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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37. [역경의 열매] 이종삼 (1-25) 어린 시절 놀이터이자 내 신앙의 뿌리 덕포교회
개척 장로 떠난 후 정식 부임 목회자 없어
젊은 집사들, 교회 사찰 설교까지 도맡아
어머니 교회 손님 늘 집으로 모셔와 대접
이종삼 성념의료재단 이사장이 최근 경남 거제시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서 성경을 읽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내 고향은 경상남도 거제시 덕포다. 거제도의 오른쪽 끝자락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는 사계절 짠 바닷바람이 불었다.
가난했던 시골 마을에도 교회가 있었다. 1951년 6·25전쟁 중 북한에서 피란 온 한 장로님이 세운 덕포교회였다. 내 신앙의 뿌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운 장로님은 개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 뒤로 다시 덕포를 찾지 않으셨다. 작은 교회에 기대 사는 교인들은 목자 없는 양떼와도 같았다.
1960년대 거제도 전체에 목사는 고작 2명뿐이었다. 훗날 신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우리 교회에는 정식으로 부임한 목회자가 없었다.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집도 변변치 않았다. 결핍은 일상이었다. 없어도 그러려니 하며 살았지만,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호소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목사님이 부임하시더라도 목사님 가정에 쌀 살 돈을 드릴 예산도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그래도 교회는 마을 사람 모두를 따뜻하게 품어줬다.
젊은 집사님들이 교회 사찰부터 설교자까지 도맡으셨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부흥회가 수시로 열렸었다. 집사님들은 열심히 부흥회에 참석하셨다. 그곳에서 들은 영의 양식은 목회자가 없던 우리 교회 강단에서 주일마다 선포되던 말씀의 재료가 됐다. 집사님들은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렇게 교인들은 복음에 젖었고 ‘쪽 말씀’으로 교회 공동체는 성숙했다.
나는 2남 2녀 중 셋째다. 쓰러질 듯 위태롭던 집과 교회는 담을 맞댄 이웃이었다. 교회 마당은 우리 남매의 놀이터였다. 어머니 최소수 권사께서는 교회를 찾는 손님을 항상 우리 집으로 모셨다. 없는 살림에 밥과 김치, 생선국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식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손님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소찬이어도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모두 덕포교회를 찾은 손님을 대접하던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옷이며 밀가루까지 각종 구호품을 보내줬던 기억도 생생하다. 미국에서 물품이 오면 늘 우리 집 마당에 풀어놨다. 그런 날이면 덕포 사람 모두가 우리 집을 들르는 것만 같았다. 어린 마음에 집에 주민들이 가득 모이던 그런 날이 참 좋았었다.
교회 옆에 살던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가장 열심히 하셨다. 새벽기도부터 시작해 교회의 시시콜콜한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으셨다. 아버지 이성형 집사도 그런 어머니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1972년 어느 날이었다. 거제도의 두 분 목사님 중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세례를 베풀러 오셨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한참 쳐다보셨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대들보가 내려앉았다. 빨리 교회를 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겠다.”
약력=1956년 경남 거제 출생, 부산장신대 졸업, 갈릴리교회 위임목사, 사회복지학 박사, 거제 경실련 집행위원장·공동대표, 거제신문 편집인, 거제시 기독교연합회 회장, 예장통합 경남노회장, 예장통합 100주년기념관 건립 부위원장·사회봉사부장·인권위원장 역임, 현 부산장신대·의료법인 성념의료재단 맑은샘병원·사회복지법인 갈릴리사랑의집 이사장, 동과의료재단 굿뉴스병원 설립자.
* [역경의 열매] 이종삼 (1) 어린 시절 놀이터이자 내 신앙의 뿌리 덕포교회
* [역경의 열매] 이종삼 (2) 교회 재건 도움 청하려 한경직 목사 찾아 서울행
* [역경의 열매] 이종삼 (3) 학교는 빠져도 부흥회는 참석… '사랑의 매'도 일상
* [역경의 열매] 이종삼 (4) "좋은 목사 돼 고향 거제로 돌아와 사역하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이종삼 (5) 하나님이 보내준 의문의 합격증… 불합격이 합격으로
* [역경의 열매] 이종삼 (6) 모든 게 봄 같았던 '1985년'… 결혼과 득남, 목사 안수
* [역경의 열매] 이종삼 (7) 목회 첫발 내디딘 제2 고향 부산 떠나 고향 거제로
* [역경의 열매] 이종삼 (8) 거제에도 YMCA 창립… 기독 청년운동의 씨앗 뿌려
* [역경의 열매] 이종삼 (9) 거제 경실련과 지역신문 창간… 시민 사회와 함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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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종삼 (25·끝) "주님, 지재유경이 이끄신 삶, 동과가 되겠나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종삼 (2) 교회 재건 도움 청하려 한경직 목사 찾아 서울행
무너진 덕포교회 짓는 속도 오래 걸리자
기도 중 ‘한경직 목사께 도움받자’ 생각
무작정 찾아갔다 연락 약속받고 돌아와
이종삼(왼쪽 두 번째) 목사가 1973년 덕포교회를 짓기 위해 건축 자재를 나르던 중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
목사님은 교회가 무너진다고 하셨지만 우리 눈에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던 중 군에서 막 제대한 큰 형님에게 초가 교회를 허물어 달라고 부탁했고 형님은 곧바로 친구 두 명과 지붕에 올라가셨다. 곡괭이로 서너 번 쳤을까. 거짓말처럼 교회가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지붕에 올라갔던 이들은 뽀얀 먼지 속에서 걸어 나왔다. 작은 초가집, 덕포교회는 그렇게 사라졌다.
목사님께도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벽돌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 주셨다. 예배는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앉아 드렸다. 비가 내리면 우비를 입어야 했다. 덕포 바닷가에서 찍은 벽돌을 1.5㎞ 떨어진 예배당까지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남자는 3~4장, 여자는 1~2장씩 지고 석 달 동안 2000여장을 옮겼다.
교회 짓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목사님이 너무 바빴던 게 문제였다. 1973년 6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기도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 교회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아야겠다.’
엉뚱한 상상이었지만 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부산역에서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무단결석을 단행하며 떠난 길은 내내 비장했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 내려 물어물어 영락교회에 도착했다. 고딕 양식의 교회당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신없이 교회 구경을 하다 행정실 문을 열었다. 호기롭게 교회를 찾았지만 교회 직원과 목사님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학생일 뿐이었을 것이다. 쉬지 않고 질문이 이어졌다.
어떤 목사님이 “네 이름을 한자로 써 보라”고 하셨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쓰자 목사님들은 ‘쇠북 종(鍾)’자가 맞네 틀리네 하며 옥신각신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한 직원이 “목사님은 오늘 안 들어오시니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좌충우돌이 시작됐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실을 소개받아 가던 중 화장실에 들렀다. 소변을 보는데 사찰 집사님이 나무라며 호통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몰랐다. 나중에 기도실에 온 집사님은 “네가 소변기가 아니라 세면대에 소변을 봤단다”라고 하셨다. 촌에서 온 내 눈에는 모든 게 다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 교회가 10시에 문을 닫으니 밤새 기도실을 열어 두는 이웃 교회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깊은 밤, 낯선 길을 물어 그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영락교회로 발길을 돌렸지만, 통금에 걸려 눈에 보이는 여인숙에 들어가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교회로 달려갔는데 한 직원이 다가왔다. “학생, 한 목사님이 오늘도 안 계시는데 교회를 세우고 싶은 학생의 뜻을 우리가 잘 알았으니 한 목사님께 잘 전하겠다. 연락할 테니 돌아가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교회 직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믿고 돌아간 뒤 다시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덕포 예배당은 여전히 빈 자리였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났다. 그러다 드디어 벽 쌓는 기술자가 교회에 와 예배당 벽을 올렸다. 주문한 양철 지붕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도착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3) 학교는 빠져도 부흥회는 참석… ‘사랑의 매’도 일상
거제에서 부흥회 열리면 어김없이 참석
부흥회 은혜받고 등교하면 꾸중 이어져
훗날 목사 된 뒤 은사들 초대 식사 대접
거제고등학교 규율부장이던 이종삼(오른쪽) 목사가 1974년 친구인 진상권 구미 양무리교회 목사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부흥회 가겠다고 결석을 하던 나는 참 별난 학생이었다. 결석했다고 그렇게 혼나면서도 거제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어김없이 참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늦가을로 기억한다. 거제제일교회에 부흥사인 신현균 목사님이 오셨다. 민족복음화운동본부를 비롯해 10여개 부흥단체를 설립하고 수많은 부흥사를 양성하셨던 신 목사님은 그 시절 부흥 사경회의 유명 강사였다. 그 신 목사님의 부흥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실 이 부흥회에 참석하기 전 거제 축복산기도원 부흥회에 갔던 일이 있었다. 기도원 원장 박 권사님이 나를 유심히 보시더니 “자네는 목사가 돼야 한다”고 하셨던 일이 있었다. 목사가 되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신 목사님은 거제제일교회에서 닷새 동안 말씀을 전하셨다. 마지막 날 집회에서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를 위해 일꾼이 필요한데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셨다.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일어섰는데 축복산기도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듬해 3학년이 돼서도 기도원을 따라 다녔다. 경북 김천의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린 부흥회에도 열흘 동안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에 남은 게 이 정도일 뿐 나는 꽤 여러 부흥회를 찾아다녔다. 문제는 학교를 빠지고 부흥회에 다녔다는 점이었다.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학교로 돌아가면 선생님들의 꾸중이 이어졌다. 사랑의 매를 드셨던 선생님들도 적지 않았다. 은혜받은 뒤 매를 맞는 일상이 반복됐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뒤에 벌어진 일들이라 억울하지 않았다.
자꾸 부흥회 때문에 결석을 하니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다. 그 선생님이 부지불식 간에 휘두른 회초리가 코에 스치면서 코피가 난 적도 있었다. 체벌이 일상이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 혼나는 게 억울하지 않았다.
은혜받은 뒤 혼나는 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꾸 결석하는 나를 바로 인도하려고 훈육하셨던 선생님들께 나쁜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점점 목사가 되는 좁은 길로 들어선다는 믿음과 확신이 생겼다. 부흥회에 참석할 때마다 하루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렇게 목사의 길로 다가갔다.
훗날 거제에 여러 병원을 세운 뒤 그 시절 선생님들을 먼저 기억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고교 은사들을 거제 굿뉴스병원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꽤 여러분을 모셨지만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세 분만 남으셨다.
그중 한 분은 굿뉴스병원 행정원장으로 계신다. 고교 선생님 중에는 내게 세례를 받고 갈릴리교회에 출석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부흥회 참석한다고 결석이 잦던 학생이 목사가 된 뒤 병원 여러 개를 운영하는 의료재단 이사장이 돼 은사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어디 선생님들뿐인가. 거제가 내게 준 사랑은 컸다. 나를 품었고 길러낸 자리가 거제다. 일생 거제에 터를 닦고 사는 것도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이종삼 (4) “좋은 목사 돼 고향 거제로 돌아와 사역하겠습니다”
고교 시절 부흥회서 목사되기로 서원
신학교 입학해서도 목표 더욱 구체화
고향서 복음 전하겠노라 주님께 약속
이종삼(왼쪽) 목사가 1975년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흥회 참석한다고 결석이 잦았던 나였지만 불량학생은 아니었다. 규율부장을 할 만큼 반듯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로 다짐한 뒤로는 마음이 이미 신학교로 향해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어서 목사가 돼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어린 마음에 의욕이 앞섰던 것이다.
신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 좌천동에 있던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였다. 이 신학교는 부산장신대의 전신으로 현재 이 대학의 이사장을 내가 맡고 있다. 모교의 이사장이 됐으니 얼마나 보람이 큰지 모른다.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던 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규모가 작았지만 품이 컸던 신학교는 나를 품어 줬다. 내게 신학의 길과 목회자의 삶을 보여준 둥지였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학생들은 진지하게 공부했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안에서 나는 몸과 영이 자랐고 목사로서의 소명을 늘 확인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편하질 않았다. 덕포교회에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았던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더욱이 거제도 전체에 상주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회자가 고작 두 분뿐이었던 것도 ‘목회자 결핍’의 이유였다.
부흥회마저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정말 목사님 설교와 축도를 받지 못한 채 신학교에 입학할 뻔했다. 신학교 입학 전 만난 목사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보니 학교에서 만나는 목사님들 모두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결핍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뒤 한 가지 다짐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 반드시 고향 거제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겠노라고 되뇌었다.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약속했었다.
사실 이 다짐을 처음 한 건 신현균 목사님이 거제제일교회 부흥회에 오셨을 때였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주의 종이 될 사람은 일어나라’는 신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렇게 기도했었다.
‘주님, 좋은 목사가 돼 꼭 고향으로 돌아와 사역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다짐은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구체화했다. 고향 거제에서 복음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세우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신학교 동기들에게도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내는 목사가 되면 거제로 갈끼다. 고향에서 목회할 끼란 말이다.” 촌에서 온 신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촌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은 “진짜 목사 된 뒤에 두고 보자”고 했었다.
신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학교도 빠지고 부흥회를 따라다니던 학생이 매일 경건회에 참석하고 강의 전 기도하는 생활이 싫었을 리 없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80년 복학한 뒤 82년 2월 졸업했다. 4학년 때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 목회연구과정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증을 받았다. 목사가 되는 여정의 끝을 향해 점차 다가간다는 감격이 컸다. 하지만 장신대 입학을 위해 학교를 찾았다가 입학처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5) 하나님이 보내준 의문의 합격증… 불합격이 합격으로
합격 점수 미달임에도 받게 된 합격증
채점 안 된 주관식 문제 답안지가 원인
교수·직원들 사과-회의 끝에 입학 허락
이종삼(왼쪽 두 번째) 목사가 1975년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 1학년 때 친구들과 소풍을 가던 중 경남 양산 물금역 선로 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종삼이라는 합격자는 없는데요. 합격증을 받았다고요?”
1982년 2월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 목회연구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학교를 찾았는데 입학처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합격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받은 합격증은 무엇이란 말인가.
“집으로 합격증을 보낼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불합격이라고 하는 건 무슨 말이고. 이게 말이 됩니꺼?”
억울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한 직원이 합격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집에 두고 온 합격증을 당장 보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집에 있었다. 합격 사실을 이미 확인했는데 그걸 들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합격증이 손에 없으니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잠시 물러서 거제 집으로 전화를 넣었다.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부산역까지 합격증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런 뒤 서둘러 부산역으로 갔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문자로 주고받아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인편으로 주고받아야 했다.
반나절이 넘도록 하행선 열차를 타고 부산역으로 내려갔다. 역에서 아버지를 만나 합격증을 받아 들고 밤새 서울역을 향해 올라왔다. 서울역에 내려서도 장신대까지는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입학처 직원에게 학교가 발급한 합격증을 들이밀었다.
합격증을 본 직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허둥지둥하며 합격자 명부를 찾아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1초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초조한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그러다 학생처장이던 박창환 교수님이 날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생, 지금 점수를 보니 시험을 너무 못 봤네. 자네 수고 많이 했는데 사정을 봐줄 수가 없겠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객관식과 주관식 문제를 모두 다 풀었다. 그랬는데도 ‘시험을 너무 못 봤다’고 하는 건 채점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교수님, 제가 주관식 답을 쓴 답안지를 한 번만 더 확인할 수 있습니꺼.”
박 교수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직원을 불러 내 답안지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답안지를 들고 오는 직원의 표정이 복잡 미묘한 게 아닌가. “교수님, 글쎄….” 알고 보니 객관식 답안지만 채점한 것이었다. 주관식 답안지 채점은 돼 있지 않았다.
총점만 보니 시험을 너무 못 본 게 맞았지만 채점을 하지 않은 주관식 답안지까지 채점하니 점수가 높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교수님과 직원들은 내게 사과하셨다. 그리고 회의 끝에 입학을 허락해 주셨다.
마지막 남는 의문은 하나였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합격증을 보냈단 말인가. 직원들은 그 부분이 의아하다고 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나는 늘 생각한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손을 빌려 보내 주신 거구나.’
불합격이 합격으로 변한 일은 두고두고 간증 거리로 남았다. “오직 주님께 영광.”
***[역경의 열매] 이종삼 (6) 모든 게 봄 같았던 ‘1985년’… 결혼과 득남, 목사 안수
동래중앙교회서 교육전도사로 첫 사역
거제 출신 성도와 결혼하고 아들 출산
연산교회 전임전도사 부임 후 목사안수
이종삼(앞줄 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1985년 10월 부산 덕천교회에서 열린 예장통합 부산동노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로회신학대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광나루 신학교’다. 광나루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학교는 언제나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광나루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건 1982년이었다.
당시는 신군부 세력이 득세하던 엄혹한 때였다. 나 또한 격랑에 빠진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었는데 마침 한 살 많은 사촌 형을 만났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광주 사태에 관해 이야기 했었다.
“광주 사태는 신군부가 정권을 빼앗기 위해 벌인 일이래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이다. 군인이 자국민을 죽인 끔찍한 비극인 기라.”
문제는 형님이 장승포의 다방에서 친구들을 만나 내 말을 전했고 이걸 경찰이 들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경찰에 붙잡힌 형님은 수사를 받던 중 내게 들은 이야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날 기숙사에 들어가는데 경찰들이 나를 붙잡았다. “자네가 이종삼인가.” 그렇다고 하자 곧바로 경찰서로 잠깐 가자는 말이 이어졌다. 그 길로 경찰서로 연행됐다. 추석을 목전에 앞둔 때였다. 고향에 가려고 기차표까지 사 놨지만 나는 열흘 동안 서울 성동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나채운 교수님과 친구들이 면회를 오기도 했었다. 그 일로 ‘출옥 성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때 경험이 훗날 거제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자양분이 됐다. 사람의 운명은 오직 주님만 아실 뿐이다.
아픈 시대였지만 선지 동산에는 찬양과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졸업이 다가오자 사역지를 정해야 했다. 동기들도 사역지를 찾느라 어수선했다. 연말이 다가오자 하나둘 사역지를 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몇 군데 이력서를 보내고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동래구에 있는 동래중앙교회에서 나를 불렀다. 교육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도 만났다. 하미영이라는 청년에게 자꾸 눈이 가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 거제 출신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교역자와 청년이다 보니 처음에는 거리가 느껴졌지만, 진심이 통했는지 서서히 가까워졌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신앙 안에서 만난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이듬해 85년 1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해 10월 첫아들이 태어났다.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 부산 연제구의 연산교회에 전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목사 안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부산동노회에서 받았는데 막 태어난 아들을 안고 갔다. 목회자로 거듭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안수식에 새 생명과 함께 간 것이 큰 보람이었다. 거듭난 사람의 삶이란 어때야 하는지 생각하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목사다운 목사로, 겸손히 주의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내게 ‘1985년’은 모든 게 새로 시작한 봄 같은 해다. 결혼과 득남, 목사 안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의 사역은 안정적이었다. 고향 거제와도 멀지 않아 낯선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내도 만족했고 아이도 잘 자랐다. 하지만 사역이 안정될수록 마음 한쪽이 편하지 않았다. 왜일까.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했다. 이유는 하나, 내 고향 거제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7) 목회 첫발 내디딘 제2 고향 부산 떠나 고향 거제로
생활 안정될수록 고향서 사역하겠단
주님과의 약속 생각나 마음 불편해져
아무 준비 없이 빈손으로 고향 돌아와
이종삼 목사가 1988년 능포 갈릴리교회에 부임한 직후 ‘늘노래 찬양단’을 초청한 집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고향 거제를 떠난 건 1975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10년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부산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꿈에 그리던 목사가 됐다. 신학교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사역도 자연스럽게 부산에서 시작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부산 동래중앙교회에서였다. 첫 아이도 부산에서 낳았다.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었다.
사역과 생활이 안정될수록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 건 첫 약속 때문이었다. 목사가 된 뒤 거제로 돌아와 사역하겠다던 고등학생 때의 약속이었다. 85년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은 커졌다. 하지만 부산에서 너무 잘 적응하는 가족을 볼 때면, 그리고 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면 거제를 향한 나의 마음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결정의 시간이 가까워 왔다. “주님, 새해부터는 제가 거제에서 사역을 하겠심더. 저에게 용기를 주이소.”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아내에게 털어놓기만 하면 됐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에 있는 얘기를 했다.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면서 거제에서 사역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부터 부산에서의 사역과 삶이 편하지만, 목사가 많지 않은 거제에서 할 일이 더 많아 지체할 수 없다는 말까지 다 하고 말았다.
아내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분명히 봤다. 그런데도 내 약속을 존중해줬다. 고마웠다. 연말에 교회를 사임하고 86년 1월, 아무것도 없는 거제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품에는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첫아들이 안겨 있었다.
나를 반긴 건 소금기 가득 머금은 바닷바람뿐이었다. 나조차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부산서 잘 있다 왜 왔노’ ‘분명 부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기라.’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두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당장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집도 없었다.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처가에 둥지를 틀었다. 나도 막막했는데 아내는 오죽했을까. 부산에서 병원에 다니던 아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모든 게 느껴졌다. 거제로 돌아온 뒤 한동안 아내는 부끄러운 마음에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야 이 얘기를 들었는데 아내의 속 깊은 배려에 울컥했었다.
목사가 주일 사역도 하지 않고 있으니 장모님께서 출석하시던 교회 목사님이 거제 장목교회를 소개해 주셨다. 마침 교회에 담임목사가 계시지 않았다. 다행히 교인들도 나를 반겨 주셨다. 장목교회는 내 첫 담임 사역지가 됐다. 목사가 되기 전 기도대로 고향의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보람이 무척 컸다.
여기서 2년 동안 사역하다 88년 5월 첫 주 거제 능포리에 있던 갈릴리교회에 부임했다. 이 교회가 바로 지금까지 내가 섬기는 교회다. 목회하면서 동시에 또 하던 일이 있었다. 고향 거제에 YMCA를 세우는 것이었다. YMCA를 통해 거제 젊은이들에게 기독 시민운동의 씨앗을 심고 싶었다. 이를 위해 작은 명함을 만들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8) 거제에도 YMCA 창립… 기독 청년운동의 씨앗 뿌려
신앙 바탕으로 건강한 사회 변화 열망과
시민운동 필요성 느낀 이들 공감 얻으며
YMCA 구심점으로 뜻 맞는 동지들 모여
이종삼 목사가 만든 거제YMCA 창립을 위한 기도회 모임 안내 쪽지 모습.
부산에서의 10년, 그 기간은 나를 목사로 길렀다. 공부하고 기도하며 목회자의 길을 연습했던 여정이었던 셈이었다. 학교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부산YMCA 활동을 했다.
YMCA를 통해 기독 청년들이 가져야 할 세계관과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1979년 부마 민주항쟁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와 같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YMCA는 기독교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을 제시했다. 신앙이 있는 또래들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했다. 공부하는 틈틈이 YMCA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내심 고향 거제에도 YMCA가 세워지는 꿈을 꿨다. 그 일을 내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85년 아무것도 없이 거제로 돌아온 뒤 드디어 YMCA를 고향에 이식할 기회가 생겼다.
이듬해부터 초대장을 만들어 돌렸다. 사실 나를 알릴 명함과도 같은 쪽지였다. ‘청년 모임 안내’라는 제목 아래 ‘거제YMCA 창립을 위한 기도회’라고 행사명을 적었다. 기도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옥포 정비공장 옆 작은 사무실에서 열렸다. 맨 아래에는 임시 연락처를 적었다. 그때만 해도 다섯 자리 전화번호가 있던 시절이었다. 사무실 번호도 ‘2-4546’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거제는 그중에서도 낙후됐었다.
기독 청년 운동의 씨앗을 거제에 심겠다는 열망이 컸다. 열망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됐다. 게다가 당시에는 6·10 민주항쟁 등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 데 결정적 변곡점이 된 여러 사건이 줄을 이을 때였다. 거제에도 구심점이 필요했다.
모임은 늘 기도로 시작했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거제YMCA 창립 주역인 내가 목사 아닌가. 신앙이 없는 이들도 창립 모임에 왔다가 함께 기도하는 일이 잦았다.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YMCA의 정체성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거제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던 동지들이 하나둘 늘었다. 약사와 의사, 사업가들도 속속 창립 모임에 참여했다.
거제YMCA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회 변혁을 꿈꿨던 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바랐다. 이런 바람이 많은 공감대를 얻었다. 거제YMCA 창립을 위한 주비위원회(籌備委員會) 총회가 89년 내가 시무하던 갈릴리교회에서 열렸다. 나는 주비위원회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총회 때 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거제에도 YMCA가 필요합니더. 여러분의 헌신으로 오늘 드디어 거제YMCA가 첫발을 내디딥니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YMCA를 세울 것이고 거제의 시민 사회를 깨울 것입니더. 하나님의 돌보심이 거제YMCA에 가득하길 바랍니더.”
90년 창립한 거제YMCA는 실제 거제 시민 사회를 움직였다. 창립 이후에는 YMCA 대표를 맡지 않았고 거제 경실련과 거제신문 창간을 이끌었다. 돌아보니 거제 시민사회 성장을 위해 작은 조약돌을 놓았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9) 거제 경실련과 지역신문 창간… 시민 사회와 함께 성장
지역사회와 기업이 서로 협력 소통하고
시민 사회 관심 키우려 경실련 설립 추진
유지들 뜻 모아 거제 대표하는 신문 창간
거제신문 창간에 앞서 제작한 창간소식지 1호 모습. 이종삼 목사는 초대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89년 대우조선은 노사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이 거제에 1년 넘도록 상주하면서 직접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노조원을 만났던 일이 유명하다. 하지만 그때 노조의 실상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제 막 구성을 시작했던, 연약한 조직일 뿐이었다.
거제YMCA를 태동한 이후 기독교적 색채가 덜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설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우조선에 대한 거제 시민 사회의 관심을 키우기 위한 접점으로도 경실련이 필요하다고 봤다. 지역사회와 함께 협력 하고 소통하는 기업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실련은 서경석 목사께서 맡고 있었다. 거제 경실련 설립을 위해 나는 서 목사님을 만난 일도 있었다. 이미 거제YMCA 창립을 위해 뛰면서 지역 시민 사회 지도자들과 안면을 텄던 게 거제 경실련 설립에 큰 도움이 됐다.
나는 거제 경실련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섬겼다. 목사란 모름지기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한 일이다. 거제 경실련 창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고 설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많은 분의 노력이 모여 89년 드디어 거제 경실련이 창립됐다. 초대 대표는 강명득 변호사가 맡았고 나는 뒤로 물러났다.
거제 YMCA와 경실련 창립은 거제신문 창간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나와 뜻을 같이한 지역 시민 사회 운동가들은 하나같이 지역 신문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우리나라 지역 신문으로는 홍성신문이 유일했다. 우리는 일단 홍성신문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준비위원들과 홍성신문도 방문해 창립 과정과 운영 노하우 등 신문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거제의 어르신도 수시로 만나 신문 창간을 의논했다. 어르신들도 거제를 대표하는 지역 신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셨다.
결국, 거제신문은 거제 경실련과 같은 해 빛을 봤다. 거제신문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긴 지역 신문으로 당시 문공부의 등록을 마쳤다. 나는 초대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신문사가 자리 잡는데 작은 역할을 했다.
창간 직후이던 90년 1월 22일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3당 합당’이 벌어졌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주도했지만 거제 출신 정치인이던 김영삼 의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역 정치인이 참여한 일이었지만 거제신문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일로 창간하자마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역사회에 든든하게 뿌리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거제신문의 성공적인 안착은 남해신문 창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해신문 창간의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 훗날 장관을 지낸 김두관 국회의원이다. 김 의원은 당시 이장으로 남해 지역 발전을 위해 큰일을 한 분이었다. 김 이장은 남해신문 창간을 위해 거제신문도 방문했었다. 홍성에서 시작한 지역 신문이 거제와 남해로 확산하면서 지역을 든든하게 세워갔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0) ‘4대 사역’과 ‘희망의 신학’ 보며 내일의 희망 꿈꿔
4대 사역으로 세상에 희망 주신 주님처럼
목회, 복지활동, 학교 설립, 병원 사역 등
맡겨진 사명 감당하며 ‘미래의 희망’ 심어
이종삼(가운데 흰 장갑) 목사가 2019년 거제 옥포 맑은샘센텀병원 개원 1주년 기념 감사예배 후 의료진과 직원, 예배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마태복음의 말씀 속에는 복음전파와 구제, 교육과 치료라는 예수님의 4대 사역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내 목회의 길잡이가 된 말씀들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이 사역을 통해 세상에 희망을 심으셨다. 희망이야말로 각박한 현실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힘이다. 거제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희망을 파종하는 농부가 되리라 다짐했었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1964년 ‘희망의 신학’을 출간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희망의 신학은 미래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과거와 현재는 단지 미래와 관계될 때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미래의 희망이 모든 것을 추진하는 동력과 기초가 된다는 게 몰트만의 탁견이었다.
예수님의 4대 사역과 몰트만 박사의 희망의 신학을 보며 나 또한 다가올 내일의 희망을 꿈꿨던 것 같다. 예수님이 다시 오는 그날까지 우리는 회개해야 하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완성된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4대 사역을 따라 구제는 요양원 운영을 중심으로 한 복지로, 복음전파는 갈릴리교회 목회로, 교육은 필리핀의 유치원과 캄보디아의 갈릴리 고등학교, 인도의 푸네 아가페신학대학교, 케냐 룽가룽가의 초등·중학교 설립으로, 치료는 거제맑은샘병원을 중심으로 한 여러 병원 사역으로 구현했다.
사람들은 나를 기관 목사라고도 한다. 그렇지 않다. 구제와 복음전파, 교육과 치료를 통해 목회하는 거제의 마을 목회자다. 오늘보다 내일, 하나님 나라가 더 가까이 온다는 믿음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목회자일 뿐이다.
어려운 점도 있었다. 뭘 좀 해보자고 권하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싹을 자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본인도 하지 않을 거면서 남들도 못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YMCA와 경실련을 창립할 때나 거제신문을 창간할 때도 몇몇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줬다.
“한번 해 보지도 않고 그만두면 됩니꺼. 될지 안 될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꺼. 그러지 말고 한 번 해 보입시더”. 설득하기 위해 여럿을 만났고 상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완고한 이들의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설득하고 설명하며 이해시키는 과정이 훗날 요양원을 세우고 병원을 설립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세상에 우연히 생기는 일이란 없다. 모든 게 주님의 섭리이고 인도하심이다. 복지 사역을 시작한 것도 그랬다. 거제 시민사회를 위한 토대를 닦은 뒤 주변을 둘러보니 소외된 어르신들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는 이들을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역경의 열매] 이종삼 (11) ‘거제 사랑의 집’ 개원… 소외된 어르신들 보살펴
노인 복지 관심 갖고 법인 설립 궁리 중
한 기도원장 통해 땅 3500평 기부받고
거제시와 대우조선에서 건립비용 쾌척
거제시 거제면의 거제사랑의집 양로원 전경. 이종삼 목사의 복지 사역이 출발한 곳이다.
1999년부터 어르신들을 돌아보게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노인 비율이 전체 인구 대비 7%를 넘어서면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고령화 사회란 65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 7% 이상인 사회를 말한다.
90년까지만 해도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5.1%에 불과했지만 노인의 수는 빠르게 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불과 45년 뒤인 2067년이면 49.5%가 노인이라는 충격적인 데이터까지 나왔다.
90년대 말 노인 복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시의적절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전문성이 없었다. 열심만 있었지 복지 법인을 설립하기 위한 기본 재산도 마땅하지 않았다. ‘갈릴리 사랑의 집’이라는 사회복지법인을 경상남도청에 등록하기 전 매일 사회복지법인 설립을 위해 기도하던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이었다. 교회를 찾은 감리교 소속의 양정호 목사라는 분이었다. 초면이었지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했다.
“알고 지내는 기도원 원장님이 2만평 정도 되는 땅을 기부할 테니 노인복지를 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 제가 이 분야에 너무 문외한이라 거제에서 시민사회 운동에 앞장서셨던 목사님이 생각나 상의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치 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거기가 어딘지 당장 가보입시더.” 나는 바로 일어나 양 목사님과 길을 나섰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양로원을 세우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하지만 2만평에 달하는 전체 부지가 다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중심 부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임야 3500평만 있으면 노인복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땅을 기부하려던 기도원 원장님을 만나자마자 말이 터져 나왔다.
“원장님, 너무 좋은 장소입니더. 마침 우리 교회가 양로원을 하려는데 3500평 정도 땅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더. 이 땅에 양로원을 한번 세워 보겠심니더.” 그러면서 거제에 양로원이 필요한 이유와 장기적으로 어떤 유익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렸다. 원장님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원장님이 내주신 3500평을 기본 재산으로 경상남도청에 법인 등록을 했다.
양로원 건립 비용도 문제였는데 거제시와 대우조선이 발 벗고 나섰다. 각각 4억원과 2억원이라는 거액을 보내 주셨다. 대우조선은 노조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큰 기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체 모금도 1억원을 했다.
7억원 가까운 기금을 가지고 양로원을 짓기 시작해 2000년 개원했다. 양로원 이름은 ‘거제사랑의집 무료 양로원’이었다. 거제에서는 최초의 양로원으로 기록됐다.
양로원은 자식이 없거나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복지 시설이다. 이런 시설은 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품는 둥지와도 같은 공간이다. 양로원을 통해 거제의 소외된 어르신들을 보살핀다는 보람과 자부심이 무척 컸다. 양로원은 시작일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2) 노인 요양원 열자 진료 사각지대 어르신들 문전성시
우리 복지법인서 요양원 부지 출연하고
정부로부터 기금 지원받아 요양원 설립
어르신들 위한 요양병원 설립 소망 품어
이종삼 목사가 2003년 거제에 설립한 솔향노인요양원 전경.
거제에 처음 생긴 무료 양로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어려운 점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어르신이 아플 때마다 너무 먼 곳의 병원까지 가야 했던 점이 고역이었다. 병원은 양로원에서 30㎞ 떨어진 하동에 있었다. 적지 않은 어르신들이 오가는 길에 멀미를 하셨다. 간단한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다 더 큰 병을 얻을 것만 같았다. 내부에서는 요양원을 함께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요양원은 환자를 수용해 요양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이다.
사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성이 필요했다. 2000년 가을, 당시 김동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님이 갈릴리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온 일이 있었다. 먼 곳까지 와준 김 총무가 감사해 서울에 간 김에 종로의 NCCK 사무실을 방문해 김 총무 방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이태복씨를 만났다. 셋이 앉아 사회 복지의 필요성에 관해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가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이 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훗날 이 수석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지냈다. 마침 요양원 설립을 검토하던 때라 이 수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 총무께 문의를 드렸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 목사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다만 요즘에는 아무리 청와대라고 해도 쉽게 요양원 설립 허가에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제에 요양원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 양로원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현황, 요양원이 필요한 이유 등을 담은 글을 써서 제게 보내 주시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고 곧바로 김 총무께 보낸 뒤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제시로부터 요양원을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김 총무께 보낸 편지가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 총무도 이 일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하나님이 진심을 알아주셨다고만 생각했다.
우리 복지법인은 요양원 부지를 출연했고 정부로부터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지원받았다. 2003년 솔향노인요양원을 개원했다. 요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공간에서 어르신들을 다 돌볼 수 없어 양로원 뒤에 새로운 정원요양원을 또 세웠다.
복지 사업은 날로 확장했다. 재가 복지도 시작했다. 이는 시설복지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이 자택에서 지내면서 여러 서비스를 받는 복지 형태를 말한다. 나는 이를 두고 ‘어르신 유치원’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시설이 ‘목련 통합 재가 복지 센터’였다.
지금 돌아보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든 사역이 진행된 것 같아도 순간순간 역경이 많았었다. 고비 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건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간증 거리로 남아 있다. 모두 주님의 뜻이었다.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며 사역을 이어오던 어느 날부터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소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3) 280병상 규모 요양병원 건축… 대출 막혀 부도 위기
“완공 후 병원 담보 대출받아 잔금” 약속
건축 막바지 대출 해줄 은행 없어 고민 중
노회장 회의서 한 장로님 도움으로 해결
소나무 밭 둘레길로 둘러싸여 있는 경남 거제 굿뉴스요양병원 전경.
요양원을 세우고 나니 요양병원이 가까이 없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간단한 검진을 받으려 해도 30㎞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왕복 60㎞ 거리는 어르신들에게 큰 무리였다.
고심 끝에 요양병원을 세우기로 했다. 거제의 교회가 양로원과 요양원 세운 것도 벅찬데 요양병원이라니. 직원들까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요양병원은 요양원 옆 9917㎡(3000평) 넓이의 부지에 짓기로 했다. 연중 온화한 기후로 요양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거제도 서남쪽 해안가 언덕에 있는 부지에 서면 바다가 내려다보였고 뒤로는 계룡산이 있었다. 겨울에는 산이 찬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이 자리에 280병상 규모 요양병원을 짓기로 하고 건축회사와 첫 미팅을 했다. 하지만 교회가 건축비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완공되면 병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잔금을 치르겠습니더. 거제에서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저희를 믿어주이소.”
간곡히 부탁했었다. 건축회사 관계자들도 고민했지만 이렇게 건축비를 내는 사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우리를 못 믿을 이유도 없었는지 승낙해 줬다. 요양병원 건립과 운영 등에 지식이 전혀 없다 보니 어려움이 컸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못 할 일도 없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건축이 거의 마무리 돼 갈 때쯤 진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시중 은행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출을 받지 않으면 건축비 잔금을 건넬 수 없었다.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사방이 막힌 벽에 갇힌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절망이 일상이 돼 버렸다. 숨도 겨우 쉬며 살던 어느 날 서울 종로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본부에서 노회장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2005년 경남노회장이던 내게도 초청장이 왔다.
대출이 해결이 안 돼 만사가 귀찮았지만 어쩐지 그 회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장에 앉았더니 바로 옆에 머리가 흰 어떤 장로님이 인사를 건네셨다. 서울 지역 한 노회 노회장이셨다. 회의를 마친 뒤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대출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을 하셨다.
“장로님. 우리 교회 장로님 중에 OO은행 은행장이 계십니다. 제가 한번 말을 전해 볼게요. 분명 길이 있을 겁니다.”
감사하면서도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길이 활짝 열리길 기대하면서도 은행장 지시라고 막혔던 대출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생각만 많고 손에 쥔 건 없이 거제로 돌아왔다. 그 후 며칠이나 지났을까. OO은행 마산 지점장이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 “행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아무리 은행장 소개로 왔다 해도 지점장은 담보 물건의 가치와 복지법인 재산, 갈릴리교회의 상환 의지 등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OO은행이 대출을 허가한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4) 혐오시설이라며 반대하던 면민들, 반색하며 “짝짝짝”
지역유지와 동네 이장들 모인 자리에
요양병원 필요한 이유 설명해 드리자
복덩이가 들어왔다며 찬성으로 돌아서
거제 정원노인요양원 어르신들이 최근 요양원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만약 대출을 받지 못했으면 요양병원은 부도를 피할 수 없었다. 요양병원이 부도로 넘어가면 기존에 운영하던 요양원과 양로원 모두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대출의 길이 열리면서 결국 요양병원이 무사히 문을 열게 됐다. 사실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만약 서울 종로 예장통합 총회에서 열린 전국 노회장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거기서 OO은행장을 소개해 준 고마운 장로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대출을 받아 건설회사에 줘야 할 잔금을 모두 치르고 개원식을 열었다. 요양병원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왕복 60㎞ 거리를 오가야 했던 요양원 어르신들이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게 감사했다.
하지만 대출보다 앞서 요양병원 허가 직후 사업 자체가 무산될 뻔했던 일이 있었다. 거제면민들이 동네에 혐오 시설이 들어온다고 반대에 나선 것이었다. 요양병원이 혐오 시설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이장님들과 지역 유지들이 면사무소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민 끝에 면장님께 전화했다.
“면장님, 제가 오늘 모임에 참석해 이장님들께 요양병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꺼. 요양병원이 주민들에게 좋으면 좋았지 절대 혐오시설이 아닙니더. 기회를 주이소.” 면장님은 나를 모임에 초대해 주셨다.
나를 노려보는 이장님들 앞에 설계 조감도를 펼쳐 벽에 건 뒤 인사를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들어보이소. 집에서 치매 노인 돌볼 수 있습니꺼. 못 합니더. 그 일을 우리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할 수 있습니더. 우리 직원들은 모두 전문가들이고 부모님처럼 환자를 돌보고 있습니더. 믿고 맡겨도 됩니더. 물론 외래 환자도 받는 병원입니더. 여러분들도 불편한 데 있으시면 언제든 와서 진료받을 수 있심더. 동네에 큰 병원 하나 새로 생긴 기지, 절대 혐오 시설 아닙니더. 오히려 기다리던 병원이 생긴 겁니더.”
이렇게 설명하자 그 자리에 모인 이장님들은 “대체 누가 혐오 시설이라 했노”라면서 박수를 보내 주셨다. 오히려 동네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다면서 반색하셨다. 반대하시던 면민들이 모두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요양병원이 들어설 나지막한 언덕에는 면민들이 오랜 세월 알음알음 묘지를 써 무려 180기 가까운 묘가 있었다. 이장을 두고 옥신각신하며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면사무소 설명회 이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장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기적은 대출 이전에 경험했다.
이런 난관을 넘어 거제도 유일의 노인 종합 복지 시설을 일궜다. 중증 치매 환자나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을 집에서 모시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효자, 불효자를 떠나 힘든 일이다. 그 일을 우리가 대신 하는 것이었다.
지재유경(志在有逕)은 나의 좌우명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뜻이다.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끄시는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5) 자립 복지 꿈꾸며 목공회사 설립… 판로 없어 망할 뻔
대형 선박에 가구 납품해 자립할 계획
담당자 “이미 물량 확보했다”며 냉대
이전 납품 업체 문 닫자 가구 주문 폭주
경상남도 고성에 있는 목공회사 ‘요셉’ 전경. 훗날 회사 이름을 ‘JSF’로 바꿨다.
나는 복지 사업을 한다면서 여기저기에 도움을 구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립 복지를 꿈꾼 이유다. 이 연장 선상에서 목공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경남 고성군의 깊은 산 중에 중소기업 대출 10억원을 받아 공장을 마련했다. 회사 이름은 ‘요셉’이었다.
가구를 만들어 대우조선이 만드는 대형 선박에 납품하는 게 목적이었다. 마침 친구가 실력 좋은 목수여서 제품에 대한 자신감도 웬만큼 있었다. 납품이 문제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대우조선 전무님을 만나 납품 가능성을 타진했다. 2002년 초의 일이었다.
“전무님, 저희가 노인 복지 사업을 하면서 자립하기 위해 목공회사를 만들려고 합니더. 저희가 만든 가구를 대우조선이 만드는 선박에 납품할 수 있을까예?”
전무는 흔쾌히 좋다고 말하고는 가구 담당 팀장을 불렀다. 팀장도 알겠다고 답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구 팀장이 자기 사무실로 가자 냉대하는 것이었다. “아니 전무님이 소개하면 납품이 진행됩니까. 아닙니다. 이미 내년에 납품받을 물량은 확보했으니 내년 이맘때 오시든지 그러세요.”
하늘이 노래졌다. 이미 공장도 세우고 각종 목공 기계도 다 들여놓은 뒤였다. 공장 문을 열자마자 망하게 생긴 것이었다.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매일 산속 목공회사에 들러 앉아 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두 달쯤 지나 성탄절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대우조선 가구 팀인데요. 고성 목공회사엘 가봐도 될까요?”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오시라고 했다. 잠시 후 여러 명의 직원이 회사를 찾아와 각종 시설과 설비들을 꼼꼼히 확인하더니 돌아갔다. 그날 오후 다시 전화가 왔는데 철판 위에 까는 나무 발판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이튿날에는 같은 물건을 100만원 어치 더 만들어 달라고 하고 며칠 지나서는 300만원 추가 주문을 했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우조선에 많은 물량의 가구를 납품하던 A업체 대표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기자 직장을 폐쇄해 버렸다. 당장 납품받을 공장이 사라져, 급한 나머지 우리에게까지 연락한 것이었다.
게다가 A회사 직원들이 직장 폐쇄 후 갈 곳이 없자 우리 회사로 이직을 했다. 기술자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 온 직원들을 잘 대우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대신 높은 품질의 가구로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회사를 팔았지만 당시 우리 법인이 운영하던 회사는 연 매출이 30억원을 넘어섰다. 이는 복지법인이 자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있고 노련했다면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에 밝지 못한 순박함이 이런 일을 벌이고 또 성공시킨 동력이 됐다.
목공회사 요셉을 운영하던 그사이 회사 앞으로 산업도로가 생기면서 매각할 때는 공장 용지 가격도 상당히 올랐다. 회사를 팔아 마련한 기금은 훗날 종합병원인 맑은샘병원을 설립하는 데 종잣돈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6) “종합병원 세워 인술 베풀며 주님 사랑 전하고 싶어요”
기도 중 공사 중단된 좋은 부지 나타나
인수 후 4200평 규모 종합병원 세우자
개원 석 달만에 220개 병상 모두 차
이종삼(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2013년 경남 거제 맑은샘병원 준공감사예배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요양병원을 설립한 뒤 양로원과 요양원,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노인 종합 복지 사역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거제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종합병원이었다. 2010년 초였던 거로 기억한다. 지역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거제시 연초면에 7명의 의사가 의기투합해 종합병원을 만들려다 무산된 부지가 있다는 얘기였다. 당장 길을 나섰다.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니 건축이 중단된 부지가 보였다. 거제대로 옆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건설 현장에서 돌아서 내려다보면 멀리 연초천이 보였다. 지대가 높아 마치 거제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공사가 중단된 폐허 같은 자리에 서서 ‘잘 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종합병원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던 중 만난 부지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동안 해 온 사역도 돌아보면 준비된 뒤 했던 일들이 아니었다. 모두 기도로 쌓은 탑이었다. 다시 빈들에 섰다.
어느 날 새벽 눈을 떴더니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새벽기도에 갔다가 또다시 공사장에 올랐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자재 위에도 눈이 쌓였고 적막했다. 눈 쌓인 공사판에 그대로 엎드려 손을 모았다.
“주님, 이 자리에 병원을 세우고 싶습니더.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 자리를 통해 거제 사람들을 치료하고 인술을 베풀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더. 주님,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처럼 또다시 이끌어 주소서. 도우소서.”
이 일을 위해 영입한 이상관 배부현씨 등 직원들은 부지를 인수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또다시 기적을 경험했다. 좋은 조건에 부지를 넘겨받았고 힘겹지만, 종합병원 건립이 다시 시작됐다. 총면적 1만3884㎡(4200평) 규모의 병원을 짓기로 했다. 내과와 정형외과, 신경외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영상의학과, 진단검사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직업환경의학과, 치과 등의 진료과를 갖춘 종합병원을 세우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2013년 4월 맑은샘병원을 개원했다. 거제 인근 병원에 계시던 유명한 의료진이 우리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개원 석 달 만에 220개 병상이 모두 찼다. 거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꾸준히 성장한 맑은샘병원은 최근에도 하루 외래환자가 800명을 넘으며 명실상부 거제를 대표하는 종합병원이 됐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요한복음 4장 14절의 말씀을 토대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로 황폐한 땅을 옥토로 만들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강을 이루고 대양으로 흘러 세계를 덮는 바다가 되겠다는 창대한 비전으로 설립한 병원이다. 기도와 눈물의 결실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자를 치료하셨고 사랑을 나누셨다. 기도하며 세운 병원에 맡겨진 사명도 같다. 아픈 이, 병든 자를 사랑으로 치료하는 일,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7) “거제서 안타깝게 세상 떠나는 이 없도록 하겠심더”
가까운 심뇌혈관 전문병원 없는 거제도
늘 골든타임 놓쳐 적절한 치료 못 받아
가족력도 있던 차에 심뇌혈관센터 증축
이순창 예장통합 부총회장이 지난 5월 24일 거제 맑은샘종합병원 심뇌혈관센터 기공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오른쪽이 이종삼 목사.
2013년 맑은샘병원을 개원한 뒤 모든 병상이 빠르게 찼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렸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크게 지었어야 했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변에서도 증축하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 병원 규모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규모를 대폭 키우고 싶은 진료과가 있었다. 바로 ‘심뇌혈관센터’였다. 심뇌혈관센터는 심근경색 등 심혈관질환과 심장정지, 뇌졸중 등 뇌혈관질환, 고혈압, 당뇨 등을 치료하는 곳을 말한다.
거제에 제대로 된 심뇌혈관센터가 없어 해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통계에 따라 달랐지만 2010년 중반만 해도 거제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 중 23.3%가 심뇌혈관 질환 때문이었다.
이 질환의 해법은 간단했다. 골든타임인 30분 안에 병원에 도착하는 게 우선이고 우수한 의료진과 첨단 진단·치료 장비만 갖추고 있으면 꺼지는 생명을 반드시 살려낼 수 있다.
심뇌혈관센터를 증축하고 싶었던 건 개인사도 크게 작용했다. 나의 아버지도 심장이 안 좋으셨다. 나 또한 심장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런 가족 병력이 있다 보니 평소에도 관심이 컸다. 이런저런 이유로 심뇌혈관센터를 증축하고 싶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첫 작업은 맑은샘병원 주변의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선 산림청이 소유하고 있던 5619㎡(1700평) 면적의 땅을 합법적 절차에 따라 구입했다. 병원과 맞닿아 있던 A교회도 인수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A교회가 내부적인 이유로 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었다. 호재였다. 교회가 자발적으로 이전을 결정하면서 이 부지도 무리 없이 확보할 수 있었다.
심뇌혈관센터를 증축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건 부지였는데 이걸 해결하고 나니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기공 예배는 지난 5월 드렸다. 새로 확보한 부지에 기존에 가지고 있는 땅을 더해 1만1548㎡(3500평) 넓이에 센터를 짓기로 했다. 내년 9월 30일 준공을 목표로 세웠다. 병원은 지상과 지하 각각 4층 규모로 300개 병상을 갖추게 된다.
공사를 마무리 하면 거제 최초로 심장과 신경외과 전문의를 비롯한 숙련된 의료진과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24시간 응급진료를 볼 수 있는 신속 의료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기공 예배 때 했던 인사말이 기억난다. “맑은샘병원까지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더. 거제에 필요한 병원이 또 있더군요. 거제에 제대로 된 심뇌혈관센터가 없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보며 무척 괴로웠습니더. 반드시 환자를 살리는 병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더.”
복지 사역을 시작한 뒤로 건물을 계속 지으면서 노하우가 생겼다. 사실 겁이 없어졌다. 이런 내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생겼다. 총회 창립 100주년 기념관 건립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8)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건축… 계획 차질 우왕좌왕
부지와 예산 문제로 사업 진행 더뎌져
총회를 위해 헌신할 기회라 생각하고
건물 지어본 경험 살려 전권 맡아 헌신
예장통합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모습.
20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제94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을 짓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건축위원회까지 조직했다. 100회 총회는 2015년이었는데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 새로운 100년의 청사진을 그리자는 뜻이 모아졌다.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사업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서울 명성교회가 총회 맞은편,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부지를 기증하면서 건축 여론이 급물살을 타기도 했지만, 그 땅은 총회 본부를 모두 이전할 건물을 짓기엔 조금 좁았다. 게다가 기존 총회 본부 바로 앞에 건물이 서면 두 건물 사이에 골목이 생기면서 동네 자체가 갑갑해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2013년 김동엽 총회장 시절 나는 총회 임원회에서 부회록서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임원회에서도 수시로 건축 문제가 나왔다.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제가 건축위원회에 한번 가 보겠습니다. 저를 위원으로 파송해 주이소.” 다들 꺼리는 건축위원을 자원해 맡았다.
총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큰 무리 없이 완공할 길이 보였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건물을 지어본 사람에게 보이는 그런 길이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총회가 큰 대출을 받지 않고 분명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당초 완공을 목표했던 2015년까지 기공식도 갖지 못한 채 100회 총회를 맞았다. 이 총회에서 또다시 100주년 기념관 건축 결의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공사를 선정한 것이었다.
총회 집행부의 고민은 더 커졌다. 공사비가 마련되지 않아서였다. 전국 교회 모금을 통해 공사비를 마련한다는 기본 계획만 있었지, 모금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은 없었다. 더욱이 전반적인 교세 감소로 모금이 원활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건축위원회 내부에서도 모금을 먼저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오정호 이창연 장로를 비롯해 내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초지일관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당시 지용수 위원장은 건축위원회 서기였던 내게 부위원장을 맡으라 하면서 전권을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4월 기공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 건물은 기존 총회 본부 정원에 짓기로 했다. 이 자리에 건물을 어떻게 짓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설계 결과 충분히 넉넉한 면적의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전히 공사비가 문제였다.
예장통합 총회는 9월마다 정기총회를 열고 총회의 대소사를 다루는데 여기서 모금을 마친 뒤 건축하라는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건축위원회 회의에서 무조건 그 전에 토목 공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다시 냈다.
결국, 건축위원회도 공사에 속도를 내기로 하고 토목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 뒤 처음 맞는 교단 정기총회에서 예상대로 총대들이 공사비 걱정을 많이 하셨다. 물론 토목 공사를 모두 마쳐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사이 총회 감사위원회도 두 차례나 “공사비 모금을 마친 뒤 공사를 진행하라”는 감사 의견을 냈다. 모두 총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결정들이었다. 갑론을박 중에도 공사는 힘겹게 진행됐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19) ‘걸어온 길 100년, 걸어갈 길 100년’ 담은 기념관 완공
공사 지연으로 공사비 올라 고민하다
사무실 유치해 보증금으로 막자 제안
건축위원회 조직한 뒤 9년 만에 결실
예장통합 관계자들이 2018년 7월 30일 서울 종로구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앞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2018년에는 큰 위기가 있었다.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사비가 계속 올라갔다. 건축위원회의 고민이 날로 커졌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전국 노회에서 5억2300만원, 467개 교회가 9억6200만원을 보내 주셨다. 완공까지 필요한 공사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건축위원회 회의에서 발언권을 얻었다. “총회 산하 기관과 단체, 노회 사무실을 유치합시더. 그분들은 새 건물을 사용해서 좋고 우리는 임대 보증금으로 모자란 건축비를 낼 수 있습니더. 그리고 그때도 부족한 예산은 대출을 받으면 됩니더.”
이후 총회 산하 기관과 단체 등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그 결과 실제 여러 기관과 단체, 부서가 새 건물에 입주하기로 하고 계약서를 썼다. 실제 이분들이 낸 임대 보증금은 가뭄 끝 단비와도 같이 사용됐다.
결국 예장통합 총회는 80억원이 넘는 공사에서 은행 대출을 15억원만 받았다. 나머지는 전국 교회와 노회의 헌금을 비롯해 새 건물에 입주한 기관과 단체 등의 임대 보증금을 통해 마련했다.
공사 중 기존에 있던 총회 본부 식당을 잘라내야 하는 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식당이 외부로 툭 튀어나온 구조여서 새 건물을 반듯하게 짓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철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묘안을 냈다. 외부로 뛰어나온 식당을 새 건물 안으로 품자는 것이었다. 기존 건물과 새 건물을 합하는 의미도 있었다. 설계에 이런 의견이 반영되면서 결과적으로 멋진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새 건물 바로 옆에 있던 미국 선교사 사택을 존치했던 것도 큰 보람이다. 1927년 지은 노후한 건물을 살리기 위해 건축위원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준공 감사예배는 2018년 7월 30일 드렸다. 2009년 총회가 건축위원회를 조직한 뒤 9년 만에 본 결실이었다. 이날 림형석 예장통합 총회장께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하셨다.
“100여 년 동안 하나님이 교단을 사랑하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은혜를 상징하는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동시에 이 건물은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건물이 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과 복음 사이의 가교가 돼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이끄는 공간으로 활용돼야 합니다. 새 100년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다리로 사용되길 소망합니다.”
감사예배에는 예장합동 이승희 총회장도 참석하셔서 축사를 전하셨다. “100여년 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이 이 기념관에 기록됐습니다. 이 집은 100년의 역사를 담는 것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나 혼자 한 일은 아니었다. 건축위원회와 예장통합 총회 산하 교회들이 해낸 일이었다. 나는 그저 그동안 여러 건물을 지어본 경험으로 완공을 위해 작은 조약돌을 얹었을 뿐이었다. 건축위원회 위원들의 수고가 무척 컸다. 의견 차이도 있었지만 모두 총회를 사랑하셨다. 새 건물을 보면서 늘 총회가 걸어갈 새 100년을 그려 보게 된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주님께 영광)’.
***[역경의 열매] 이종삼 (20) 신학교서 쌓은 우정… ‘동사 목회’하며 노후를 함께
신앙 안에서 형제처럼 지낸 입학 동기들
양로원과 요양원 원목 부임을 시작으로
각각 자신의 사역 마친 후 하나둘 모여
1975년 신학교에 함께 입학했던 ‘친구 목사들’이 지난 20일 경남 거제 갈릴리교회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화종 정정호 이종삼 김장수 여두기 목사(왼쪽부터).
나는 1982년 장로회신학대 목회연구과정에 들어가기 7년 전인 1975년 부산 좌천동에 있던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에 입학했다. 부산장신대의 전신인 이 신학교에서 신학도로서의 성품을 길렀고 목회자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했다.
신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신학교에 오기 전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던 고향의 덕포교회에서 외롭게 신앙 생활하던 나는 매일 열리는 경건회와 기도회가 좋았다. 무엇보다 찬양이 가득한 캠퍼스를 거닐 때는 감사가 넘쳤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을 더욱 알차게 만든 건 입학 동기들이었다. 특히 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온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우정을 쌓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함께했다. 진로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신앙의 동지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쌓은 우정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우리는 목사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스무 살 청년들과 같다.
우정은 ‘동사 목회’로 이어졌다. 동사 목회란 사역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사업으로 말하면 동업인 셈이다. 나는 75년 신학교에 함께 입학했던 친구 4명과 함께 사역하고 있다.
2000년 김장수 목사가 사랑의집 무료 양로원 원목으로 처음 부임했다. 2003년 솔향노인요양원이 문을 열 때 정정호 목사가 원목으로 부임한 게 두 번째다. 학교 다닐 때부터 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좋은 성품을 가졌던 정 목사는 현재 굿뉴스병원 원목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솔향노인요양원 원목실의 빈자리는 정화종 목사가 채웠다.
모두 목회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렸던 친구들로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 짓고 하나둘 내 곁으로 왔다. 울산수정교회를 조기 은퇴한 여두기 원로목사는 내가 담임으로 있는 갈릴리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다. 앞으로 윤병수 이수부 목사도 거제로 올 예정이다.
우리는 친구이며 목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다 보니 사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하다. 우정이 사역을 더 깊게 만드는 건 또 다른 유익이다.
물론 친구들끼리 모여 사역하다 보니 서로 조심할 것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다. 목사의 사명이 뭔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우정으로 채우며 의지하는 동역자들이다.
동역은 목회에서만 끝나지 않을 예정이다. 은퇴한 뒤에도 친구들과 모여 사는 계획을 세웠다. 열 세대 남짓한 공동주택을 짓는 꿈을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 같이 밥해 먹고 노년을 사는 실버타운을 만드는 꿈이다. 거창한 집을 짓겠다는 건 아니다. 소박하지만 친구들과 노후를 함께할 수 있는 멋진 꿈을 짓는 것이다.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아닌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1) 인도 푸네 아가페신학교 설립…
복음의 일꾼 양성
아가페신학교의 열악한 교육 환경 듣고
신학교로 사용될 건물 구입 비용 쾌척
거제 갈릴리교회가 인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 지원하는 인도 푸네 아가페신학교 본관 모습.
‘푸네’는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州)의 도시로 156만7000여명이 산다. 목화와 카펫을 비롯해 식료품 화학 농기구 유리 제지 공업이 발달했으며 동시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갈릴리교회는 이곳에 세운 신학교를 전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도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학교 법인까지 설립하면서 복음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역사가 있다. 20대 때 신학교에서 만난 형님인 김봉수 목사가 미국 플로리다에 아가페신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 분교를 세우겠다는 꿈도 꿨다. 그러던 중 인도에서 사역하던 김동휘 선교사라는 분이 2020년 푸네에 아가페신학교의 분교를 세웠고 올 초 그분이 거제의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
김 선교사는 푸네 아가페신학교의 현황을 소개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했다. “목사님, 신학교를 세웠더니 학생이 50명이나 입학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아주 좁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무 열악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할 지경입니다. 학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규모를 좀 키워야겠는데 여력이 없습니다. 마침 학교 옆 건물을 인수하면 이를 기본 자산으로 인도 교육부로부터 교육 법인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바로 답했다. “그 건물 구입을 돕겠습니더. 2억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꺼. 갈릴리교회가 지원할 테니 그 건물 놓치지 말고 구입해야 합니더.”
교회는 결국 이 건물을 자산으로 ‘갈릴리 아카데미’라는 교육 법인을 설립했다. 푸네 신학교육의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김 선교사도 지난달 갈릴리교회가 후원하기로 하고 파송 예배를 드렸다.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지만, 빈부격차가 심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선교 역사는 오래됐지만 정식 신학 교육을 받은 목사의 수도 적다. 아가페신학교가 제대로 된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을 목사를 배출하는 인도 신학 교육의 요람으로 키우려 한다. 재학생 중에는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와 처음 신학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섞여 있다. 모두 신학 교육이 필요한 이들이다. 교육과정은 목회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면을 강조해 구성했다.
적지 않은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교회가 큰 헌신을 했다. 김 선교사와 내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좋은 일을 하는 신학교 동문의 지인이었을 뿐이다. 나는 인도에서의 사역과 미래만 그렸을 따름이다. 김 선교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선교사님께서는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의로운 짐을 맡기셨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지도자를 길러 주세요.” 김 선교사도 “복음의 결실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갈릴리교회 교인들이 받은 은혜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지면을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22) “선교사님, 우리 갈릴리교회가 다리를 놓겠습니다”
에스와티니 마을에 제대로 된 다리 없어
폭우 땐 옆 마을 아이들 예배 참석 못해
‘갈릴리 다리’ 준공하고 병원 건축도 지원
거제 갈릴리교회가 2019년 아프리카 에스와티니의 한 마을에 세운 ‘갈릴리 다리’ 전경. 아래 작은 사진은 다리 입구에 게시된 안내판 모습.
에스와티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동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붙어 있는 나라로 영국 보호령을 거쳐 1968년 독립했다. 남한 면적의 6분의 1 수준의 작은 내륙국으로, 높은 산악 지대가 병풍처럼 국토를 둘러싼 풍경이 아름다워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지녔다.
나는 몇 해 전 아프리카 선교를 많이 하는 마카누리선교회 회원들과 이 나라를 방문했다. 박재춘 선교사의 사역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남아공에서 사역하다 에스와티니로 사역지를 옮긴 박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은 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하늘에서는 쉬지 않고 폭우가 쏟아졌다. 방문할 교회에는 이미 동네 아이들이 도착했다는 얘길 들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오고 있어 마음이 더 급해졌다.
산속 교회에는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검은 구름 아래 놓인 교회가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없었다. 일행이 서둘러 교회로 들어서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우와.” 쉼 없이 이어지는 함성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우리는 모두 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 순간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형광등 한 개가 “퍽”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게 아닌가.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성만으로 형광등이 깨지다니…. 그 광경이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함성은 이내 찬양으로 바뀌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시다는 사실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예배를 드렸다. 일행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예배 후 우리나라에서부터 들고 간 선물을 전했다. 동그란 눈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꼭 안아줬다. 그런데 선물이 많이 남는 게 아닌가.
박 선교사가 말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옆 마을 아이들이 다리를 못 건넙니다. 너무 부실한 다리여서입니다. 그래서 많이 모이지 못한 겁니다. 제대로 된 다리를 놓는 게 오랜 바람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올라왔다. 선교사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선교사님, 다리를 우리 갈릴리교회가 놓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약속한 뒤 거제로 돌아와 당회를 열었다. 당회도 흔쾌히 동의해 주셨고 즉각 재정 지원을 했다. ‘갈릴리 다리’로 명명한 다리는 2019년 10월 완공했다. 복음의 가교가 된 셈이었다.
우리 교회와 에스와티니의 인연은 계속됐다. 그 나라의 왕이 박 선교사에게 병원을 지어 달라며 3만3057㎡(1만평) 넓이의 땅을 하사했다고 했다. 하지만 재정이 부족해 병원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지원을 결정했다. 우리 교회와 성념의료재단, 내가 세운 데이비스선교회가 협력해 병원 건축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했다. 이 병원은 내년 중 완공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 1만㎞ 이상 떨어진 먼 나라 에스와티니. 지금 바로 출발해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그 땅에서 자랄 복음의 열매를 생각하며 늘 두 손을 모은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23) 침몰 직전인 모교 부산장신대… 대학 정상화에 총력
대학 기본역량 진단서 최하위 성적 받아
3년 동안 교육부 일반재정지원서 제외돼
총장으로 허원구 목사 모시고 회생 논의
경남 김해에 있는 부산장신대 정문에서 바라본 캠퍼스 모습.
2018년 8월 23일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2018년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를 발표했다. 교육부 등은 전국 대학을 ‘자율개선대학’ ‘역량강화대학’ ‘재정지원제한대학’ 3단계로 분류했다.
당시 모교인 부산장신대가 가장 낮은 단계인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속했다. 이 결과 3년간 교육부 일반재정지원에서 제외되는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신입생부터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 놓였다.
공교롭게도 이 발표가 있기 하루 전 나는 모교 이사가 됐다. 이사 모두가 침통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미안했고 부산에서 유일한 예장통합 총회 산하 신학 교육 기관이 이런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대학은 새로운 총장을 선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당시 학교를 이끌던 A총장이 재선에 도전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나와는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친구였다. 우정으로 치면 그의 재도전을 응원해야 했지만, 이사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총장 선거 하루 전 전화를 했다. “총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더. 하지만 학교가 이래 어려워지니 수습할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더. 아쉽지만 총장 재도전은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더.” 친구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A총장은 아내와 상의한 뒤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고마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총장 선거 직전 A총장이 다시 후보로 올라온 것이었다. A총장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만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결국 A총장과 또 다른 후보를 두고 투표가 진행됐다. 누구든 8표를 얻으면 당선되는데 A총장이 6표를 얻었다. 나를 비롯한 또 다른 친구 이사가 표를 줬다면 무난히 당선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공적 책임이 우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는 지금도 몹시 미안할 뿐이다.
학교는 풍전등화에 놓였다. 나는 새 총장 후보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허원구 목사가 부산 산성교회 원로목사가 된 뒤 순회 선교사로 출국한다는 말이 들렸다.
허 목사는 부산장신대에서 10년 동안 강의를 했고 이사로도 봉사해 학교를 잘 알았다. 교회를 이끈 목회자였지만 학자적 풍모도 있는 분이었다. 나는 허 목사에게 전화를 드렸고 대학 회생의 지도자가 돼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허 목사는 가족과 상의한 뒤 답을 주기로 했다.
나는 그가 신학교 회생의 적임자라는 확신이 있었다. 몇몇 이사들에게도 언질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 목사가 맡아 보겠다는 답을 줬다. 그 즉시 이사회를 소집해 허 목사를 총장에 선출했다.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즈음 나는 모교 이사회의 이사장이 됐다. 내가 취임하고 한 달이 지난 2019년 5월 허 목사도 총장에 취임했다. 대학 평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아 난파선처럼 침몰 직전에 놓인 대학을 살리기 위해 신임 이사장인 나와 허 총장이 머리를 맞댔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24)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재정지원제한대학 오명 씻어
사회복지과 폐지하는 아픔 겪어가며
교육 품질·학생 역량·취업률 등 높여
교육부 보완 평가서 두 단계나 상승
부산장신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4만 쪽 분량의 보완 평가 자료 모습.
나와 허원구 총장은 대학의 먼 미래를 논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대학 평가에서 낙제점 받은 걸 회복해야 했다. 우리 둘뿐 아니라 교수와 직원, 학생들까지 마음을 모았다. 교육부 보완 평가를 위해 준비한 서류만 4만 쪽에 달했다. 허 총장도 평가 당일 2분 스피치를 위해 한 달이 넘도록 준비했다.
대학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시스템 확립을 시작으로 교육 품질 제고, 학생 역량 강화를 비롯해 취업률을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학과를 폐과하는 아픔도 겪었다. 뼈를 깎는 노력은 결실을 봤다. 2020년 신입생 충원율이 98%로 상향됐고 결국 그해 7월 29일 교육부 보완 평가 결과 재정지원 제한이라는 꼬리표를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뿐 아니라 무려 두 단계나 상승했다.
부산과 울산, 경남의 7개 노회와 전국 교회의 후원을 통해 재정 운영 개선 부분에 특히 좋은 점수를 받았다. 기적이 일어난 셈이었다. 고난이 대학을 성숙시키는 변곡점이 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대학은 1인당 연간 장학금이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학교가 됐다.
수렁에 빠졌던 대학을 건져내는 과정에서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특히 큰 노력을 기울였었다. 이사회와 등을 졌던 교수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스승의 날에 모든 교수님에게 꽃을 보냈고 명절에는 선물을 전했다.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교수님들은 이런 사랑에 크게 감동하셨다. 내게 메신저로 감사를 표한 교수님들도 계신다. “13년째 우리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선물에 감동을 넘어 어리둥절합니다. 학교를 위해 끊임없이 물심양면 애써주시는 이사장님께 저희가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사장님께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저희가 감사의 자리를 마련하는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늘 건강 유의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박명화 특수교육과 교수)
“명절 때마다 큰 선물 주셔서 너무 감사하면서도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요즘 교수님들이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지고 활기를 찾는 건 이사장님이 학교를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2년여 전 학교 위상이 추락해 슬픔과 분노 속에 휩싸였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학교가 돼 가고 있습니다. 이사장님과 이사회가 학교의 울타리가 돼 주신 덕분인 걸 오래 잘 기억하겠습니다.”(민경진 신학과 교수)
부산장신 공동체는 대학 평가라는 큰 산을 넘으면서 하나가 됐다. 이사장으로서 나는 모든 구성원을 잘 섬기기 위해 애썼고 다른 분들도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무엇보다 허 총장이 하려는 일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지지했다. 이사회가 사사건건 총장의 결정에 제동을 걸면 대학이 굴러가질 않는다. 이사회는 대학을 품는 사람들이지 대학을 이리저리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재정 지원 제한 대학에서 빠르게 빠져나온 건 우리 대학의 건강성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가 됐다.
***[역경의 열매] 이종삼 (25·끝) “주님, 지재유경이 이끄신 삶, 동과가 되겠나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이웃 사랑과 나눔처럼
아프고 상처받은 이 돕고 싶은 꿈 가져
주님께 은혜 구하며 실현하기 위해 노력
이종삼 목사가 최근 역경의열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를 방문해 기도하고 있다.
겨울 들판은 쓸쓸하다. 하지만 바람 소리만 가득한 언 땅이 때때로 훈훈해질 때가 있다. 가지 끝에 달린 과일을 볼 때가 그렇다.
가을걷이 때 누군가 남겨둔 과일이 찬 겨울을 풍요롭게 만든다. 이렇게 남은 ‘동과(冬果)’를 보며 ‘나누는 삶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동과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명수와도 같다. 빈 들판, 먹을 만한 과일이나 씨앗이 사라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굶주린 새들에게, 작은 들짐승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동과야말로 희생의 결정체다.
언젠가부터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내는 삶이 싫었다. 동과처럼 나를 쳐 딱한 이들을 돕고 싶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중심 사상은 바로 ‘천국’이다. 천국을 바라는 마음을 주셨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에도 하늘의 천국이 땅에서도 이뤄지리라는 기도가 담기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
위대한 신학자 몰트만의 말처럼 완성된 천국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오는 법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완성된 회개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을 바라며 오늘을 개혁하는 게 믿는 자들의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천국 설교야말로 내 삶을 이끄는 동력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몸소 보이셨던,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시며 병을 치료하시고 악한 걸 고치셨던 4대 사역이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이 보이셨던 사역의 특징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겼단 사실이다.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 것도 모두 죄인으로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사랑과 나눔은 이웃을 불쌍히 여길 때 시작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진정한 돌봄의 토대인 셈이다.
그저 주님의 가르침만 따랐을 뿐이다. 내게는 특별한 기술도, 복지나 병원 운영에 대한 지식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열정이 가득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픈 이들, 상처받은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 애썼다.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기특하게 보신 인생의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무너져버린 고향의 덕포교회를 다시 세운 일과 목사가 된 뒤 고향 거제로 돌아와 목회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등이다. 모든 건 뜻을 세우고 묵묵히 길을 찾은 데서 시작됐다. 지재유경(志在有逕·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이 나의 좌우명인 이유다.
동과는 나의 호다. 그런 삶을 살고 싶고 후대에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오늘도 동과와 같은 삶을 꿈꾸고 또 바란다. 최근 들어 소박한 소망이 한 가지 더 생겼다. 내 삶의 자리에서 언젠가 은퇴한 뒤 인도 푸네에 세운 신학교로 가 묵묵히 사역하다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이다.
“주님, 저를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 들판의 과일처럼 나를 드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삶을 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