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 세대를 버리었나
시편 제13장의 연구
1931년의 제1일이 왔다. 사람들은 어제 저녁에 내일이면 새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일이 오면 새 생각을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그렇게 해서 묵은 짐을 새해로 넘긴다. 우편배달부는 신년의 축하를 전하느라고 무거운 짐에 헐떡인다. 신문지는 연두 1일부터 절망적 규고성(呌苦聲)으로 가득 찬다. 이 축복의 중하를 지는 배달부와 희망의 절망적 비명을 발하는 신문이야말로 이 사회의 이 문명의 상징이 아닌가.
이 사회를 향하여 문을 닫고 나는 서재에 앉아 시편을 들었다. 1편, 2편, 3편, 4, 5, 6으로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감격과 호소와 신뢰와 찬송은 또 한번 내 가슴에 넘치기 시작하였다. 내 전인격은 형용할 수 없는 진동에 떨기 시작하였다. 나는 손에 맡겨 뒤집혀지는 대로 25편, 31편, 50편, 46편으로 읽었다. 모두 다 “아멘 아멘”이었다. 최후에 내 시선은 제13편에 떨어졌다. 그 1절을 “여호와여 나를 잊어버리시기를 어느 때까지 이르겠나이까”하고 읽었을 때 문득 폭발하는 듯한 격동이 내 영혼의 오저(奧底)에서부터 일어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격리되어 있었던 외계의 모양과 음향은 불길같이 전후의 창구로 침입하여 내 전신을 휩싸가지고 천상으로부터 오르는 듯하였다. 과연 이는 이 날에 내게 가장 적합한 기도다. 그러나 온 지면에 사는 인류의 아들들은, 더구나 조선의 자녀들은 역시 이 제13년의 시를 읊어서 이 1931년을 맞을 것이 아닌가.
1.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리이까 여호와여 영원토록 하시오리까 어느 때까지 내게서 당 신의 얼굴을 가리우시리이까.
2. 어느 때까지 내가 내 영혼에 획책하고 종일토록 내 맘에 근심하겠나이까.
어느 때까지 내 원수가 나보다 높으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보시고 응낙하시어
내 눈을 밝히사 죽음의 잠을 자지 말게 하시옵소서.
4. 내 원수로 “내가 너를 이겼다”하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동요할 때 나를 괴롭게 하는 자가 즐거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5. 나는 주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였고
내 맘이 주의 구원을 즐거워하겠사옵나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미하리니 이는 풍성한 은혜로 나를 대접하심이로다.
이를 다윗의 시로만 읊을 때에도 우리의 심금은 공명의 진동에 떨린다. 마찬가지 인생의 십자가를 지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우리의 최심처(最深處)를 다치지 않고는 마지않는다. 반드시 그와 동양의 절망적 곤란과 압박을 경험치 않아도 우리의 가지는바 인간성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한 동정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마는 이제 이는 내 시다. 우리의 시다. 그리 생각할 때 불과 6절의 이 짧은 시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위로를 준다.
시는 구조로 보아서 3단으로 성립되었다. 즉, 1,2절에 있어서 영혼은 암흑 속에서 절망적 비탄을 발한다. 3,4절에서 신뢰의 기도로써 도움을 구하고 5,6절에서 이미 거기 대한 응낙(應諾)을 받고 감사한다.
제1단에 “어느 때까지”가 네 번 반복되었다. 이것이 극도의 수난상태에 있음을 잘 표시한다. 곤란이 올 때도 그는 견디었다. 이기게 하여주십사 하고 기도하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신뢰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곤란은 가지 않았다. 점점 더 하였다. 그는 애소하였다. 애소(哀訴)하면 할수록 곤란은 더하였다. 그의 영혼은 캄캄하여졌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결과로는 맘속에 번뇌(煩惱)와 초조(焦燥)가 불일듯하였다. 그리하여 악마의 세력은 그를 억눌렀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할 길만이 남았다. 극도의 정신적인 혼란 상태에 빠졌다. 제1절에 서로 모순되는 두 구(句)를 연하여 읊은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즉, “어느 때까지나”라는 데서 오히려 일루(一縷)의 광명을 이으려하면서도 다음은 절망적으로 “영원히”라고 하였다. 냉정하게 전도(前途)의 광명을 찾는다 운운은 벌써 벌써 지나간 일이요 인제는 전혼(全魂)이 전후 무질서의 비탄이 되어버린 때다. 이것이 1931년의 인류의 아우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 불안과 초조와 혼란과 동요의 경제적 정치적 사상적 짐을 지고 넘어오는 1931년의.
이 세상을 투시하면 하여 볼수록 이 문명을 비판하면 하여 볼수록 느껴지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 문명이 아닌가 함이다.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써 진보라고 생각하는 문명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 문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변론으로 책략으로 운동으로 해결하려고 혈안(血眼)을 가지고 광분(狂奔)하는 이 문명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 문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과연, 지금 우리는 이 시의 작자의 말대로 “영혼에 획책”하고 있다. 매일매일 점점 신묘해가는 획책이 인류 중의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에 의하여 발명된다. 그러나 획책이 있으면 있을수록 문제는 점점 절망적이 되는 것은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 그러기에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원수가 높아졌다. 즉, 악마의 세력이 높아졌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문명을 타락시키려는 힘이 인류를 정복하여 버렸다. 그 밑에서 세계는 위축(萎縮)과 난무의 1년을 보내고 위축과 난무의 1년을 맞았다. 그리하여 우리 중에 신뢰하는 자까지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리이까 여호와여”하고 슬퍼 부르짖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시 13편은 그 제1단만이 우리의 노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 제2단, 제3단이야말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시인같이 혹은 누가복음의 탕자같이 맘 속에 광련하려는 악마의 힘을 누르고 고요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이사야」, 제30장 15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보시고 응낙하시어”—— 그렇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자기의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시는 것과 우리 수소(愁訴)에 응낙하심이 필요하다. 우리 영혼은 극도로 위축하였다. 피곤하였다. 죽음에 잠자려 한다. 이대로 있다면 영원의 사멸밖에 없다. 그때에 유일의 길이 있다. 광명과 생명, 힘의 근원인 하나님 당신이 그의 성안(聖眼)으로써 우리를 보심이다. 그리하여 자비와 격려(激勵)와 생기를 우리 위에 내려 부음이다. 베드로는 이 안광에 마주치어서 깨닫고 통곡하였다. 사울은 이 안광에 맞아서 사망의 구각(舊殼)을 벗고 바울이 되었다. 하나님이여 이 다메섹 도중의 20세기 문명을 당신의 성안의 광채로써 치시기를. 이제 세계는 경건한 자를 향해 내가 너를 이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동요함을 보고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한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기다(幾多)의 청년 남녀가 영적 기요치—누(단두대)로 나간다. 그를 보고는 무신론자만세라고 미쳐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성안으로써 우리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영안이 밝아질 것을 믿는다. 그가 우리에게 응낙할 때에 모든 악의 세력은 서찬(鼠竄)할 것을 믿는다. 다윗은 곤란 중에서도 이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마 사울에게서 피하여 굴속에 숨었을 때 눈물과 탄식으로 하였을 것이다. 크리스천에 대하여는 현대의 전 세계가 사울의 군사가 아닌가. 그들의 거하는 곳은 겨우 ‘아둘남’ 굴이 아니면 ‘엔게디’ 산성의 굴이나 ‘십 거친 땅 수풀’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이 기도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안다 —— 거기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확실히 있음을. 다윗이 음침한 굴속에서도 오히려 멀리 저쪽에 광명의 천지를 보았을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 받는 영적 안광에 의하여 지평선의 저 건너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광명의 땅을 안다. 진실로 이기는 것은 신앙이다. 그리하여 곤란 속에 있어서도 우리의 잔은 은혜와 감사와 기쁨으로 넘친다.
창밖을 내다보면 1931년 제1일은 눈 속에 저물고 있다. 그칠 줄 없이 솟는 백화(白華)는 모든 산과 모든 내와 모든 인가를 덮어버릴 작정이다. 그리하여 신년 제1일에 새 세계를 지으려는 듯하다. 모든 썩은 것과 더러운 것을 다 묻어버려서.
은혜의 백설이 이 세계를 덮는 때는 언제인가. 그 흰 눈이 이 문명을 정화하는 때는 언제인가. 인류의 아들 —— 이 광야에 버림을 당한 탕자에게 빛나는 백의를 입히는 때는 언제인가.
십자가를 지라, 인류의 아들들아, 십자가를 지고 1931년도 피땀으로 걸으라. 누르는 십자가에 어깨는 상하여도 네 입에서 기도는 그치지 말라.
은혜의 백설이 풍성히 내리는 날 네 흐르는 피땀의 더러운 것은 마침내 그 속에 묻혀버리고, 새 광선이 올려 쏘는 내일 아침엔 은색에 빛나는 십자가만이 저 멀리 하늘가에 솟을 것이다.
성서조선 1931. 2월, 25호
저작집30; 20-37
전집20; 1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