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속의 인물
오종락
존경하는 인물들이 얼굴을 맞대고 고이 잠들어 있다. 그곳은 바로 내 지갑속이다. 그 모습이 예전과 달리 새로운 관심으로 다가온다. 그 까닭은 얼마 전에 읽은 『퇴계선생일대기』의 영향 때문인지 모른다.
각 지폐 단위마다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훌륭한 인물의 초상을 새겨 놓은 까닭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그분들의 훌륭한 가르침과 고마움을 평소에도 잊지 말고 되새겨 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존경해야 할 초상을 늘 마주하면서도 무심했던 나. 단순한 금전거래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그쳤다. 액면 가치에만 치중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비록 천원권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액면가만 봐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된 건 얼마 전 일이다. 천원권 한 장 속에는 수천만 냥을 매겨도 부족한 선생의 깊은 사상과 정신세계가 그대로 녹아 있다.
긴 세월이 흘렸음에도 선생의 고결한 숨결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정신세계와 생활 태도는 하나같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선생의 사상과 인품을 필설로 모두 다 형언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 책 필자의 제목처럼 ‘가을 하늘 밝은 달’과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필자도 그런 생각에서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게 아닌가 한다. 조금 덧붙이면 한반도 상공에 높이 떠올라 사계절 변함없이 온 세상을 비추는 환한 보름달이라 말하고 싶다.
인품의 대명사처럼 흔히 회자되는 ‘인향 만리’를 한참 뛰어 넘어 ‘퇴계사상 수억 만리’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이웃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까지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본받고자 한다니 어찌 온 세상을 비추는 환한 보름달 같은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인품이나 학덕은 누구나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 그의 심오한 사상과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퇴계 선생 수양론의 두 축은 심(心)과 경(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心)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근본 바탕이요, 경(敬)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경(敬)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다. 퇴계 선생이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敬)의 태도를 일생 동안 몸소 실천한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평소 그가 남긴 편지 글의 내용을 보면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다. 아랫사람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마음을 전하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형제나 자식 및 조카들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주고받은 편지 글에서는 따듯한 인간애가 느껴지며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랫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경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작은 답례라도 하며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은 참으로 본받아할 대목이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같이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는 생활태도는 동서양을 넘어 그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군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입단속이나 유가의 법도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엄격하였다.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고 평소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집안의 대소사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모두 자신의 잘못이며 죄라고 여겼다. 남을 탓하기 좋아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고가 팽배한 오늘날 선생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는 크게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경사상을 비롯해 인성중심의 인간교육,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사상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퇴계학 가운데 주목받고 있는 평등, 배려, 합리성, 청렴 등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온갖 반칙과 부조리가 만연한 혼탁한 이 시대에 선생의 가르침은 더욱 빛을 발한다.
지갑을 열다 눈에 들어온 초상을 통해 얻게 된 작은 깨달음! 이건 선생의 거룩한 영혼이 아직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그 순간 ‘진작 지폐에 새겨진 주인공의 진면목을 살펴보고 본보기로 삼을 걸’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러했다면, 내 인생의 내면도 보다 알찬 결실로 가을을 맞이했을 터. 인생도 이제 가을이라 더욱 아쉽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세상이 그리운 세태다. 선생의 가르침을 십 분의 일이라도 실천하는 그런 세상을 꿈꿔 본다. 사람 냄새 풍기며 살맛나는 세상도 바로 이 세상 안에 존재할 터. 한 순간 깨닫고 실천만 따른다면 말이다.
늦은 밤 중천에 뜬 가을 달에서 선생의 얼굴을 그려본다. 달빛에 실려오는 선생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떠올리며. 먼저 이런 가르침을 주시지 않을까 하고. “염치와 분수를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참된 인간세상이 되느니라.”라고 일깨워 주실 듯, 밝은 가을 달빛은 묵묵히 선생의 가르침을 대신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20.9.23)
첫댓글 좋은 책을 읽으셨군요. 퇴계 선생님은 우리나라를 떠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늘 지갑속에 그분의 사상과 가르침을 생각하며 선생님의 앞길이 맑은 가을 보름달 같이 빛나길 바라오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퇴계선생은 일생 철저한 개인관리를 잘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군자를 본받기 위해 생활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흡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지갑 속 인물이라 하여 몰래 감춰 둔 옛 애인의 사진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외입니다. 일상에서 가끔 신바람을 일게 하는 것이 발상의 전환입니다. 앞으로 지갑을 열 때마다 위인들의 행적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돈에 찍혀있는 성현의 얼굴이 요즘 아이들에겐 액면가의 가치로 보이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좀더 교육적인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천원 지폐에 담긴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폐의 앞면에는 퇴계 이황선생과 성균관의 명륜당, 매화 그림이 있고 뒷면은 겸재 정선이 이황 생존시 건물인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산수를 담은 풍경화(계상정거도)가 그려져 있음을 찾아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