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이가인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날에는 슬픔이가진 장악력을 믿는다 어린아이처럼
사거리 도로 한가운데 모두가 나를 본다 나만 사랑한다 믿으면
펭귄처럼 걷게 된다 전봇대가, 어지러운 간판들이 하나같이 귀여워진다
차들은 멈춰서고 타이어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멀리서 주차 안내요원이 뛰어온다 사방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좋아서 잠자코 서 있다 분노가 내는 다정한 불협화음
나를 데려가주세요 순순히 손 내밀기 아니면 손들고 걷기
언젠가 들은 적 있지 거리에서 사슴을 보면 멈추지 말고 쳐버려야 한다
눈이 마주쳤어도?
심장이 덜컥 흔들렸다고 해도 갑자기 뛰어든 생명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니
나는 사슴도 아니고 펭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기도 아닌데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믿는 말이지
질투를 하는 사람의 눈은 멀어버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던데
앞을 보지 않는 내가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미움도 사랑도 독차지하고 싶다 소리 없는 울음이 도로를 정체시킨다
가끔 영화를 보다 잠이 든다
거긴 내 자리예요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영화관에 앉아 있지만
무언가 시작되면 잠이 온다 빛나는 거미불이 눈거풀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눈을 감은 사이에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떠났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은 몰래 입을 맞추고 알람을 끄고 손톱을 물어뜯고 신발 끈을 묶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검은 화면에서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왔던 것 같아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붙들고 별점을 매겼다
가끔 잠에서 깨면 꿈에서 본 것들이 영화였기를 바란다
바다에서 고양이랑 나랑 살고 싶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물이 흐르는 거리
우리 지금 너희 집 앞에서 헤엄치고 있어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사람들이 잠든 바다 웅크린 고양이가 넘실거리는 바다 저 멀리서 파도가 흰 천을 벗어던지고 달려들었다
반짝이는 빛들은 저마다 혼자였고 손을 뻗으려고 하는 순간 영화관 안으로 파도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람들은 내가 놓친 장면만을 궁금해했다 영화가 어땠냐고 물으면
나 아까 저기서 고양이를 봤어 말했다
이가인 숭실대 영화예술 4년
심사평
‧ 시 부문 2024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에는 상당한 수련을 거친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작품이 많았다. 안정적인 문장의 운용을 통해 다채로운 감각을 펼쳐내는 투고작들을 읽으며, 무엇보다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 기뻤다. 시를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기쁨, 세계와 마주하는 즐거움을 잘 누리고 있음이 작품에서 잘 읽혔기 때문이다. 다만 대학생 작품에서 주로 나타나는 좁고 작은 세계 안에서 머무르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쉽게 느껴졌다. 좋은 문학이란 이질적이고 낯선 것에 몸을 기울이고, 바깥을 향해 나가는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심사에서는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시를 펼치는 작품을 찾고자 했다. 3명의 심사위원이 작품을 나누어 1차 심사를 진행했고, 2차 심사에서는 「중심과 테두리」 외 4편, 「밤마다 어깻죽지에서 깃털을 뽑아 잉크를 찍다가 미쳐버린 새에게」 외 4편, 「뒷면」 외 4편, 「제 자리」 외 4편, 「챔피언스리그」 외 4편,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외 4편, 「밤의 유리창의 앞에 서는 일」 외 4편, 「너를 지키려고 지구를 지켰어」 외 4편, 「유리 구두」 외 4편, 총 9명의 작품을 검토하였다. 이 가운데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밤마다 어깻죽지에서 깃털을 뽑아 잉크를 찍다가 미쳐버린 새에게」 외 4편과 「중심과 테두리」 외 4편,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외 4편이었다. 「밤마다 어깻죽지에서 깃털을 뽑아 잉크를 찍다가 미쳐버린 새에게」 외 4편은 시가 거느리는 에너지와 호흡이 좋았다. 정서는 다소 과잉되어 있으며, 문장 또한 때로는 잘 조율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도, 그런 불안함과 과잉까지 포함하여 이미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지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가 바라보는 세계가 다소 좁게 느껴진다는 점, 결국 이 모든 상상력의 범주와 방향성이 다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시가 품고 있는 칼날이 조금 더 예리하게, 그리고 외부를 향한다면 좋겠다. 「중심과 테두리」 외 4편은 장면과 상황을 잘 다루며 시의 레이어를 풍부하게 만들어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긴장감이 때로는 감각으로, 때로는 내러티브를 통해 구성되는데 그 긴장을 쉽게 해소하지도 않고, 폭발시키지도 않은 채로 절묘하게 시를 잘 이어가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정교한 장면의 구성과는 달리 언어가 다소 늘어지는 면이 있었다. 또한 이 긴장을 끌고 어디에 도달하는가 하면 달리 가는 곳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시가 항상 이동이나 도약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갈 힘을 남겨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논의 결과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외 4편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수상작이 결정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시라는 점이 좋았다.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점 없이 문장이 흐르는데, 그것이 쉽고 익숙한 방향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미지의 자유로운 연결이 돋보였으며 그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문득 낯설고 이상한 자리에 도착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침범하지 않고,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시적 주체의 결기는 어쩌면 오늘날의 젊은 시에서는 익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펼쳐 보이는 방식만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 섬세한 예민함이 앞으로 우리 시의 지평을 더욱 넓히리라 기대해 본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작품을 투고한 모든 이에게는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소연 이현승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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