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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 다시 일어나 따르자 (마9:9)
성경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라는 사람이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책 중간에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을 슬쩍 끼워 넣고 있다는 건 잘 모르셨을 겁니다.
본문 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이 실은 마태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 말씀이 어째서 마태의 신앙고백인가?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누가 봐도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한 책이란 걸 알고 있는데 마태는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듯이 ‘마태라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심스러웠던 겁니다. 마태가 저자라는 게 알려지면 당시 유대인들은 책을 읽어 보기도 전에 집어 던질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의 직업이 하필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보면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더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세관은 요즘으로 치면 세무서와 같은 곳을 말합니다. 그랬기에 그곳에 앉아 있더라는 것은 그의 직업이 세리 즉 세금 징수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마태가 세리인 건 그렇다 쳐도 그는 왜 자신이 복음서를 썼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로마에 바쳐야 할 세금 이상의 세금을 거둬들여 남은 차익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불렸기에 세리들은 과도한 세금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곤 했습니다. 덕분에 당시의 세리는 부유층이자 권력층에 해당하는 삶을 살 수는 있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당시의 세리는 로마인들에게서는 유태인 하수인이라는 멸시받아야 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동포의 고혈을 쥐어짜는 착취자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마태가 복음서를 썼다고 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런 놈이 쓴 책이라면 볼 것도 없다고 내팽개쳤을 것입니다.
본인은 진정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을 썼건만 과거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복음서가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한다면 마태 입장에서는 얼마나 죄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랬기에 마태는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본문 9절에서 넌지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렇다면 이렇게 기록하면서 마태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 한 문장을 통해 마태는 ‘마태라는 사람이 전에는 세리였으나 예수님이 불러 주셨고, 그 예수님을 따랐던 마태라는 사람은 이젠 더 이상 세리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 마태로 살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을 무심코 읽다 보면 ‘그랬었구나’ 하며 넘어가기가 쉬운데 사실은 마태처럼 그러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5:28에서는 이런 마태에 대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본인 얘기였기에 마태는 비교적 겸손한 표현을 썼습니다만, 누가는 동료 얘기를 하다 보니 좀 더 솔직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실제로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선은 직장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자니 그동안 누려오던 수입과 부를 포기해야 했고, 자연히 본인과 가족의 가난과 고생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요?
나도 할 수 있다고 할만한가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이 말을 함으로써 마태는 마태복음이 세리 마태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리였던 마태의 인생을 바꿔 주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책인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태복음을 읽으며 “일어나 따랐다.”고 했던 마태의 이런 ‘순종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보여준 ‘순종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순종은 ‘순종 이후’를 따져 보지 않고 행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만약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순종 하게 되면 그 뒤엔?’
이래 놓고 순종하려고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게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마태에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어느 관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더니 23절을 보면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순종 이후를 따지다 보면 순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근심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오늘날에도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순종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이미 나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마태처럼 우리도 인생에서의 ‘반전의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믿음 앞에서 주저주저하는 자는 은혜받지 못합니다. 마태는 예수님 말씀대로 따르기를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아내하고, 자식들하고, 직장의 동료나 선배들, 그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를 세상에서 의논하면 그땐 이미 사탄의 방해가 시작된 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주님을 따르는데 지체하지 마세요. 주님께 기도하는데 지체하지 마시고, 주님께 예배드리는데 지체하지 마세요. 주님께 봉사하는데 지체하지 마시고, 주님께 헌금 드리는데 지체하지 마시며, 주님을 전하는 일에서도 지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직업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학력이 문제 될 게 없고, 재산이나 소유는 더더군다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당시 직업으로는 천대받는 어부요 학식으로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는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나도 부르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서 나는 무식하다 말하지 마세요. 나는 가진 게 없다 말하지 마시고, 나는 내세울 게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19세기 미국 최고의 복음 전도자였던 D.L.무디는 시카고의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무식했던지 설교를 할 때면 한 문장에 50에서 60%는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했을 때 무려 100만 명을 구원시켰습니다.
한번은 그런 무디를 향해 비방하는 사람이 무디를 향해 무식하다고 지적하자 무디는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그래 그렇게 똑똑한 당신은 몇 사람이나 구원시켰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이미 은혜는 시작된 것입니다. 세리처럼 죄인이라도 괜찮습니다. 중풍 병자나 혈루증 앓던 여인처럼 병든 자라도 괜찮고, 제자들처럼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손가락질당하는 자라도 괜찮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자도 예수님 만나서 전도자가 되었으며,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도 은혜받고 주님께 수종 들었습니다.
로마서 5:8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듯이 예수님께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왔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무엇을 갖고 나왔느냐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실패가 있고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이기에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오히려 가진 게 없고 원하는 걸 못 하고 안 되기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많은 문제 속에서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나를 위해 피 흘려 주셨습니다.
이렇듯 나를 위한 피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어린 양의 피로 인해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유월절의 은혜를 받았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인생의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는 유월절의 은혜가 있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구주’라는 말은 ‘구세주’의 준말입니다. 사전에서 보면 구세주는 ‘괴로움이나 곤경에서 구해 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생에서 괴로움이나 곤경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생일지라도 그런 형편에서 ‘나를 구해 주는 분’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님의 피'와 '나의 행복'을 바꿔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찬송가 370장의 가사에서도 보면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생은 ‘주 안에 있는 인생’과 ‘주 밖에 있는 인생’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면 당연히 예수 안에서 사는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예수님만 믿으세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에서라도 믿는 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세요. 우리에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귀로부터 옵니다. 마귀는 우리 인생 각 분야를 병들게 하고 멍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은혜가 고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은혜는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한 은혜가 영혼을 병들게 한 모든 죄를 고치셨습니다. 마음을 병들게 한 모든 시험을 고치셨습니다. 육신을 병들게 한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도 마귀가 주는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귀가 가져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평안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지만 잘 안되는 게 믿음입니다.
우리의 이런 약함을 예수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6:41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육신이 약한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나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였습니다.
육신이 고장났습니까? 가정이 고장났습니까? 사업이 고장났습니까? 인생이 고장났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이 고장났다는 것만 알지 마시고, 예수님이 그것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나에게 오셨다는 것도 같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신학교 시절엔 동기들이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예수님께 영안실은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간혹 어느 동기가 교회 일이나 개인 사정으로 못 살겠다거나 죽겠다고 푸념할라치면 ‘이 사람아. 예수님께 영안실은 없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성경에서 증거를 찾자면, 죽은 나사로도 영안실을 넘어 무덤까지 갔어도 예수님이 살려내셨고, 백부장의 딸도 죽어 영안실로 가기 직전에 예수님이 달리다굼을 선포하여 살리셨습니다.
게다가 죽겠는 게 꼭 목숨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든 ‘죽겠다’거나 ‘죽을 맛이다’라고 하는 상황에 부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나에겐 예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는 영안실이 없다는 것과 그렇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죽게 놔두지 않으시리라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어느 핸가의 달력 1월 달의 그림 밑에 적혀 있던 걸 옮겨 적어 놓고 가끔 묵상하던 글귀가 있습니다.
‘모든 창을 열고 동터 오르는 하늘을 보자. 부질없는 것들은 툭툭 털어버리고, 올해는 기필코 뜻을 이루자.’
‘기필코 뜻을 이루리라!’
좋은 글귀이고 멋진 결단의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분 모두의 소원과 교회의 모든 바람이 기필코 이루어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기필코 뜻을 이루겠다는 건 좋은 데, 문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필코 뜻을 이루리라는 글귀에 추가하여 몇 자를 더 적어 놓았습니다. ‘예수 안에서’라고.
앞에 추가 해도 좋습니다. ‘예수 안에서, 기필코 뜻을 이루리라.’
뒤에 추가해도 괜찮습니다. ‘기필코 뜻을 이루리라. 예수 안에서’
믿으세요. 예수 안에서라면 우린 해낼 수 있습니다.
믿으신다면, 이제 하나만 더 알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 안에서 살 수 있는지를.
예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린 두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해 주실 것이다.’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잘들 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해 주실 거라는 건 믿으시지요?
그렇게 믿으신다면, 더 잘해야 할 두 번째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에서든 ‘예수님이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이 해 주실거다.’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예수님 해 주세요.’라는 기도로 마무리가 되어야만 믿음대로 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실 믿음은 ‘기도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귀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9:29절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종류’가 뭘까요?
마가복음 9장 전체를 보면 제자들이 고치려다 실패한 귀신 들린 아이에게 있던 귀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넓은 의미로는 인생을 괴롭고 힘들게 하는 모든 종류의 사탄의 시험과 마귀의 고난을 통칭하여 예수님은 ‘이런 종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인즉 “기도 하면 이런 종류는 언제든지 인생 밖으로 쫓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도 싸움인 거고, 인생의 행과 불행은 기도 여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면한 문제 앞에 섰다면 이를 기도 싸움으로 여겨 힘내서 기도하여 끝내 싸워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린 우리가 할 일만 잘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받을 기회는 항상 있게 하셨습니다. 언제든 우리가 ‘다시’라는 말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다시 기도를 시작하세요.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강건하고, 다시 형통하고, 다시 복 받고, 다시 잘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