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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75
8월2일 [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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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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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NkxO5Au-58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4489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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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날, 아니 조만간 우리가 직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한평생 그려왔던 곳, 그리워했던 곳, 갈망했던 하느님 나라이기에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 알량한 교리와 성경지식, 제 보잘 것 없는 신앙 체험이지만 총동원해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유한했던 이 지상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결핍이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원 없이 채워지는 곳... 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안에 온전히 치유되고 바로 서게 되는 은혜로운 장소.
언젠가 한 특별한 수도공동체를 방문하고 제 나름대로 큰 충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흔적, 예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정다감한 어머니처럼 자상한 책임자 수녀님을 중심으로 능동적이고 협조적인 구성원 수녀님들의 조화와 화합이 거의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들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서로 섬기고 헌신하니 거기서 무슨 명령이나 순명, 회헌회칙이나 특별한 요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봉사를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도 깊은 신뢰심과 편안함, 행복함과 가족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자원봉사자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나누려고 방문하느라 공동체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본당 공동체, 보편 교회 공동체에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 각 구성원의 끝도 없는 자기 비움, 자기 낮춤, 헌신과 내어놓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그 배경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물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모퉁이에 군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작은 내어놓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아주 작은 선행과 봉사, 내어놓음을 기뻐하십니다. 그 작은 우리들의 내어놓음을 기반으로 엄청난 당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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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적을 일으키는 힘, 감사와 사랑의 봉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4Uc3Ohc38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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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기적을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동네에서도 여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와 대화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로 심히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제 복음 묵상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말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제가 수천 명의 신자분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에 부끄럽지만, 그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힘입니다.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창백한 소년이 꽃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쁜 꽃들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토비’라고 밝힌 후 “앞으로 60년간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할 꽃다발을 미리 주문하고 싶어요. 엄마 생일이 9월 22일이에요. 매년 이날 배달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토비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던 여주인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했고 “30달러면 충분해.”라고 말한 뒤 토비를 돌려보냈습니다.
두 달 후 토비와의 약속을 기억한 여성은 토비 엄마의 생일인 9월 22일에 꽃다발을 안고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꽃을 든 여성에게 “누구세요?”라고 묻는 소년의 엄마에게 “이 꽃은 토비가 당신을 위해 주문한 꽃이에요. 생일 축하해요.”라며 꽃을 건넸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란 토비의 엄마는 “제 아들이 저를 위해 주문을 했다구요? 정말이에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꽃집 여성은 “토비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며 60년간 매년 꽃다발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비의 엄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투병 중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전에 한 번 생일날 꽃을 선물 받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했더니 앞으로 매년 꽃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했었어요.” [참조: ‘(감동 실화)60년 동안 매년 엄마 생일에’, 유튜브 채널 ‘공감픽’]
토비가 가진 것은 ‘30달러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서 30달러는 빵 5개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숫자 ‘5’는 인간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5가지 감각’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몸’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말씀과 성령’, 혹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끌어내는 것은 ‘감사’이고,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토비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꽃집 주인도 자비로운 분이라는 믿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작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수천, 수만 배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봉헌하지 못합니다. 그 작은 것을 지키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치며 더 많이 부풀려 달라는 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토비가 60년간 어머니에게 꽃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30달러와 어머니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톨릭신자로 유명 유튜버이며 작가인 ‘김새해 잔다르크’ 씨가 있습니다. 첫아기를 낳자마자 거의 회복될 수 없이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서 1년 이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랑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생각해서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으로 계속 되뇐 것입니다. 감사할 것도,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되뇌다 보니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왕성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해주셨습니다. 기적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하면 누구나 기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할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겠다는 사랑의 마음만 첨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진 것을 봉헌해 드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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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음식’, ‘잔치’, ‘빵’, 그리고 ‘물고기’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징적 표징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그 사랑을 저버리지만 않으면 절대로 거두어지지 않는다.
제1독서: 이사 55,1-3: 나의 말을 들어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리라
제1독서는 ‘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들음’과 ‘귀 기울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계약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실성을 전제로 한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잔치’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잔치이다. 때문에, 우리가 ‘말씀의 식탁’(계시 21)을 먼저 갖지 않는다면 성찬의 식탁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 마태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말씀’의 능력을 마태오는 빵의 기적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는 그 기적이 “외딴곳”에서 일어났다(13절)고 하면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5절)라고 청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마태오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며 만나를 먹게 한 기적(탈출 16장)보다 더 위대한 기적으로 백성을 배를 불리시는 새로운 모세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동참하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14절)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가엾은’이란 사람들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좌절의 상태에까지 확대한다(마르 6,34 참조). 빵의 기적도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궁핍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사랑으로 이해한 행위의 결과이다. “오천 명가량 되는”(21절) 사람들은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허기지고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가까운 마을로 보내 “먹을거리를 사게”(15절) 예수께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기를 걱정하시고 특히 연약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신다.(마태 15,32 참조) 그러므로 기적은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동참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기적은 ‘함께 나누는’ 데서 일어난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17절)는 적은 것이고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함께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물론 기적을 이룬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지만, 그 기적은 나누려고 했던 마음 자세가 더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16-18절)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누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항상 우리 인간들의 협력이 필요하다.(16~18절.)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가지셨던 ‘가엾음’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20-21절) 남은 조각 ‘열두 광주리’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보상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 안에 들어가셨지만, 사도들과 또 그들의 사도직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계속 함께하실 것이다. 사도적 봉사란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베풀어주셨던 그 선물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몸과 피로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이 기적의 ‘잔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정말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왕국이 될 것이다. 주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시대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마음과 또한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물질적인 음식보다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양식으로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 항상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살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거행하는 성체성사가 진정 우리가 모두 누려야 하는 진정한 사랑의 잔치이며, 우리에게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 사랑으로 하느님 안에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로마 8,35.37)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에 장애가 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주님 안에 살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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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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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데,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은 보살피고 돌보는 이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양들이고,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양들이고, 이리 떼가 공격하면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양들입니다. 그 당시의 군중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와 신앙 없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만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하셨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주신 일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적인 배부름을 체험했을 것이고,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5-17)
아마도 예수님도 군중도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을 말하지 않고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는 제자들의 말은,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인데, 무엇인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의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고, 군중이 오천 명 이상이었으니 그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고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면서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1) 만일에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식량은 아무도 독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 어디선가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선가는 식량이 남아도는 곳이 있고,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 상황은 분명히 부유한 나라들의 죄악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놓는 곳이 아닙니다.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부유하게 살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 의무만 있습니다.>
2)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한다고 포기하면 그만인가? 그럴 때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해결책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실지, 그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상황만 말씀드리면 되고, 해결 방법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루카 1,37) <교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마태 14,19-20)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실제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시키시는데, 지시만 내리고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리신 다음에는 우리가 그 지시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 테니” 라는 말씀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생색 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원칙은 항상 지켜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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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라면 내가 꿈꾸는 곳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합니다. 컴퓨터의 게임이 비슷합니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꿈꾸는 곳이 공존하는 곳을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라고 합니다. 영화관에서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화면 안의 동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것을 혼합현실(Mixed or Merged Reality)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4D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향기와 촉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에서 비가 내리면 현실에서도 비를 맞고, 영화에서 장미향이 나면 현실에서도 장미향이 납니다.
혼합현실과 네트워크가 연결되면 원격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공존현실(Coexistent Reality)이 된다고 합니다. 달나라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갈 수도 있고, 히말라야 산맥을 오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쇼핑이나 운전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천국현실(Heaven Reality)도 체험할 수 있고, 지옥현실(Hell Reality)도 체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만나는 체험도 하고, 성인들을 만나는 체험도 한다면 실제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해시대에도 없었던 미사 중단이 있었습니다. 사제들도, 교우들도 당황했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재개될 때까지 영상을 통한 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본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평화방송을 통해서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교황청에서도 성삼일 전례를 방송으로만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신부님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문제를 푸는 학생들에게는 피자를 배달시켜 주었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줌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하는 수녀님도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에 본당 신자들과 소통한 사제도 있습니다. 매일 전 신자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미사가 재개 되었을 때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동체 미사에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조금 늦게 공동체 미사가 재개된 뉴욕입니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성가도 없이 미사에 함께 했지만 성당에 온 교우들을 통해서 신앙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힘을 얻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과 같았을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도,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도,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증강현실도 아니고, 혼합현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나라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고,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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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은 먹고 가야지>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밥은 먹고 가야지>
넉넉지 못한 살림에
가난하고 초라한 집임에도
벗이 찾아오니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밥 때가 되면
집안 사정 잘 아는
찾아온 벗은 마음이 닳아
맞아준 벗을 살피게 되지
반갑게 맞아줘서 고마워
이제 늦었으니 가야지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서려는 벗에게
찬은 없어도
밥은 먹고 가야지
가난한 벗이
털털하게 한 마디 건네면
찾아온 벗도
맞아준 벗도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이미 한껏 배부르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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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안두현 미카엘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오 14,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을 따라 육로로 달려온 이들을 가엾이 보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것을 사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당신의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것에 제자들의 것을 더해 나누어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적은 음식을 드립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예수님께서 드시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예수님께 보여 드리고 내어 드립니다. 제자들이 가진 이 작은 것에 예수님의 권능이 더해져 수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복음의 이 표현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보셨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상황에 함께하신다는 것,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의 힘듦과 배고픔에 함께 동참하셨고,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눔에 당신의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 초대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작은 것을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이 내어 드림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군중의 상황에 동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와 그 초대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군중과 함께하신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제자들의 나눔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시 초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도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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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양선규 요셉 신부님]
<“예수님, 배고파 죽겠어요”>
저희 학교 학생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신부님, 배고파 죽겠어요’라는 말입니다. ‘죽겠어요’라는 절실함의 표현을 꼭 붙이면서 ‘맛있는 거 사 주세요’라는 표현을 온갖 불쌍한 표정으로 드러냅니다. 학생들과 함께 떡볶이부터 시작해서 치킨에 삼겹살에, 뭘 좀 먹으러 가면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남김없이 아주 깨끗하게 먹어 치웁니다.
음식을 매개체로 하여 한 번 더 웃고 떠드는 그런 만남 속에서 조금씩 참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우리 학생들을 만납니다. 사랑이 싹트고 행복이 자라나는 공동체로 성장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떡볶이의 기적이요 삼겹살의 기적일 겁니다.
예수님께선 ‘하느님 나라가 당신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기적을 행하십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47항) 즉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끝없는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도록, 그 갈망을 해결할 수 있도록 기적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배경이 되는 유배 생활 중 이스라엘 민족은 육체적·정신적 굶주린 삶에 시달립니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결과로 굶주린 생활을 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일지라도, 당신 백성의 고통을 못 보시는 하느님께선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당신 사랑의 식탁으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너희가 살리라.” 이러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성체성사를 통해 완성되어 풍부한 사랑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되어 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에 위치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당신 양들의 병도 고쳐주시면서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양식도 선사하십니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이 예수님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파하는 당신의 양들에게서 느끼는 이 마음은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즉 무언가 부족함에 시달린 이들이 완전함을 맛보게 되는 기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선 하느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셨듯이 직접 만드신 “풀밭에 우리가 자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영적 궁핍을 해결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린 그분의 사랑 없이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는 늘 부족함에 시달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가 중단되자, 신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성체를 너무나도 모시고 싶다’는 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성체가 내 삶에 없을 때 이 삶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영적 궁핍에 시달려봤습니다. 그만큼 성체의 소중함이 더욱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오늘날이기에 더더욱 예수님께 외쳐봅니다.
“예수님, 배고파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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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백동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그 많은 군중은 무엇에 배불렀을까?>
어릴 때 본당 수녀님이 선물해주신 돈보스코 신부의 만화 전기 「요한아 뭘하니?」를 마르고 닳도록 읽었습니다. 돈보스코 신부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계속 펼쳐보게 된 것 같습니다.
돈보스코 신부님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모아 <오라토리오>를 만드시고 동네 언덕에 있는 창고를 개조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머물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청소년들과 함께 놀고먹고 그들을 위해 당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여있는 아이 중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찾았습니다. 빵 몇 개가 있었는데 신부님은 그 빵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모두 다 배불리 먹고 빵은 남았습니다.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인 청소년들이 그 적은 빵을 먹고 배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상상을 해봤습니다. ‘아이들이 신부님 눈치를 보고 배부르지 않은데 먹고 배불렀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빵을 나눠 먹을 때 이미 다른 것을 먹어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상상은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 돈보스코 신부님의 전기를 다시 읽으면서 그 궁금증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라토리오 청소년들은 돈보스코 신부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겪은 육적인 허기짐은 사실 그들에게 큰 결핍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말 작은 양이었지만 빵을 나누는 행위 자체에 영적인 배부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육로로 뒤따라갔습니다. 얼마나 고된 여정이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 때문에 그런 힘듦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려 그들을 보시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끼니도 해결하게 해주십니다.
복음에서 군중이 먼저 배고픔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챙겨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그들이 당신과 제자 공동체에 함께 하고 싶은 열망을 배고픔이라고 보시고 빵 나눔을 통해 그들을 사랑으로 배를 불리신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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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미사 때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부터 가지?”
혼잣말이라고 했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듣고 키득키득 웃습니다. 신부님도 이 말을 들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강론했습니다. 강론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말로만 말고, 하느님 나라가 왜 좋은지 증명해 보세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할머니! 올해 돌아가신 친구분인 마리아 할머니, 또 데레사 할머니 기억나시죠? 그 나라가 얼마나 좋으면 안 돌아오고 계시겠어요?”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절대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 사람은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를 압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의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눈이 뜨이지 않아서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듯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외딴곳에서 세상을 배불리 먹일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주님은 시간에 매인 분이 아니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유심히 보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늘 눈을 하느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우리가 묵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전해줍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바로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39 참조)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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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한 부인이 신부님께 묻습니다.
“제 남편은 지독한 골초에 엄청난 주정뱅이예요. 그런데도 이 인간이 성당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녀요. 과연 이런 인간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모든 면에 있어서 세속적인 남편의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당만 열심히 다닌다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네요.
“모르긴 해도, 빨리 갈 것 같습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하니 건강에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갈 것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가고 싶다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피하면서, 건강하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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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中心의 구원救援의 삶>
-환대, 경청, 공부, 성찬례-
개그 우먼 박미선을 압니까? 저는 그 유명하다는 분을 어제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성가에 손색이 없는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한 인터뷰 대목을 나눕니다.
“2인자면 어때요. 결국 돌아봤을 때 인생을 완주하는게 중요한 거거든요. ‘젖은 낙엽’ 정신으로 바닥에 바짝 붙어서. 그 대신 고개는 하늘을 쳐다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버텨보는 거예요.”
어제는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12321보 수도원 경내를 2시간 동안 틈틈이 거닐며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푸른잔디’ 동요를 마음껏 불렀습니다. 손주를 키우면서 자식들 키울 때 몰랐던 기쁨을 느끼듯 노년에 이르러서야 동요를 목청껏 부르며 진가를 깨닫습니다. 44년전 28세 초등학교 청년 교사시절 아이들과 함께 참 좋아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어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은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불러요.
우리들 노래소리 하늘에 퍼져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면은
우리 모두 다 일어나 손을 흔들며 즐거워 즐거워 노래불러요.”-
하느님 찬미에 손색이 없는 참 좋은 동요입니다. 시간될 때 마다 부르시기 바랍니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이 상징하는바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이라면 그대로 주님 찬미가처럼 느껴지는 동요입니다. 주님 그리워 바라볼 때 영혼은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하늘을 나르는 새처럼 생각됩니다. 더불어 떠오른 짧은 자작시도 떠올랐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 된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보면 저절로 마음도 훨훨날아 흰구름이 되는 듯 기쁨과 자유로 가득한 분위기에 저절로 푸른잔디 동요를 노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산책중 만난 어느 자매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휴가 가지 않습니까?”-
“가고는 싶은데 갈 곳이 없네요.”
많은 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외딴곳을 찾듯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습니다. 가고는 싶은데 갈곳은 결국은 지금 여기 몸담고 살고 있는 주님의 집 수도원뿐이기에 휴가를 잊고 산 지 수십 년이 됩니다. 두 가지 유머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모자입니다(That sky is my cap)”
아주 예전 미국수도원에 잠시 머물던 겨울철 ‘왜 추운 겨울날 모자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제 유머러스한 답이었습니다. 참으로 맑은 공기에 밥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느껴졌던 아름다운 수도원이었습니다.
“내 머리가 우산입니다.”
어제 우산을 쓰고 성전에 오는 수사님을 보며 제 삭발한 민둥머리를 가리키며 나눈 유우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과 유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오늘 강론 주제는 ‘주님 중심의 구원의 삶’입니다. 바로 하늘 나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오너라!”
주님의 환대에 지체없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으로 갈 곳은 주님뿐입니다. ‘가고 싶은데 갈곳이 없다’에 대한 유일한 답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처럼 늘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환대, 구원의 환대요 바로 우리 정주 수도원이 이런 주님 환대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다음 주님 환대의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하여 주님께 돌아감이 바로 구원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55,1)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얼마나 눈물겹도록 고마운 주님 환대의 초대인지요. 이런 주님이 없다면 어디서 우리 지친 영혼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을런지요. “오너라!”, 주님의 환대에 지체없이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들어라!”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입니다.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분도 규칙입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의 열매가 겸손이요 순종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는 바로 들음의 경청입니다.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이사55,2-3)
‘오너라’에 곧장 이어지는 ‘들어라’입니다. 주님 환대에 응답하여 우선적 할 일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셋째, “배워라!”
평생 배움터에서 살고 있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공부합니까? 하여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수도생활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위가 모두 스승입니다. 배워야 할 것은 널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음의 불안에 최고의 치유제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깨닫는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체험적 사랑의 고백을 배워 내 고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9)
이런 사랑을 배우고 깨달아 체득할 때 백절불굴의 믿음에 천하무적입니다.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하고 싶지 않아 모두를 인용했습니다. 그대로 우리 영혼을 사랑에 불타오르게 하는 주님 ‘사랑의 불’같은 말씀입니다.
넷째, “먹어라!”
성찬에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찬례의 표징이자 천상잔치의 예표입니다. 무엇보다 광야여정중이 만나보다 더 좋은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외딴 곳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광야인생 참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측은히 여기시는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음 묘사는 그대로 성찬례를 상징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세상에 믿든 이들에게 성찬례 미사의 은혜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광야인생 오아시스 미사가 없다면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무기의 영어囹圄의 몸인 장기수長期囚에게는 달인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둘중 하나랍니다. 광야인생중인 우리또한 마찬가지 성인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둘중 하나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55,2ㄱ)
사실 광야인생중 무지로 인해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세상 우상들에 노예가 되어 급기야 폐인이, 괴물이 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광야여정중 미사의 은총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저는 때로 연옥같은, 지옥같은 광야여정중에서도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기적처럼 천국을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입니다. 연옥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성인이 되어 하늘나라의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환대, 경청, 공부, 성찬례聖餐禮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주님 중심의 구원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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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병이어의 기적>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능력의 주님과 깊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든 따라가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습니다. 다시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마태 14,15-17) 하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먹을 것을 너희가 주어라’ 하시는데 제자들은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것밖에 없는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이나 있는데’ 하는 새로운 생각이 없는 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생각 안에 갇혀 있으면 인간을 뛰어넘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은 너무도 다릅니다. 이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만큼만 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아6,6) 이것으로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배 불릴 수 있을까? 계산하지 말고 부족한 모두를 내놓으면 주님의 손을 거쳐 풍요로워 집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5천 명이 먹고도 남는 넉넉함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렇게 그 풍요로움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우리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연장으로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이 배고픔에 주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리의 사랑에 더 주려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물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성과 사랑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겨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하면 더 넉넉해질 것이고 사랑을 받는 이들도 머지않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여러 가지 일들에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면. 주님께서 모두를 배 불리시고 먹고도 남게 하실 것입니다. 나눈다고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덤으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미약하게 여겨질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더욱 큰 풍요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작은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성녀는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구로 써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는 “모든 재물은 똥 오줌과 같이 그것이 쌓여 있을 때에는 냄새를 피우고 뿌려졌을 때에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 거름을 뿌리고 기적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일 더하기 일은 막노동이랍니다. 이 빼기 이는 틀니고요, 삼 더하기 삼은 인삼 두 뿌리래요. 그럼 100 빼기 1 은 무엇일까요? 0입니다. 100번 잘 하다가 한 번 잘못하면 말 장 헛일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마태10,22)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베드로 크리솔로고)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니 많이 많이 뿌리십시요, 사랑의 씨앗을! 사랑이 있는 곳이 기적의 자리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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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는 생명의 양식 이야기입니다.
"돈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와서 먹으라'는 주님의 초대가 울려퍼집니다. 대상은 목마르고 허기진, 가난한 이들입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어 궁핍한 이들뿐만 아니라, 아무리 소유하고 누려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까지도 포함된 초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이번에 주님께서 주실 양식은 입이 아니라 귀로 "먹는" 음식입니다. 바로 말씀이지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마태 4,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과연 그분께 다가가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따르는 이는 살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영적 육적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아무리 제 힘, 제 능력으로 땀흘려 벌었다고 큰소리 친다 해도 원천은 하느님이시지요. 당신 자녀들을 먹여 살리시는 하느님 마음의 동기는 바로 "가엾은 마음"(마태 14,14)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 마음을 지니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분"(화답송)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기의 뱃속 사정을 헤아리는 엄마처럼 섬세하고 자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고 계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군중을 보내어 스스로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의 말에 예수님이 단호히 답하십니다. 너희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우리"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군중을 먹이시려고 마음을 정하셨으니 제자들만 돌아서면 될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20)
이사야서의 주님 초대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목말라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들은 치유도 받고 배도 채우게 됩니다. 따뜻한 사랑과 돌봄에 영혼의 원기가 되살아나고, 식민지 백성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피폐해진 인간의 존엄성도 회복하지요. 군중이 충만해질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예수님은 하느님의 연민,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우리에게까지 와닿으셨습니다. 우리는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를 응시하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마음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배불리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으니 우리가 충만히 채운 바를 나누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으니, 연민의 사랑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기적으로 흘러나가길 소망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지만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고 흡족한 오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용서의 축제인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지냅니다. 저희 수도회의 요람인 아씨시의 조그만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 전대사를 받는 성당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작음을 경축하는 축제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큰 축복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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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 세 편을 들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목마른 자들 모두 물가로 오라 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하십니다. 너희가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하십니다. 당신의 변치 않는 자애를 드러내십니다.’(이사 55,1-3)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지요!
<제2독서>는 결코 떼어놓을 수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로마 8,35-39)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낍니다. 제자들은 자기중심에서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에서 곧 그들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연민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거리를 사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이 곧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 그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 그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있는 것, 그것을 보는 눈,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인 것입니다. 있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야말로 실재하여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나라,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보는 눈이 바로 지복의 눈이요 관상의 눈인 까닭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집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참으로,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우리는 받아먹어야 합니다. 이를 먹은 이들은 배부르겠지만, 먹지 않은 이들은 배고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이를 받아먹지 않는다면 여전히 배고플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받아먹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사랑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드리는 감사요, 전능하신 아버지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오로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이 선물의 밥상에서 기뻐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야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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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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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CMlJwXE77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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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매순간이
사랑과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나눌 수 있기에
생명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존재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기쁨을 살아가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기심을
벗어나게 하는
사랑의 빵입니다.
사랑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낌없이
내어주기에
아름답습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빵이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
절실한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이
되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빵이 될 순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빵이 되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일상이며
일상의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예수님같이
기쁘게
주십시오.
사랑은
빵이 되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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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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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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