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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과 또 바울을 보면서 그리고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들으면서 고민하는 벨릭스 총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인생이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지 12일
바울은 이 세 가지 결백한 삶, 이 세 가지 결백한 삶, 믿음과 진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는 그것이 바울에게는 어마어마한 힘이었어요. 권력자 앞에서도 어떤 대적하는 무리 앞에서도 바울은 당당했고 항상 자신이 있었고 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힘은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결백하고 또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적으로 거리낌이 없으면 우리는 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 자체가 힘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자같이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연하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굉장히 당당해 보입니다. 크리스천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출세해서 권력을 가졌대 좋은 자리에 올라갔대 많은 재물을 얻었대 이런 거보다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거예요. 내가 그랬으면 하는 거지.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에요. 결백한 삶, 내가 믿고 있는 그 신앙과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그런 자신만만한 모습들 그런 것을 우리에게 기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 사실은 자기들하고 다르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욕도 하고 박해도 하지만 그러면서 한 면에서는 한쪽 마음에서는 존경하고 부러워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랬어요. 초대교회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까? 사람들이 힘없는 이 사도들을 박해하면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면서 동시에 그들은 두려워했어요. 그리고 존중했어요. 로마 시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거대한 로마의 세력 앞에 그 박해 세력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힘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예요. 결백한 삶 그리고 자기가 믿는 믿음에 대한 확신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모습 그걸 보면서 로마인들이 점점 마음을 열고 그 강력했던 로마가 이 사람들 크리스천들의 전해준 그 복음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매력을 주고 또 도전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이 진짜다. 우리를 막 박해하면서도 욕하면서도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진짜 그래도 믿는 사람이야. 믿으려면 저렇게 믿어야지 내가 만약 믿는다면 저렇게 믿겠다 그렇게 생각해요. 나일롱처럼 그냥 왔다 갔다 하고 이게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그리고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힘이 없어요. 그렇게 믿을 바에는 나 안 믿겠다. 그렇게 세상 사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바울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을 보면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들으면서 복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벨릭스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울을 만나면서 벨릭스의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사실 바울이라고 하는 예수님 다음에 가장 걸출한 그 전도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굉장히 강박한 사람이겠죠.
근데 바울을 만나면서 이 벨릭스에게 변화가 시작이 됐어요. 그래서 재판을 빨리 결정하지 않고 아예 그냥 유대인들에게 내어줄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안 하고 재판을 연기하면서 천부장 루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오면 그때 결정하자 이렇게 하면서 계속 재판을 지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호감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바울에게 자유도 주고 친구들이 와가지고 바울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줍니다. 호의를 베푸는 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열고 바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바울에게 호의를 호의를 베푸는 그 배경에는 벨릭스의 부인이 있었어요. 그 부인은 유대 여자였습니다. 두루실라라고 하는 유대 여자였어요. 유대인들도 그 여성들이 신앙을 신앙이 더 견고합니다. 이 두루실라라는 여인과 결혼하면서 벨릭스는 그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미 유대교에 대해서 바울이 전하는 도에 대해서 이것 좀 꺼주세요. 와서 이거 껐다 켰다 해가지고 여러 사람 나만 헷갈리나 바꿔주세요.
그래서 이 벨릭스가 이미 유대교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과 그들의 도에 대해서 이미 관심을 어느 정도 두고 있었고 또 아는 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아내와 함께 바울을 불러가지고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눈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도 한 번 나오죠. 아내와 함께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을 불러서 그가 전하는 예수의 도에 대해서 의와 절제에 대해서 그리고 장차 곧 임하게 될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들었어요.
여러분 이 남자하고 여자하고 비교를 하면 남자보다는 여성들이 훨씬 이 영적인 일 이 신앙적인 일에서 더 민감합니다. 훨씬 센시티브해요. 그래서 빨리 받아들이고 더 깊이 수용을 하고 헌신하고 따릅니다. 그리고 대개 여성들이 끝까지 그 신앙을 따라가는 걸 보게 돼요. 예수님의 마지막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안에서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들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여성들만 있었어요. 그 여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남자들은 약간 둔한 면이 있어요. 일은 밖에서 잘하고 하지만 이런 내면적인 거 영적인 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분은 얘기를 해도 이게 빨리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깊은 관심이 없어요. 물론 남자들의 장점은 대신에 한 번 믿으면 확실히 믿고 헌신을 하면 좀 큰 보폭으로 합니다. 크게 크게 하는 그런 장점이 있지만 대개 처음 받아들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부부가 나와도 부인들은 쫙 성장을 하는데 남편들은 성장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오래 걸립니다. 그러다가 이제 신앙이 한 번 주님을 만나고 깊이 들어가면 그분들이 큰 헌신을 하게 돼요.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물론 여성도 남성 남편을 잘 만나야 되지만 남자들은 남자는 세상을 움직입니다. 근데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을 가진 그런 사람을 만나면 좋은 신앙을 갖게 되게 돼 있어요.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잘 협조가 안 되면 성장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독교를 로마에 공인한 그런 황제죠.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 헬레나 여사가 있었어요. 그 어머니가 기독교를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들에게 영향을 미친 겁니다. 기도했겠죠. 복음을 전했겠죠. 또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황제가 그걸 받아들이게 되고 이제 로마가 점점 기독교 국가가 되는 과정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 헬레나 여사는 나중에 이제 예루살렘에 가가지고 예수님 돌아가신 지 300년이 지났으니까 거기에 뭐 흔적이 있겠어요? 다 가서 그 예수님의 발자취를 거증하면서 거기에 오늘날 우리가 성지 순례를 가는 그런 유적들을 다 찾아냈다고 그래요. 여성의 힘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그의 어머니 모니 가가 있었어요. 어거스틴이 방황할 때 진리를 찾아 헤맬 때 끊임없이 뒤에서 기도하면서 그 아들에게 예수 잘 믿어야 된다고 복음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하면서 도와주었던 사람이 어거신의 어머니 모니카입니다. 이 어거신은 고향이 어디냐 하면 알제리 튜니지 지역이에요. 알제리 출신이면서 튜니지 타가스테라고 하는 곳에서 크게 활동했던 사도 바울 이후에 최고의 기독교 인물입니다.
근데 그가 변화되는 데는 모니카가 있었어요. 이 여성은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어요. 북아프리카의 까무잡잡한 여인입니다. 정열적인 여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믿었어. 그래서 자기 아들에게 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 진리의 길을 가도록 기도했고, 그래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잖아. 그리고 계속 아들을 따라다니면서 설득하고 설득했어요. 나중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피할 정도로 그러나 그 아들이 결국은 변화됐어요. 어머니의 힘입니다.
프랑스 왕국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 이 사람은 전사였어요. 그래서 전쟁 때 사람 죽이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을까 그 배경에는 그의 부인 끌로틸드라는 여자가 있었어요. 저쪽 프랑스 남동부 지방에서 십집을 온 이 왕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이 덕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남편을 감동시킨 거예요. 그래서 그는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고, 이 프랑스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그 시작이 여기서 출발을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는 세상을 다스리고 움직이지만 그 남자를 다스리고 움직이는 사람은 여자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청년들 남성 셀리바테르 청년들은 좋은 신앙을 가진 자매를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남자들은 없나 봐 꼭 그렇게 만나기를 바래요. 그리고 이미 만났거나 결혼하신 분들은 어쩔 수 없어요. 대신에 그걸 뭐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헤어지라고 하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그분들이 더 잘 믿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게 좋아요.
벨릭스의 뒤에도 두루실라라고 하는 좋은 아내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결혼해가지고 둘이 대화를 하면서 유대교에 대해서 그가 믿는 신앙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을 만나자 이 두 부부가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여보 한번 오늘 바울을 만나보자고 아마 아내가 더 그렇게 했겠죠.
그래서 이 벨릭스가 아내와 함께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을 만나면 마음이 열리게 돼 있어요. 벨릭스는 천국 문 문턱 앞에 온 거예요. 마음문이 조금 열리면서 천국이 보여요. 천국의 빛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가 거기서 멈췄다는 거예요. 한 발만 내딛으면 천국 문턱을 넘어가는 건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건데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멈춘 거예요. 그가 망설였던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유추해 볼 수가 있어요.
첫째는 결단의 부족이죠. 대개 중요한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에 그냥 과감하게 질러야 되는데 그 앞에 가서 꼭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가 말합니다. 바울에게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아니 지금이 결단해야 될 때예요. 다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미루는 거예요. 뭔가 감동이 왔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종말의 심판에 대해서 들으니까 두려움이 왔어요. 그러면 결단해야 되는데 지금은 가라. 내가 조금 더 생각해 볼게.
그러다가 그는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말이에요. 성령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지체 없이 과감하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근데 이 벨릭스는 이 부분에서 이게 걸린 거예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잘하는데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거기서 걸려가지고 이게 마음 문만 열으면 예수님 영접하고 지금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들 가운데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사실 주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 많아 주님이 와서 여러 번 문을 두드리는데 망설이다가 지체하다가 그 기회를 저버린 사람이 있어요.
최소한 주님을 만나야 돼요. 다른 건 못해도 최소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은 변하고 천국 가는 기회는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데 이 중요한 걸 빼놓고 다른 건 다 해요. 그리고 그 문 앞에서 막상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이거죠.
내가 그런 사람이지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은 오늘 회개하시고 기도하시고 주님 내가 내 마음을 여우니 주님 들어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옵소서 이렇게 하시면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입술만 열면 돼요. 이따 우리 함께 기도할 때 여러분 곧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분은 기도하셔야 됩니다. 지금 망설이면 또 앞으로 망설이게 되고 그게 자기 인생의 패턴이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죽는 날이 오는 거예요. 그때는 이미 늦어요.
또 벨릭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세속적인 마음이었어요. 이 사람은 진리에 대한 관심도 어느 정도 있는데 또 다른 마음이 있었어요. 이게 이 권력자들이 갖는 또 하나의 마음이에요. 벨릭스가 무슨 생각을 했어요? 돈을 받을까 바라는 거로 그래서 자꾸 바울을 만나는 거예요.
두 가지가 같이 가는 거예요. 자꾸 만나서 풀어줄 듯 말 듯 이게 계속 밀당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뇌물이라도 찔러줄까 아니면 바울이 좀 편하기 위해서 돈을 좀 갖다가 자기한테 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누가에게도 보였어요? 돈을 받을까 바라는 거로 세속적인 마음 그것이 그의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눈치를 봤어요. 그래서 그를 구류해 두니라. 그래서 자기가 볼 때는 사실 바울이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바울을 잡아두는 거예요. 이런 매우 폴리틱한 마음 이 전형적인 꾼 정치꾼의 그 모습 때문에 진리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벨릭슨은 복음을 듣고 깨달음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자신의 자리와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어요.
뭘 좀 얻을까 소탐대실입니다. 그거 조금 바라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뭐예요?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데, 먼 훗날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는 날 오시는 날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주님과 함께 상속받게 되는데 그걸 놓치는 거예요. 또 예수 믿은 다음에 그런 고민도 있었을 거예요. 로마에서 알게 되면 내가 앞으로 더 출세해야 되는데 로마에서 알게 되면 크리스천이 됐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어요.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하지 못하고 미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또 여러 번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그 기회가 끝날 수도 있어요. 사람을 보내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강하게 푸시하시기도 하십니다. 감동을 주신다 이거야 그 막 눈물이 날 것 같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될 것 같은데, 또 그때 결단을 마음만 열면 되는데 결단을 안 하고 또 머뭇거리다가 그 감동이 사라져버려 그때 여러분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때가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에요. 그러나 그 순간을 저버리면 다시는 기회가 안 올 수도 있어요.
결국 벨리스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27절에 보면 이해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고려하여 두니라 2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변화가 없어 10년을 교회 다녔는데도 아직 변화가 없어 심각한 겁니다.
그런데 계속 바울을 만날 것 같았는데 여러분 2년이 지난 후에 후임자가 와버렸어요. 그리고 벨릭스는 다시는 바울을 만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 됐습니다. 그는 변죽만 울리며 복음의 언저리만 돌아다니다가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버렸습니다. 입질만 했어요. 확 물으면 되는데 주님이 주신 그 기회를 확 물으면 완전히 인생이 바뀌는데 계속 깔짝깔짝 하다가 시간 다 보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기회 주실 때 기회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돼요. 사실 그게 쉽지는 않아요. 우리가 사우나에 가면 막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 그거 쉽지를 않아요. 그래가지고 집에서도 이렇게 막 물 욕조에 뭘 받아놓고 못 들어가는 사람 있어요. 그래가지고 계속 손으로 이렇게 온도 재다가 손만 담그고 끝나는 사람이 있어요. 절대로 그걸 못 들어갑니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냥 풍덩 들어가야 돼. 한 번 한 번 막 뜨끈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좋아지는 거예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게 계속 입맛만 다시다가 시간 다 보내면 안 돼요. 주님이 두드릴 때 문을 확 열어야 됩니다.
아멘 기회 주실 때 그 기회를 확 잡아야 돼요. 망설이다가 그 기회가 지나가면 어떡하시려고 합니까?
기회는 지금입니다. 벨릭스처럼 미루지 마세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말이에요. 설교를 듣는 중에도 말씀하실 수 있어요. 어떤 경우는 자려고 잠들려고 하는데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오를 수 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어느 날은 새벽에 갑자기 잠이 깨가지고 잠이 오지 않으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라는 막 고민이 몰려올 때가 있어요. 우울증인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일어나서 무릎 꿇고 주님 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난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오셔서 나를 어루만져주시고 내 인생을 바꿔주십시오라고 내어놓기만 하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내가 크리스천으로서 성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그게 종말론적 삶이에요. 또 그 기회가 다시 오는 게 아니라 나는 계속 다시 오리라고 생각했어. 언젠가 그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쩌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는 벨릭스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 곁에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그런데 나는 벨릭스가 아닌지 걸어보시고 망설이지 마시고 오늘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고,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고 결단하시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