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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끼 낀 묘비를 더듬어 읽으며
다가올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 여정
“죽음에 대처하기 어렵다.(處死者難)” 사마천 『사기』의 말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죽음이 나를 무로 이끈다는 사실에 직면했기에, 그에 대한 담론을 펼치며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는 했다.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무화(無化)를 극복하는 강력한 기획이 바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는 일이다. 이 책 『내면기행』은 한문학자 심경호 교수의 안내를 따라 58편의 자찬묘비(自撰墓碑)를 읽는다. 고려 시대의 조촐한 비석에서 조선의 대학자가 극구 단순하게 남긴 묘비를 거쳐 구한말 이국의 땅에 묻힌 지식인의 묘지까지, 옛사람의 죽음과 삶을 읽는 일은 곧 나의 죽음, 나의 삶을 깊이 생각하는 일이 된다
목차
책을 엮으며
1 현달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오래 살았다고도 할 만하다 - 김훤, 「자찬묘지(自撰墓誌)」
2 청풍명월을 술잔으로 삼아 장사 지냈다 - 조운흘, 「자명(自銘)」
3 나는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이다 - 조상치, 「자표(自表)」
4 시끌시끌한 일일랑 도무지 긴치 않다 - 박영, 「묘표(墓表)」
5 「감군은」 곡을 늘 타다가 천수를 마쳤노라 - 상진, 「자명(自銘)」
6 모욕과 칭송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흙뿐 - 이홍준, 「자명(自銘)」
7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 이황, 「자명(自銘)」
8 대의가 분명하기에 스스로 믿어 부끄러움이 없다 - 노수신, 「암실선생자명(暗室先生自銘)」
9 시신을 소달구지에 실어 고향에 묻어 다오 - 성혼, 「묘지(墓誌)」
10 벼슬에는 뜻을 끊고 농사에 마음을 기울였다 - 송남수, 「자지문(自誌文)」
11 느긋하고 편안하게 내 명대로 살았다 - 홍가신, 「자명(自銘)」
12 나 홀로 나를 알 뿐 - 권기, 「자지(自誌)」
13 죽은 뒤에나 그만두리라 - 이준, 「자명(自銘)」
14 담백하고 고요하게 지조를 지켰노라 - 김상용, 「자술묘명(自述墓銘)」
15 그 비루함이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 윤민헌, 「태비자지(苔扉自誌)」
16 슬픔과 탄식 없이 편안한 삶을 누렸도다 - 한명욱, 「묘갈(墓碣)」
17 뜻은 원대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 금각, 「자지(自誌)」
18 대부가 직분을 유기했다면 장사 지낼 때 사(士)의 예로 한다 - 이식, 「택구거사자서(澤?居士自敍)」
19 인간의 모든 계책은 그림자 잡으려는 것과 같다 - 김응조, 「학사모옹자명병서(鶴沙?翁自銘幷序)」
20 서른을 넘긴 뒤로는 다시는 점을 치지 않았다 - 박미, 「자지(自誌)」
21 허물을 줄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 허목, 「자명비(自銘碑)」
22 몸이 한가롭기에 일 또한 한가롭다 - 이신하, 「자지문(自誌文)」
23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 - 박세당, 「서계초수묘표(西溪樵?墓表)」
24 이것이 거사가 반생 동안 겪은 영욕이다 - 이선, 「지호거사자지(芝湖居士 自誌)」
25 뒤뚱뒤뚱 넘어지고 큰 재앙이 이어져 놀라웠을 뿐 - 유명천, 「퇴당옹자명(退堂翁自銘)」
26 노새 타고 술병 들고 나가서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남학명, 「회은옹자서묘지(晦隱翁自序墓誌)」
27 감암에서 야위는 것이 마땅하다 - 이재, 「자명(自銘)」
28 선영 아닌 딴 곳에 장사 지낸다면 눈을 감지 못하리라 - 김주신, 「수장자지(壽葬自誌)」
29 이처럼 살다가 이처럼 죽어, 태허로 돌아가니 무어 걸릴 것 있으랴 - 박필주, 「자지(自誌)」
30 입조한 30년 동안 좌우에서 돕는 자가 없었다 - 이의현, 「자지(自誌)」
31 슬픈 일이 반이고 웃을 일이 반이다 - 권섭, 「자술묘명(自述墓銘)」
32 허물과 모욕이 산처럼 쌓여 있다 - 유척기, 「미음노인자명(渼陰老人自銘)」
33 뼈야 썩어도 좋다 - 김광수, 「상고자김광수생광지(尙古子金光遂生壙誌)」
34 화합을 주장하던 내가 세상의 죄인이 되었다니 - 원경하, 「자표(自表)」
35 재주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노닐었다 - 남유용, 「자지(自誌)」
36 천명을 즐기거늘 무엇을 의심하랴 - 조림, 「자명병서(自銘幷序)」
37 어리석다는 평은 정말 말 그대로가 아니랴 - 임희성, 「재간노인자명병서(在澗老人自銘幷序)」
38 으레 그러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 강세황, 「표옹자지(豹翁自誌)」
39 나 죽은 뒤에 큰 비석을 세우지 말라 - 서명응, 「자표(自表)」
40 사람됨이 보통 사람보다 못했다 - 정일상, 「자표(自表)」
41 나 역시 세속적인 것을 면치 못했다 - 조경, 「자명(自銘)」
42 갈아도 닳지 않는 석우가 있다 - 오재순, 「석우명(石友銘)」
43 행적이 우뚝하고 마음이 허허로워 탕탕한 사람이 아닌가 - 김종수, 「자표(自表)」
44 기쁨과 슬픔을 헛되이 쓰려 하지 않았다 - 유언호, 「자지(自誌)」
45 깨닫고 보니 죽음이 가깝다 - 유한준, 「저수자명(著?自銘)」
46 썩은 흙과 함께 스러지리라 - 이만수, 「자지명(自誌銘)」
47 이름이나 자취나 모두 스러지게 하련다 - 신작, 「자서전(自敍傳)」
48 나라의 은혜를 갚으려면 먼저 제 몸을 지켜야 한다 - 남공철, 「사영거사자지(思潁居士自誌)」
49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고 곱게 다듬으려 했다 - 정약용,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50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낭비일 뿐이란 말인가 - 서유구,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
51 올해의 운이 가 버렸구나 - 서기수, 「자표(自表)」
52 전형이 여기서 인몰될까 두렵다 - 유정주, 「자지(自誌)」
53 남들은 나를 늙은 농사꾼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 - 이유원, 「자갈명(自碣銘)」
54 백 세대 뒤에라도 옹의 실질을 알리라 - 김평묵, 「중암노옹자지명병서(重庵老翁自誌銘幷序)」
55 문을 닫아걸고 의리를 지켰다 - 전우, 「자지(自誌)」
56 나라가 망하자 사흘 동안 흰옷을 입고 슬픔을 표했다 - 김택영, 「자지(自誌)」
57 행적의 글을 스스로 지어 후손에게 밝힌다 - 유원성, 「모옹자명(帽翁自銘)」
58 일본의 신민이 될 수는 없소 - 이건승, 「경재거사자지(耕齋居士自誌)」
보론 자찬묘비ㆍ묘지와 자찬만시
원문
참고 문헌
저자 소개
저 : 심경호
1955년 충북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조교수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단독 및 공저 1-4),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국문학 연구와 문헌학』, 『한학입문』, 『한국 한문기초학사』 1-3, 『다산과 춘천』, 『다산의 국토 사랑과 경영론』,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김시습 평전』, 『안평―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한국한시의 이해』, 『한시기행』, 『한시의 세계』,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 『한시의 성좌』, 『김삿갓 한시』,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문산문미학』,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 『내면기행―옛 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읽기』, 『산문기행―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선인들의 자서전』, 『국왕의 선물』 1-2, 『참요』, 『옛 그림과 시문』,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등 30여 종이 있다. 역서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동성문파술론』, 『일본한문학사』(공역), 『금오신화』, 『한자학』, 『역주 원중랑집』(공역), 『한자 백 가지 이야기』,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일본서기의 비밀』, 『증보역주 지천선생집』(공역), 『서포만필』 1-2, 『삼봉집』, 『기계문헌』 1-6,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강의: 논어 1-3』, 『역주 당육선공주의』 1-2(공역),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방법과 실천』, 『도성행락(圖成行樂)』, 『여유당전서』(시) 등 30여 종이 있다.
책 속으로
쯧쯧
내 인생 끝이로구나.
- 조운흘(趙云?, 1332~1404년), 「자명(自銘)」중에서
* * *
재주 없는 데다
덕 또한 없으니
사람일 뿐.
살아서는 벼슬 없고
죽어서는 이름 없으니
혼일 뿐.
근심과 즐거움 다하고
모욕과 칭송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흙뿐.
- 이홍준(李弘準, ?~?), 「자명(自銘)」중에서
봉성(鳳城)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彦恭)이다.
일곱 살에 공부를 시작해서
열여덟에 죽었다.
뜻은 원대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 금각(琴恪, 1569~1586년), 「자지(自誌)」중에서
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 많았다.
중간엔 배운 것이 얼마나 되었나, 늘그막엔 왜 외람되이 작록을 받았나?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
나아가면 가다가 발 접질리고 물러나면 숨어서 올곧았다만,
깊이 나라 은혜에 부끄럽고 진실로 성인 말씀이 두렵도다.
산은 아스라하고 물은 끊임없나니,
너울너울 평복 차림으로 뭇사람 비방을 벗어났도다.
내 생각을 저가 막으니, 내 패옥을 누가 완상하랴.
옛사람을 그리워하나니, 실로 내 마음 미리 알았도다.
어찌 알랴, 오는 세상에 내 마음 알아줄 이 없다고.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승화하여 돌아가리니, 다시 무엇을 구하랴.
- 이황(李滉, 1501~1570년), 「자명(自銘)」중에서
이황은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라고 했다. 시름은 상시우국(傷時憂國, 시절을 슬퍼하고 나라를 근심함)의 시름이다. 즐거움은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즐거움이다. 그 둘은 모순이 아니다.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지 못한 처지에서 그 둘은 하나가 되었다.
다만 김장생(金長生)은 어록에서 “퇴계는 단지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살며 뜻대로 글을 보면서 시비가 이르지 않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낙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자나 안연의 낙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다.”라고 평했다. 이황에 대해서도 이런 유보가 있을 수 있다면, 범인의 경우에야 어떠하겠는가.
* * *
너는 너의 착함을 기록하여
서너 장에 이르고
숨겨진 악을 기록하여
누락 없이 하려고 한다.
너는 말하지, 나는 아노라
사서와 육경을.
하지만 행한 바를 살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는 명예를 바라겠지만
찬양할 것 하나 없다.
어찌 몸으로 증명하여
덕을 드러내고 밝히지 않느냐.
네 번다함을 거두고
네 미친 짓을 베어 내어
힘써 하늘을 섬겨야
마침내 경사 있으리라.
―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 중에서
이 명에서 정약용은 남은 생애 동안 힘써 하늘을 섬기겠다고 했다. 천명의 존재를 믿고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말이다.
공자는 군자의 덕목으로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라고 가르쳤고, 제자 가운데 증자는 “매일 거듭거듭 스스로를 반성했다.”라고 말했다. ‘스스로에게서 모든 원인을 찾는다(反求諸己)’는 반성을 대단히 중시한 것이다. 하지만 선인들이 남긴 자전적 시문에서는 스스로 뉘우치거나 삶의 변화를 응시한 글이 의외로 적다. 물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어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개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는 심사와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은 종교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자기반성과 고백을 시문 속에 담은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광대한 학문 세계와 깊이 있는 번역으로 정평이 난
한문학자 심경호 교수의 주저 『내면기행』
영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 출간 예정
광대무변한 동양고전의 엄밀한 연구와 탁월한 번역으로 정평이 있는 한문학자 심경호 고려대 교수의 『내면기행』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한문학 연구의 기초를 수립한 『한국 한문기초학사』(전 3권)에서 동양 고전의 정수를 풀이한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논어』(전 3권), 명나라 말의 문호 원굉도의 전집을 한중일 최초로 역주한 『역주 원중랑집』(전 10권)까지 저자의 저·역서는 70여 종을 헤아린다. 그중에서도 이 책 『내면기행』은 주저로 꼽히는 ‘기행’ 연작의 첫째 권으로, 2010년 우호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 출간을 앞두고 10년 만에 펴내는 개정증보판에는 학문의 원숙기에 접어든 저자의 공력이 온축되어 있다.
김시습이라는 비범한 개인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한 『김시습 평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심경호 교수는 역사 인물을 서술하는 방법론에 오래 천착해 왔다. 사적의 나열에 그치지도, 픽션에 빠지지도 않기 위해 객관적 검증과 주관적 논평을 종합하는 평전 서술의 예를 보여 주는 『내면기행』은 곧 58편의 자찬묘비·묘지와 함께 읽는 58인의 인물 열전이다. 개정판에서는 작가의 생년 기준으로 연대순 배치해 고려에서 조선 말까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을 하고 어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권기, 유명천, 유정주, 전우, 유원성 등의 자찬묘비가 새로 소개되며, 근세 이전 자서전적 글쓰기의 흐름에 대해 서술한 보론은 저자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민음사에서 새로 선보이는 본문 디자인은 독서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서체의 크기와 판면을 세심하게 만들었으며 침상에서나 여행길에서나 동반할 수 있도록 간소하게 장정했다.
“근심과 즐거움 다하고
모욕과 칭송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흙뿐”
죽음에 대면하여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간
자찬묘비(自撰墓碑)ㆍ묘지(墓誌)의 세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의 묘지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구절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일상 속에 묻혀 있던 우리가 문득 삶에 대해, 혹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묘비명들이다.
두 서양 작가의 묘비명이 20세기에 쓰였다면,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짓는 전통은 동양에서 실로 20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의 현자들은 간단하게 달관한 것이 아니다. 죽음 뒤의 구원보다 죽음 자체에 직면했기에, 그 공허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사생(死生)의 의미를 깊이 성찰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을 던진 글쓰기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묘비를 미리 짓는 자찬묘비다. 자찬묘비·묘지 연구의 권위자인 심경호 교수는 이름 없는 선비에서 이황·정약용·서유구 등 한국의 근대 이전 지식인들이 남긴 58편의 묘지명을 한 편씩 읽으며 옛사람의 내면세계를 탐사한다.
고백의 기술이 전승된 서양과 달리 근대 이전 동양의 자찬묘비·묘지에는 숨은 욕망, 죄의 참회, 마음속 비밀 등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며 적는 글이기에 가문과 이념에 파묻히지 않고, 그 순간 그 시대에 종속되지 않고 내면을 비교적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언설의 장이 열린다. 찬찬한 문헌 고증의 바탕 위에서 문면 속에 담긴 옛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저자를 따라가면 하루하루 외면했던 타인의 죽음,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가 되찾아진다.
우리는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곧바로 세간과 수작한다. 일상의 삶을 달가워하면서 이 세계가 결함계라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생사의 문제가
중대하다는 점을 환기하고 섣달그믐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의 근대 이전 지식인들도 영원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번민했으며,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빛을 찾아내어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왔다. 슬픔이 저며 오기도 했지만, 음울함 속에서 죽어 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선인들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쓴 묘비와 묘지에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들이 담겨 있다. ─ 「책을 엮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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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좌우명이 나 이렇게 살겠노라 하는, 의지의 축약이라면, 묘비명은 나 그렇게 살았노라 하는, 결과의 함축적 표현 아닐까요? 묘비명이 좌우명의 연장선 위에 놓인 삶은 그래서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 순간, 이런 묘비명 몇 줄이 가슴을 스칩니다...
°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이여! - 독일 시인 릴케
° 살고, 쓰고, 사랑했다. - 프랑스 작가 스탕달
°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네. -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
°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
...무덤을 남길 생각은 없지만, 나도 가끔은 내 묘비명을 장난처럼 떠올려 보곤 합니다...
° 술 좀 작작들 마시게나.
° 한잔 주고, 내 잔은 자네 손으로 따라 마시게나.
° 평생을 표류하다가 여기 정박했노라.
°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다.
° 인간아, 이 인간아...
° 매일매일이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 미안해, 고마워, 사랑한다.
선생님께서 떠올리신 묘비명 가운데 제 마음 속에 두었던 문구가 하나 있네요.. ^^
"매일매일이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보다는 자신을 토닥이며 격려하는 이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건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