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있으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체 열심히 스타와 디아블로의 나락에 빠져 있는 펜더에게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는 펜더의 뉴스시청에 한가지 버릇이 생기게 만들어 버렸다.
임신이나 유전병에 관한 뉴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채널이 돌아간다...겁이 난다는 이유에서일까? 그러다가 교육문제가 터져나오는 뉴스나 취재프로그램에서는 채널 고정...쿠션에 내맡겼던 몸을 일으켜 시선고정에 부동자세로 텔레비전을 보게 된다...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펜더의 부성애...아 뜨겁다.
연일 텔레비전을 몰아치는 사교육비, 교육이민, 0교시 수업 등등...
그 말많은 줄넘기 과외....실제로 줄넘기 과외가 있단다. 거기에 웬만큼 공부하는 초딩 6학년짜리의 한달 사교육비가 110만원이란다...이것도 적게 한다는 아줌마의 말을 듣고 허탈하기만 했다. 함주리 기자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가난한 집에 태어난 재능있는 아이는....재앙이다.
맞는 말이다. 110만원...이게 말이 되는가....울나라 도시노동자의 한달 평균 수입이 160만원 선인데 교육비가 110만원이라니.....아 씨바스럽다. 요즘은 자식 많은게 부의 상징이라는 말이 남말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열심히 9시 뉴스를 보다가 슬쩍 바라본 그 바보상자 안에서 촌지를 받아먹는 선생님 이야기가 쩌렁쩌렁하게 텔레비전을 울렸다. 돈 받아먹는 선생의 모습이라....
결국 펜더의 아픈 옛 추억을 회상하게 되었다....
1. 줄 세우기는 국민학교 때부터....
펜더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24년을 보낸 대전 촌놈이다. 뭐 한마디로 대전에서 초중고를 다 이수한 녀석이라 보면 되겠다. 이런 펜더에게 있어서 국민학교시절(요즘은 초등학교라 하드만...)의 기억은 참 더러운 기억 밖에 없었다...뭐 6년 내내 더러운 기억만이 있는 기간은 아니었고...바로 6학년때의 기억 때문이다.
펜더는 원래 대전의 태평국민학교란 데서 학교를 다녔다...그러다가 아부지가 마산본가의 악다귀같은 삼촌들이 돈 내놓으라는 협박 덕분에 집을 처분하여 대전 가장동이란데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결국 4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새로생긴 가장국민학교란 데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좋은 학교였다. 잘 지었고 깨끗했고 사물함도 달려 있었고...뭐 좋은 학교였지만, 결정적으로 이 학교가 좋지 않은 한가지는 동네 자체의 특성상 잘사는 새끼들과 똥꾸멍 찢어지게 가난한 새끼들이 공존하는 동네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2층양옥집에 자가용과 피아노가 기본으로 달려있던 놈들이 꽤 되었지만(그넘들중에 펜더도 끼였다) 집안이 어려워 신문배달을 하고, 어머니가 백화점 청소부로 일하는 여자애가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가출했던 기억도 난다.....뭐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펜더 또래의 독자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한 국민학생이 87년에 빈 콘테이너 안에 숨어 들었다가 얼떨결에 중국까지 가게 된 사건들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학교였다. 그때 그녀석이 6학년 1반이었고, 펜더는 그 옆옆옆반이었다.
당시 우리 담임을 맡았던 오xx 선생이란 씹새끼 때문에 펜더는 국민학교 선생이란 애들 볼모로 돈이나 뜯어먹는 씹새끼란 생각을 아직까지 갖게 되었고, 펜더가 군대있을때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서울교대에 들어갔던 펜더의 여동생은 펜더의 한마디 덕분에 아주 후련하게 교대를 때려치고 이화5적이 활개치는 곳으로 도망갔다.
(차라리 애들 볼모로 삥이나 뜯으라 그럴걸 하는 생각을 요즘 하기도 한다--;;;;)
우리 오선생....(그냥 오노선생이라 그러겠다)이 오노 선생은 펜더에게 인생이란 어떤건가를 몸으로 보여준 선생이었다. 이땅의 학력 줄세우기와 가진자만을 위한 대한민국이란걸 13살 국민학생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오노선생이 한 첫 수업이 바로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던 <학벌 줄세우기>였다. 여자 1등이 1분단 맨 앞자리 남자 1등이 그 옆자리, 여자 2등이 그 뒷자리, 남자 2등이 그 짝궁....이런식으로 반 아이들을 일등서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워 1분단서부터 4분단까지 쭉 줄을 세워버렸다. 그리곤 이어서 <가진 자만이 잘사는 대한민국>이란 수업을 시작하였다.
- 시험성적이 평균 일등인 분단은 10점
- 저축을 잘하는 분단 5점
- 편지를 많이 보내고 받은 분단 3점(이때 울학교는 학교내에 우체국이 있어서 애들끼리 10원짜리 우표 붙혀서 편지를 보내고 받았다)
- 화분 가져온 학생은 3점
- 오락실, 만화방, 분식점을 간 학생을 신고한 학생에게 3점
- 유해업소를 간 학생은 -3점
- 발표를 잘하는 분단 5점
- 청소 잘한 분단 3점
등등등...이런식의 내규를 발표하였다...반 아이들끼리 북한의 5호작통법의 무서움을 알려 반공교육과 함께 앞으로 사회에 나가 공안사회의 무서움을 미리 체험하라는 듯이 서로서로를 감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잘사는 것들은 잘사는 것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었던 우리 오노 선생.....
이렇게 쭉 점수를 메겨서 1주일이 지나 총점을 내서 1등한 분단은 그 다음주 청소 1주일을 면제 시켰다. 독자 여러분 필이 꽂히지 않나?? 늘 1등하는 분단은 1분단이라는 것에 대해서 뭔가 강렬한 의혹이 들지 않는가??
당시엔 무적천하 1분단만이 청소를 늘상 면제받았다. 계속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반 구성원비부터 잘못되었다. 공부 잘하는 것들만 따로 모아놓은 1분단에게 유리한 시험 가중치가 있었고, 당시 반 임원진을 맡았던 1분단 애네들의 가정형편은 우리반에서 성적과 마찬가지로 <스카이 레벨>이었다....이 스카이 레벨의 학생들 부모들이 뻔질나가 갖다 바친 화분들.... 당시 우리반은 전교에서 화분이 제일 많은 반이었다. 거기다가 저축이라니.... 단돈 5백원이 없어 빌빌 싸던 녀석이 있었던 우리반이었는데 저축을 가져오고 안 오고가 계량적으로 측정이 되었다.
어쨌든 이 엿같은 제도 덕분에 가장 이득을 본 것들은 1분단이었다.
그들은 몇 달동안 계속 청소를 면제받곤 했고, 그들의 면제는 곧 4분단 아이들이 1년 내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담임은 곱게자란 1분단 애들이 쓰레기통을 들고 대걸레를 들고 청소하는게 못마땅했던가 보다.....
첨언하면 당시 펜더는...늘상 2분단 끝과 3분단 앞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당시 한참 인기 있었던 에어건...BB탄 나가던 총에 빠져 있던 펜더는 총을 조립하는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한 자도 안하게 되었고...그 결과 4분단에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집에서 난리가 난건 당연했다. 지금도 한성질 하시는 우리 아버지...애들은 자고로 패야 된다는 투철한 교육이념으로 당시 펜더를 무지막지한 구두칼과 프라스틱 강관으로 개패듯이 두들겨 팼었다....죽는줄 알았다....당시 종아리가 팅팅 붇다 못해 상처가 터져 피고름이 나올 정도 였으니....말 다했다. 아부지의 엄명
- 다음달까지 5등 안에 들어라....
울 아부지...막가파였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공부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의 그 매질이 무서워 당시 펜더는 이달학습, 다달학습, 동아, 표준전과, 아이템플 등등등을 만화책 보듯 넘겼다. 한달에 문제집 10권을 넘게 푼 기억이 난다....그리고 펜더는 당당히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반에서 6등인가를 했던 기억이 난다...1분단 3번째 자리에 앉았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아부지는 아들의 그 노력이 대견했던지 두들겨 패는 대신에 거하게 외식을 쐈고, 그때부터 펜더는 별천지에서의 생활에 젖어들게 되었다.
2. 쁘띠부르주아...펜더
천상계에 올라간 펜더...그 동경하던 1분단의 아이들과 모이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펜더는 일단 땟국물을 뺏어야 했다...당시 월드컵을 신던 펜더 어무이께 졸라 나이키 운동화를 사야 했다...물론 도시락도 바뀌어야 했다. 4분단에 있을때에는 당연하게 느껴졌던 메칸더 v 도시락통이 이제는 촌스러움과 가지지 못한자의 표식이 되어버렸다...당근 스테인레스 보온 도시락으로 바꾸었다....1분단 앞자리에 앉은 년놈들 중에 보온 도시락이 아닌 년놈은 없었다....반찬도 문제였다. 오징어 채 무침 같은 걸 싸온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소말리아 난민들의 밥상을 레이건에게 내미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펜더 당시에 울먹이며 펜더 어머니께
- 애들이 반찬이 후지다고 같이 밥 못먹겠대....
펜더가 누군가?? 펜더 집안의 종손 아니던가?? 어머니 아들이 반찬 같은 쪼잔한 것 때문에 애들에게 기죽어 산다는 말에 눈시울을 붉히더니 당장 임금님 수랏상 저리가라 할 9첩반상을 차려 찬합에 싸 학교에 보내셨다...여기엔 아버지도 동조하셨다...자가용 통학하는 것들 부모는 다 자식 망치는 부모라 주장하시던 아버지...아들 기 안죽이겠다며 아들을 실어 나르셨다.
천상계의 생활은 달콤하였다...청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작은 특권말고도 이 1분단에는 수많은 특권이 존재하였다...일단은 담임의 용모검사나 소지품 검사에서 유도리있는 대우를 받았고, 여기 앉아 있으면 선생이 날리는 체벌에서 어느정도 피해 있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왠만한 잘못은 조용히 넘어가는 담임의 배려또한 있었다.
거기에 발맞춰 애들끼리도 작은 사조직을 만들었다...일종의 귀족모임이라 할까??
이들은 자기들끼리 작은 친목회를 만들어 방과후에 각자의 집으로 서로를 초대하며 밀담을 나누곤 했었다...물론 펜더도 여기 끼었다....나중에 알았지만, 이게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타리 클럽의 축소판이었단 느낌이었다.
그런 꿈같은 천상계의 얼마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지금도 기억나는 그 천상계의 회장이 월말고사 끝이 나고 내 시험지를 맞춰 주며 하던 한마디로 내 천상계의 생활은 끝이났다.
- 펜더야...이 점수론 힘들겠는데??
내 점수가 평균 커트라인에 모자랐던 것이다. 천천히 뒤로 밀려나 앉게 되던 얼마간 시간들...참혹했다. 천상계의 그 달콤한 시간들을 가졌던 얼마간의 시간이 마치 마약처럼 나를 얽어맸다. 저 자리에만 앉으면 나에게 주어졌던 그 작은 권력의 맛에 이미 맛들릴대로 맛들려 어쩌지 못하던 순간들...그러나 그 한달간의 시간동안 내 모든 공부머리를 다 써 버렸던지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차츰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1분단 아이들은 더 이상 펜더와 놀아주지 않았다...그리고 3,4분단 아이들 역시 펜더의 과거 전력(?) 때문인지 펜더와 놀아주지 않았다...펜더 역시 그들과는 놀고 싶지 않았다....쓰레기와 놀면 쓰레기 밖에 더되냐는 그 천상계의 대장 아이의 말이 계속 펜더의 귓가를 왱왱거리며 지나갔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펜더는 어느날 우리반에서 제일 가난했던 내 뒷자리 녀석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정말 우연이었다...녀석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정이 어려워 신문배달을 하고 있었다...아직 동아일보가 석간이던 시절, 녀석은 학교가 파하자마자 신문 보급소로 달려가 석간을 날랐던 것이다....어린마음에 그게 왜그리 마음에 걸리던지...결국 그 녀석을 몰래 따라가 하루 같이 신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측은지심일까? 아니면 조금 가진자가 가지지 않은자에 대한 작은 동정이었던가? 어쨌든 그날 하루 같이 신문을 배달했다. 그 당시 150부 였던가를 같이 돌리던 중 왠 아저씨가 신문을 달라 그래서 100원인가를 주고 신문을 팔던 기억이 난다...당시 녀석은 그 100원을 가지고 라면을 사자고 그랬고, 난 죠스바를 사먹자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결국 녀석은 내 청을 들어주어 죠스바를 사 먹었다...신문을 다 돌리고 죠스바를 물고 그녀석과 내집이 갈라지던 골목에까지 왔을때서야 난 녀석이 왜 라면을 사자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녀석은 주린배를 움켜쥐곤 꼬르륵 소리를 냈던 것이었다...배가 고픈 녀석은 라면을 사서 뽀개 먹자고 했던 것이었다.....어스름 저녁 무렵 주린배를 움켜쥐곤 죠스바 덕분에 뻘겋고 검은 입가를 훔치며 손을 흔들던 녀석....충격이었다. 배가 고파서 라면을 사자는 녀석의 심정이 날 너무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날밤 난 녀석이 왜 주린배를 움켜쥐고 보급소로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문제는 청소란 것이었다...청소...짧은 시간인 듯 해도 못잡아 먹어도 1시간 덕분에 녀석은 책가방도 갖다 놓지 못하고 다이렉트로 보급소로 가야 했다...만약 청소만 공평하게 돌아간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담임이 증오스러웠다. 가진녀석, 공부잘하는 녀석들만 세상을 멋지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가진 녀석들은 청소 한번 해도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 신문배달 하는 녀석은 그 1시간이면 숨 돌리고, 밥 한공기 먹을 시간이었다....씨바스러웠다.
3. 작은 반란
결국 난 담임에 대한 반항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 난 짱구를 굴려서 이것저것 계산을 하기 바빴다...D데이는 시험성적이 포함되지 않는 다음주로 잡았고, 우리 분단 애들을 다 모았다....담임 개새끼란 말이 오가는 13살짜리들의 역적모의였다.....
담임이 내세운 점수제의 맹점을 파해쳐 가기 시작했다. 8명의 꼴통들이 모여서 짜낸 방식이랑 각자에게 편지를 7통씩 써서 56통의 편지를 우리 서로에게 보내는 것이었다...그리고 집에 있는 손바닥 만한 선인장 화분부터 꽃가게에서 파는 5백원짜리 모종까지 화분 12개를 담임에게 기부한다는 작전...그리고 3백원이 되었든 5백원이 되었든 서로 돈을 꿔줘서 저축 할때 어쨌든 전원 다 납부를 하자는 계획....공부가 안되면 짱구라도 굴려야 했다...엄마를 졸라 길거리 화원에서 5백원짜리 모종을 들고가 담임에게 화분이라고 박박우기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56통의 편지를 보고 담임은 기가 차단 듯 우리를 보고 허- 웃어버렸다.
결국 그 편지는 사기성이 짙다는 이유로(너 잘있냐? 나 잘있다...학교서 보자... 이 한줄이 편지의 내용이었다)우리는 1점씩 배정받던 편지를 0.5점만 받았다.
어쨌든 우리는 이겼다....1분단 애들도 청소를 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담임의 그 떨떠름한 눈망울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개새끼...
그 사건이 있은 후 담임은 이 제도를 폐지해 버렸다...나같은 잔머리 새끼가 다시 등장할까 염려한 것이었고, 그 얼마뒤 이 오노담임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점심시간에 떠든다고 밥먹지 말라며 입에 청테이프를 붙혀 놓고는 5교시까지 있게 만들었다....물론 밥은 못먹었다...오전 한자시간에 떠든 단 이유로 13살 펜더는 밭가는 괭이 하나를 들고 학교의 텃밭으로 쫓겨나 2시간 동안 밭을 갈아엎어야 했다....씨바스럽다.
얼마뒤 펜더는 졸업을 했고, 그 후로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알러브 스쿨을 통해 그때 천상계에 있던 한뇬을 만나게 되었다...이 뇬 결국 초딩선생이 되어버렸다...그뇬 말로는 그때 그 오노 담임은 우리가 졸업하자마자 학부모와 눈이 맞아 결국 선생직에서 짤리고 말았다 한다.....그리고 밝혀지는 그 담임의 비리들...돈을 얼마나 받았네, 스승의 날 때 학부모가 얼마가 왔네 하는 말이 있었지만...그건 펜더와 직접 연관된 일이 아니니까 이쯤에서 마치겠다...
그때 펜더는 그 담임에 의해서 세상은 가진자, 배운자들의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가진자 배운자에게 밟히는 것이 당연하단 이치를 배우게 되었다...그리고 실제로 사회에 나와 느낀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오노담임은 우리에게 이 사회가 얼마나 드럽고 학벌과 재력이 없으면 얼마나 살기 힘든 동네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것일까?? 지금도 난 그 점이 궁금하다....
지금도 누가 펜더에게 네가 가장 존경하는 샘님은 누구냐라고 물을때마다 펜더는 주저없이 중2때 도덕선생님이시던 “김기정 선생님”을 말한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한땐 전교조였던 선생님이었다...느낌이 팍 오지 않는가?? 그렇다 참교육이란걸 말하던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은 펜더와의 인연은 거진 없었다...담임이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덕이란 비인기 과목의 담당 선생님이었을 뿐이다....호리호리한 체구에 두꺼운 안경을 썼던 선생님은 참으로 이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곤 하였다....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첫 번째는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에 대해 묻는 선생님의 질문이었다...50여명 가까이 되는 반 아이들 중에서 북침이라고 손든 놈은 펜더 하나밖에 없었다--;;;;;;;;
울 김선생은 펜더에게 왜 북침인지에 대해 말해보라 말했고, 펜더는 이승만이 6.25터지기 직전까지 북진통일을 외쳤고, 미국애들은 남한이 치고 올라갈까봐 무서워 그 흔한 야포 하나도 안주려 했다는...군사학적 주장을 말했다...아 씨바...그때부터 펜더는 싹수가 보였다...
두 번째는 핵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는데...펜더는 그 당시에 IBRD와 IRBM(중거리 탄도탄)을 헷갈려 쪽팔림을 당했지만, 울 선생님은 이런 펜더의 비상함에 찬사를 보냈다...
뭐 그때부터 이미 이쪽방면에 한자락 했었다는게 펜더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선생님은 특이했었다...도덕 시험을 책을 읽는걸로 대체하였고, 토요일 오후만 되면 자기 반 아이들을 붙잡고 축구시합을 하곤 했었다...지든 이기든 짜장면을 사는건 선생님이었지만 말이다...이런걸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김선생님 반중에 펜더랑 친한 한놈은 토욜날 짜장면 한그릇으로 애들을 붙잡는건 반인륜적 처사라며 분개하곤 했었다--;;;;;
이런 김선생님의 기행(?)아닌 기행 때문에 김선생님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펜더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89년에 불어닥친 <전교조>란 광풍의 한가운데 선생님은 서 있었던 것이다.
15살 어린 펜더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그 <참교육>이 뭔지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당시 펜더가 알기론 전교조란건 선생들이 월급 더 받겠다고 떼쓰는 것이며, 전교조=노조=빨갱이 란 공식이 머릿속에 각인된 시점이었다.
버스를 타면 버스에서 나오는 라디오 뉴스는 온통 전교조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다. 정부의 강경대응이란 말이 나오고, 어쩌고 저쩌고...결론은 전교조는 빨갱이란 것이었다.
그런데...김기정 선생님이 우리에게 <참교육>이란걸 말하며 치고 나온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 네들을 위해서...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말문을 열으셨다....우리도 대충 눈치는 깠다...원래 하던짓이 심상치 않던 선생이었기에 그럴만도 하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그 각오가 사뭇 비장했었다...또 그때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펜더와 아이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선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교육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살았으면 얼마나 살았을까??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전두환이 129억을 해먹었다고 난리치던 그 무렵 우린 그저 대통령이란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여담이지만, 대통령 기념 우표를 전문으로 수집하는 펜더의 친구 한녀석은(펜더가 모은 희귀한 외국 우표도 다 쓸어갔다--;;;) 그때 우표 수집가로서 전두환을 엄청 증오했었다. 이 전두환이란 꼴통노무시키는 졸라 외국을 싸돌아 다녔다. 대내적으로 승인 받지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니 오죽 콤플렉스가 심할까...결국 외국가서 인정 받으려는 거 아닌가??
문제는 이노무쉐이가 외국 나갔다 올때마다 뻑하면 기념우표를 찍어내서 내 친구를 괴롭히는 거였다...어디 나이지리아, 콩고 우간다 같은 이상야리꾸리한 나라 갔다오면 그담날에 우체국에서 기념우표 뿌려대니....우표를 수집하는 이녀석이 안 살 수도 없는 처지이고...하여간 그녀석의 콜렉션을 보면 전두환이 우표가 제일 많았다.
그 시절에 울 김기정 선생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전교조로 떠났다...지금도 선생님의 마지막 그말만은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 사람의 눈이 왜 두개인지 아니??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야. 사물을 바라볼땐 한쪽 눈으로 바라보면 원근감이 없어져서 사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거든...좌우 양쪽의 눈을 동시에 떠서 바라봐야만 사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거다...선생님들 세대는 왼쪽 눈을 억지로 감고 애꾸로 지내야 했었다...하지만 너희들만은 애꾸로 살아가게 할 순 없단다...그래서 선생님은 나서는 거야.
선생님 세대때에는 한쪽눈을 빼앗기고 살았다....당시엔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줄 알았다...선생님이 안경을 썼긴 썼지만 애꾸는 아니었기에 말이다.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는 데까지 난 그 후 5년의 세월이 필요했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전교조에 가입하였다.
그 선생님이 만약 멋들어지게 전교조에 가입하고, 그 뒤에 불어 닥친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짤렸다면...난 아마 이 선생님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은....돌아왔다. 그리고 늘상 그랬다는 듯 우리곁에서 수업을 다시 하였다.
선생님은 전교조를 탈퇴했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배신자가 되었던 것일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선생님은 배신자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돌아오고 나서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반 아이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선생님은 노부모님을 봉양하시던 분이셨다...당시 각급학교 교장과 교감들이 전교조 가입 선생님들 댁에 일일이 전화를 넣어서 협박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뭐 국어, 영어, 수학 선생님들이야 안되면 학원으로 튈수 있었지만....도덕이었다.
선생님 부모님들은 그런 선생님을 걱정어린 시선으로 뜯어말렸고 말이다.
난 돌아온 선생님의 그 냉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쓸쓸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그 미소...
- 미안하다 애들아....겁많고 비겁한 날 용서해라....미안하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축구도, 책추천도 하지 않았다.
15살 소년에게 있어서 국가의 힘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해 알려준 짧은 에피소드였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고...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던 시기에 문득문득 떠올랐던 얼굴...그건 내 중학교 2학년 시절의 도덕 선생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내가 성공하면....내가 자리를 잡으면 선생님을 찾아가 뵈야겠단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한번은 충남지방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의 소재를 파악했던 적이 있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의 그 씁쓸한 미소를 봤다는 것 자체가 선생님께 죄를 지은게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 전교조가 합법화가 된 지금에서야 난 지금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이 10여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이 땅의 교육현실을 개탄하는 학부모의 탄성을 보면서...무기력한 소시민의 비애와 가지지 못한자의 비애를 13살 때 느꼈던 그 감정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번 스승의 날에는 용기를 내어 김기정 선생님을 찾아뵙고, 늦었지만 쓴소주라도 한잔 대접해 드려야 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