귀국함으로써 스승과의 약속을 근10년만에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혜량의 행위는, 일신의 출세를 위한 매국행위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진흥왕이 혜량을 곧바로 승통으로 삼고 그의 건의에 따라 대대적으로 팔관회등을 개최한 것만 보아도,
혜량은 보통의 인물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거칠부는 고구려에게 영토적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문화종교계 거물인 혜량을 영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신라의 전성기를 구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문무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한 거칠부는 576년(진지왕 1)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78세로
사망하였다. 진흥왕순수비(巡狩碑) 중 마운령비(摩雲嶺碑)와 창녕비(昌寧碑)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당시 거칠부가 획득한 땅은 지금의 함경북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낙랑국(樂浪國)의 자명고(自鳴鼓)진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장해현이 장산군도의 행정 중심지 북쪽으로 그려진 항로가 피구항으로 연결된 18해리.
이곳을 낙랑국의 중심지로 추정함.
장산군도는 같은 바다같지만 외장산열도와 리(내)장산열도로 구분됨. 소해와 대해의 다른 표현으로 추정함.
목책(자료사진): 기습을 방지하기 위한 해양 방어시설.
유달리 초기 백제의 온조왕조에는 목책 얘기가 많이 나옴
낙랑국은 위만에게 추방당한 준왕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준왕을 보좌하던 최숭은 낙랑국의 제후였습니다.
그는 준왕이 축출되기 1년전에 이미 보물들을 한배 가득 반출하였다고 <한단고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보물들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마한도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가 익산 금마군이 아니라 금주 금마군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 있던 섬을 장악하여 낙랑국을 경영한것입니다.
이후로 고구려의 건국과 깊숙히 관계하게 되고 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2세 단군 모 수리 재위 35년
정미원년(B,C 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 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 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 제께서 상장 연타 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 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 단 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이 계림전도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만주지역 책성의 범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안지역은 책성의 밖에 위치함으로 책성이 등장하는 기록에서는 제외시켜야 합니다.
길림지역을 울타리처럼 들러 싸고 있는 성책중에는 오직 봉황성만이 책성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고구려는 동부여가 위치하던 이 책성을 점령하고 그 자리에 석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과 마지막 대막리지 연남생도 봉성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그의 비문을 통하여
밝혀졌습니다.
개주의 웅악성과 웅악하 그리고 봉황성일대를 예맥족의 고지라고 하는것은 웅악성 근처에 천연의 곰바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
<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추모대제기>>대무신데제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북으로 도망하여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 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
<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苓郡>. < 樂浪>自<柴吉>四世八十餘年而國除. 七月,
<大解>太子薨.
*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의 새 도읍(압구)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내었더니, 그녀가 <호동>을 위해 고각을 망가뜨리고
(호동을 성 안으로) 받아들이니, 왕이 대군을 <옥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서 배를 타고 건너가 그 도읍을
뿌리뽑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았더니 귀복하였고, 그 땅은 <죽령군>으로 삼었다.
<낙랑>은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되었다. 7월, <대해>태자가 죽었다
3세 단군 고 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 랑 왕 최 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 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 처럼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 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 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 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 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
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
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戊申二年帝遣上將延 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
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
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國
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엄사수를 건너면서부터 기록을 시작합니다.
*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게 하였다.
* 元年甲戌五月立召西奴爲妃
원년(B.C.47) 갑술 5월 우태가 왕으로 서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日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舊?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상을 걸었다. 7일간 큰비 후에 도읍이 떠내려가고 군사를 일의키어 (백성을)
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은 스스로 지혜와 덕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추모(上:여기서는 임금을 뜻함)가 그 땅을 고국원으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땅은 추모(盖가 추모를 뜻함)의 아버지 해모수가 어머니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七月以黃龍國男丁三千人爲軍女丁五千人爲婢. 冶工三十取?兵船二伯隻成.
7월 황룡국 남정(성년남자) 3천명을 군인으로 하고 여정(성년여자) 5천명을 하녀로 삼았다.
대장장이 30명을 구하고 싸움하는 배 2백척을 만들었다.
*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逐于水(黑龍江)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七月,宮室成,茅茨土階. 九月,<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 召樂浪王柴吉獵于河南(富錦)
낙랑왕 시길을 불러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 七月東明神宮成茅茨土階
7월 동명신궁을 흙 층계위에 띠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 九月禾妃生子乙豆智.
9월 화비(황룡국왕의 딸)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 以柴吉女柴花妻陜父
시길의 딸 시화를 협부(협보)의 처로 삼았다
*壬午春與樂浪王柴吉定(원문은 약자)界以奄利東興?之使安其心. 遣再思于卒本修和. 卒本王延陀勃以女召
西奴妻之. 解(원문 角+羊)弗以禮氏爲妻.
임오(B.C.39)년 봄 낙락왕 시길(柴吉)과 경계를 정하여 이로써 엄리의 동쪽을 편안하게 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재사를 졸본으로 보내어 나라를 합쳐 다스리게 되었다. 졸본왕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처로 삼았다.
해불이 예씨를 처로 삼았다.
*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而<馬黎>敎<溫祚>,
上與<召>后,時往聽之.
15년(단기2311년/BC23)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자, 배타고 바다에 떠서 <시길>에게 들려
그의 딸 <작>을 얻었다.
8월, 신마 2천필을 둘러보았으며, <마리>에게 <온조>를 가르치라 하였었는데, 이때 상은 <소>후와 함께 가서
(온조의 교육상황이 어떠한 지를) 들었다.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
<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추모대제기>>대무신
데제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북으로 도망하여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 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苓郡>. < 樂浪>自<柴吉>四世八
十餘年而國除. 七月,<大解>太子薨.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의 새 도읍(압구)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내었더니, 그녀가 <호동>을 위해 고각을 망가뜨리고
(호동을 성 안으로) 받아들이니, 왕이 대군을 <옥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서 배를 타고 건너가 그 도읍을
뿌리뽑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았더니 귀복하였고, 그 땅은 <죽령군>으로 삼었다.
<낙랑>은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되었다. 7월, <대해>태자가 죽었다.
*최숭으로 부터 계산하면 기원전194년~기원후 54년까지 약 248여년을 유지한 셈입니다.[주1]
이곳은 주몽이 동순하여 낙랑에 이르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가 시길의 딸 작부인을 아내로 맞어
대려왔으며, [주2]
대무신왕 역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들어가 최리의 내외를 사로 잡았다고 하였습니다.[주3]
이후로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칠때도 역시 배를 타고 건넜으며[주4]
위(魏)나라경초때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어 낙랑,대방 이군을 평정할때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주5]
낙랑국은 시작하는 당시부터 최숭이 배로서 준왕의 보물들을 사전에 배에 싣고 옮겨왔고, 해성에 300석의
쌀을 바치는가 하면 이후로 마한도왕검성(馬韓都王儉城)으로 옮겨와 한왕이 된 준왕을 보좌하였습니다.
[주6]
*주석에 대한 자료
[주1][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
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
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한단고기><북부여기 상>
[주2]**◎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0年
[주3]○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삼국사기>는 이 대목에서 <고구려사략>에서 보이는 도해(渡海)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을 제외시켰습
니다. 그렇다면 상세한 부분에서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신빙성이 높은것을 알수 있습니다.
도해 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은 숨겨진 강역을 추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추모대제기>
대무신데제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 최리>는 북으로 도망하여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주3]**◎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
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苓郡>.
<樂浪>自<柴吉>四世八十餘年而國除. 七月,<大解>太子薨.<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주4]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三國志/魏書/卷三十 魏書三十/東夷/韓]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7年
[주5]○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삼국사기><고구려본기>
[주6]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
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
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한단고기><북부여기상>
맺는말
처음에는 기원전 194년 최숭으로부터 시작된 낙랑국은 중간쯤에 최리가 등장하였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무렵에는 시길이라는자가 낙랑국의 왕으로서 요동반도의 남쪽바닷가 대장산도에 머무르고 있었
습니다.
당시 이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무리들이었기에 주몽도 만만히 보지를 못하고 포용을 할려고
노력하였던 흔적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시길의 딸인 작을 부인으로 받아드렸고, 후에도 계속하여 혼인길은 열려있었지만 대무신제때
이르러 일격을 당하고 북주하여 남옥저로 패주한것이 서기47(37?)년이었습니다.
남옥저로 달아났던 시길은 또다시 대고산(남옥저)앞에 바다로 떨어져있던 대록도에 둥지를 틀고 있었으나
호동왕자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서기44년 4월에 대무신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는데 이해 9월에 후한의
광무제 세력에 다시 빼앗기고 대무신은 다음달 10월에 죽게됩니다.
추정하긴 대무신은 후한과의 싸움에서 얻은 타격으로 죽었다고 보는것입니다.
이곳이 죽령군으로 불려진 이후에도 신라와의 잦은 충돌이 있었고 신라는 이 죽령군을 거점으로 고구려를
괴롭혓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거칠부의 요동진출사건이었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붙들려있을때 연개소문은 죽령을 돌려달라고 위협까지 하는 광경을 읽을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록도(大鹿島)는 새롭게 등장한 낙랑공주의 친정이고,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 죽령이었습니다.
<북부여기>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성지역을 중부여라고 한것입니다. 애매하던 부여들의 위치를 참고하는데 중요한 흰트가 될것입니다.
해성은 당시 개주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사비성이 그곳 바다에 있었으니까요.
戊申二年帝遣上將延 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
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
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무신 2년 단 제께서 상장 연타 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 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바다에서 생멸한 한사군의 정체
한 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한국의 통설은 아직까지도 북한 지역에 있었느니 없었느니 우왕좌왕이고, 변두 리의 사학자들 역시 난하 북 동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역사는 실증 위에서만 존재 한다던 강단사학자들은 어이없게도 사서의 근거들을 올바르게 해독하지 못하여 스스로 왜곡을 자행하고 이러한 부당성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소위 재야 사학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이유있는 반론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해명을 하지못하고 있습니다. 습니다. 이 사서의 근거는 <사기>의 정의에 의거 하였습니다. 첫번째로 올려놓은 지도에는 조금 복잡한 글들이 있습니다. 지도의 아래쪽 왼쪽부분에 붉은색 원안에 표시 된것들은 험독같은 수로(水路)의 이름입니다. 아홉개의 수도가 있지만 이중 비교적 큰 물길을 7개로 보고 이를 칠중하(七重河)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창해군. 진번군. 3. 임둔군. 4. 현도군. 남옥저성. 고구려현. 일명(貊) 2+3+4=예맥조선 임시 네모안에 있던 낙랑군과 진번군은 B,C 82년 낙랑군으로, 원 안에있던 임둔군과 현도군은 현도군으로 각각 통합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진번군과 임둔군은 패지 된 것입니다. 한 무제가 창해군설립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곳은 2번자리의 진번군 자리입니다. 왕험성을 격리 시키기 위한 작전 이었다는것을 이해하실줄 압니다. 다시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인 정의를 올려 근거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앞에 제시된 <사기> 조선열전의 첫번째 기록에대한 정의의 주석입니다. 이상 소개드린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조선에대한 기록은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거기에 위만조선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것입니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조선 고려 맥 동옥저등 오국의 땅은 동서로 천삼백리, 남북으로 이천리인데, 경사(낙양) 동쪽으로 동에 이르러 큰 바다와 만나고, 바다안에서 사백리리다. 북으로 영주경계에 이르고,거리는 구백 이십리다. 남으로 육백리를 가면 신라국에 이르고,북으로 천사백리거리에 말갈국이 있다.] 5000리라는 기록과 등주라는 지명을 볼수 있읍니다. 등주가 오천리라는 기록은 <동국고승전> 에서도 볼수 있읍니다. 이 곳을 산해경 에서는 조선의 위치를 "동해지내"라 하였고, 한서 지리지 권24 와 자치통감 에서는 "연제 지간"이라 하였읍니다. 이 곳이 갈석을 지나 동으로 낙랑과 현도군을 두었다고 하는 위치로 봅니다. 위의 기록에서 주시할것은,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때는 현도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현도는 이미 남 옥저로서 위만의 제후역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남옥저성의 저항이 심하여 일년뒤인 B,C 107년에야 현도군이라는 이름으로 한사군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이들이 맥(貊)족 또는 말갈족 이라고 부르던 전사족 들 이었습니다. 현도군의 치도(治都)가 고구려현 이라는 기록에 따라서 고구려가 마치 900 여년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후대에 전해져서 후학들을 햇갈리게 하고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북한의 모학자가 권위자라는 설까지 떠돌고 있을정도로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人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蚡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舉矣.] 〔고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지 못하여, 응당 80세 되는 대장이 있어 멸망 시킨다'라는 말이 있으니,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운지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세적의 나이가 80이니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오랑캐들은 거듭 배고프고, 사람들은 서로 노략질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위기에 있으니, 이번에 행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니다. 한사군 초기때 현도군의 치도로 등장하는 고구려현은 다만 지명일뿐 나라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구려라는 지명이 약 70 여년후에 고주몽에 의해서 국명으로 바뀌는 모태가 되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이 자리에 있었던 현도군을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하여 B,C 75년 북쪽의 천리밖으로 몰아 낸뒤 그 자리에 송양국이 세워졌고 또 다시 38년 뒤에 고구려가 건국되었습니다. 두 계 이 병도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연구>에서 현 도군 얘기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습니다. 徙 郡 句麗西北, 今 所謂 玄 도 故 府, 是 也 沃沮還屬樂浪. 사 군 구려 서북, 금 소위 현 도 고 부, 시 야 옥저환속낙랑. 뒤에 이 맥의 침범으로 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다. 지금의 소위 현도 고부다. 이 현도 고부 옥저는 낙랑으로 환속되었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 동이전 동 옥저 조에도 대동소이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서의 이야기를 이 병도 박사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옥 저 성을 함흥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사>지리지 동경도 조에 "해 주 남해군 절도"(海 州 南 海軍 節度), 본 옥저국지(本 沃 沮 國 地)" 라는 설명 때문에 해석이 엉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맹랑한 얘기라고 부정을 한 것입니다. 요동반도의 서쪽에 있던 개주와 그 남쪽에 있던 남옥저성 (북황성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함흥으로 이동시켜서 합리화 시켜볼려고 하였으니 맞아 떨어질리가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B,C 75년 현도군의 한나라 세력들은 이적(맥족)들의 기습을 소화하지못하고 급기야 북쪽으로 천 여리 떨어진 북옥저의 무순에있는 신성으로 쫓겨났습니다. 이 곳이 천산산맥의 맨 북쪽의 종착지 입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여기서도 북쪽으로 장춘 근방까지 더 올라가야 됩니다. 이 곳을 제이의 현도군으로 삼은 이유는 이 곳이 요하와 가까운 북쪽의 요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고구려현도 같이 이동한 셈이지요. 그리고 떠난 현도를 원도라고 부르게 된것입니다. 그 들은 먼곳으로 작전상 이동하였지만 위만조선의 핵심부였던 왕험성의 위치는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요하와 근접한 위치로 옮긴 것입니다. 막강하던 한나라의 국력을 앞세웠던 한 사군중의 현도군이 제일차 현도군을 쫓겨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게릴라전 밖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던 맥족들의 기습을 견뎌내지 못한것입니다. 주변으로 흐르고 있는 비류수.사수. 오호해. 소요수등으로 불리우던 물길의 비밀을 익히지 못한데다, 인해전술이 통하지않는 복잡한 물 때문이었습니다. 후일 이곳에서 벌어졌던 수 천의 방효태군을 몰살시켰던 사수전투가 그 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무나 그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적을 추격하다가 물이 도는곳으로 들어간다면 진퇴는 장담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한나라군은 이 비밀을 풀어내지 못하여 수없이 많은 군사들을 수장시키고, 견디다 못하여 쫓겨난것입니다. 다음 기록은 "고구려의 귀속문제에 관한 몇가지 논쟁의 문제점"이란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손진기의 글 중에서 추출한것입니다. 출처는 고구려연구회입니다. 기원전 108년에 벌써 정식으로 한(漢)나라 현토군의 한 현이 되었고, 졸본부여(卒本夫余)도 한나라 현토군이 관할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이것은 모두 당시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 즉 오늘의 중국 영토에서 진행된 것으로 오늘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가 일어난 곳은 조선반도 북부가 아니고, 압록강 이북은 낙랑이 아니라 현토에 속한다. 것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관점 역시 명확하지 못하다. 오직 네 번째 관점만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데, 우리 나라에서 일찍이 비교적 정확한 관점이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관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개별적인 관점은 여전히 차이가 있다. 고구려가 조선반도 북부를 차지하기 전, 당시 반도 북부는 어디에 속했는가?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오늘날의 중조(中朝) 두 나라 국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반도 북부는 진(晉)의 낭랑군에 속했고, 그 이전은 한(漢), 위(魏)의 낙랑군에 속했고, 그 이전에는 한(漢)의 위씨(衛氏)조선에 속했고, 그 이전에는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 ), 주(周)와 연(燕)의 속국인 기씨(箕氏) 조선이었다. 상나라 기자(箕子), 그 다음 연(燕), 제(齊), 조(趙)의 망명자들이 낙랑군을 세운 뒤 이 지역은 한족(漢族)의 방언구(方言區) 가운데 하나로 변했다. 재령강) 사이』를 한어(漢語)의 방언구로 보았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한인(漢人) 및 그 선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반도 북부가 오늘날의 조선 민족 거주지가 되고 오늘날 조선의 일부분으로 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가지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 된다. 게다가 당시는 중조(中朝) 두 나라 영토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우리는 과거 15세기에 건립한 이씨조선과 기원전 11세기에 건립한 기씨(箕氏)조선, 기원전 2세기에 건립한 위씨(衛氏)조선을 서로 혼동하고 있다.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이들은 민족 구성과 국가 귀속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고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된다. 5세기 후 고구려는 조선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나누는 것으로 당시 국경 을 가지고 보면 5세기 전후 고구려는 모두 중국 영토에 있는 중국 지방정권이다. 이상의 글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전사라는 역사서에 대한 반론으로 작성된 내용중의 일부입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을 뻔뻔히 지껄이는 그 들의 얼굴은 철면피가 된지 오래입니다. <위지등>은 전연히 거론도 하지않고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방언에관한 글을 내 세워 연나라의 동북부에 있던 열수가 지금의 대동강과 재령강 일대를 말하고 있기때문에 북한의 반쪽은 과거부터 중국 땅이라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연나라의 동북에 있다는 조선의 열수를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합니까. 그 열수는 요하가 틀림없는 사실인데도 막무가내입니다. 연나라의 동북에 조선이 있었다면 그럼 연 나라는 조선의 서남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쯤 된다고 보십니까?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주장을 이렇게 해도 그 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짓은 치욕이 안된다는 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탄생에대하여 <삼국사기> 권 제 37의 잡지 제6 지리지 4 고구려에는, 고구려의 탄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성과 졸본은 한 곳인것 같다. <한서> <지리지>: 실은 <후한서>군국지 위)에는 "요동군은 낙양과의 상거가 3600리요, 속현에 무려가 있다"고 하였는데, 무려는 곧 주례(周禮)에서 말한 북지 의무려산이다. 후세 대요가 그 아래에 의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현도군은 낙양과의 상거가 동북쪽으로 4000리요 속현이 셋인데, 고구려가 그 하나로 되어 있으니, 주몽이 도읍하였다는 홀승골성과 졸본은 대개 한 현도군의 경내요, 대요국의 동경(지금 요양) 서쪽이니, 한지의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인 고구려가 (혹시) 이것이 아닌가?... 하략... 니다. 그리고 현도군은 낙양에서 의 거리가 4000여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설명도 부기되어 있습니다. 실증을 생명으로 한다는 사학계에서 이러한 뚜렷한 사서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어떻게하여 현 압록강의 중류에 있는 집안현과 환인현을 고구려의 탄생지로 추정을 하는것인지 정말 황당한 괴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입니다. 이 문장에서도 특별히 큰 물에대한 설명이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인류의 문명은 강을 끼고 발달 하는것은 상식이지만 고구려처럼 강과 바다 얘기가 많이 나오는 예는 드문 현상입니다. 이 글에서 서안평(西安平)이라는 지명의 위치는 개주의서쪽 바다 근처에 있다가 발해로 윤몰된 지명으로 이해를 해야 될 듯합니다. 에 있던 지명으로 추정을 해봅니다. 이 서안평이 뒷날 엉뚱하게도 단동 근처로 옮겨져 있으니 혼동이 올 수 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물의 근원이 태자하이고, 소요수(小遼水)라고 부르던 물입니다. 일부가 대요수(大遼水)인 현 요하로 합류가 되고 본류가 요동반도의 서쪽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서 비류수인 바다로 합류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만, 일부 지류가 요하로 합류되던, 한서 지리지에 보이던 요동군의 험독도 윤몰되어 바다로 살아지고, 서안평을 통해서 비류수로 합류되던 소 요수도 바다로 윤몰 되어 살아졌습니다. 또 '서북계도'를 보시면 소요수와 대요수가 합류되는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들어간다. 고구려의 별종은 작은물을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 들을 소수(小水) 맥 이라고 불렀다. 좋은 활이 생산되고, 그 활 이름을 맥궁(貊弓) 이라 불렀다.] 이렇듯 한 사군은 B,C 108년에 낙랑. 진번. 임둔군의 3개군으로 시작하여 B,C 107년 현도군이 참가함으로 정히 4군이 성립 되었고. 그 후 B,C 82년에 4개군을 2개군으로 줄이게 되는데 이유는 원주인구가 많이 빠져나가서 군세(郡勢)가 줄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의 낙랑과 현도군의 군세를 보시겠습니다. 전과 후가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서> 및 <<후한서>>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표의 대략적인 분석은 현도군이 비교적 변화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인구수가 221,845명에서 43,163명으로 무려 178,682명이 줄었습니다. 이는 B,C 75년에 3개현이 강제로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심하여 집이 많이 파괴된 결과로 가구당 인구수가 무려 27,1명 이라는 황폐화 되었던 현장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은 없었던지 가구당 인구수는 6,5명에서 4,2명으로 줄어든 현상을 보입니다. 현도군의 인구 감소는 무려 80%가 살던 땅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만약 섬이 아니고 내륙이라면 거의 불가 능한 얘기입니다. 이렇게 폐허가 된 곳에 졸본부여인 송양국이 세워지고, 38년후에 고구려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74년후인 서기 37년 제 3대 대무신왕 20년에 전 한의 무제가 세웠던 낙랑군은 고구려의 대무신왕 에게 멸망하게 되고, 최초 4개군으로 시작하여 최종으로 낙랑군만 남았던 고조선의 뿌리 위만조선의 땅은 이렇게 고구려에게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은 서기 30년 후한의 광무제가 영동7현의 관활권을 포기한 뒤에 고구려의 투쟁으로 얻어진 광복이었 습니다. 낙랑군을 개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의 최초 낙랑군은 145년만에 망하고 7년뒤에 다시 새로운 후 낙랑 군이 개설되는 것입니다. 이 전쟁으로 5000 여명의 조선 잔류민이 장도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삼한땅에 있던 신라로 이동하게 됩니다. (九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